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와 억지로 약을 삼키게 했다.소원은 그의 행동에 머리가 어질거렸고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그렇게 그는 가져온 알약 4개를 전부 삼키게 하고 나서야 입을 뗐다. 그녀의 볼을 누르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언제부터 아프면 약 안 먹고 버티는 습관을 길들였지.”소원은 기가 찬 듯 크게 웃어버렸다.“누군 안 먹고 싶었나? 네가 내 약을 전부 버렸잖아.”그가 버린 약은 그녀의 몸에 무리 가지 않게 하면서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다.그녀도 서현재가 그 약을 어떻게 구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서현재는 이 약을 위해 며칠 동안이나 다른 곳으로 출장 갔으니 분명 힘들게 구한 약이라 생각했다.그러나 그 약은 전부 변기로 내려갔다. 꼭 마지막 살길이 막혀버린 것처럼 그녀의 앞길도 캄캄해진 기분이었다.육경한은 소원이 또 그가 버린 피임약을 언급하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볼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넣었다.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피임약을 자꾸만 언급하는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그의 아이를 배기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는 점차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 소원을 곁에 묶어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전에 유산한 아이가 떠오른 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콩알만 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그 약을 버린 건 다 널 위해서야.”육경한은 절로 오한이 들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은 두 눈은 빛을 잃어 공허했고 자조적으로 말했다.“그랬군요. 날 위해 버려줘서 정말 고맙네요.”육경한은 그녀의 비아냥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한번 결정한 것을 바꿀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어떻게든 그는 소원을 임신시켜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소원은 마음속에 커다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불길은 거세지기만 했다.어릴 때부터 착했던 그녀는 살면서 죄가 될만한 일은 해본 적이
자꾸만 죽는다, 죽는다 언급하자 육경한은 소원이 왜 죽는다는 말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는 큰 손을 뻗어 여자의 가느다란 목을 잡으며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도 죽고 싶은 거야?”남자의 몸에서는 방금 씻은 듯한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그 향은 소원이 제일 좋아하는 향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역겹게 느껴졌다. 육경한의 몸에서 나니 말이다.그녀는 울렁이는 속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내 말은, 난 죽어도 네 내연녀 할 생각 없다는 소리야! 날 그만 좀 괴롭혀!”육경한의 관자놀이가 움찔거렸다. 그는 화가 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반항하기 위해 그런 소리를 한 거라고?”소원의 두 눈은 아주 공허했고 화도 내지 않았다.“넌 네가 한 사람의 죽음도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육경한은 그녀의 말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정말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도 생겨났다.그러나 여자의 안색은 그가 봐도 너무도 창백했고 꼭 유리로 만든 인형처럼 살짝만 힘을 주어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순간 그는 화도 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도 전부 상처가 되어 배로 그에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분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결국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했다.그녀의 입안을 거칠게 헤집는 것으로 그는 분풀이를 했다.그 순간, 소원은 속이 울렁거렸고 위통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그를 확 밀어낸 그녀는 얼른 쓰레기통을 찾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그녀가 게워낸 것은 전부 위액이었다.그녀의 행동은 전부 육경한의 눈에 들어왔다.‘내가 토 나올 정도로 싫은 건가?'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그래, 그래, 알겠어.”육경한의 눈빛이 써늘해지고 단단히 증오하는 어투로 말했다.“그런데 어쩌지? 넌 영원히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말을 마친 그는 문을 쾅 세게 닫고 나가버렸
결국 그는 양심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안상철은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 USB를 꽂으면서 미안한 듯 말했다.“사장님, 이건 다른 사람이 사장님께 보여드리라고 한 겁니다.”곧이어 컴퓨터 화면에선 보는 사람마저 낯뜨거워지게 하는, 남자와 여자가 뒤엉켜 있는 영상이 흘러나왔다.소진용은 미간을 확 구겼다. 화면 속에 나오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려던 순간 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화면 속 남자도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그 남자는 바로 그때 그에게 매를 맞았던 육경한이었다.자세히 보면 그의 딸은 육경한의 거친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즐겼다고 하기엔 애매했기에 차라리 육경한의 일방적인 괴롭힘 더 어울렸다.순간 소진용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컴퓨터를 꺼버리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파킨슨병 환자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손가락을 펴보려고 애를 써도 펴지지 않았다.소진용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고 세월의 흔적인 주름을 타고 흘러내렸다.얼른 컴퓨터를 꺼서 딸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쿵!