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도움도 받지 말고 폭우속에서 죽을 때까지 서있으라는 건가?“그러니까 네 말은 저자가 네가 임신한 걸 알고 네 남편인 척했던 게 다 오해라는 거야?”이준혁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꼬았다. 윤혜인은 그런 이준혁을 보며 그가 전혀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이준혁 씨, 이 모든 건 처음부터 오해였어요. 선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믿지 않을 뿐이에요.”씁쓸하게 웃던 윤혜인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 말을 한 사람이 임세희 씨였다면 당신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믿었겠죠.”임세희가 언급되자 이준혁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여기서 세희가 왜 나와?”밤은 깊었고 바람도 차가웠다. 윤혜인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언제든지 날아갈 잎새 같았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냥 궁금해서요. 왜 이준혁 씨는 임세희 씨를 그렇게 굳게 믿고 있으면서 내 말은 한마디도 믿어주지 않는 건지. 2년이에요. 이준혁 씨, 2년이라는 시간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엔 부족해요?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 더러운 사람이에요?”실망 가득한 윤혜인의 목소리에 이준혁은 가슴에 뭔가 박힌 듯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이준혁도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상황에서 만약 상대방이 윤혜인이 아닌 임세희였다면 그는 그녀를 위해 혼수까지 챙겨줬을 것이다.하지만 윤혜인에 대해서만은 그럴 수가 없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몰래 보는 것만으로도 이준혁은 그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이 순간, 이준혁은 설마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그는 자신이 평생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살게 될 줄 알았다.한편, 눈앞에 있는 이준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윤혜인은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생기지 않았다.지금까지 벌어진 일들로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그녀가 바람을 피워서 창피하다고 생각된 것뿐이다. 윤혜
품에 안긴 윤혜인은 종이장 마냥 가벼웠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순간 긴장한 이준혁은 겁이 나서 손바닥에 힘조차 주지 못했다.“왜 그래? 어디 아파?”윤혜인은 그의 손목을 잡더니 힘겹게 말을 꺼내며 애원했다.“배… 배가 너무 아파요… 제발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말을 하던 윤혜인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이준혁은 바로 그녀를 안아 들더니 병원안으로 들어갔다.“이준혁 씨.”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한구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 좀 잘 지켜줘요.”걸음을 멈춘 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대꾸했다.“당신 걱정이나 해요. 다시 한번 내 여자를 넘보면 그땐 손 하나 부러트리는 걸로 안 끝납니다.”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기에 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이내 이준혁은 병원안으로 들어갔고 뒤따라가던 경호원은 상처투성이가 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그들은 죽일 각오로 때렸는데 한구운은 한쪽 팔이 빠진 것 말고는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다니. 경호원은 한구운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숨긴 게 아닌가 의심됐다.하지만 한구운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한구운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운전할 사람 한 명 보내. 그리고 그 사람한테 얘기해. 내가 그 일을 동의한다고.”전화를 끊은 한구운은 다리를 쫙 뻗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약점이 생긴 남자는 휘두르기 너무 쉽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준혁이 벌써 저렇게 미쳐 날뛰다니. 그럼 나중에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르면 과연 이준혁은 어떻게 될까?어두운 불빛속에 눈을 감고 있던 한구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생각만 해도 너무 흥미진진했다.한편, 병원에서.응급실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보며 주치의가 이준혁에게 물었다.“이준혁 씨, 몸에 부작용이 가장 적은 약물로 낙태를 진행할까요?”“일단 어른부터 살려요. 어른에게 문제없으면 그때…”말을 하던 이준혁
흠칫하던 윤혜인이 되물었다.“뭐가 아니에요?”이때,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304호 윤혜인 환자분 약물 교체해 드릴게요.”들어오던 간호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 놀라다가 이내 빠르게 달려와 이준혁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환자분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몰라요? 그렇게 자극하면 어떡해요! 얼굴도 반반하게 생기신 분이 여자한테 손찌검을 해요?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를 겁니다!”말을 하던 간호사는 살짝 겁이 났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기세 등등한 모습에 고고한 자태까지 자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때리는 걸 보고도 방관할 수는 없다. 환자가 겨우 깨어났는데 이렇게까지 폭력을 쓰는 걸 보면 집에서도 주먹을 자주 휘두르는 게 분명하다.간호사는 자신의 딸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윤혜인을 보며 순간 연민이 두려움을 이겨버렸다.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환자분 괴롭히지 말고 당장 병실에서 나가요!”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진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화가 잔뜩 났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병실을 나섰다.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혜인 손등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이때, 이준혁의 말이 마음에 걸린 윤혜인은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제 뱃속의 아이는…”간호사는 알코올 솜으로 손등을 닦으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문제없습니다. 