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희는 취조하는 듯한 이준혁의 눈빛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소식은 그녀가 임씨 아주머니를 시켜 이준혁 본가 도우미를 매통하여 얻은 정보였기에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세희야, 난 누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해!”임세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이준혁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준혁 오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말을 하던 임세희는 갑자기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까지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추측한 거야. 오빠가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잘하는데 당연히 그런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했겠지!”이준혁은 여전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임세희는 그의 눈빛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참고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준혁 오빠, 설마 혜인 씨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래서 이혼하기 싫은 거야?”오늘 이 질문을 여러 번 들은 이준혁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그가 윤혜인을 좋아하게 된 거라고? 그럴 리가! 그는 절대 아무도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그 순간, 머릿속에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윤혜인의 모습이 떠올랐고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있다.임세희는 아무 대답도 없는 이준혁을 보며 분노가 차올랐고 절망스러웠다!그녀가 계속 이준혁에게 따져 물으려던 찰나, 임씨 아주머니가 병실로 들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그러더니 갑자기 과장된 연기로 엉엉 울기까지 했다.“우리 가여운 아가씨, 조금 전에 의사가 흥분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순간, 임씨 아주머니의 의도를 눈치챈 임세희도 아주머니를 와락 끌어안더니 슬피 울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며 이준혁은 그제야 임세희가 환자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내 날카로운 눈빛을 거뒀다.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세희야, 네가 꼭 나에게 시집오고 싶은 지 잘 생
“아니, 친구가 차린 부업을 엎어버린 다니! 지금 그게 할 소리야?”김성훈의 호통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이준혁이 병실을 나서기 전에 임세희를 안아 침대에 다시 눕혔다.이 모습에 임세희는 다시 의기양양했다. 그녀가 이렇게 불쌍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준혁은 무조건 마음이 약해지니까! 이렇게 고분고분 그녀를 다시 안아주니까!두 사람은 알고 지낸 세월이 이렇게 긴데 이준혁은 그녀에게 정이 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이런저런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던 임세희가 손을 뻗어 이준혁의 목을 감싸려던 순간,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임씨 아주머니를 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앞으로 아가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아주머니는 이제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서 노후를 즐겨도 될 것 같습니다!”이 말은 당부이자 적나라한 경고였기에 듣고 있던 임씨 아주머니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아주머니는 임세희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를 모시고 있었고 이 사실을 이준혁도 알기에 평소에 아주머니에게 예의를 갖췄다.오늘처럼 이렇게 직설적으로 경고를 한 건 처음이었다.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임씨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임세희는 뒤에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뒤로 안 돌아보고 떠나는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쫓아가려던 그때, 임씨 아주머니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아가씨, 겨우 남은 준혁 도련님의 인내심까지 도전하지 마세요.”임씨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온몸에 힘이 풀려버린 임세희가 침대에 축 늘어져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아줌마, 나 진짜 너무 무서워요. 준혁 오빠가 나 진짜 버리고 가면 어떡해요? 진짜 나 필요 없다고 하면 어떡해요?”임씨 아주머니가 임세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가씨, 준혁 도련님은 잠시 이혼을 미뤘을 뿐이에요. 두 사람을 이혼하게 만들 방법은 많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참고 지켜보는 거예
“자, 어디 한번 소리 질러봐.”팍!남자가 깐족거리며 말을 하던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와인병이 꽂혔고 유리조각들이 여기저리 튀었다.“당장 내 친구한테서 떨어져!”손에 절반 남은 와인병을 들고 있던 소원이 남자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고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흐르던 남자가 소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이 천박한 계집애가! 너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입고 와인바에 온 거잖아!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말을 하던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을 들더니 윤혜인을 보며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냈다.“이 계집애는 오늘 내가 반드시 따먹을 거야!”한편, 이를 지켜보던 웨이터가 곁에 있던 김성훈을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대표님, 내려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우리가 나설 입장이 아니야.”김성훈이 가볍게 피식 웃었다.이때, 팍 소리와 함께 재킷을 입은 남자 손에 들고 있던 와인병이 그대로 본인의 머리에서 깨져버렸고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이런 젠장, 누구…”남자가 욕설을 채 퍼붓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혔고 몸이 하늘 위로 붕 떴다가 이내 바닥에 던져졌다.다음 순간, 이준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고 와인바에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와인병 던지려고 했어?”싸늘하게 굳은 이준혁의 목소리가 들렸고 얼굴이 짓밟힌 남자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수려하게 생긴 이준혁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같았다.이때, 이준혁이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웨이터가 카트에 비싼 술을 가득 담아 그의 앞에 대령했고 이준혁은 그 중 한 병을 손에 쥐고는 얼굴을 짓밟고 있던 발을 거둔 채 술병을 그대로 떨어트렸다.술병이 바닥에 떨어진 채 산산조각이 났고 유리파편들은 이리저리 튀었으며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눈에 박힐 뻔했다.“악! 악!”그 남자는 소름 끼칠 정도로 처참한 비명 소리를 질렀고 주위에 몰려 있던 손님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이준혁을 바라보았다.저런 사