소진용이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면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아무리 제 모습이 처참하다고 해도 그는 안성철에게 애원했다.“빨리, 빨리 그것 좀 꺼줘요. 빨리 내 딸을...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내 딸을 구해줘요...”그는 정말로 영상만 꺼버리면 딸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안상철은 영상을 꺼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컴퓨터 화면을 옮겨 소진용 앞으로 가져다 놓고 끝까지 보게 했다.영상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육경한 외에 진아연이 그의 딸을 폭행하는 장면도 나왔다.소진용은 자신의 연약한 딸이 여러 남자에게 둘러싸여 폭행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되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내 딸...'‘내 소중한 딸이...'‘그렇게 말 잘 듣던 귀여운 딸을...'‘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 짐승보다 못한 자식들이!'“아..
서울, 성원 호텔.화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예식장엔 수많은 붉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주례대의 마이크마저 스와로브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정 중앙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그야말로 극 호화로운 예식장이었던 터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신부 대기실에 있던 진아연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메이크업 수정받고 있었다.그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물었다.“밖에 하객이 많이 와 있어요?”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밖에는 호텔 직원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호텔을 통째로 빌린 터라 오늘 하루 성원 호텔에서 결혼하는 커플은 진아연과 육경호 밖에 없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진아연이 긴장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휴지로 진아연의 땀을 닦아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진아연 씨, 지금 9시 반이에요. 하객들 오기엔 아직 이르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짝!경쾌한 소리가 들려오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고개가 돌아갔다.그녀는 뺨을 손으로 감싸며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왜 그러세요?”진아연은 흉악한 얼굴로 화를 냈다.“대체 어딜 봐서 내가 긴장했다는 거죠!”아침부터 진아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눈꺼풀도 가끔 떨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의 가격이 600억이고 예식장에도 2000억을 들였으니 긴장할 것이 없다고 계속 달랬다.방금 뺨을 때린 것도 사실은 긴장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 충동적인 마음에 그런 것이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멍하니 서 있자 그녀는 짜증을 냈다.“당장 꺼져요.”‘눈치도 없네, 쯧.'신부 대기실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진아연은 핸드폰을 꺼내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아침부터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었다.이때 문이 열렸다.들어온 사람은 턱시도를 입은 육경한이었따.진아연은 얼른 치맛자락을 들며 육경한에게 달려가곤 애교를 부렸다.“경한 시
그녀는 너무도 불안했다.그가 대체 왜 사고를 하는 것일까?설마...불안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지고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떨쳐냈다.몇 분 뒤면 입장해야 했으니 불길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아연아, 오늘 우리 결혼식 없어.”육경한은 미안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취소했어.”그는 새벽에 오아시스 아파트에서 나온 뒤 다른 별장으로 가서 조금 눈을 붙였다.그러나 계속 악몽만 꾸었다.꿈속에서 소원의 몸은 피로 흥건히 젖어버렸고 두 눈엔 눈알이 없었다. 꼭 누가 파버린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에게 말도 걸었다.“육경한, 이제 만족해?”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 그는 억지로 꿈에서 깨어났다.머리가 너무 울렸다.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내연녀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 계속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육경한은 결국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결혼을 취소하기로 했다.그는 비서 소종에게 연락해 모든 것을 취소하라고 했다.그의 말을 들은 진아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육경한의 소매를 꽉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지금 농담하는 거죠? 그렇죠? 결혼 준비 다 했잖아요. 다 했는데 왜 취소를 해요...”“미안해, 아연아. 내가 나중에 다른 거로 보상해줄게.”진아연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세게 저었다. 화장도 이미 눈물에 번져 가련해 보였다.“안돼! 싫어요! 보상 안 받을래요!”“경한 씨, 내가 원하는 건 경한 씨에요! 경한 씨랑 결혼하는 거라고요! 경한 씨랑 결혼하는 게 아니라면 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거예요!”“난 경한 씨의 신부가 될 거예요!”육경한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단호했다.“아연아, 결혼 말고 원하는 것 있으면 내가 다 해줄게.”진아연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싫다고요!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나랑 결혼하자고요!”그녀는 육경한의 옷을 꽉 잡았다. 눈물이 그의 옷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가련하게 말했다.“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잘