다만 환자분 몸 자체에 영양가가 많이 없어서 아이의 발육이 조금 늦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환자분께 영양액을 수액하는 겁니다.”윤혜인은 간호사의 손을 덥석 잡더니 흥분한 듯 다시 물었다.“그럼 제 뱃속의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씀인가요?”“그럼요.”간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며 대답했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윤혜인은 자신의 귀가 믿어지지 않았다.이때, 간호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남편분이 참 너무하네요. 아침에 젊은 간호사들이 남편분이 잘생기고 아내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이준혁은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죽을 받아먹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언제 이혼할 건지 물을 줄은 몰랐다.그는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코웃음 쳤다.“배부르니까 이제 다시 싸울 힘이 생긴 거야?”“이준혁 씨, 이런 싸움이 우리에게 아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진 만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우린 이런 무의미한 싸움과 의심을 계속 하기보다는 평화롭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나아요.”“평화롭고 깔끔하게 헤어지자고?”이준혁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곱씹자 윤혜인은 희망이라도 본 듯 얼른 말을 보탰다.“준혁 씨가 이혼을 동의하기만 하면 어떤 조건을 걸든 전 상관없어요.”뱃속의 아이는 이제 윤혜인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고 위로였기에 그녀는 절대 이 아이를 잃을 수 없다. 만약 이준혁이 정말 아이를 빼앗으려고 마음먹으면 그녀는 이선 그룹의 법무팀을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다.그럼 그녀는 부양권을 받을 수 없다.이준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윤혜인, 이렇게까지 나를 벗어나고 싶은 거야? 한구운 그 남자에게 가고 싶어?”윤혜인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배와 상관이 없다는 말을 입이 아프게 반복했는데 이준혁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그냥 그가 생각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은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덥석 잡더니 차갑게 말했다.“윤혜인, 너 너무 단순한 거 아니야? 내가 네 소원대로 이뤄지게 내버려둘 거 같아?”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은 울먹이면서 물었다.“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어떻게 하길 바라냐고?”차갑게 코웃음을 치던 이준혁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넌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돼. 괴롭더라도 참아.”윤혜인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무력하게 말했다.“서
기껏 보러 왔는데 윤혜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자 이준혁은 또다시 화가 났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불을 홱 거둔 뒤 침대위로 올라갔고 깜짝 놀란 윤혜인은 굳어버린 표정으로 물었다.“왜 올라와요?”“그럼? 설마 내가 어젯밤에 침대 곁에 계속 앉아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이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윤혜인은 거부감이 확 들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렇게까지 감정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같은 침대에 눕는다는 건 너무 불편했다.침대에는 어느새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찼다.“씻었어요?”이준혁은 윤혜인의 물음에 흠칫했다. 병실 욕실은 너무 불편했기에 그는 집에서 씻고 왔다.윤혜인 곁으로 슬쩍 다가간 이준혁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냄새 맡아볼래?”너무 가까이 붙어있은 탓에 윤혜인은 향기를 정확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씻고 온 게 분명하다. 이 남자 몸에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이때, 이준혁의 뜨거운 입김이 윤혜인의 귓가에 쏟아졌고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병실 침대에서 야릇한 짓을 했던 게 떠올라서 어느새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좀 옆으로 가면 안 돼요?”병실 침대가 작은 사이즈는 아닌데 이준혁이 올라오니 왠지 어린이 침대처럼 작게 느껴졌다.“안 돼.”이준혁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기에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저 내일…”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일 너랑 같이 외할머니 보러 갈 거야.”윤혜인은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이준혁이 언제부터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보기 시작한 거지?내일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7일째 되는 날이기에 윤혜인은 외할머니를 보러 가고 싶었다.그런데 이준혁도 같이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침묵이 흐르던 그때, 이준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외할머니 일은 내가 잘못한 게 맞아.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돌아왔을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이 다시 한번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준혁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어떻게 된 일이에요?”이준혁이 다급하게 묻자 임씨 아주머니는 엉엉 울면서 대답했다.“아가씨가 일어나자마자 어지럽다고 하시더니 계단을 내려올 때 정신을 잃고 굴러 떨어졌어요.”“구급차는 불렀어요?”“네.”이내 차량 스피커로 임세희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흑…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다리고 너무 아프고… 준혁 오빠 어디 있어요? 나 준혁 오빠 보고 싶어요…”혀 짧은 임세희의 목소리에 윤혜인은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으며 속이 울렁거렸다.이준혁처럼 여자를 많이 겪어보지 않은 남자만 이 사실을 모르고 이런 수법에 번번히 넘어갈 것이다.“어느 병원이에요?”