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나도 끼워줘요.”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여기 다른 메이컵을 한 여자들보다 백 배는 예뻤기 때문이다.특히 밝은 눈동자는 순수해 보였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보기 드문 훌륭한 여자였다.그들은 듣기 거북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지만, 이준혁은 못 들은 척하며 그들이 모욕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소원, 여기 네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소원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육경한을 보았다.육경한은 소원의 팔목을 낚아채 밖으로 향했다. 소원이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몸부림은 그의 힘에 비해 너무 보잘것 없었다.육경한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약혼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육경한이 노골적으로 윤혜인 옆에 서있는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윤혜인이 그런 류라고 더욱 확신했다.한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친구분은 이미 찜 당했으니 아가씨는 저랑 놀아요. 얼마든지 돈을 드릴게.”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불평했다.“누구 맘대로! 아가씨 이 자식 말은 듣지 말아요. 제가 2배로 줄 테니 저랑 놀아요.”윤혜인은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꺼져!”남자의 손에 꽂힌 이준혁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화가 난 남자는 손을 들어 올렸고 윤혜인을 때리려 했다. 그때 임세희가 막아서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남자는 그제야 조금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벌했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기세였다.임세희는 남자의 힘을 빌려 이 몹쓸 년을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아직 윤혜인을 대하는 이준혁의 태도를 확신할 수 없기에 자칫 잘못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는 착한 역할을 해야 한다.윤혜인은 고집스럽게 이준혁을 보고 있었다.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고 코끝이 찡해진다.“어젯밤에 나와 한 약속은 잊었어요?”마침내, 이준혁이 그녀를
남자는 말하면서도 조금 양심에 찔렸다. 방금 그녀는 역대급이긴 했다. 적어도 그는 쌩얼이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었다.이준혁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당신이 안소주야?”오늘 파티에 온 사람들은 모두 이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었다.하여 자신에 대해 묻는 것에 안소주는 감격 되어 하마터면 무릎이라도 꿇을 뻔했다.그는 속으로 자신이 떤 아부가 적절했다고 스스로를 긍정하고 있었다.그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성은 안 씨 이고 안소주라고 해요. 제 아버지께서는 안영제약의 대표세요.”말을 마친 그는 손을 뻗어 존경을 표하며 이준혁에 악수를 청했다.이준혁은 남자의 손목을 잡고 힘껏 비틀었다.으드득-뼈가 부러졌다.남자는 손목을 감싸쥐며 바닥에 쓰러졌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앞으로 다가간 이준혁은 남자의 손을 지그시 짓밟았다.안소주의 처참한 비명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이준혁은 차가운 눈으로 지시했다.“끌어내. 다시는 이 면상을 보고 싶지 않아.”보디가드 2명이 다가와 남자를 질질 끌로 나갔다.사람들은 자신이 안소주처럼 저 대단한 분을 건드리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하지만 안소주가 어느 부분에서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임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안소주의 그 손은 방금 윤혜인의 손목을 잡았었다.이것이 이준혁이 남자의 손을 망가뜨린 이유였다.그녀의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자신이 힘들게 공을 들여 친자확인서까지 조작했지만, 이준혁의 마음속에서 그녀를 완전히 아웃시키지 못했다.도대체 어떻게 매료시킨 거지?...밖으로 나온 윤혜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방금 일어난 일은 모두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소원이 생각난 윤혜인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소원이 미안해하며 일이 생겨 먼저 돌아간다며 그녀더러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다.소원이에게 아무 일도 없다면 된 것이다.전화를 끊은 윤
그 남자를 한바탕 혼낸 이준혁은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하지만 한발 앞선 임세희가 그를 붙잡았다. 그의 팔에 매달리고 몸을 밀착시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오빠,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안소주의 일로 분위기는 싸해졌다. 그래서 마침 둘의 모습을 본 어떤 이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외쳤다.“키스해.”그의 말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모두들 그들에게 다가가며 외쳤다.“키스해! 키스해!”임세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곧 그녀의 뜻대로 전개될 것이다.그녀의 목적은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것이었다. 필경 이준혁의 여자 친구 자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녀만 차지했었고 그녀에게도 임씨 가문에도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이쯤 되면 이준혁도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것이라고 임세희는 생각했다.아니라 해도 정도껏 비위를 맞춰줄 거라 여긴 임세희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거의 닿을 뻔한 찰나, 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경고했다.“임세희, 정도껏 해.”오늘 여기에 온 그는 그녀가 생일파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까발리지 않고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임세희는 입술을 깨물며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이 정도도 못 해주는 거야? 그저 가벼운 입맞춤도 안 돼?”이준혁의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나에게 와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와이프’란 세글자가 임세희의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꽉 쥔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어떻게! 그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바람 핀 년인데 어떻게 와이프자격이 있는 거야!이건 그녀만 들을 수 있는 호칭이다! 반드시 그녀야만 한다!이준혁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리를 떠났다.한순간, 정적이 흘렀다.임세희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해명했다.“오빠가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요. 우리는 계속 해요.”파티는 다시 열기를 되찾았다.몸을 돌린 임세희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 얼굴이 사악하게 일그러졌
