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하얀 셔츠는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붉은 피는 육경한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그녀가 토해낸 피를 보고서야 그는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왜 피를 토해낸 거지?”육경한의 목소리는 전처럼 싸늘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소원은 피가 잔뜩 묻은 모습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암 환자는 다 그래. 자주 피를 토해낸다고.”그녀가 웃으면서 말해서 그런지 육경한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자신을 일부러 비꼬고 있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의 셔츠는 그녀의 피로 처참하게 되었다. 소원은 그가 화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소원을 안아 욕조에 눕혔다.그가 그녀의 옷을 벗길 때 소원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힘겹게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육경한은 그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움직이지 마. 더럽잖아. 깨끗하게 씻어야지.”목이 너무 아팠던 소원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버둥거렸다.“너한테 씻겨달라고 한 적 없어.”그녀는 혐오의 눈길로 그를 보았다.소원은 오히려 그가 더럽게 느껴졌다. ‘더러운 놈. 이런저런 여자들이랑 침대에서 뒹굴었으면서 성병 옮았나 모르겠네.'육경한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눈치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그녀의 혐오를 받았다고 해서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를 안는 것도, 그녀를 씻겨주는 것도, 나중에 아이를 낳는 것도 말이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위협했다.“자꾸 움직이면 여기서 해버릴 거야.”“역겨운 놈.”소원은 정말로 그가 혐오스러웠다.육경한은 그녀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그녀의 옷을 벗긴 후 물을 틀었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같이 침대에서 뒹굴기도 하고 몸도 이곳저곳 다 만졌으면서 이제 와서 역겹다고?”소원은 아무 감정 없이 자신의 몸을 씻겨주는 육경한에 얼굴이 붉어졌다.그는 그녀의 온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다시 욕조에 물을 채웠다
남자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와 억지로 약을 삼키게 했다.소원은 그의 행동에 머리가 어질거렸고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그렇게 그는 가져온 알약 4개를 전부 삼키게 하고 나서야 입을 뗐다. 그녀의 볼을 누르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언제부터 아프면 약 안 먹고 버티는 습관을 길들였지.”소원은 기가 찬 듯 크게 웃어버렸다.“누군 안 먹고 싶었나? 네가 내 약을 전부 버렸잖아.”그가 버린 약은 그녀의 몸에 무리 가지 않게 하면서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다.그녀도 서현재가 그 약을 어떻게 구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서현재는 이 약을 위해 며칠 동안이나 다른 곳으로 출장 갔으니 분명 힘들게 구한 약이라 생각했다.그러나 그 약은 전부 변기로 내려갔다. 꼭 마지막 살길이 막혀버린 것처럼 그녀의 앞길도 캄캄해진 기분이었다.육경한은 소원이 또 그가 버린 피임약을 언급하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볼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넣었다.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피임약을 자꾸만 언급하는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그의 아이를 배기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는 점차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 소원을 곁에 묶어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전에 유산한 아이가 떠오른 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콩알만 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그 약을 버린 건 다 널 위해서야.”육경한은 절로 오한이 들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은 두 눈은 빛을 잃어 공허했고 자조적으로 말했다.“그랬군요. 날 위해 버려줘서 정말 고맙네요.”육경한은 그녀의 비아냥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한번 결정한 것을 바꿀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어떻게든 그는 소원을 임신시켜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소원은 마음속에 커다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불길은 거세지기만 했다.어릴 때부터 착했던 그녀는 살면서 죄가 될만한 일은 해본 적이
자꾸만 죽는다, 죽는다 언급하자 육경한은 소원이 왜 죽는다는 말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는 큰 손을 뻗어 여자의 가느다란 목을 잡으며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도 죽고 싶은 거야?”남자의 몸에서는 방금 씻은 듯한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그 향은 소원이 제일 좋아하는 향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역겹게 느껴졌다. 육경한의 몸에서 나니 말이다.그녀는 울렁이는 속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내 말은, 난 죽어도 네 내연녀 할 생각 없다는 소리야! 날 그만 좀 괴롭혀!”육경한의 관자놀이가 움찔거렸다. 그는 화가 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반항하기 위해 그런 소리를 한 거라고?”소원의 두 눈은 아주 공허했고 화도 내지 않았다.“넌 네가 한 사람의 죽음도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육경한은 그녀의 말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정말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도 생겨났다.그러나 여자의 안색은 그가 봐도 너무도 창백했고 꼭 유리로 만든 인형처럼 살짝만 힘을 주어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순간 그는 화도 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도 전부 상처가 되어 배로 그에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분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결국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했다.그녀의 입안을 거칠게 헤집는 것으로 그는 분풀이를 했다.그 순간, 소원은 속이 울렁거렸고 위통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그를 확 밀어낸 그녀는 얼른 쓰레기통을 찾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그녀가 게워낸 것은 전부 위액이었다.그녀의 행동은 전부 육경한의 눈에 들어왔다.‘내가 토 나올 정도로 싫은 건가?'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그래, 그래, 알겠어.”육경한의 눈빛이 써늘해지고 단단히 증오하는 어투로 말했다.“그런데 어쩌지? 넌 영원히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말을 마친 그는 문을 쾅 세게 닫고 나가버렸