이준혁의 물음에 윤혜인은 자신이 이 차안에 계속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상대방에게 쫓겨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내려가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에 차문을 연 윤혜인은 길거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핸드폰이 망가진 관계로 윤혜인은 기차표를 예매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갈 생각이었다.이때, 뒤에 서있던 고급 외제차가 거대한 엔진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었고 그 모습에 윤혜인은 씁쓸하게 웃었다.역시 그녀의 추측대로 버림을 받은 것이다.임세희 이름 세자는 그녀가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지만 이미 여러 번 버림을 받은 덕분에 이제는 큰 감흥도 없었으며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이내 윤혜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췄고 윤혜인은 자연스럽게 차문을 열고 택시에 타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택시 뒤에서 귀를 자극하는 경적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에 떠났던 고급 외제차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차량 앞 유리창을 통해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창문을 내리더니 윤혜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리와.”멍하니 서있던 윤혜인 뒤로 다른 손님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재촉했다.“저기요, 타실 거예요 말 거예요? 안
한편, 병원에서.임세희는 병실 침대에 기대서 실실 웃으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그녀는 일부러 무릎과 손바닥에 찰과상까지 만들었다.많이 아프긴 하지만 윤혜인 그 계집애를 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임세희가 아침 일찍 이준혁이 윤혜인과 함께 그녀 외할머니를 보러 마을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녀는 절대 윤혜인 뜻대로 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이때, 병실 문 앞에서 복도를 지켜보고 있던 임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가씨, 오고 계십니다.”임세희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내려놓은 채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준혁의 비서 송휘재가 병실에 들어서자 임씨 아주머니는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휘재 씨, 준혁 도련님은요?”송휘재가 헛기침을 살짝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대표님은 지금 많이 바쁘셔서 저에게 임세희 씨를 보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누워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언성을 높였다.“뭐라고?”조금 전의 말을 다시 반복한 송휘재는 마지막에 말을 조금 보탰다.“대표님이 임세희 씨에게 최고의 의사를 붙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임세희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도 이준혁이 대충 비서만 보낼 줄은 몰랐다.임세희는 곁에 놓인 컵을 들어 송휘재에게 던지더니 소리를 질렀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준혁 오빠를 데려왔어야지!”재빨리 피한 송휘재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대표님의 결정을 제가 좌우지할 수는 없습니다.”이때, 임씨 아주머니가 중재에 나섰다.“휘재 씨,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저희 아가씨가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아주머니, 저놈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저 버러지 같은 놈은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자식이에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송휘재가 말했다.“맞아요. 전 임세
임세희의 부탁을 들은 송휘재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녀를 홱 밀쳐냈다.“대표님 스케줄을 알아내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부탁은 절대 못해요. 그러다가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예요.”더군다나 송휘재는 윤혜인의 가르침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 윤혜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이준혁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일일이 알려줬기에 그가 이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임세희가 지금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짓을 시키다니. 그는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절대 윤혜인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잔뜩 흥분해 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화가 나서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고 송휘재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빨간 손자국이 생겼다.“왜? 감옥 가고 싶어?”임세희의 말에 송휘재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가족들의 유일한 희망이기에 절대 감옥에 갈 수는 없다.“한가지 부탁만 들어줄게요.”송휘재가 덜덜 떨면서 말하자 임세희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 이 구렁텅이에 빠져놓고 쉽게 발을 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꿈도 참 야무지네.임세희는 송휘재 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를 꼬셨다.“휘재 오빠, 나 아직 만족 못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얼른…”말을 하던 임세희는 차오르는 흥분에 얼굴까지 일그러졌고 눈빛에는 원망과 독기로 가득했다.나쁜 계집애, 넌 이제 곧 내연녀 타이틀을 달고 평생을 살게 될 거야.한편, 인하 마을에서.마을에 도착한 윤혜인은 꽃집에서 하얀 국화꽃을 주문한 뒤 떡집에 가서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떡까지 구매했다.떡집 사장님은 바로 윤혜인을 알아보았다. 사장님은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가 인상이 깊었다.“아가씨, 지금 막 나온 떡이에요. 가래떡도 한 팩 줄 테니 먹어봐요. 이번에는 절대 울면서 먹지 말고.”사장님은 떡을 챙겨주며 허허 웃었고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카드 결제요.”이준혁이
