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 안긴 윤혜인은 종이장 마냥 가벼웠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순간 긴장한 이준혁은 겁이 나서 손바닥에 힘조차 주지 못했다.“왜 그래? 어디 아파?”윤혜인은 그의 손목을 잡더니 힘겹게 말을 꺼내며 애원했다.“배… 배가 너무 아파요… 제발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말을 하던 윤혜인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이준혁은 바로 그녀를 안아 들더니 병원안으로 들어갔다.“이준혁 씨.”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한구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 좀 잘 지켜줘요.”걸음을 멈춘 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대꾸했다.“당신 걱정이나 해요. 다시 한번 내 여자를 넘보면 그땐 손 하나 부러트리는 걸로 안 끝납니다.”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기에 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이내 이준혁은 병원안으로 들어갔고 뒤따라가던 경호원은 상처투성이가 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그들은 죽일 각오로 때렸는데 한구운은 한쪽 팔이 빠진 것 말고는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다니. 경호원은 한구운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숨긴 게 아닌가 의심됐다.하지만 한구운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한구운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운전할 사람 한 명 보내. 그리고 그 사람한테 얘기해. 내가 그 일을 동의한다고.”전화를 끊은 한구운은 다리를 쫙 뻗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약점이 생긴 남자는 휘두르기 너무 쉽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준혁이 벌써 저렇게 미쳐 날뛰다니. 그럼 나중에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르면 과연 이준혁은 어떻게 될까?어두운 불빛속에 눈을 감고 있던 한구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생각만 해도 너무 흥미진진했다.한편, 병원에서.응급실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보며 주치의가 이준혁에게 물었다.“이준혁 씨, 몸에 부작용이 가장 적은 약물로 낙태를 진행할까요?”“일단 어른부터 살려요. 어른에게 문제없으면 그때…”말을 하던 이준혁
흠칫하던 윤혜인이 되물었다.“뭐가 아니에요?”이때,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304호 윤혜인 환자분 약물 교체해 드릴게요.”들어오던 간호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 놀라다가 이내 빠르게 달려와 이준혁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환자분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몰라요? 그렇게 자극하면 어떡해요! 얼굴도 반반하게 생기신 분이 여자한테 손찌검을 해요?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를 겁니다!”말을 하던 간호사는 살짝 겁이 났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기세 등등한 모습에 고고한 자태까지 자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때리는 걸 보고도 방관할 수는 없다. 환자가 겨우 깨어났는데 이렇게까지 폭력을 쓰는 걸 보면 집에서도 주먹을 자주 휘두르는 게 분명하다.간호사는 자신의 딸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윤혜인을 보며 순간 연민이 두려움을 이겨버렸다.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환자분 괴롭히지 말고 당장 병실에서 나가요!”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진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화가 잔뜩 났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병실을 나섰다.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혜인 손등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이때, 이준혁의 말이 마음에 걸린 윤혜인은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제 뱃속의 아이는…”간호사는 알코올 솜으로 손등을 닦으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문제없습니다. 다만 환자분 몸 자체에 영양가가 많이 없어서 아이의 발육이 조금 늦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환자분께 영양액을 수액하는 겁니다.”윤혜인은 간호사의 손을 덥석 잡더니 흥분한 듯 다시 물었다.“그럼 제 뱃속의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씀인가요?”“그럼요.”간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며 대답했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윤혜인은 자신의 귀가 믿어지지 않았다.이때, 간호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남편분이 참 너무하네요. 아침에 젊은 간호사들이 남편분이 잘생기고 아내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이준혁은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죽을 받아먹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언제 이혼할 건지 물을 줄은 몰랐다.그는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코웃음 쳤다.“배부르니까 이제 다시 싸울 힘이 생긴 거야?”“이준혁 씨, 이런 싸움이 우리에게 아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진 만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우린 이런 무의미한 싸움과 의심을 계속 하기보다는 평화롭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나아요.”“평화롭고 깔끔하게 헤어지자고?”이준혁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곱씹자 윤혜인은 희망이라도 본 듯 얼른 말을 보탰다.“준혁 씨가 이혼을 동의하기만 하면 어떤 조건을 걸든 전 상관없어요.”뱃속의 아이는 이제 윤혜인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고 위로였기에 그녀는 절대 이 아이를 잃을 수 없다. 만약 이준혁이 정말 아이를 빼앗으려고 마음먹으면 그녀는 이선 그룹의 법무팀을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다.그럼 그녀는 부양권을 받을 수 없다.이준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윤혜인, 이렇게까지 나를 벗어나고 싶은 거야? 한구운 그 남자에게 가고 싶어?”윤혜인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배와 상관이 없다는 말을 입이 아프게 반복했는데 이준혁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그냥 그가 생각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은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덥석 잡더니 차갑게 말했다.“윤혜인, 너 너무 단순한 거 아니야? 내가 네 소원대로 이뤄지게 내버려둘 거 같아?”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은 울먹이면서 물었다.“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어떻게 하길 바라냐고?”차갑게 코웃음을 치던 이준혁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넌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돼. 괴롭더라도 참아.”윤혜인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무력하게 말했다.“서
