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분노에 찬 눈으로 이준혁을 노려봤다.“무슨 헛소리예요! 어젯밤에는 분명 서로가 원해서 한 거잖아요!”이준혁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목에는 여전히 어제 남겨둔 흔적이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서로가 원해서 한 거면, 더 해도 되잖아?”윤혜인이 눈을 피하며 답했다.“안 돼요. 더 이상 안 할 거예요. 이제 더 얽히면 안 돼요.”이준혁은 그녀가 피하지 못하게 턱을 잡으며 눈을 맞췄다.“혜인아, 속이려고 하지 마. 어제 그 반응은 거짓이 아니야. 너도 여전히 나 사랑하잖아, 안 그래?”“준혁 씨, 당신이 밤 일을 잘해서 그래요. 그런 쾌락은 고급스러운 장난감을 사도 얻을 수 있어요.”윤혜인은 어두워진 이준혁의 표정을 모른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다는 거 진심이에요. 이러는 거 정말 별로예요. 깔끔하게 물러나 줘요.”문현미의 말에 동의한 이상, 윤혜인은 약속을 지켜 이준혁이 단념하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오만함이 절대로 다른 사람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걸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윤혜인은 손톱을 손바닥 깊숙이 박으며 가슴에 맺힌 통증을 덮으려 했다.“준혁 씨, 이 세상에 여자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집착하지 마요. 없어 보여요.”남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흉악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춘 상처도 무시할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이게 네 진심이야?”윤혜인은 잠시 멈칫하다 입을 열었다.“네, 진심이에요. 앞으로는 저희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요. 더 이상 연락하지 마요.”“모르는 사람?”그녀의 대답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윤혜인의 얼굴은 평온한 상태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몸 아래 감춰둔 손바닥은 이미 검붉게 변해있었다.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내뱉고 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누군가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팠다.이준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떠났다
진아연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러 은행에서 이미 인정했어. 한이그룹은 대출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그래서 강제 조치를 취할 거라고 말이야. 소씨 집안은 끝났어!”청천벽력과 같았다!소원은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고 온몸이 떨렸다.‘우리 소씨 집안이... 정말 망했다고?! 부모님은 어떻게 하지? 직원들은? 빌린 돈은 어떻게 갚지?!’진아연은 소원의 표정을 보면서도 만족하지 못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단순히 망하기만 한 게 아니야. 당신 아버지는 피고인이 될 거고, 돈을 갚지 못하면 감옥에 가야 할걸?”소원의 머릿속은 ‘윙’하는 소리로 가득 차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진아연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사악하기 그지없었다.“소원 씨, 성원그룹과 회진그룹의 계약 건 문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이 두 회사뿐만이 아니라 동원그룹과 호성그룹에서 거절당했잖아. 안 그래?”소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진아연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뜻이야?!”육경한이 없으니 진아연의 가식적인 온화함은 즉시 사라졌다.그녀는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경한 씨가 이 계약 건들은 당신이 술자리에서 목숨 걸고 따온 거라던데, 참 고생 많았겠더라. 혹시 처음부터 이 계약 건들은 경한 씨가 당신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어?”소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녀는 덜덜 입술을 떨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봐!”“잘 생각해봐. 왜 이 문제들이 일찍 터지지도, 늦게 터지지도 않고 하필 내 생일 날 터졌을까.”진아연은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다.“아직도 모르겠어?”진아연의 생일날 한이그룹의 제품들이 집단으로 문제가 생겼다.소원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몸은 만 개의 화살을 맞은 듯 모든 “상처”가 터지며 피가 흐르는 듯했다.“당신들이... 미리 계획한 거였어?!”소원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이 계약 건
자신의 순진함 때문에 소씨 집안이 이렇게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고 심지어 아버지가 감옥에 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소원의 머리는 찢어질 듯이 아팠다.그때 진아연이 얼굴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당신 아버지 몸 상태를 보니까 감옥에 들어가면 아마 거기서 죽을 것 같던데... 미리 수의를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두 벌 준비해야 할걸? 당신 엄마도 몸이 안 좋다고 들었거든. 그때 가서 허둥대지 않게 미리 준비해둬.”순간, 소원은 눈에 핏발이 서더니 이내 진아연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녀의 목을 졸랐다.“죽여버릴 거야!”지금 소원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진아연을 죽이는 것!소원의 머릿속은 증오로밖에 가득 차지 않았다!그들이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소씨 집안을 망가뜨리고 부모님에게까지 저주를 퍼부으니, 소원은 그들을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먼저 진아연, 다음엔 육경한이야!’자신의 이 한 목숨으로 두 악마의 목숨과 바꾼다면, 소원은 그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아...”‘젠장... 그냥 자포자기하게 만들려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 미쳐 날뛸 줄이야. 이러다 나 진짜 죽겠네!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진아연은 필사적으로 바닥을 두드렸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절망한 소원의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더욱더 짓밟아 놓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무슨 소리가 들려도 들어오지 말라고 미리 지시했던 것이 떠오르자 진아연은 그제야 후회막심했다.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진아연은 두 손을 필사적으로 흔들어 보지만 소원은 마치 사신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진아연의 목을 꽉 조르고 있었다.“진아연! 이 악마! 넌 죽어 마땅해! 그리고 안심해! 육경한도 너와 함께 보내줄 테니까, 두 사람 지옥에서 함께 벌 받아!”새빨개진 소원의 눈은 마치 악마로 변한 듯했다.‘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착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왜 나쁜 사람은 제멋대로 날뛰는 거야?
