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한 후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약상자를 뒤적이며 약을 꺼냈다.그녀가 거부하기도 전에 기다린 손가락으로 약을 쭉 짜 발라주었다.차가우면서도 시원한 것이 몸에 닿자 윤혜인은 당황해했다.순간 그녀는 치욕스러움을 느꼈다.서러워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남자는 그녀를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녀를 존중해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약을 바른 뒤 그녀는 또 남자에게 압박당했다. 행여나 쓸리게 될까 봐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윤혜인의 얼굴이 분노에 빨갛게 물들었다.이준혁은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집에 약이 있었는데 왜 안 발랐어?”“...”윤혜인은 바르기 쉬운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게다가 약을 발라 빨리 낫기라도 하면 그가 다시 짐승처럼 달려들 위험성이 있었다.그녀가 치료를 하지 않은 건 일종의 보장이기도 했다.이준혁이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일부러 치료하지 않은 거야? 이 핑계로 내가 널 안지 못하게 하려고?”“...”윤혜인이 당황하던 순간을 남자는 바로 눈치챘다.그는 훅 다가오며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거짓말해도 소용없어!”이준혁은 이번에 정말로 마음속에 욕구가 생겨났다. 절대 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함도 아니었다...그저 단순히 그녀를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전보다 조금 안정된 정서를 보이었고 그녀의 몸도 생각해 다른 방식으로 안으려 했다.윤혜인은 몸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두 팔로 힘껏 그를 밀어내면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냈다.“비켜요...당신은 못 해요... 안 돼요...”남자의 안색이 음험하게 변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다시 말해 봐, 누가 못한다고?”윤혜인은 조급한 나머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아니라, 제가...”그는 커다란 손으로 천천히 부드러운 그녀의 속살을 만졌다.“난 안 넣어도 돼. 하지만...”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뒷말을 이었다.윤혜인의 얼굴
윤혜인의 심장이 순간 쿵 내려앉았다.핸드폰도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이준혁은 맨발로 들어왔다. 긴 팔다리엔 튼실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고 상체의 복근은 더욱 탄탄해 보였다.그는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워 윤혜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822822로 해봐.”윤혜인은 멈칫했다.8월 22일.그것은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했던 날이었다.그녀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도 점차 그녀의 온기에 뜨거워지고 있었다. 특히 화면이 켜지고 그녀가 작성했던 내용이 남자의 눈에 확연히 들어갔다.이준혁은 한 글자씩 그녀가 작성한 문자를 읽었다.“아저씨, 저 혜인이에요. 지금 준혁 씨에게 감금당했는데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이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지금 내 삼촌한테 도움 요청한 거야?”남자는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속에선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역시나 내 곁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점차 화가 치밀어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그녀의 턱을 확 잡으면서 벽으로 밀었다.“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한테 꼬리치고 싶은 거야? 왜, 삼촌이 널 도와주면 뭐로 보답하려고?”윤혜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들킨 마당에 숨기지 않고 말했다.“이렇게 절 집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준혁 씨에겐 제 자유를 제한할 권리가 없다고요.”이준혁의 표정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는 차갑게 피식 웃었다.“윤혜인, 그게 지금 네가 나한테 할 소리인 거야?”그의 단단한 팔이 순간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고 있었다. 그는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그럼 넌 나를 위해 아이를 낳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윤혜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뜬금없었다.그녀의 머릿속으로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그들의 아이가 떠올랐다.그 아이는 그녀에게 커다란 가시가 되어 그녀의 살에 파고들었고 뽑을 수도 없
육경한을 미행하던 사람이 진아연에게 보고했다.“대표님께선 오아시스 아파트로 들어가셨습니다.”전화가 끊긴 후 방에서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쿵! 콰앙!진아연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구를 전부 던졌다.더 이상 던질 가구가 없어진 진아연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육경한이 소원을 대하는 태도는 점점 분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장 내일이 결혼식인데도 이 야밤에 소원을 찾으러 간 것을 보면 설령 그와 결혼한다고 해도 소원을 계속 만나러 갈 것 같았다.그녀는 사실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육경한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한다는 것을 말이다.만약 나중에 잘못된 대상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그녀를 어떻게 대할까?육경한은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소원을 상대할 때 그녀는 눈치챘었다.하지만 소원과는 적어도 어린 시절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이었다.게다가 육경한이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책임감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그는 끊임없이 좋은 물건으로 그녀에게 보상해주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대답을 피했고 꼭 영혼 없는 마리오네트와 결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여하간에 육경한이 그녀에게 준 재산은 평생 다 쓸 수 없는 정도였으니까.하지만 그 상대가 소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니, 문제가 커진다.불안과 초조함에 진아연은 바닥에 있던 핸드폰을 주워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결혼식이 시작될 때 그 파일들을 전부 전송해줘요.”지금 이 순간 진아연의 두 눈은 너무도 음험하여 꼭 극독을 지닌 독사의 눈빛 같았다.‘이번엔 반드시 소원을 끌어내릴 거야!'...오아시스 아파트.소원은 이미 짐을 다 정리한 상태였고 내일 아침 이삿짐센터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육경한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까지 오아시스 아파