결국 그는 양심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안상철은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 USB를 꽂으면서 미안한 듯 말했다.“사장님, 이건 다른 사람이 사장님께 보여드리라고 한 겁니다.”곧이어 컴퓨터 화면에선 보는 사람마저 낯뜨거워지게 하는, 남자와 여자가 뒤엉켜 있는 영상이 흘러나왔다.소진용은 미간을 확 구겼다. 화면 속에 나오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려던 순간 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화면 속 남자도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그 남자는 바로 그때 그에게 매를 맞았던 육경한이었다.자세히 보면 그의 딸은 육경한의 거친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즐겼다고 하기엔 애매했기에 차라리 육경한의 일방적인 괴롭힘 더 어울렸다.순간 소진용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컴퓨터를 꺼버리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파킨슨병 환자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손가락을 펴보려고 애를 써도 펴지지 않았다.소진용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고 세월의 흔적인 주름을 타고 흘러내렸다.얼른 컴퓨터를 꺼서 딸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쿵!소진용이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면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아무리 제 모습이 처참하다고 해도 그는 안성철에게 애원했다.“빨리, 빨리 그것 좀 꺼줘요. 빨리 내 딸을...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내 딸을 구해줘요...”그는 정말로 영상만 꺼버리면 딸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안상철은 영상을 꺼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컴퓨터 화면을 옮겨 소진용 앞으로 가져다 놓고 끝까지 보게 했다.영상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육경한 외에 진아연이 그의 딸을 폭행하는 장면도 나왔다.소진용은 자신의 연약한 딸이 여러 남자에게 둘러싸여 폭행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되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내 딸...'‘내 소중한 딸이...'‘그렇게 말 잘 듣던 귀여운 딸을...'‘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 짐승보다 못한 자식들이!'“아..
서울, 성원 호텔.화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예식장엔 수많은 붉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주례대의 마이크마저 스와로브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정 중앙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그야말로 극 호화로운 예식장이었던 터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신부 대기실에 있던 진아연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메이크업 수정받고 있었다.그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물었다.“밖에 하객이 많이 와 있어요?”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밖에는 호텔 직원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호텔을 통째로 빌린 터라 오늘 하루 성원 호텔에서 결혼하는 커플은 진아연과 육경호 밖에 없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진아연이 긴장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휴지로 진아연의 땀을 닦아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진아연 씨, 지금 9시 반이에요. 하객들 오기엔 아직 이르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짝!경쾌한 소리가 들려오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고개가 돌아갔다.그녀는 뺨을 손으로 감싸며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왜 그러세요?”진아연은 흉악한 얼굴로 화를 냈다.“대체 어딜 봐서 내가 긴장했다는 거죠!”아침부터 진아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눈꺼풀도 가끔 떨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의 가격이 600억이고 예식장에도 2000억을 들였으니 긴장할 것이 없다고 계속 달랬다.방금 뺨을 때린 것도 사실은 긴장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 충동적인 마음에 그런 것이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멍하니 서 있자 그녀는 짜증을 냈다.“당장 꺼져요.”‘눈치도 없네, 쯧.'신부 대기실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진아연은 핸드폰을 꺼내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아침부터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었다.이때 문이 열렸다.들어온 사람은 턱시도를 입은 육경한이었따.진아연은 얼른 치맛자락을 들며 육경한에게 달려가곤 애교를 부렸다.“경한 시
