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소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이미 망한 인생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죽음이 두려울 리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저항하지 않는 소원의 모습은 마치 죽어 말라붙은 물고기 같았다. 그러자 흥미가 사라진 육경한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너 손님 받겠다며, 그럼 지금부터 연습해. 잘하면 내가 돈도 줄 테니까.”뒤이어 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에 2000만 원! 내가 돈 넣어줄게.”짝!카드가 그녀의 얼굴에 찰싹 닿았다. 세게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뺨을 맞은 것보다 어쩐지 더욱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2000만 원...’소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주변 공기는 점점 더 희박해져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그가 원하는 것은 소원에게 모욕을 주고 짓밟는 것뿐이었다.그녀가 체면을 챙기려고 하면 할수록 육경한은 더욱 흥미를 느끼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어 했다.때문에 소원은 그럴 바엔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가 최대한 자신을 역겨워하게끔 만드는 게 나았다.순간, 소원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통이 크시네요, 대표님. 2000만 원이라... 아예 전에 것들도 싹 다 계산해주시는 게 어때요? 어차피 저를 속인 거였다면 우리의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요. 전에...”소원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다 헤기도 힘들어 머리가 아팠다.“대충 20억으로 계산해드릴게요. 예전에 진 빚들 돌려주지 않으시면 아무래도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겠네요.”그러자 육경한이 차가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20억 원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소원은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돈과 권력을 다 가진 우리 육경한 대표님께서 왜 그깟 빚 하나 갚는 거로 이러실까? 20억도 싸게 쳐준 거예요. 그걸 낼지 말지는 대표님 마음에 달렸습니다!”바닥에 누워있으면서 그녀는 바닥이 찬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무료로 얻을 수 있는
육경한의 체면을 지켜주고자 진아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안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움직임 소리를 그녀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이 빌어먹을 년이 또 경한 씨를 유혹하는 거야?! 심지어 이런 병원에서조차도? 발정 난 개가 따로 없구나, 아주.’방 안에서, 육경한은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소원을 만난 것 같이한 번 만지면 멈출 수가 없었다. 소원이 무슨 약이라도 되는 듯이 육경한은 그녀에게 중독되어 버린 것 같았다.그녀와 함께할 때만 육경한은 공허함을 채울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떠나려는 모습만 보이면 육경한은 이러한 행위로 소원을 굴복시키려고 했다!노크 소리가 계속되었고 진아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만약 계속 여기에 남는다면 그녀는 굴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진아연의 생일날, 육경한은 계획을 취소하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진아연이 미리 사람들을 매수해 이미 한이 그룹에 문제가 생긴 계약 건들을 전부 취소하고 환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녀가 엿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언론을 이용하여 대중에게 한이 그룹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렸다.엎질러진 물은 되돌릴 수 없었다.그 후로 육경한은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해져 진아연과 함께 있을 마음조차 없었다.나중에 심지어는 소원이 크루즈선에 못 올라오도록 막기까지 했다.이윽고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진아연은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소원 씨를 크루즈 선에 못 오르게 한 건 설마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거야? 내가 소원 씨를 괴롭힐까 봐?’이전에는 그냥 넘겼지만 이제 진아연은 확실히 그가 여전히 소원과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상을 벗어난 이러한 상황에 그녀는 여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에 휩싸였다.왜냐하면 육경한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오직 소원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나서라는 것밖에 없어서이니 말이다.어쩌면 육경한 자신조차도 몰랐을 수 있다. 자신이
육경한은 순간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수술 동의서? 수술이라니... 그렇게 심각한 건가? 그냥 조금 말랐을 뿐인데 그게 수술까지 할 정도라고? 웃기고 있네. 분명히 자기 입으로도 자기가 연약하게 생겼지만 몸은 건강하다고 했던 앤데...’육경한은 어두운 눈빛으로 간호사를 노려보았다.“그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예요?!”그의 매서운 눈빛에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불만스럽게 말했다.“보호자 분, 여기는 병원입니다. 저희는 절대 이런 일로 장난을 치지 않아요. 환자는 말기 위암이며 현재 악성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보호자님께서 사인하지 못하시겠다면 즉시 다른 보호자님께 연락하세요!”육경한의 머릿속에서는 ‘윙’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는 간호사의 손목을 꽉 쥐더니 입술까지 덜덜 떨며 물었다.“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시 말해봐요!”간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환자분이 위암 말기라고요, 못 알아들으셨어요?”이렇게 말하며 간호사는 육경한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너무 아프게 쥐고 있어서 말이다.꽈당!검은색의 용머리 장식의 검은색 지팡이가 땅에 넘어졌다!육경한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다행히 바닥에 넘어지지 않고 벽에 기댔다.그의 머릿속은 마치 탄약에 맞아 내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퍼져 갔다!온몸은 언제든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하하, 위암 말기... 분명히 내가 잘못 들은 걸거야! 그 여자가 어떻게 그런 병을 앓아?! 게다가 목숨이 위태로워? 웃기고 있네. 그렇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거북이보다도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그 여자가 어떻게 죽어?!’하지만 앞에 있는 간호사는 계속 말했다.“보호자 분, 지금 환자 상태가 매우 위급하고 언제든지 쇼크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1분이라도 더 지체하면 위험이 더 커져요. 정말 가족 맞으십니까?”머릿속에서 이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수술 동의서에는 명확히 적혀있었다.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통해서 수술 후