윤혜인의 말은 이준혁이 더 이상 전처의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준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고 살기에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난 아직 네 남편이고 네 일에 관여할 자격이 있어.”말을 마친 이준혁은 윤혜인을 확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채 그대로 와인바를 나섰고 윤혜인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이준혁 씨, 이거 당장 놔요! 당장 내려놓으라고요!”하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이준혁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김성훈이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끝까지 아니라고 하더니, 대체 누가 이혼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네.’이때, 소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혜인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김성훈이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소원 씨, 윤혜인 씨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경한이가 위에서 소원 씨를 기다리고 있어요.”그의 말에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던 그녀는 김성훈의 부축에 겨우 몸을 가눴다.“소원 씨, 왜 그래요?”김성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육경한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소원이 이렇게까지 겁을 먹은 거지?“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대표님.”겨우 정신을 차린 소원이 창백한 얼굴로 한 걸음씩 위층으로 올라갔다.한편, 위층의 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원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큰 결심을 한 듯 다가갔고 룸과 가까워질수록 살결이 맞닿은 마찰음이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밝은 불빛이 비추고 있던 룸 안에서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소파에 앉은 채 한 여인의 허리를 잡고 한데 엉켜 있었으며 그 여인은 황홀한 표정으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도련님, 진짜 너무해요…”“좋아?”남자가 여인의 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물었다.“너무 좋아요…”룸 밖에 서있던 소원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지난번 일을 생각하면 이를 악물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소파에
육경한이 소원을 두 팔에 가둔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긴 싫어? 밖에 가서 할래? 소씨 집안 공주님이 얼마나 방탕한 여자인지 보여주고 싶어?”입술을 덜덜 떨고 있던 소원이 육경한의 팔을 잡은 채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이 남자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저번에 소원은 그저 싫은 내색을 조금 보였을 뿐인데 육경한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소씨 가문 회사의 주식을 폭락하게 만들었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소원이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육경한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이제 드디어 그녀를 만나준 이상, 소원은 절대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한편, 육경한이 싸늘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원을 쳐다보며 그녀가 더러운 몸으로 순진한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한국에 없던 이 몇 년 동안, 그녀의 몸은 수많은 남자들에게 놀아났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육경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어버린 뒤, 치마를 위로 올렸다.소원은 그렇게 목이 조인 채 소파에 누워 육경한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연민도 없었으며 소원에게 끝없는 고통만 남겨주었다.소원은 시체 마냥 누워서 육경한의 갈취를 버텨내 수밖에 없었다.두 시간 뒤, 육경한은 소원의 몸 위에서 내려와 곁에 있던 옷을 바닥에 툭 던졌고 소원에게 입으라고 눈치를 줬다.소파에서 일어난 소원이 바닥에서 옷을 주웠다. 그 옷에서는 술집 아가씨들이 자주 쓰는 저렴한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겼다.소원은 코를 찌르는 향기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녀가 입고 온 옷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졌기에 그가 준 옷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우리 소씨 공주님이 표정이 별로 안 좋네, 왜? 만족 못했어?”육경한이 코웃음을 치며 비꼬자 휘청거리던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이 남자는 분명 조금 전에 그 여자와 충분히 즐겼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아직도 힘이 저렇
하지만 윤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준혁이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를 내야 하는 건 그녀 아닌가?이준혁은 증거도 없이 그녀를 모함한 것도 모자라 매번 임세희의 편에 서서 그녀를 괴롭힌 주제에…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윤혜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 제발 좀 천천히 달려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덜컥 겁이 난 윤혜인이 엉엉 울면서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이준혁 씨, 제발 차 좀 멈춰요! 저 진짜 토할 것 같아요. 제발 멈추라고요! 멈춰주세요… 웩…”결국 참다못한 윤혜인이 입을 막은 채 헛구역질을 했고 그제야 이준혁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채 차를 세웠다.십 분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스카이 별장에 도착한 것이다. 차가 멈추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별장 안에 있는 1층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와락 토를 했다.하지만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녀는 속이 비어 있었기에 죽을 것처럼 아팠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다.이때, 이준혁이 그녀의 곁에 나타나 따듯한 물 한잔을 건넸고 윤혜인이 얼른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마시고 나서야 속이 좀 편해진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이준혁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이준혁 씨, 당신한테 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저는 살고 싶어요! 흑흑… 진짜 너무 놀랐단 말이에요…”엉엉 우는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껴안았고 그의 셔츠 위로 떨어진 눈물은 그대로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조금 전에 너무 놀란 탓에 윤혜인은 아랫배에 통증이 조금씩 느껴졌고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에게 문제라도 생기진 않았을까 너무 걱정되었다.창백해진 윤혜인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이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아파?”