그는 서둘러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육경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소종에게 말했다.“차 대기시켜!”진아연의 안색이 파리해지고 얼른 달려갔다.“경한 씨, 경한 씨... 우리 결혼식...”남자는 무정하게 그녀는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다.진아연은 그렇게 육경한이 자신을 결혼식장에 버리고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두 눈엔 원망과 울분이 가득했다.‘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경한 씨가 그 여자 때문에 나와의 결혼은 취소했다고!'‘정말 제정신이 아니야!'그녀는 결혼식 당일에 소원 때문에 결혼식이 취소될 줄은 몰랐다.‘천박한 X!!! 이번엔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진아연은 드레스를 올려잡고 호텔 리무진을 타곤 흉악한 얼굴로 말했다.“당장 앞차 쫓아가요.”차 안.육경한은 핸드폰으로 생방송을 보면서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에게선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툭, 투툭, 투투툭...이때 빗방울이 창문으로 떨어지면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어느새 비는 세게 내리고 있어 전체 도시를 우중충하게 만들었다.생방송을 튼 핸드폰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다.“꺄악! 세상에! 진짜로 뛰어내리려나 봐요! 어떡해요!”“왜 한이 그룹 옥상에 올라갔대요? 혹시 한이 그룹 직원이었나?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건가요?”“전 한이 그룹 사장님이라도 들었어요. 대체 왜 옥상을 올라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이 그룹 사장님을 찾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긴급 체포인가? 아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올라간 거 아닐까요...”“...”제대로 편히 쉬지 못한 육경한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소진용이 무슨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알아봐.”“네.”육경한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그는 소진용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소진용은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그런 남자가 자살하려고 한다니, 말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옥상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소원의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소방관은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달랬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동료들이 이미 설득하러 올라갔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버님께선 어쩌면 순간의 충동으로...”소원은 물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꺄아아아아악! 뛰어내렸어요!!!”소원은 고개를 확 들었다. 그러자 검은 형체가 빠르게 옥상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영혼도 생명도 없는 돌덩이 같았고 기이한 자세로 떨어졌다.쿵!빗소리보다 더 센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비명도 이내 들려왔다.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말이다.순간 소원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툭.들고 있던 생수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소원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빗물이 그녀의 입과 코로 흘러 들어갔다.숨 막혀오는 절망에 순간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한참 후, 그녀의 시야가 드디어 밝아졌다.“아아... 아아아!!!”소원은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울부짖으며 피로 물든 형체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그녀는 보았다.사람인지 아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 시체를 보았다...시체가 입고 있는 네이비 정장은 오늘 아침 그녀가 직접 골라준 정장이었다. 거기다 파란색 땡땡이 넥타이도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 아침까지 소진용에게 애교를 부리던 장면이 떠올랐다.“아빠, 그렇게 입으시니까 한 십 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소진용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젊으면 좋지. 젊으면 활력이 있어 보이잖아. 그러면 아무도 우리 원이를 다치게 할 수 없겠지...”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에 씻겨 소원의 손까지 닿았다.그것은 그녀의 아빠의 피였다. 그녀를 낳고 길러준 아빠의 피...‘대체 왜 그러셨어요!'그녀는 이성을 잃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갔다. 그러자 소방관들이 그녀의 팔을 꽉
만족하냐는 말이 순간 육경한의 숨통을 조여왔다.소씨 집안은 결국 처참하게 끝났다. 그는 정말로 만족하고 있을까?아니었다.오히려 반대였다.그는 사실 소진용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소진용이 죽는다는 것은 소원을 휘두를 방법이 하나 줄어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울리는 머리 탓에 그는 생각을 이어가기도 힘들었다.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소진용이 자살을 했다니.대체 왜 그런 것일까? 정말로 그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소원이 그의 아이를 낳아주면 그가 당연히 그들의 빚을 갚아주지 않겠는가?“나랑 약속했잖아. 그 계약서 없애기로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그 계약서를 이용해서 우리 아빠를 사지로 몰아?”“이 배신자! 비열한 놈!”소원은 너무 소리를 질러 가슴이 아파졌다. 원래부터 그녀는 목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소리를 지르니 더 쉬어버린 것이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그때 없애버렸던 계약서는 사실 원본이 아니었다. 