차 안에서는 술 냄새가 조금 났다. 보아하니 방금 술은 마신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맡겼다.그때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렸다.소원이었고 집에 도착했는지 묻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할까 봐 윤혜인은 도착했다고 답장했다.소원은 영상 하나를 보내왔고 그 속에는 그들이 떠난 후 이준혁과 임세희에게 키스하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담겨있었다.영상은 짧았고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닿기 직전에 영상은 갑자기 끊겼다. [혜인아, 그 사람과 잘 지내고 있단 거 거짓말이었지? 네가 그 사람의 와이픈데 왜 그렇게 널 대하는 거야?]영상 속 남자와 여자는 너무 잘 어울렸다.뚝뚝-눈물이 휴대폰 액정에 떨어졌다. 그녀가 급히 눈물을 훔쳤지만 또다시 떨어졌다.그렇게 휴대폰은 눈물로 얼룩졌다.심장이 또다시 갈기 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그녀는 진짜 멍청했다.항상 그의 사소한 부분에 대뜸 흔들린다.그렇게 매번 웃음거리로 전락하였다.그녀는 이제 그의 맹세 따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이신우는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넸다.그것을 건네받은 윤혜인은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았다.그녀의 작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강한척하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했다.눈물을 닦고 난 후에야 그것이 손수건이란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더러워진 상태로 돌려줄 수 없어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차는 개인 별장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린 이신우는 손을 내밀며 그녀를 힐끔보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문에 들어서자, 40대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오며 이신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여자친구야?”윤혜인이 대답하기 전에 이신우가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다쳐서 처치 부탁할게요.”고개를 들어 윤혜인을 본 여자는 당황한 듯 말했다.“소아?”윤혜인은 순간 멈칫했다. 여자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안경을 하나 맞춰야겠어.”여자는 윤혜인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구급상자에서 약통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세심하게 닦아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
별장은 조용했다.아줌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 시간에 취침하지 않으시는단 말이다.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짐을 챙겼다.방안은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상태라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녀도 불을 켜지 않았다.옷장을 연 그녀는 전에 넣어두었던 트렁크가 보이지 않았다.딸깍-불이 켜졌다.이준혁은 터벅터벅 그녀에게 다가오며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뭘 찾는 거야?”깜짝 놀란 윤혜인은 그가 거기에 서있을 줄은 몰랐다.임세희의 생일 파티는 어쩌고 여기에 있는가?”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든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그녀가 물었다.“아줌마는요?”이준혁은 대답대신 반문했다.“뭘 찾아?”“트렁크요.”“가려고?”그의 말투는 폭풍우가 휘몰치기전처럼 잔잔했지만 너무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윤혜인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차갑게 말했다.“이미 결정난 거 아니에요?”임세희의 생일 파티에서 그가 한 말은 이미 그녀를 난처하게 하고도 남았다.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그녀도 그렇게 무신경하지는 않았으니까.이준혁은 아무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윤혜인은 울어도 보았으니 이제 훨씬 차분해졌다. 감정적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예전에 그녀는 이준혁을 포기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한순간의 문제 같아 보인다.그는 항상 상처를 주고 달콤함으로 그녀를 달랬다. 그것이 너무 반복되다보니 많이 지쳤다.아무말 없는 이준혁에 윤혜인이 계속해서 말했다.“생각이 정리 된것 같으니 좋게 끝내요. 우리. 난 예전과 같은 태도예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지만 아이는 절대 당신에게 줄 수 없어요.”어느 부분이 그를 자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고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그는 무섭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들어 올려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다음 남자를 이미 찾은 거야?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말해! 이신우야?”왜 또 이신우를 걸고넘어지는지 윤혜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녀와 이신우가 만난 횟수는 한 손으로도