기껏 보러 왔는데 윤혜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자 이준혁은 또다시 화가 났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불을 홱 거둔 뒤 침대위로 올라갔고 깜짝 놀란 윤혜인은 굳어버린 표정으로 물었다.“왜 올라와요?”“그럼? 설마 내가 어젯밤에 침대 곁에 계속 앉아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이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윤혜인은 거부감이 확 들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렇게까지 감정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같은 침대에 눕는다는 건 너무 불편했다.침대에는 어느새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찼다.“씻었어요?”이준혁은 윤혜인의 물음에 흠칫했다. 병실 욕실은 너무 불편했기에 그는 집에서 씻고 왔다.윤혜인 곁으로 슬쩍 다가간 이준혁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냄새 맡아볼래?”너무 가까이 붙어있은 탓에 윤혜인은 향기를 정확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씻고 온 게 분명하다. 이 남자 몸에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이때, 이준혁의 뜨거운 입김이 윤혜인의 귓가에 쏟아졌고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병실 침대에서 야릇한 짓을 했던 게 떠올라서 어느새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좀 옆으로 가면 안 돼요?”병실 침대가 작은 사이즈는 아닌데 이준혁이 올라오니 왠지 어린이 침대처럼 작게 느껴졌다.“안 돼.”이준혁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기에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저 내일…”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일 너랑 같이 외할머니 보러 갈 거야.”윤혜인은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이준혁이 언제부터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보기 시작한 거지?내일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7일째 되는 날이기에 윤혜인은 외할머니를 보러 가고 싶었다.그런데 이준혁도 같이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침묵이 흐르던 그때, 이준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외할머니 일은 내가 잘못한 게 맞아.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돌아왔을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이 다시 한번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준혁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어떻게 된 일이에요?”이준혁이 다급하게 묻자 임씨 아주머니는 엉엉 울면서 대답했다.“아가씨가 일어나자마자 어지럽다고 하시더니 계단을 내려올 때 정신을 잃고 굴러 떨어졌어요.”“구급차는 불렀어요?”“네.”이내 차량 스피커로 임세희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흑…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다리고 너무 아프고… 준혁 오빠 어디 있어요? 나 준혁 오빠 보고 싶어요…”혀 짧은 임세희의 목소리에 윤혜인은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으며 속이 울렁거렸다.이준혁처럼 여자를 많이 겪어보지 않은 남자만 이 사실을 모르고 이런 수법에 번번히 넘어갈 것이다.“어느 병원이에요?”이준혁의 물음에 윤혜인은 자신이 이 차안에 계속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상대방에게 쫓겨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내려가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에 차문을 연 윤혜인은 길거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핸드폰이 망가진 관계로 윤혜인은 기차표를 예매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갈 생각이었다.이때, 뒤에 서있던 고급 외제차가 거대한 엔진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었고 그 모습에 윤혜인은 씁쓸하게 웃었다.역시 그녀의 추측대로 버림을 받은 것이다.임세희 이름 세자는 그녀가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지만 이미 여러 번 버림을 받은 덕분에 이제는 큰 감흥도 없었으며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이내 윤혜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췄고 윤혜인은 자연스럽게 차문을 열고 택시에 타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택시 뒤에서 귀를 자극하는 경적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에 떠났던 고급 외제차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차량 앞 유리창을 통해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창문을 내리더니 윤혜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리와.”멍하니 서있던 윤혜인 뒤로 다른 손님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재촉했다.“저기요, 타실 거예요 말 거예요? 안