육경한이 방금 문을 열었을 때 소원이 진아연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그리고 소원도 직접 인정했다!이건 고의적인 상해이다.만약 진아연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면 소원은 분명히 감옥에 수감될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육경한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그는 진아연이 소원에게 화풀이를 하고 그냥 넘어갔으면 했다.현재 육경한은 마음이 한없이 혼란스러웠다. 소원을 감옥에 가는 게 자신이 직접 그녀를 괴롭히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소씨 집안의 나락은 육경한의 첫번째 목표이긴 했으나 아직 만족할 수는 없었다. 소원의 부모님은 여전히 잘 살아 있으니 말이다!육씨 집안에 일이 생겼을 때 그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었다. 지금 그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지만 그들을 다시 되살아오게 할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무시하고, 그녀가 위선적이고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라고 자신을 세뇌시켰다.게다가 육경한은 자신이 받은 고통에 비해 소원이 겪는 고통은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그때, 소원이 고개를 들더니 웃으며 말했다.“나더러 진아연한테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고?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거야?”지난번 그녀가 크루즈선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단지한이그룹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제 한이그룹도 망한 마당에 그녀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갑자기 진아연이 육경한의 팔을 꽉 잡더니 분노하며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도 스스로 인정했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그냥 가만히 두는 거예요! 전 그냥 소원 씨가 걱정돼서 보러 온 건데... 소원 씨는 저를 죽이고 경한 씨도 죽일 것이라고 말했어요! 빨리 이 미친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란 말이에요!”진아연의 위선적인 말이 소원은 역겨웠다.“하하하! 걱정돼서 왔다고? 걱정했다는 사람들이 서로 손 잡고 날 조롱하고 내 손으로 직접 한이 그룹을 파산시키게 하고 또 우리 부모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수의를 준비하라는 저주를 퍼부어? 마음씨가 아주 좋구먼 그래!”진아연은 안색이 변하
소종은 용머리 장식의 검은색 지팡이를 들고 들어왔다.이 지팡이는 특별히 맞춤 제작된 것으로 한눈에 봐도 귀해 보였다.육경한이 용머리 장식의 검은색 지팡이를 받자마자 휠체어를 버리고 벌떡 일어났다.그 지팡이를 든 육경한의 모습은 우아함이 돋보였다.진아연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역시 내 남자야. 지팡이마저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하다니!’이때 육경한이 소종에게 말했다.“아연이를 병원에 데려가서 철저히 검사해봐. 어디 한 곳도 놓치지 말고.”그러자 진아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경한 씨, 나랑 같이 안 가줄 거예요?”하지만 육경한은 그저 진아연의 머리를 어루만질 뿐이었다.“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넌 먼저 검사 잘 받고 가서 쉬고 있어.”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지팡이를 짚고 빠르게 나갔다.안색이 굳어지더니 진아연은 입술을 깨물며 분노했다.‘하하, 일이 있다고? 아까 그 말 듣고 그 여자가 위험하게 될까 봐 겁이 난 거겠지! 빌어먹을 년, 죽어 마땅할 년이야!’진아연은 악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다짐했다.‘반드시 널 빈털터리로 만든 후 제일 처량한 모습으로 죽게 만들거야!’...소원은 아버지의 병실 문 앞으로 돌진했다.작은 병실은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한때 그들 가족에게 아첨하며 지분을 요구하고, 울며 배당금을 구걸했던 친척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그들의 얼굴은 예전 아첨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아버지 소진용이 침대에 누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을 할 수 없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의 어머니 전미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친척들에게 빌고 있었다.“제발, 그만해요. 남편 지금 건강이 안 좋아요. 여기서 떠들지 말고 나가서 얘기하면 안 되겠어요?”그 순간 주변은 더욱 떠들썩해졌다.“집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병원에 누워서 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치료받을 자격도 없습니다!”“맞아요, 더 이상 돈 안 갚으면 우리가 쫓아내 버릴 거예요!”그리고 한 여성은 흥분해서 전미영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사람들은 다가오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은 다리 저는 남자라는 것을 보고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그때, 한 중년 남자가 옷이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소원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말했다.“빚을 갚지 못하겠으면 몸이라도 팔아야지, 안 그래? 아가씨 같은 미모라면 하루에 몇 명만 받아도 빚을 갚을 수 있을 거야...” 추잡한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검은 은빛이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쾅!무거운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지팡이의 끝부분이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에 내리꽂힌 것이다.그 은빛은 지팡이 끝에 박혀 있는 은으로 만든 장식이었다.“풉!”남자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네 개의 피 묻은 이를 뱉어냈다. 그러고는 고통에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것이 참혹한 모습이었다.‘다리를 절고 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더니... 