윤혜인은 화장실의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인 채 이준혁의 갈취를 받아내고 있었고 이 순간, 자신이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반항도 못하고 이렇게 이준혁에게 휘둘리다니.짜고 달달한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입술에 흘러 들자 그는 마음속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고 언짢은 듯 윤혜인을 놓아준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때리려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이준혁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어디 감히!”다시 한번 다른 남자를 위해 그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이준혁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준혁이 너무 꽉 잡고 있었던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고개를 홱 돌린 채 그와의 스킨십을 피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입술이 다른 여자의 몸에 닿은 적이 있다는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반항하면 그녀만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윤혜인이 조금 전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단 이거 놔요.”간만에 부드러워진 윤혜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놓아주었고 단 일초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않은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이준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벽에 밀쳤다. 두 사람의 거리는 또다시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난 분명히 놨어.”이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두 번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이준혁은 왠지 화를 내는 윤혜인의 모습이 좋았으며 오늘 병원 주차장에서 영혼 없이 고분고분하던 그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조금 전에 거칠었던 행동과 달리 이번에 이준혁이 선사한 키스는 매우 섬세했다. 목덜미로부터 시작하여 고
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던 크리스탈 장식품을 빼앗았고 그대로 벽에 던져버렸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장식품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고 깜짝 놀란 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턱을 꽉 잡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기억해,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면 난 그 놈을 서울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말을 마친 이준혁이 문을 쾅 닫은 채 화장실을 나섰고 윤혜인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꼭 끌어안고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아랫배에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힘겹게 배를 꼭 끌어안았다.이때, 문이 벌컥 열렸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온 도우미 아주머니는 엉망진창이 된 화장실 바닥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재빨리 부축했다.“여기에 왜 피가 있어요? 사모님 어디 다치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걱정된 듯 묻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제 피가 아니에요.”“그럼…”도우미 아주머니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사모님, 일단 방에 가서 좀 쉬세요.”윤혜인을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윤혜인을 침대에 눕힌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조금 전에 제가 쌍화차를 끓였는데 한 잔 드릴까요?”“고마워요, 아주머니. 근데 전 지금 별로 입맛이 없네요. 누워서 좀 쉬고 싶어요.”윤혜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힘겹게 대답했고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서서 방을 나서던 아주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전했다.“사모님, 요즘 도련님이 매일 사람을 시켜 산삼이며 녹용이며 귀한 송이까지 보내오십니다. 이 약재들을 끓이는 방법까지 친히 배워 오셔서 주방장에게 가르치셨어요. 사모님 안색이 안 좋다고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두 분은 서로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셨잖아요. 옛정을 많이 돌이켜 보시고 작은 다툼 때문에 그 정까지 잃지는 마세요.”“네, 알겠어요.”윤혜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휴게실에서 나온 남자는 다름아닌 한구운이었다. 카키색 바람막이를 입고 금색 테두리 안경을 낀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점잖고 잘생겨 보였다.“혜인이는 누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확실해요.”한구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와 임수향은 사촌누나와 남동생으로 평소에 사이가 꽤 좋았다.그의 말에 임수향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법이다.“조금 전에 나와서 인사하지 왜 숨어 있었어?”임수향의 물음에 한구운이 다정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한구운은 윤혜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설마 저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거야?”임수향이 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구운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여자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러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이력서를 보니까 기혼이라고 적혀 있던데, 설마 남의 가정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지?”조금 전에 한구운이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윤혜인은 아직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듯했기에 임수향이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타일렀다.“구운아, 네 조건으로 어떤 여자도 찾을 수 있어. 절대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내연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아니에요.”한구운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윤혜인에 대한 그의 마음은 아직 겉으로 드러내서는 절대 안 된다.임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한구운은 겉으론 점잖고 온순해 보이지만 사실상 꽤 사악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결심한 일은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남의 가정에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임수향도 굳이 나서서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한편, 작업실에서 나온 윤혜인은 이 좋은 소식을 외할머니에게 제일 먼저 전하려고 병원에 찾아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저녁밥을 두 공