그녀는 너무도 불안했다.그가 대체 왜 사고를 하는 것일까?설마...불안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지고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떨쳐냈다.몇 분 뒤면 입장해야 했으니 불길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아연아, 오늘 우리 결혼식 없어.”육경한은 미안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취소했어.”그는 새벽에 오아시스 아파트에서 나온 뒤 다른 별장으로 가서 조금 눈을 붙였다.그러나 계속 악몽만 꾸었다.꿈속에서 소원의 몸은 피로 흥건히 젖어버렸고 두 눈엔 눈알이 없었다. 꼭 누가 파버린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에게 말도 걸었다.“육경한, 이제 만족해?”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 그는 억지로 꿈에서 깨어났다.머리가 너무 울렸다.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내연녀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 계속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육경한은 결국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결혼을 취소하기로 했다.그는 비서 소종에게 연락해 모든 것을 취소하라고 했다.그의 말을 들은 진아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육경한의 소매를 꽉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지금 농담하는 거죠? 그렇죠? 결혼 준비 다 했잖아요. 다 했는데 왜 취소를 해요...”“미안해, 아연아. 내가 나중에 다른 거로 보상해줄게.”진아연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세게 저었다. 화장도 이미 눈물에 번져 가련해 보였다.“안돼! 싫어요! 보상 안 받을래요!”“경한 씨, 내가 원하는 건 경한 씨에요! 경한 씨랑 결혼하는 거라고요! 경한 씨랑 결혼하는 게 아니라면 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거예요!”“난 경한 씨의 신부가 될 거예요!”육경한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단호했다.“아연아, 결혼 말고 원하는 것 있으면 내가 다 해줄게.”진아연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싫다고요!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나랑 결혼하자고요!”그녀는 육경한의 옷을 꽉 잡았다. 눈물이 그의 옷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가련하게 말했다.“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잘
그는 서둘러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육경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소종에게 말했다.“차 대기시켜!”진아연의 안색이 파리해지고 얼른 달려갔다.“경한 씨, 경한 씨... 우리 결혼식...”남자는 무정하게 그녀는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다.진아연은 그렇게 육경한이 자신을 결혼식장에 버리고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두 눈엔 원망과 울분이 가득했다.‘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경한 씨가 그 여자 때문에 나와의 결혼은 취소했다고!'‘정말 제정신이 아니야!'그녀는 결혼식 당일에 소원 때문에 결혼식이 취소될 줄은 몰랐다.‘천박한 X!!! 이번엔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진아연은 드레스를 올려잡고 호텔 리무진을 타곤 흉악한 얼굴로 말했다.“당장 앞차 쫓아가요.”차 안.육경한은 핸드폰으로 생방송을 보면서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에게선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툭, 투툭, 투투툭...이때 빗방울이 창문으로 떨어지면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어느새 비는 세게 내리고 있어 전체 도시를 우중충하게 만들었다.생방송을 튼 핸드폰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다.“꺄악! 세상에! 진짜로 뛰어내리려나 봐요! 어떡해요!”“왜 한이 그룹 옥상에 올라갔대요? 혹시 한이 그룹 직원이었나?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건가요?”“전 한이 그룹 사장님이라도 들었어요. 대체 왜 옥상을 올라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이 그룹 사장님을 찾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긴급 체포인가? 아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올라간 거 아닐까요...”“...”제대로 편히 쉬지 못한 육경한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소진용이 무슨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알아봐.”“네.”육경한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그는 소진용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소진용은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그런 남자가 자살하려고 한다니, 말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옥상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소원의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소방관은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달랬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동료들이 이미 설득하러 올라갔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버님께선 어쩌면 순간의 충동으로...”소원은 물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꺄아아아아악! 뛰어내렸어요!!!”소원은 고개를 확 들었다. 그러자 검은 형체가 빠르게 옥상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영혼도 생명도 없는 돌덩이 같았고 기이한 자세로 떨어졌다.쿵!빗소리보다 더 센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비명도 이내 들려왔다.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말이다.순간 소원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툭.들고 있던 생수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소원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빗물이 그녀의 입과 코로 흘러 들어갔다.숨 막혀오는 절망에 순간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한참 후, 그녀의 시야가 드디어 밝아졌다.“아아... 아아아!!!”소원은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울부짖으며 피로 물든 형체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그녀는 보았다.사람인지 아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 시체를 보았다...시체가 입고 있는 네이비 정장은 오늘 아침 그녀가 직접 골라준 정장이었다. 거기다 파란색 땡땡이 넥타이도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 아침까지 소진용에게 애교를 부리던 장면이 떠올랐다.“아빠, 그렇게 입으시니까 한 십 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소진용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젊으면 좋지. 젊으면 활력이 있어 보이잖아. 그러면 아무도 우리 원이를 다치게 할 수 없겠지...”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에 씻겨 소원의 손까지 닿았다.그것은 그녀의 아빠의 피였다. 그녀를 낳고 길러준 아빠의 피...‘대체 왜 그러셨어요!'그녀는 이성을 잃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갔다. 그러자 소방관들이 그녀의 팔을 꽉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