“이준혁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뱃속의 아이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 윤혜인이 그를 힘껏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고 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윤혜인은 화장실의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인 채 이준혁의 갈취를 받아내고 있었고 이 순간, 자신이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반항도 못하고 이렇게 이준혁에게 휘둘리다니.짜고 달달한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입술에 흘러 들자 그는 마음속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고 언짢은 듯 윤혜인을 놓아준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때리려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이준혁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어디 감히!”다시 한번 다른 남자를 위해 그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이준혁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준혁이 너무 꽉 잡고 있었던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고개를 홱 돌린 채 그와의 스킨십을 피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입술이 다른 여자의 몸에 닿은 적이 있다는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반항하면 그녀만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윤혜인이 조금 전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단 이거 놔요.”간만에 부드러워진 윤혜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놓아주었고 단 일초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않은 윤혜인은 홱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이준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벽에 밀쳤다. 두 사람의 거리는 또다시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난 분명히 놨어.”이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두 번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이준혁은 왠지 화를 내는 윤혜인의 모습이 좋았으며 오늘 병원 주차장에서 영혼 없이 고분고분하던 그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조금 전에 거칠었던 행동과 달리 이번에 이준혁이 선사한 키스는 매우 섬세했다. 목덜미로부터 시작하여 고
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던 크리스탈 장식품을 빼앗았고 그대로 벽에 던져버렸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장식품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고 깜짝 놀란 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턱을 꽉 잡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기억해,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면 난 그 놈을 서울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말을 마친 이준혁이 문을 쾅 닫은 채 화장실을 나섰고 윤혜인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꼭 끌어안고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아랫배에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힘겹게 배를 꼭 끌어안았다.이때, 문이 벌컥 열렸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온 도우미 아주머니는 엉망진창이 된 화장실 바닥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재빨리 부축했다.“여기에 왜 피가 있어요? 사모님 어디 다치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걱정된 듯 묻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제 피가 아니에요.”“그럼…”도우미 아주머니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사모님, 일단 방에 가서 좀 쉬세요.”윤혜인을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윤혜인을 침대에 눕힌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조금 전에 제가 쌍화차를 끓였는데 한 잔 드릴까요?”“고마워요, 아주머니. 근데 전 지금 별로 입맛이 없네요. 누워서 좀 쉬고 싶어요.”윤혜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힘겹게 대답했고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서서 방을 나서던 아주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전했다.“사모님, 요즘 도련님이 매일 사람을 시켜 산삼이며 녹용이며 귀한 송이까지 보내오십니다. 이 약재들을 끓이는 방법까지 친히 배워 오셔서 주방장에게 가르치셨어요. 사모님 안색이 안 좋다고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두 분은 서로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셨잖아요. 옛정을 많이 돌이켜 보시고 작은 다툼 때문에 그 정까지 잃지는 마세요.”“네, 알겠어요.”윤혜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
윤혜인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이준혁과 함께했던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윤혜인을 위해 이준혁은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사랑의 증표였다.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다.그러니 더 이상 윤혜인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윤혜인의 마음은 이제 분명했다.이준혁에 대한 감정은 결코 동정이 아니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준혁을 사랑하기 때문에.외롭고 긴 밤마다 끝없는 악몽 속에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를 잃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을 사랑했다.그와 함께, 그리고 한 가족으로 평화롭게 함께 지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하여 윤혜인은 이준혁의 사무실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마음을 전하려 했다.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윤혜인은 남자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의 다리를 덮었던 듯한 어두운색 담요를 집어 스스로를 덮었다.곧 그의 독특하고 따뜻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며 윤혜인은 그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회의가 끝난 후 이준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비서에게 물었다.“제 사무실에 아직 사람이 있나요?”비서가 답했다.“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결국... 갔구나.’윤혜인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준혁은 그녀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잠깐의 동행 후에 떠나는 것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길 테니 차라리 짧은 고통이 나을 것이었다.‘내가 고집을 부리면 우리 두 사람 결국 모두 불행하게 될 거야. 차라리 혼자 그 고통을 감당하는 편이 낫지.’...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한기를 느껴 깨어났다.밤이 된 북안도는 얼음 창고나 다름없었다. 난방이 없으면 젊고 강한 사람이라도 얼어 죽을 수 있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에