로비로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2층으로 올라갔다. 문현미의 외할아버지는 올해 백세가 되셨지만 여전히 정정하셨으며 말도 잘 알아들었다.축복의 말을 올린 윤혜인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문현미의 외할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바로 윤혜인에게 옥패 하나를 선물했다.그 옥패는 색깔도 예쁘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기에 윤혜인이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문현미가 계속 그녀에게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윤혜인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 옥패를 받게 되었다.그 뒤로 문현미와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집안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길을 잃을까 봐 윤혜인은 2층 거실만 조용하게 둘러보고 있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은 윤혜인은 옆에 있던 난간에 기대 수다를 떨고 있던 두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오늘밤 이씨 가문 그 남자도 온다고 하던데 반드시 이 기회를 잘 잡아야 돼. 그 남자는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됐거든, 넌 기회도 없어. 듣는 소문에 의하면 그 남자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를 좋아한대.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중간에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계속 반복했대. 임씨 가문 아가씨가 요 근래 귀국했는데 두 사람 기사만 해도 엄청 많이 났어.”“임씨 가문 그 비실대는 여자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런 남자를 손에 넣은 거지?”“그 여자가 첫사랑이래. 근데 이씨 가문 그 남자가 꽤 많이 좋아하나 봐.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나거나 연애설이 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에휴, 참 부럽네. 저런 남자에게 시집만 갈 수 있다면 타이틀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난 좋아.”“야, 꿈도 꾸지 마. 하하하, 이씨 가문 사모님의 타이틀을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두 사람의 대화에 윤혜인은 왠지 씁쓸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이씨 가문 사모님 타이틀을 원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절대 다른 여자와 그 남자를 공유하고 싶어
윤혜인이 송소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보니 정장을 입은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함께 서있는 두 사람은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한눈에 봐도 완벽한 커플이었다.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준혁이 지금 임세희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건가?분명 어제까지 윤혜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경고했는데 그럼 지금 그의 행동은 대체 뭘까?이준혁은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한 건가?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첫사랑을 데리고 참석하는 건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겠다는 뜻인데.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왠지 웃을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이준혁, 참 대단한 사람이네!곁에 서있던 송소미도 윤혜인의 표정 변화를 발견했고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비웃었다.“참 불쌍해. 네 표정을 보니 오늘밤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데리고 참석할 줄은 몰랐나 보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속으로 자신에게 괜찮다고, 어차피 저 두 사람은 언젠가 서로를 공개할 거라고 위로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너무 아프고 쓸쓸했다.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곁에서 망연자실한 윤혜인을 지켜보던 송소미가 신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했다고 뭐가 달라져? 넌 영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해. 준혁 오빠가 너랑 결혼한 건,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거야.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준혁 오빠와 세희 언니를 좀 봐, 얼마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넌 지금 뭐 같은 지 알아? 못난이 같아. 그것도 자기 분수를 모르는 못난이!”송소미의 비웃음이 이어지던 그때, 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누구에게 분수를 모른다고 지껄이는 거야?”의기양양하던 송소미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 목소리에 대꾸했다.“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이 천박한…”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게 뺨을 한 대 맞았고 순간 휘청거리던 송소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감히 어떤 놈