육경한은 일어서서 의사들이 소원이 눕힌 침대를 끌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육경한은 ‘쿵’하고 바닥에 쓰러졌다!가슴에서는 선홍빛 피가 새어 나와 코트를 적시고 있었다.“경한 씨!”진아연은 바닥에 넘어진 그를 안고 큰소리로 외쳤다.“의사 선생님!”곧 의사가 나와 그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그가 입은 검은색 셔츠를 자르고 보니,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셔츠에는 말라버린 핏덩이들이 잔뜩 붙어있었다.“장난하는 겁니까, 지금?!”의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이건 새로운 상처잖아요! 염증이 생겨서 이렇게 된 겁니다. 보아하니 몇 시간 동안 피를 흘린 것 같은데 살펴보지도 않고... 죽으려고 작정하신 것인지!”진아연은 원한이 가득 찬 눈빛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역시 남자는 믿을만한 게 아니야. 이번 생에 육경한의 아내가 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하더니... 그깟 평범한 여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육경한이 치료를 받고 안정이 되자 진아연은 소원의 병실로 가다 우연히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조금 전 그 보호자랑 같이 오신 분인가요?”“네, 저는 그 여자 환자의 제일 친한 친구입니다.”진아연은 슬픔에 잠긴 얼굴을 하고 물었다.“소원이... 진짜 위암 말기인가요? 수술은 가능할까요?”육경한이 쓰러지기 전에 그녀는 수술 동의서를 보았다. 보자마자 그녀는 하늘을 향해 웃고 싶었다.‘이 빌어먹을 여자가 드디어 죽는다니, 너무 잘됐잖아!’의사는 그녀가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위로를 건넸다.“환자분 상황이 꽤 심각합니다. 수술로 완치될 가능성은 매우 적어요. 저희는 가족분들께 말기 간호를 할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 그러면 환자를 너무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요.”진아연은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의사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여기 보니까 전에 입원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이번
소원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설마 너 이준혁한테서 빌려온 거야?!”그러면서 그녀는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나는 이거 필요 없어! 그러니까 빨리 가서 돌려줘. 나 때문에 너까지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이거 준혁 씨한테 빌린 거 아니야. 이 돈은 내가 대학 시절 그린 ‘그리움’이라는 그림을 팔고 번 거야.”“뭐라고? 너 그 그림 팔았어?”놀란 소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그림은 윤혜인이 꿈속에서 어머니를 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으로, 그녀가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이었다.당시 그녀는 그림의 일부를 찍어 해외 소셜 미디어에 올렸고 누군가가 그림을 사고 직접 작가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었다.소원이 윤혜인의 의견을 물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그 포스팅을 삭제했다.하지만 현재 윤혜인은 소원을 위해 그 그림을 팔아 버렸다.소원은 거부했다.“나 이 돈 받을 수 없어. 가서 그림 되찾아와.”“그냥 받아둬. 나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판 거야. 그래서 내 그림을 산 사람이 누구인지 정보를 알 수조차 없어. 지금 돌려받으려고 해도 이미 받을 수 없게 됐다고.”처음에 소원이 그 작품을 올렸을 때 상대방은 6억을 제안했다고 한다.하지만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가격은 바로 10억까지 뛰어올랐고 심지어 경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인터넷상에는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 많다. 윤혜인은 매우 신중하게 거래를 마치고 바로 계정을 삭제했다.소원이 여전히 돈을 받기를 거부하자 결국 윤혜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나 전에 그 집 팔았잖아. 이 돈으로 너희 집 산다고 치자. 그럼 나 앞으로는 집세 안 낼 거야!”“그거랑은 다르지. 우리 집은 6억에도 팔리지 않아, 겨우 4억 정도라면 모를까.”“말 섭섭하게 한다? 자꾸 이러면 네가 날 좋은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길 거야. 남은 돈은 내가 투자한다고 치면 되잖아. 손해 보면 방법 없는 거고 벌게 되면 나한테 네가 나한테 나눠주면 되지!”윤
윤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여기서 뭐해요?”그녀는 어젯밤 이미 충분히 자기 의사를 똑똑히 밝혔었다.때문에 이준혁처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왜, 내가 방해됐어?”남자가 이를 악물고 몇 마디 내뱉었다.‘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또 이렇게 불쾌해하는 거야...’하지만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희망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철저히 끝내는 것이 맞았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 정말 방해돼요. 제가 어제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 이준혁 씨?”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랑 재결합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한구운 때문이야?”윤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자꾸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않으시면 안 돼요?”그러자 이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하... 