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이 그녀를 휘감았다.이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밖의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시간 맞춰서 갈 겁니다.”비서는 대답을 듣자마자 얼른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품에서 몸을 떼려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그러자 당황한 윤혜인이 물었다.“그... 회의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태연히 대답했다.“1분 정도는 문제없어.”윤혜인의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조금 전의 용기도 사라지고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듯했다.“일단 회의에 가세요. 우린 이따가 얘기해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날렵하고 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물었다.“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야?”이 질문 하나로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준혁 씨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동정하고 있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잠시 동안 윤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에는 점차 어두운 빛이 어렸다.“네 동정은 필요 없어.”이준혁이 말했다.그는 그녀가 자비로운 마음에 얽매이는 걸 원치 않았다.감정이란 단순한 감동이나 연민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동정으로 얻게 되는 감정이라면, 이준혁은 차라리 윤혜인을 자유롭도록 놓아주고 자신이 홀로 평생 아픔을 감수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곧 이준혁은 윤혜인은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제대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이제 돌아가.”그런 다음 스위치를 눌러 휠체어를 움직여 윤혜인 앞에서 천천히 떠났다.윤혜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조금 전 왜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마음속으로는 이 감정이 동정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이준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많은 고통이 함께 밀려올
이준혁은 모든 과정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한눈에 보기에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이 분명했다.동작이 빨랐지만 윤혜인은 그의 한쪽 다리가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걸 분명히 보았다.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며 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표정을 본 이준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혹시 주 비서가 뭔가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건가?”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도 눈이 있으니까...”하지만 이준혁은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했다.요즘 주훈이 점점 겉으로는 알아듣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항상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주훈이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지금 모습만 봐도 주훈이 분명 무슨 말을 했구나 싶었다.‘탄페니아에서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네? 아직 더 단련시켜야겠어.’윤혜인이 주훈에게서 아무 말도 들은 게 없다고 부정하자 이준혁도 굳이 그 말을 들춰내지는 않았다.대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다리는 괜찮아. 보이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그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문득 자신이 미워졌다.‘준혁 씨는 자신의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늘 자존심 강하고 뛰어났던 사람인데...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거야.’정말이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이준혁은 혼자서 견뎌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을 떠나고 그를 밀어내는 동안, 이준혁은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순간 윤혜인은 모든 것을 잊고 이준혁을 껴안았다.뒤이어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양복을 적셨다.“준혁 씨... 많이 아팠죠?”‘많이 아팠죠?’라는 말은 이준혁의 마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이준혁이 일하는 회의장 밖에 도착했다.이미 소식을 들은 주훈이 미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주 비서님,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요?”주훈은 순간 멈칫하며 혹시 이준혁이 자신의 피의 대부분을 헌혈한 사실을 윤혜인이 알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는 약간 망설였다.지난번에도 사실을 말하다가 이준혁에게 한 소리 듣고 근 반년 동안 탄페니아에 보내져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급여나 처우는 그대로였지만 황토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고단한 생활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 하나 찾기 힘든 환경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그곳의 여자들은 주훈을 보고 마치 신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여기며 하룻밤에도 서너 명이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친해지려 하는 일들이 많았다.겁이 난 나머지 주훈은 급히 벽돌로 집을 짓고 문을 굳게 닫고 지냈다.물론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주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말씀하세요.”윤혜인은 물었다.“대표님의 다리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요.”주훈은 두어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다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이준혁이 어떻게 다리를 다쳤는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였다.‘그럼 이제 그 얘기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곧 주훈은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대표님은... 북안도의 전문가들 소견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거라네요.”“회복 불가능하다고요?”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고 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술받으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 하지 않았나? 심지어 퇴원하기 전에는 혼자 서 있는 모습까지 봤었는데?’그녀는 주훈의 팔을 꽉 쥐고 다급히 물었다.“그날 밤, 오빠 보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