이준혁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윤혜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작은 흉터가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상처는 처치한 듯했다.문현미가 아들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내가 일찍 와서 혜인이 좀 챙기라고 했잖아!”“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요.”“어떤 일인데 네 아내보다 중요해? 근데 그 이마는 왜 그렇게 된 거야?”퉁명스럽게 말을 하던 문현미가 이준혁 이마에 난 상처를 발견했고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고양이한테 긁혔어요.”순간 움찔한 윤혜인이 이준혁을 힐끗 쳐다보았고 이준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의미심장하게 윤혜인을 주시했다.두 사람의 눈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문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고양이는 갑자기 어디서 났어? 파상풍 주사는 맞았어?”“얼마 전에 키우기 시작했어요. 아직 더 길들여야 할 거 같아요.”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이준혁은 드레스를 입은 윤혜인의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드레스 색깔과 디자인이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렸기에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아름답긴 했지만 허리 부분에 속살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가 조금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무뚝뚝하게 서있던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윤혜인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누가 이런 드레스를 골라준 거야?”“안 예뻐요?”윤혜인은 별 기대 없이 대충 되물었지만 그녀의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이 몇 초 정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예뻐.”예뻤다. 솔직히 그녀를 주머니에 넣고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반면,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심장이 움찔했다. 조금 전에 그녀는 홧김에 일부러 그에게 되물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이런
독한 계모 밑에서 자란 문현미는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 그녀라면 이기려고 아옹다옹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겉과 속이 다르고 낯까지 두꺼운 사람은 찍소리도 할 수 없게 무찔러버려야 한다.그녀는 손을 뻗어 임세희를 잡으며 비꼬았다.“적당히 하고 얼른 일어나지 못해?”하지만 그녀의 손이 임세희에 닿기도 전에 임세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줌마, 때리지 마세요...”임세희는 이준혁의 다리를 끌어안고 애원하고 있었다. 문현미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인 것처럼 말이다.문현미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 손을 놓지 못해? 감히 유부남의 다리를 잡아? 미쳤어?”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이미 다른 이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어머님.”윤혜인은 재빨리 문현미를 불렀다. 그녀는 천식을 앓고 있어서 흥분하면 안 된다.“엄마!”눈살을 찌푸린 이준혁도 손을 뻗어 문현미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그때 임세희가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그렇게 그의 손이 방향을 잃더니 그대로 윤혜인을 밀치고 말았다.“악-!”그녀의 뒤에는 바로 계단이었다. 비명 지르는 윤혜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겁에 질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그가 잡아주길 바랐다.이준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도 손을 내밀고 싶었다...하지만 임세희가 그를 너무 꽉 안고 있어서 그는 한발 늦었다.불과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닿지 못하고 있다.윤혜인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걸쳤던 겉옷이 떨어지고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자신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문현미가 그녀를 잡았다.위험에서 벗어 난 후.문현미를 잡고 있는 윤혜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방금전 화면이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마치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준혁이! 너! 켁켁...”문현미는 기침하기 시작했다.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준혁은 자신이 그녀에게 위험을 가하게 될 줄은 몰랐다.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아팠다.품에 안고
진짜 윤혜인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겠지?임세희 눈에 짙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그때 송소미가 다가와 임세희를 부축했다.“언니, 돌아가서 쉬어.”두 사람은 어느 한 방으로 들어갔고 송소미가 방문을 잠갔다.“언니도 아줌마한테 맞은 거예요?”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송소미의 입술이 터져있었다.임세희도 순간 깨달았다.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너도 아줌마한테 맞았어?”송소미는 이를 갈았다.“모두 윤혜인, 그년 때문이에요.”윤혜인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어떻게 문현미에게 맞을 수 있을까.임세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제 더 이상 너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말한 투자 방안은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아줌마의 태도가 보다시피 너무 완강하셔. 거기에 혜인 씨는 임신까지 한 상태라 오빠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전에 그녀는 송소미를 불렀고 그녀의 투자방안에 흥미를 느끼는 척하며 그녀에게 계약금 2억을 주면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여야지만 투자할 수 있다고 했다.“임신했다고요?”“응, 하지만 오빠는 모르고 있어. 아마 아이를 낳은 다음 오빠를 협박하려는 건 가봐...”송소미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내가 뜻대로 되게 하지 않을 거야.”윤혜인과는 악연이었던 송소미기에 그녀가 이씨 가문의 손자를 낳게 된다면 송소미에게 이로울 게 없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언니는 포기하면 안 돼요.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임세희는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아줌마는 혜인 씨와 배 속의 아이만 예뻐하잖아.”그때 송소미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는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 거예요.”임세희는 너무 기뻤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보람이 있다.하지만 겉으로는 속내를 숨기며 순진한 얼굴을 했다.“그게 무슨 뜻이야?”송소미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냉소를 지었다.“언니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해요. 내가 꼭 사모님이 되게 해줄게요.”임세희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