그는 원본을 몰래 남겨두어 집안 금고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그게 왜...그는 소원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만족한 적 없다고, 계약서로 소진용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입에 접착제라도 붙은 것인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계약서의 출처는 그가 확실했으니 말이다.그와 무조건 연관이 있었다.소원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 계약서를 위해서 구치소에서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견뎌냈는지 알아? 그때 아이유 유산한 거로는 부족했어?”“육경한, 너 그 아이 유전자 검사는 해봤니? 그 아이 네 아이야! 아직도 속죄하기엔 부족한 거야?”아이를 언급하자 육경한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부족하지 않았다. 부족할 리가 없었다.그 아이에게서 느낀 아쉬운 마음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아이를 하나 더 낳아달라며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소원은 울먹였다.“우리 가족이 전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육경한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아니...”
잠시 동안 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그는 담담하게 소원의 얼굴빛을 살폈고 소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신이 유진이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엄마인 내가 할 수밖에 없지. 내일...”“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 모두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거야.”소원의 단호한 말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백업 파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물었다.“그리고 나면?”소원은 잠시 멈칫했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육경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공개한다고 해도 연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야. 우리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최악의 경우 해외로 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면 그만이지. 연주의 이후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방민아와 방민기도 마찬가지야. 방씨 가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네가 벌이는 이 작은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만약 돈과 인맥을 써서 이슈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육경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들의 대응 방식은 연주와 다를 게 없어.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거야.”그리고 그는 냉랭하게 덧붙였다.“소원, 꿈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방민아와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야. 근데 내가 그 여자들이 유진이에게 나쁜지 좋은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육경한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점들이 속속 보였다.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지금 그녀가 가진 영상은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님 부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그녀가 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겠는가.결국 육경한이 유진이를 놓아주지 않는 이상 양육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으며 잠재적인 위험은 피할 수 없었다.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
하지만 곧 그녀는 이 생각을 부정했다.영숙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영숙을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영숙이 소원을 해치려 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도와줄 필요도 없었고 지금 같은 시점에 와서 그녀를 해칠 이유도 없었다.그렇다면 이건 분명 육경한이 알아챈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몰랐다.‘내가 육연주와 방민아를 몰래 찍어둘 줄 어떻게 알아챘지?’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초소형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겨우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조용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이미 소용없어.”확인해 보니 과연 카메라 안의 저장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육경한이 이걸 손에 넣고 안에 있는 내용을 봤다면 그녀에게 돌려줄 리 없었다.그 안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의 조카, 약혼녀, 그리고 그의 큰처남이었다.그들과의 관계가 워낙 가깝기에 육경한이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도록 놔둘 리 없었다.소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장카드를 가져갔다면 그 안의 내용도 이미 보셨겠죠, 육 대표님.”“응, 봤어.”육경한은 솔직히 인정했다.“봤다면 당신 약혼녀가 한 말을 들었을 텐데요?”소원은 약간 흥분하며 물었다.“그 여자가 정말 유진이 새엄마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육경한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하지만 이 순간, 문득 어젯밤 무의식중에 소원이 흘린 한마디가 떠올랐다.“현재야...”그리고 그동안 소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냉담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장난처럼 다루었는지, 그 안에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던 것들이 떠올랐다.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바꾸었다.“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될 거야. 유진이는 어쨌든 새엄마가 필요하니까. 누구도 유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필 수 없다면 차라리 나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이 낫지.”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자신의 아이를 이익의 발판으로 삼