느껴지는 통증에 소원은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육경한의 얼굴이 다시 한번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육경한?”그녀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면서 그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화가 난 듯 씩씩거렸다.내일이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가 지금 그녀의 침대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뻔뻔하지 않은가.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여긴 왜 왔어? 우리 계약 끝난 거 아니었나?”전에 이미 서로 합의했었다. 그가 결혼하면 계약은 끝이라고.그녀는 전부터 오아시스에서 지낼 때 방문을 잠그지 않는 습관을 길들었다.매번 문을 잠그면 육경한은 발로 문을 뻥 차버려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는 벌로 그녀를 괴롭혔다.그 뒤로 그녀는 더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 덕에 육경한이 아주 쉽게 그녀의 침대까지 올라온 것이다.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집은 애초에 이 남자의 소유였다.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미 그를 쫓아냈을 것이다.소원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육경한은 바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몸을 돌려 큰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분노를 억누르는 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내가 지금 결혼했어?”“...”말을 마친 남자는 그녀의 잠옷 바지 사이로 손을 넣으며 익숙하게 움직였다.소원은 그런 그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이거 놔!”그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그러나 육경한은 아랑곳하지도 않았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당황한 소원은 조급한 나머지 이마로 힘껏 그에게 들이받았다.퍽.힘을 너무 세게 써서 그런지 그녀의 이마가 빨갛게 물들었다.육경한의 행동은 멈추었지만,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다만 그 웃음소리는 그녀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세상에, 소원 씨 정말로 힘이 세네요.”육경한은 일어나 앉아 달칵 소리를 내며 라이터를 켰다.은은한 라이터
그녀가 한 말은 육경한의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만약 그럼에도 그녀와 한다는 것은 육경한은 더는 자존심 같은 것을 신경 안 쓴다는 소리였다.그러나 육경한은 체면을 엄청 챙기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행동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것과 같았다.역시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소원이 예상한 대로라면 그는 아마 문을 쾅 닫으며 떠날 것이다.육경한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자연히 그녀의 미세한 눈빛 변화도 캐치하고 있었다.그 순간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부 간파했다.소원은 일부러 그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먼저 약속을 어기는 것처럼 상황을 만들었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면서 차갑게 피식 웃었다.“개가 개를 문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소원은 그의 손길이 익숙하지 않아 손이 닿자마자 그녀의 몸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너랑 침대에서 뒹굴면 개가 된다고 했으니 그럼 너는...”육경한은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몸에 꽈악 밀착시켜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게 했다.남자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태연하게 뒷말을 이었다.“암...”뒷말은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주 모욕적이었다.소원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손도 어느새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단번에 남자의 욕구를 자극했다.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좋아했다.뭔가 짜릿한 기분이기도 했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거울 앞으로 밀었다.이내 남자의 커다란 몸이 그녀의 시야를 가려 버리고 그 순간 소원은 숨을 참아버렸다.“돌아서서 거울을 잡아.”육경한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소원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육경한은 가만히 모욕을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그를 건드린 것에 후회할 정도로 배로 돌려주는 사람이었다.“아버님이 이틀 뒤에 순조롭게 수술실로 들어갈 수 있을까?”그의 말에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거울을 붙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던 소우너은 길가에 버려진 유기견처럼 몸을 웅크렸다. 엄청난 위통에 일어서는 것마저 그녀에게 고역이었다.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 순간 통증은 온몸으로 퍼져 심장마저 누군가가 꽉 쥐어 잡은 듯 아파졌다.최근 위통은 자주 찾아왔다. 그녀는 줄곧 진통제를 먹으면서 겨우겨우 버티며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소진용이 수술하기 전까지 절대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버텼다.그녀는 엉금엉금 힘겹게 침대까지 기어가 서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약 두 알을 물도 없이 삼켜버렸다.그러나 말라버려 이미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으로 약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녀가 물 마시러 가려고 할 때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뭘 먹은 거지?”남자는 꼭 사나운 늑대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소원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굳어버렸고 입을 열려던 순간 남자는 그녀가 들고 있던 약병을 빼앗아 갔다. 그는 그녀의 입안에 있던 두 알도 거칠게 빼냈다.반응하기도 전에 육경한은 몸을 틀더니 어디론가 가버렸고 소원은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미친놈이 지금 내 진통제를 변기에 버리려고 한 거야?!'소원의 안색이 더없이 창백해졌다.얼른 일어나 약을 빼앗아 오고 싶었지만,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지금이 꼭 죽기 직전인 것 같았다. 몸은 커다란 기계에 깔린 것처럼 아팠다.육경한은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미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아무 약이나 막 주워 먹지 마.”소원은 미칠 지경이었다.그 약은 국내에 없는 해외에서 어렵게 공수해온 특효약이었고 그녀의 주치의가 직접 어렵게 구해온 그녀를 살릴 수 있는 약이었다.그런데 육경한이 그 약을 전부 변기에 버린 것이다.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를 욕하고 때리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그저 그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육경한, 넌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야?”