아까 보니까 되게 즐겁게 문자 주고받더라?”‘...혹시 아까 내가 문자 나누는 거 봤나?’하지만 그녀와 한구운은 그저 업무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이고 두 사람은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심지어 지난번 일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직접 해명한 적이 있다.아마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믿지 않았던 것 같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가능성이 없으니 윤혜인은 이준혁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해명할 의욕도 없었는지라 윤혜인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이준혁은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뒤에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돌려세워 문에 밀어붙였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윤혜인의 입술을 덮쳤다.“웁...”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밀쳐낼 새도 없이 그의 혀는 이미 그녀의 입안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마치 못다 한 욕구를 해소하려는 듯 거센 키스가 이어졌다.윤혜인의 입은 온통 그의 숨결로 가득 찼다. 이런 강제적인 키스가 그녀는 매우 불쾌했다.그래서 강하게
윤혜인은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조금 촉촉이 젖어 들었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열 번을 말해도 똑같아요...”과거의 여러 가지 일들이나 이준혁 부모님의 반대 등... 모두가 그녀에게 이준혁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럼 하지 마.”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윤혜인의 얼굴을 감싸더니 그녀의 눈물에 강압적으로 입을 맞췄다.“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까.”윤혜인은 여전히 몸부림치려 했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아주 꼭 껴안았다. 너무 꽉 껴안다 못해 그녀를 자신의 몸속에 녹여 넣으려는 것 같았다.그가 말했다.“알아, 네가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닐 거라는 거. 그렇게 빨리 거절하지 말고, 잘 생각한 다음에 나한테 말해줘, 응?”그녀를 껴안는 이준혁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자존심이 강한 그가 현재 모든 주도권을 이 여자에게 넘겨버렸다.그는 자신이 너무 비굴해졌다고 느꼈다. 지금 윤혜인이 단 한마디만 뱉어도 그는 무너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이준혁이 떠난 후, 윤혜인은 문을 열고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다시는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스스로 다짐했지만, 이준혁과 가까워지기만 하면 마음속 깊이 자리한 뭔지 모를 감정이 꿈틀거렸다.충분히 단호하지 못한 것 같아 후회하면서도 그녀는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자신이 깊이 빠져버릴까 봐, 떨어져 내릴까 봐,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까 봐......다음 날.윤혜인은 병원에 있는 소원에게 국을 가져다주러 갔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눈 밑의 다크서클을 가리기 위해 옅게 화장을 했다.막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윤혜인은 안에서 들려오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었다.“태아에 관한 일은 오직 환자분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신중히 생각하시길 바라요.”윤혜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의사가 나간 후,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소원을 마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소원아, 너... 임신했어
하지만 상대방은 양보하지 않았다. 당시 한구운은 투자 은행에서 그의 기를 적잖이 꺾어놨었다. 때문에 방혁수는 이 기회를 빌어 한구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앞으로 나와서는 두 사람의 길을 막으며 말했다.“뭐야, 여자친구랑 식사하는 거야?”윤혜인은 반박하려 하자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그녀에게로 돌아갔다.“이쁜이, 그거 알아? 이 사람 회사에서 위반 행위로 해고되었었어. AI한테 해고됐다는 건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란 말이지. 국내의 어떤 투자 은행에서도 얘를 다시 뽑지 않을거야. 이런 쓰레기랑 미래가 있을 것 같아? 그러니 나를 따라오는 건 어때?”한구운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그는 늘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말이다.그는 윤혜인을 자신의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말했다.“방혁수, 너 말 좀 조심해. 내 친구 성가시게 하지 말고.”그러자 방혁수가 헤벌쭉하고 웃는 것이다.“이 이쁜이가 반드시 너를 따를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넌 지금 직장도 없잖아. 이쁜이 나랑 가자. 오빠가 멋진 거 보여주고 맛있는 거 먹게 해줄게. 어때? 내 카드 다 너한테 맡길게.”한구운은 방혁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윤혜인을 끌어당겼다.“무시해요. 우리 이만 갑시다.”표면상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윤혜인은 한구운의 팔이 굳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가 왜 해고당했는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구운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써도 절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방혁수 같은 인간쓰레기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니, 윤혜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물었다.“방 대표님이시죠?”“음, 응, 맞아.”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방혁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생각 다 한거야, 이쁜이? 가자, 가자. 오빠 따라와.”그가 내민 손을 보자 윤혜인은 역겨움을 느꼈다.“교양이 있으면 어디 가서든 존중을 받습니다. 다음에 외출하실 때는 꼭 함께 챙기시길 바라요.”방혁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가, 비로소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