“손님, 케이크 좀 드세요.”소원이 다시 한번 방민아를 불러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계속해서 케이크를 나눠주던 소원이 서현재에게 건네려고 할 때, 육연주가 갑자기 그것을 가로채며 말했다.“현재 씨, 현재 씨가 사 온 케이크가 얼마나 달콤한지 한번 먹어봐요.”이 케이크는 분명 서씨 가문에서 준비한 것이었다.서현재는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받았다.이런 자리에서 굳이 육연주의 얼굴에 먹칠을 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돌아가 서진태와 분명히 얘기할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육연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원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케이크를 나눠줄 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그녀의 두 친구는 즉시 알아차리고 소원이 케이크를 나눠주고 돌아서기도 전에 양옆에서 그녀를 덮쳤다.“어머 어머!”모두들 단순한 생일 장난이라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두 친구는 일부러 더 심하게 장난을 쳤다.케이크를 얼굴에 던지고도 멈추지 않고 양손으로 얼굴에 더 세게 밀어붙이며 소원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연주야, 생일은 이렇게 즐겨야 재밌지 않겠어?”두 사람은 남은 케이크를 소원의 몸에 온통 문질러댔다.결국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케이크로 엉망이 되었고 마치 작은 밀가루 인형처럼 보일 때까지 괴롭힘을 당했다.곧 서현재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으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육연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꺅!”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자 육연주는 천천히 입에서 반지를 꺼냈다.눈부시게 빛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현재 씨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에요?”육연주는 서현재를 끌어안으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흑흑... 현재 씨, 정말 감동이에요.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이 반지는 서씨 가문에서 준비한 것이었지만 서현재는 전혀 몰랐다.반지가 번쩍이는 모습을 본 서현재는 무의식적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온몸이 케이크 범벅이 되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
육연주의 이런 행동은 남자들에게 더 미움을 살 뿐이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서현재가 싫어할 행동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만약 육경한이 든든히 그녀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서씨 가문조차 그녀 같은 질투 많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방민아에게는 이런 멍청한 아군이 필요한 존재였다.그녀는 육연주의 행동에 만족하며 손을 끌어 잡고 오늘 옷차림이 참 예쁘다고 열렬히 칭찬했다.그러자 육연주는 마치 깃털을 활짝 펼친 공작처럼 더욱 자랑스러워하며 우쭐해졌다.소원이 케이크를 자르러 오자 육연주는 일부러 서현재를 향해 말했다.“현재 오빠, 내가 방금 무슨 소망을 빌었는지 알아?”서현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충 반응해 줄 생각조차 없었다.그는 자신이 이런 자리에 다시 온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느꼈다.‘이렇게 강압적이고 몰상식한 여자가 과거 내가 사랑했던 사람일 리 없어.’최근 그는 자주 꿈을 꾸었다.꿈속의 여자는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웃을 때면 별조차 빛을 잃는 듯했다.그녀는 일반적인 여자들과 달리 애교를 부리지 않았고 자유롭고 거침없으면서도 용감했다.그 순간, 서현재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고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가슴 한구석의 공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때문에 서현재는 분명 누군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군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육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서현재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방민아가 나서며 분위기를 맞추려 했다.“연주야, 뭐 빌었는지 한번 말해 봐. 나랑 경한 씨도 듣고 싶거든.”그제야 덜 민망해진 육연주가 말했다.“현재 오빠랑 빨리 한 가족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방민아는 입을 가리더니 웃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망이야? 두 사람은 곧 가족이 될 거잖아.”그리고 육경한을 바라보며 농담하듯 말했다.“연주가 정말 못 참
소원은 순순히 점화기를 육연주에게 건넸다.곧 육연주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저리 가서 구석에 서 있어요!”오늘은 자신의 생일,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이런 재수 없는 여자가 가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소원은 고개를 숙이고 ‘네’라고 대답한 뒤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났다.어둠 속으로 물러나 섰지만 여전히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들이 따라오는 느낌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소원은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응시했다.이곳에는 소원을 미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선들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육연주는 소원을 무시한 채 소망을 빌었고 이어서 서현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현재 오빠, 우리 같이 촛불 불어요. 네?”잡힌 손이 약간 굳어 있는 것을 느낀 육연주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손을 더 꽉 잡았다.‘삼촌 앞이라 내 손을 뿌리치지는 못할 거야. 안 그럼 서씨 가문이 삼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테니까.’역시나 서현재는 살짝 손을 빼려 했지만 실패하자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눈을 내리깔며 육연주를 기다리지 않고 홀로 촛불을 꺼버렸다.“불 껐어.”서현재는 무심하게 말했다. 육연주의 굳어버린 얼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육연주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현재 오빠.”서현재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그 순간 소원이 고개를 살짝 든 것을 육연주가 보았다.육연주는 이를 악물며 억지로 웃음을 짓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아가씨, 와서 케이크 좀 잘라봐요.”그녀는 소원을 ‘소원 씨’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며 명령조로 말했다.이런 곳에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사람을 비하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소원은 평온한 얼굴로 다가가 케이크를 자르기 위해 플라스틱 칼을 들었다.그러나 육연주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잠깐! 손 멈춰요!”소원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육연주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손은