소원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내가 하라는 거 전부 할 수는 있고?”그녀는 화장기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웃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차갑게 말했다.“생각해볼 수는 있어.”사실 그녀의 말대로 결혼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녀가 그의 아이를 낳아준다고 약속하면 말이다.하지만 그는 오만하고 모순적인 성격이었다. 속으로 생각한 것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그저 겉으로만 타협했다.어쩌면 소원이 마음 약해지게 하는 말 한마디만 했다면 그는 바로 단단한 자신의 껍데기를 깨고 속마음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그럼 난 네가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해줄 수 있어?”“죽을 수 있냐고.”소원은 두 번이나 연달아 물었다.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아 장난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다시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그 정도로 내가 싫은 거야?”“응.”소원은 위통에 더는 버틸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힘겹게 말을 하고 있었었다. 그녀는 육경한이 얼른 할 말을 끝내고 떠나주길 바랐다.“죽으러 갈 때 반드시 진아연 데리고 죽어. 그러면 너희 둘은 죽어서도 부부가 될 수 있잖아.”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육경한은 그녀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아 갸름한 턱을 잡으면서 이를 빠득 갈았다.“소원아, 대체 누가 너한테 그런 용기를 준 거지? 감히 내 앞에 그런 악랄한 말을 해?!”‘악랄하다고?'그의 말을 들은 소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진찬성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해치려고 했고 나중에 별장에 그녀를 가둬 폭행했다. 이 일은 분명 진아연과 연관이 있었다.진아연이 이렇듯 악랄한 것은 누구를 믿고 그런 것이겠는가?그녀는 그저 두 사람이 죽길 바란다고 말했을 뿐인데 악랄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니.그러나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악랄하든 잔인하든 상관없었다.그간 육경한이 그녀에게 만들어 준 죄명이 많지 않은가? 그녀는 정말로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의 하얀 셔츠는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붉은 피는 육경한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그녀가 토해낸 피를 보고서야 그는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왜 피를 토해낸 거지?”육경한의 목소리는 전처럼 싸늘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소원은 피가 잔뜩 묻은 모습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암 환자는 다 그래. 자주 피를 토해낸다고.”그녀가 웃으면서 말해서 그런지 육경한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자신을 일부러 비꼬고 있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의 셔츠는 그녀의 피로 처참하게 되었다. 소원은 그가 화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소원을 안아 욕조에 눕혔다.그가 그녀의 옷을 벗길 때 소원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힘겹게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육경한은 그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움직이지 마. 더럽잖아. 깨끗하게 씻어야지.”목이 너무 아팠던 소원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버둥거렸다.“너한테 씻겨달라고 한 적 없어.”그녀는 혐오의 눈길로 그를 보았다.소원은 오히려 그가 더럽게 느껴졌다. ‘더러운 놈. 이런저런 여자들이랑 침대에서 뒹굴었으면서 성병 옮았나 모르겠네.'육경한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눈치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그녀의 혐오를 받았다고 해서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를 안는 것도, 그녀를 씻겨주는 것도, 나중에 아이를 낳는 것도 말이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위협했다.“자꾸 움직이면 여기서 해버릴 거야.”“역겨운 놈.”소원은 정말로 그가 혐오스러웠다.육경한은 그녀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그녀의 옷을 벗긴 후 물을 틀었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같이 침대에서 뒹굴기도 하고 몸도 이곳저곳 다 만졌으면서 이제 와서 역겹다고?”소원은 아무 감정 없이 자신의 몸을 씻겨주는 육경한에 얼굴이 붉어졌다.그는 그녀의 온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다시 욕조에 물을 채웠다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