한편, 병원에서.임세희는 병실 침대에 기대서 실실 웃으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그녀는 일부러 무릎과 손바닥에 찰과상까지 만들었다.많이 아프긴 하지만 윤혜인 그 계집애를 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임세희가 아침 일찍 이준혁이 윤혜인과 함께 그녀 외할머니를 보러 마을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녀는 절대 윤혜인 뜻대로 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이때, 병실 문 앞에서 복도를 지켜보고 있던 임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가씨, 오고 계십니다.”임세희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내려놓은 채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준혁의 비서 송휘재가 병실에 들어서자 임씨 아주머니는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휘재 씨, 준혁 도련님은요?”송휘재가 헛기침을 살짝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대표님은 지금 많이 바쁘셔서 저에게 임세희 씨를 보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누워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언성을 높였다.“뭐라고?”조금 전의 말을 다시 반복한 송휘재는 마지막에 말을 조금 보탰다.“대표님이 임세희 씨에게 최고의 의사를 붙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임세희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도 이준혁이 대충 비서만 보낼 줄은 몰랐다.임세희는 곁에 놓인 컵을 들어 송휘재에게 던지더니 소리를 질렀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준혁 오빠를 데려왔어야지!”재빨리 피한 송휘재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대표님의 결정을 제가 좌우지할 수는 없습니다.”이때, 임씨 아주머니가 중재에 나섰다.“휘재 씨,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저희 아가씨가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아주머니, 저놈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저 버러지 같은 놈은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자식이에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송휘재가 말했다.“맞아요. 전 임세
임세희의 부탁을 들은 송휘재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녀를 홱 밀쳐냈다.“대표님 스케줄을 알아내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부탁은 절대 못해요. 그러다가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예요.”더군다나 송휘재는 윤혜인의 가르침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 윤혜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이준혁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일일이 알려줬기에 그가 이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임세희가 지금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짓을 시키다니. 그는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절대 윤혜인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잔뜩 흥분해 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화가 나서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고 송휘재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빨간 손자국이 생겼다.“왜? 감옥 가고 싶어?”임세희의 말에 송휘재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가족들의 유일한 희망이기에 절대 감옥에 갈 수는 없다.“한가지 부탁만 들어줄게요.”송휘재가 덜덜 떨면서 말하자 임세희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 이 구렁텅이에 빠져놓고 쉽게 발을 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꿈도 참 야무지네.임세희는 송휘재 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를 꼬셨다.“휘재 오빠, 나 아직 만족 못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얼른…”말을 하던 임세희는 차오르는 흥분에 얼굴까지 일그러졌고 눈빛에는 원망과 독기로 가득했다.나쁜 계집애, 넌 이제 곧 내연녀 타이틀을 달고 평생을 살게 될 거야.한편, 인하 마을에서.마을에 도착한 윤혜인은 꽃집에서 하얀 국화꽃을 주문한 뒤 떡집에 가서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떡까지 구매했다.떡집 사장님은 바로 윤혜인을 알아보았다. 사장님은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가 인상이 깊었다.“아가씨, 지금 막 나온 떡이에요. 가래떡도 한 팩 줄 테니 먹어봐요. 이번에는 절대 울면서 먹지 말고.”사장님은 떡을 챙겨주며 허허 웃었고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카드 결제요.”이준혁이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고집을 부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여기서 잘 거예요. 제가 잔다고 했지 준혁 씨에게 자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그녀는 이곳에 어렸을 때의 즐거움 추억들이 많았다. 이준혁은 이곳을 누추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윤혜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건 안 돼. 여긴 습기가 너무 심각하고 세균들도 많아. 넌 지금 임신 상태…”윤혜인은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참다못해 그의 말을 끊었다.“준혁 씨, 이럴 필요 없어요.”찬물을 확 끼얹은 윤혜인을 보며 이준혁이 실눈을 뜬 채 물었다.“내가 어쨌는데?”“아이를 신경 쓰는 척하지 않아도 돼요.”“내가 신경 쓰는 척한다고?”표정이 살짝 변한 이준혁은 가까스로 차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듯했다.“아니에요?”윤혜인이 되물었다.그는 그녀 뱃속의 아이가 원망스럽고 싫어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했던 사람이다. 뱃속의 아이가 그의 아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전혀 믿지 않았으면서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일 필요는 전혀 없다.이준혁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며 억지로 화를 눌렀다.“윤혜인, 괜히 시비 걸지 마.”그는 그녀와 싸우기 위해 몇 백 킬로미터를 달려 이곳으로 온 건 아니다. 한편, 윤혜인은 저택에서 하루 지내고 싶다는 게 왜 이준혁에게는 시비로 들리는건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모든 걸 이준혁의 뜻대로 해야 할까?뱃속의 아이를 살리고 없애는 것조차 그의 뜻대로 해야 한다니. 그녀는 이렇게 구속받는 인생이 너무 지긋지긋했다.“이준혁 씨, 대체 누가 시비를 거는 건데요? 시간이 그렇게 많으면 계단에서 떨어진 애인이나 보러 가요. 어차피 준혁 씨는 그 여자가 하는 연기도 좋아하잖아요. 이곳에서 괜한 소리 듣지 말고 가요.”윤혜인의 말에 이준혁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네 그 잘난 선배에게 고자질하려고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거 아니야?”“좋을 대로 생각해요.”윤혜인은 어차피 믿지도 않은 이준혁에게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반대로 화가 잔뜩 치밀어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