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약간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지금은 육경한과 이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어젯밤, 소원이 영숙에게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게 한 것은 방민아의 수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 외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방민아의 수를 깨뜨리지 못하면 유진이를 지킬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육경한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이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이후 소원은 영숙에게 부탁해 숨겨 둔 소형 카메라를 가져오게 했다.현재 그 증거는 영숙의 손에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그래야만 육경한과 조건을 논할 수 있었다.그녀는 확신했다. 이 증거를 본다면 육경한도 미우 그룹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방민아와 결혼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설사 결혼을 강행하려 해도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었다.소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나가야겠어. 내 옷 줘.”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너무 헐렁해 입고 나가면 거의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민망했다.육경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네 옷? 그 찢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입고 나가겠다고?”소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싸움으로 옷이 모두 찢겨나갔던 것이다.“그럼 부탁할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 좀 찾아줘.”그러나 육경한은 냉소하며 말했다.“왜 내가 널 위해 옷을 찾아줘야 하지? 나가고 싶으면 그냥 지금 입은 채로 나가.”소원은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곧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지금 입은 그대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문까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육경한이 발로 문을 차며 문을 닫아버렸다.소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정말 그렇게 나가려는 거야?”육경한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투는 뭔가 숨은 의도를 담고 있는 듯했다.속이 덜컥 내려앉았
피가 끝없이 번져가 끝내는 눈까지 뒤덮자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눈이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머릿속은 웅웅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낯선 방을 둘러보며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이전의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방민아가 쉽게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그 룸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었다.그리고 영숙이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다음은 육경한이 그녀를 데려간 장면이 이어졌다.머리를 감싸 쥐고 문질렀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정신도 완전히 맑지 않았다.공기 중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맴돌았다.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닌 소원은 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저절로 미간도 찌푸려졌다.‘어젯밤...’소원은 서둘러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방민아, 방민기와 몸싸움을 벌이며 생긴 상처들 외에 민감한 곳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허리에 남은 손자국이 의심스러웠다.그 자국은 너무 깊어서 마치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흔적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분명 싸움에서 생긴 자국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하려니 겁이 났다.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본래 소원이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육경한이 성큼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원을 보고 무심히 말했다.“깼네.”말을 끝내자마자 커다란 베개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육경한은 손을 살짝 들어 그것을 쳐냈고 베개는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구해줬더니 이렇게 보답하는 건가?”“나한테 무슨 짓 했어?”소원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물었다.육경한은 그녀가 화가 난 모습을 보며 얇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었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도우미가 가져다 놓은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뭘 했다면 네가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 같아?”순간 멍해졌지만 소원은 이내 그의 말