윤혜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음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됐어. 선택할 필요 없어. 다른 놈이 사용했던 거 나도 역겨워.”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이준혁은 그녀의 앞에 서서 정장 바지로 단단히 감싸고 있던 긴 다리를 갈라서 그녀의 몸 양쪽에 옮기고 몸을 구부려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을 벌리도록 강요했다.윤혜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미쳤어요?... 저리 가!”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잡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윤혜인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건드리면 남자구실을 못 하게 할 거예요!”가까이에 있는 이준혁의 얼굴에서 짙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살기가 어렸다.“이 아이를 갖고 싶지 않으면 어디 마음대로 해 봐.”간단한 그의 한마디가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윤혜인은 아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다.“임세희에게도 똑같이 이래요?”이준혁의 얼굴에는 잔인함과 무자비함이 가득했다.“잠자리용으로 널 데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 너의 위치를 잘 알아 둬.”남자는 화가 나면 아무 도리도 통하지 않았고 무슨 말이든 내뱉었다.그는 차갑게 몸을 부딪쳐 오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와도 비교하지 마. 넌 그럴 자격이 없어.”윤혜인은 비명을 질렀다. 얼굴 전체가 이상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읍...켁...켁...”그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이준혁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다른 사람을 이렇게 모신 적 없나 보네? 너한테 너무 오랫동안 속았으니까, 너의 처음을 받아내야 하지 않겠어?”윤혜인은 머릿속이 윙윙 울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반항도 할 수 없었다.그저 기계적인 반응만 있었을 뿐...이준혁은 멈추지 않았다. 순간, 그는 온몸의 피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절정으로 치달았다.그의 손은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었다. 그녀의
약을 건네받은 이준혁은 한 웅큼 집어삼키고 주훈이 가져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김성훈은 계속 병실을 쳐다보는 이준혁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네가 아프기 시작하면 혜인 씨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마. 그녀의 작은 몸이 너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시간 나면 치료를 받아. 통제력을 잃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후에 후회하지 말고.”김성훈은 잘 돌려서 타일렀다.조울증은 심하기도 하고 경하기도 해서 자제력이 있다고 해도 사고는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보통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자제력이 무너진다.이준혁은 듣고 있는 듯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알았어.”김성훈이 다시 물었다.“그리고 방금 인스타에 네가 세희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줬다며 좋은 일이 생길 거라던데 어떻게 된 거야?”이준혁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무심하게 말했다.“멋대로 올린 거야.”“그럼, 이대로 내버려둘 거야? 혜인 씨가 상처받으면 어떡해?”상처?이준혁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그 여자는 상처 따위 받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칼을 들고 그의 심장을 찌를 줄만 안다. 게다가 아주 치명적으로.검사 결과가 빨리 나왔다.프로게스테론이 낮고 저혈당에 경미한 출혈이 있어 유산기가 있으므로 입원해서 태아를 보호해야 했다.김성훈은 깜짝 놀랐다.“임신한 사실을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어?”이준혁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병방으로 향했다.수액을 맞고 있는 그녀는 통증이 완화되어 훨씬 차분한 모습으로 잠자고 있었다.이준혁은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밤은 평화로웠다.날이 밝아 눈을 뜬 윤혜인은 옆 침대에서 자는 이준혁을 보았다.남자는 뻣뻣한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고 길고 곧은 다리는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윤혜인은 어제 밤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침대 난간을 잡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체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때 강한 손이 그녀를 잡고 일으켜 세
윤혜인은 의아해했다.그녀가 먹든 안 먹든 그가 무슨 상관인가?게다가 그녀가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여기에 있어서 밥이 넘어가지 않을 뿐이다.“당신이 나가...”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혀버렸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짓눌렀고 그녀의 아픔을 배려한 듯한 노력이 보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혜인은 욕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역겨워서 발버둥을 쳤고 그 바람에 죽을 그에게 쏟았다.이준혁은 뜨거운 죽에 데였다. 그는 입술을 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또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인내하며 다시 새것을 꺼냈다.“먹어. 아니면 방금전 방법으로 먹일 거야.”윤혜인은 그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눈에 그의 모든 행동은 그저 환자였다.신경 쓰지 말자.그녀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그가 여기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나가준다면야.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먹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어디가 찢어졌는지 스치기만 해도 쓰라렸다.이준혁이 없었더라면 아파서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은 그저 역겨운 법이다.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지 않잖아?이준혁은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그가 옷을 가지러 가는 것을 본 윤혜인은 어리둥절했다. 옷장까지 준비했다고? 아예 병원에서 지낼 셈인가?식사가 끝난 후, 간병인이 깨끗하게 청소했다.그녀가 누워서 쉬고 있는데 이준혁이 갑자기 그녀의 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윤혜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쳐냈다.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윤혜인은 그를 경계했다.“아무리 도구라고 해도 휴식 시간이 있어야지 않겠어요?”그녀의 신체가 좋지 않았다면 어젯밤의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얼굴색이 변한 이준혁은 휴지를 뽑아 입을 닦으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건넸다.하지만 윤혜인은 받지 않았다. 그녀는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