이렇게 힘이 셌어?!’다들 육경한의 포스에 놀라 소원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었다.또각, 또각, 또각...육경한은 용머리 장식의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한 마디 뱉었다.“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말을 끝낸 뒤, 그는 살짝 입술을 씰룩이더니 큰 손으로 지팡이의 용머리 장식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남자를 향해 내리쳤다.순은으로 된 지팡이의 끝이 남자의 손바닥에 정확히 꽂혔다.“아아아아!!!”남자는 손이 부서질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코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알고 보니 남자가 겁에 질려 그만 바지에 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순간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뭐야? 당신 지금 우리 협박하는 거야? 빚 안 갚으려고?!”하지만 이내 육경한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 사람은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났다.육경한은 자신의 재킷으로 소원의 어깨에 덮어 몸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이 계획이 시작될 때부터 그는 매우 기뻐했어야 했다.하지만 즐겁기는커녕, 현재의 육경한은 그녀에 대한 끝없는 혐오감만 느낄 뿐이었다.방탕하고 변덕스럽고 여기저기 꼬리를 치고 다니는 소원의 모습에 육경한은 그녀를 철사로 묶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그렇게 하면 마음이 없다는 듯 언제든 떠나려고 하는 소원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대표님, 이만 가세요. 저희 소씨 집안은 이미 충분히 비참해졌습니다. 그러니 이 꼴을 보러 앞으로 직접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TV에서 볼 수 있을 거니까요!”소원은 매우 힘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의미 없어 보였다.하늘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직접 가족을 지옥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소원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그 타격이 크다 못해 소원은 이 세상을 혐오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사는 게 정말 힘드네... 하지만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야. 모든 게 다 마무리될 때까지는. 때가 되면 난 화창한 날을 골라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힐 거야.’“소원! 거기 멈춰!”육경한은 분노했다. 하지만 소원은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를 무시하는 것인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전미영이 응급실로 옮겨지자 소진용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간병인을 찾아야 했고 부모의 의료비를 내야 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간에 병원비는 미룰 수가 없었다.그때, 갑자기 손목을 잡힌 소원은 곧이어 분노에 이글이글 타는 육경한과 시선이 마주쳤다.“내가 멈추라고 했잖아!”“우리 약속은 끝났어!”소원은 육경한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잠시도 보기 싫을 정도로 그가 미웠다.하지만 다음 순간, 육경한은 그녀를 강제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자신도 믿기 어려운 말을 내뱉었다.“안 끝내도 돼.”하지만 그를 보는 소원의 눈빛에는 여전히 아
아니나 다를까 소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이미 망한 인생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죽음이 두려울 리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저항하지 않는 소원의 모습은 마치 죽어 말라붙은 물고기 같았다. 그러자 흥미가 사라진 육경한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너 손님 받겠다며, 그럼 지금부터 연습해. 잘하면 내가 돈도 줄 테니까.”뒤이어 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에 2000만 원! 내가 돈 넣어줄게.”짝!카드가 그녀의 얼굴에 찰싹 닿았다. 세게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뺨을 맞은 것보다 어쩐지 더욱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2000만 원...’소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주변 공기는 점점 더 희박해져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그가 원하는 것은 소원에게 모욕을 주고 짓밟는 것뿐이었다.그녀가 체면을 챙기려고 하면 할수록 육경한은 더욱 흥미를 느끼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어 했다.때문에 소원은 그럴 바엔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가 최대한 자신을 역겨워하게끔 만드는 게 나았다.순간, 소원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통이 크시네요, 대표님. 2000만 원이라... 아예 전에 것들도 싹 다 계산해주시는 게 어때요? 어차피 저를 속인 거였다면 우리의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요. 전에...”소원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다 헤기도 힘들어 머리가 아팠다.“대충 20억으로 계산해드릴게요. 예전에 진 빚들 돌려주지 않으시면 아무래도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겠네요.”그러자 육경한이 차가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20억 원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소원은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돈과 권력을 다 가진 우리 육경한 대표님께서 왜 그깟 빚 하나 갚는 거로 이러실까? 20억도 싸게 쳐준 거예요. 그걸 낼지 말지는 대표님 마음에 달렸습니다!”바닥에 누워있으면서 그녀는 바닥이 찬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무료로 얻을 수 있는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