오늘 밤, 소원은 또 소진용에 대한 꿈을 꾸었다.어릴 적, 소진용이 그녀를 데리고 시골로 자선 활동을 갔던 기억이었다.끝없이 이어진 논둑길 위에서 소진용은 그녀에게 본 적 없는 농작물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그것들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나중에 어떤 음식으로 변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어린 소원은 금세 지쳐버렸고 소진용은 몸을 낮추어 그녀를 등에 업었다.소원은 아버지의 등에 업힌 채 그의 설명을 들으며 즐거워했다.그때 소진용이 어떤 농부들은 하루 세끼를 고구마로 연명한다고 말하자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소원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빠, 왜 농부 아저씨들은 고기를 안 먹어요? 고기를 먹으면 배도 부르고 맛있잖아요. 왜 안 드시는데요?”소진용은 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미소가 번진 것이었다.이 나이의 아이가 고기와 같은 값진 음식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소원은 대도시에서 자랐고 가풍 덕분에 소씨 가문은 도우미들에게조차 인색하지 않았다.집안에서 일하는 도우미들조차 매 끼니마다 고기와 생선이 곁들여진 음식을 먹는 상황에서 시골 농부들이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소진용은 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의 논리가 아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말로 설명해 주었다.“우리 소원이, 고기 좋아하니?”“네, 소원이는 고기 좋아요!”소원은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고기는 얼마나 맛있는데, 부드럽고 향기로운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소진용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가 먹는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는 다 농부 아저씨들이 키운 거란다. 하지만 아저씨들은 그것들을 먹지 않고 다 팔아서 집안 살림에 보탠단다. 많은 농부 아저씨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해. 그래서 몸으로 하는 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해.”“아저씨들이 고기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돼지 한 마리나 양 한 마리의 값이 그 집 한 해 생활비나 아이
방 안.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 마치 잠이 든 듯 보이지만 완전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젖은 머리카락과 몸에는 도우미가 갈아 입혀준 실크 잠옷이 걸쳐져 있었다.목선이 살짝 드러난 잠옷은 조금만 움직여도 속살이 살짝 비칠 듯 아슬아슬했다.손에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육경한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말려주기 시작했다.여자의 머리를 말려주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는지라 육경한의 손놀림은 익숙하고 능숙했다.몇 년 전, 그가 머리를 말려주던 여자도 바로 눈앞의 이 여자였다.다만 그때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순진하고 온순했다.침대 한구석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자신에게 머리를 맡기던 모습이 떠올랐다.그것이 육경한이 처음으로 여자의 머리를 말려준 순간이었다.그 후로, 그녀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여자에게도 머리를 말려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같은 일을 하면서도 육경한의 마음은 전혀 달랐다.그와 그녀 사이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미약한 드라이기의 온풍이 두피를 스치자 소원은 따스함을 느꼈다.가벼운 간지러움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척였지만 여전히 깨어나지는 않았다.그녀 옆으로는 넓은 공간이 비어 있었다. 이곳은 원래 육경한의 침대였다.폭이 무려 2.8m에 달할 만큼 넓은 침대였다.그는 잠시 고민하다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걷어내고 누웠다.부드러운 침대는 곧바로 크게 푹 꺼졌다.육경한은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다만 이렇게 한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순간이 그에게는 너무 오랜만이었다.오늘만큼은 충동적으로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이불 안은 온통 소원의 향기로 가득했다.희미한 향기가 은은하게 그를 유혹하고 있는 듯했다.그는 눈을 감고 침대와 어울리지 않는 이 새로운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향기는 육경한을 편히 잠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머릿속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몸속에 잠자고 있던 짐승이 서서히 깨어나는 듯했다.제어할 수 없는 욕망
의사로서 해야 할 말은 했으니 선택권은 육경한에게 있었다. 의사도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방민기도 그저 즐기는 게 목적이었기에 소원에게 독극물을 먹이기보다는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음료수를 먹였을 것이다.육경한이 물었다.“다른 방법은요?”육경한이 첫 번째 방안을 동의하지 않자 의사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나 싶어 멈칫했다. 육경한의 눈빛은 말 그대로 여자가 남자를 보는 눈빛이었기에 같은 남자로서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의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주사를 맞아도 되는데 어떻게 처리하실래요?”“몸 많이 상해요?”육경한이 물었다.의사도 더는 아는 척하기가 두려워 이렇게 말했다.“많이 상하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일 온화한 진정제를 선택해서 투여할게요.”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소원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주사 놓으세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구급상자에서 도구를 꺼내 소원에게 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소원이 조금도 협조하려 하지 않았다. 손이 묶여 있었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도우미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힘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퍽 난감한데 결국 육경한이 손으로 소원을 꾹 누르고 의사에게 지시했다.“이제 주사 놓아요.”주사를 놓자 소원도 많이 얌전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슴처럼 얌전해졌다. 육경한은 도우미에게 소원을 데려가 몸을 닦아주라고 하고는 그도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으로 들어온 육경한은 더러워진 옷을 벗어 던지고 누드로 샤워실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샤워기에서 흘러 내려오자 입술이 따끔거려 손으로 만져보니 아까 소원에게 물려 입술이 까진 것 같았다.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는 키스였기에 육경한도 덤덤할 리는 없었다. 육경한은 욕망이 없는 게 아니라 대부분 억누르고 있었지만 먼저 다가오는 여자에겐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역겹다고 생각했다.지금까지 육경한이 인정한 여자는 방민아뿐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은 아직 거기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방민아
순간 육경한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손등에 올라온 핏줄이 그가 화를 억누르고 있음을 알려줬다.바로 소원을 차에서 던지려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소원이 창가에 몸을 쭈그리고 앉은 채 불안해하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았다. 소원에게 이렇게 얌전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참으로 드물었다.육경한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과 신경전을 벌이는 게 의미없다 생각해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젠장.”육경한이 욕설을 퍼붓더니 짜증스럽게 셔츠 단추를 풀다가 힘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단추가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셔츠 앞부분이 밖으로 펼쳐져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다행히 소원은 잠깐 실언했을 뿐 그 뒤로 더는 실수하지 않았다. 아니면 육경한은 정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소원을 차에서 던져버렸을지 모른다.‘이렇게 데리고 오는 게 아닌데.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지 왜 데려와 가지고. 봐. 저 여자가 필요한 건 네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고...’별장.육경한은 소유한 부동산이 많았는데 이 별장은 시내와 좀 떨어져 있었고 여기로 올 때면 주로 혼자 왔다. 그가 이곳을 좋아하는 원인은 조용하고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강가에 지어져 있어 폭우가 오면 위층 테라스에서 큰비가 강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동안 겪었던 풍파가 떠올라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했다.그래야만 흔들리지 않고 그동안 겪었던 수모와 해왔던 노력을 생각하며 꿋꿋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육경한은 이제 더는 부드럽고 젠틀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부드럽고 젠틀한 남자가 아니었는지 모른다.별장의 도우미는 운전기사의 지시를 받고 준비에 돌입했고 의사도 대기하고 있다가 차가 들어오자 얼른 앞으로 다가섰다.도우미는 육경한이 여자를 안고 들어오는 걸 보고 얼른 손을 뻗었지만 소원은 육경한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의식이 흐릿했기에 모든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밖에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온몸으로 거부하며 남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저리... 가... 제발... 좀 꺼져... 이 나쁜 놈아...”소원이 팔을 버둥거리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이거 놔... 나쁜...”육경한이 소원의 턱을 꽉 움켜잡자 소원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꺼지라고?”육경한의 차가운 목소리는 어딘가 음침했다.“그러면?”“그러면...”소원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듯 이렇게 말했다.“아무튼... 너는 아니야... 꺼져... 꺼지라고.”“누구더러 꺼지라는 거야.”육경한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의 소원은 음료를 마신 사람 같지 않게 정신이 말짱했다.“경한... 육경한... 꺼지라고... 이 나쁜 놈아.”버벅거리지만 않았다면 육경한은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내뱉는 소원을 보며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너뿐이야.”육경한이 소원의 뾰족한 턱을 부여잡더니 싸늘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 너뿐이라고.”육경한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굽신거리는 쪽이 많았지만 유독 소원만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내뱉는 말마다 육경한의 신경을 자극했다.소원은 정신이 말짱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늘이 빙빙 돌고 혀가 꼬여서 하던 말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꺼져.... 꺼지라고... 꺼져...”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언짢은 듯 이렇게 말했다.“꺼지면? 아까 그 애송이들 찾아서 해결하게?”소원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소원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소원이 아니었기에 소원 본인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아무튼 너는 아니야... 악마 같은 놈. 나쁜 놈.”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내가 정말 네 말대로 악마였다면 네가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있을까?”육경한에게 밉보인 사람은 지금쯤 다 한 줌의 재가 되었을 것이다. 소원은 지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기만 한 게 아니라 쥐고 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