육연주는 서현재와 단단히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재 오빠, 드디어 왔네요! 할아버지가 오빠 프로젝트 준비한다고 하던데 많이 힘들었죠?”서현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팔을 뽑아냈다. 이어서 손을 주머니에 깊이 넣어 육연주가 다시 끼지 못하게 만들었다.지난번 서현재가 결혼식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이후, 육연주는 분노에 차 사흘간 그를 무시했다.그러나 사흘이 지나자 참지 못하고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예상대로 서진태는 둘 사이의 갈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사실을 알게 된 뒤 서현재를 심하게 꾸짖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서현재가 처음으로 서진태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제가 이 여자를 사랑했다고요? 혹시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제가 이런 여자를 사랑할 수 있죠?”서현재가 무언가 기억해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서진태는 속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서현재는 과거와 달리 순종적이라 서진태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예전에는 그가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협력을 무시하며 소원의 손에 증거 자료를 넘기고 결국 함께 도망친 일까지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잃은 후 서현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만약 약물을 과다 사용할 시 부작용이 생긴다고 의사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서진태는 서현재가 평생 기억하지 못하도록 더 많이 투여하고 싶을 정도였다.의사는 기억 상실이 일시적이며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몇 년 혹은 10년이 지나도록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도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재가 이렇게 빨리 의심할 줄은 서진태도 예상치 못했다.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하겠냐? 네가 먼저 그 애와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린 거잖아. 이제 와서 싫다고 하면 그 애는 어딜 시집가겠니? 네가 그 애의 평판을 이렇게 망쳐놓았는데.”서현재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제 안목이 그렇게 없을 리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악독한 그런 여자를 좋아할 리 없잖아요.”서진태는 한숨을 내쉬며 서현재
소원은 말없이 있었지만 방민아는 내심 무척 즐거워했다.물론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육연주에게 다소 정색하며 말했다.“연주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그러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소원에게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어려운 일 생기면 꼭 말해주세요. 소원 씨랑 경한 씨 서로 동창이잖아요.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겁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방민아는 자신이 충분히 ‘배려 깊은’ 모습을 보였다고 느끼며 만족한 듯했다.이어서 그녀는 작은 보석 가방을 꺼내 육연주에게 건네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주야, 이건 나랑 네 삼촌이 같이 고른 거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그러자 육연주는 기쁘게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언니는 뭘 주셔도 다 좋아요. 언니 눈썰미는 최고니까요.”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제윤’ 브랜드 최신작 보석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이 목걸이는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 등급의 회원만이 예약 가능한 특별한 제품이었다.육연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 삼촌, 고마워요.”이 말에 방민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아직 그렇게 부를 때는 아니잖아, 연주야...”그러자 육연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곧 그렇게 부를 날이 오잖아요. 미리 연습하는 거예요.”“어머, 이 녀석 정말...”육연주는 방민아의 손을 잡고 앉으며 말했다.“어서, 저희 삼촌이랑 이모한테 술 한 잔 따라 드려요.”소원은 이 상황에서 육연주가 자신을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술잔을 채운 뒤 육경한에게 건넸다.“드세요.”하지만 육경한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잔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드세요.”소원이 다시 말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때 방민아가 잔을 대신 받아들며 말했다.“죄송해요. 경한 씨가 요즘 술을 끊었거든요. 담배도 마찬가지고
“이 천박한 게...”육연주의 친구가 다가와 소원을 밀치려 하자 소원도 만만치 않게 방어했다.그 친구는 힘이 약한 편이라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감히 나를 밀어?”여자는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소원을 덮치려 했다.하지만 소원은 그녀가 덤벼들 것을 예측하고 이미 자리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지금은 육연주와 정면으로 맞설 처지가 아니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서비스를 거부해 영숙에게 혼나는 게 차라리 낫지 더 큰 싸움에 휘말려 자신만 손해를 보는 건 피해야 했다.소원이 아직 몸을 피하지 못했을 때, 육연주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친구를 붙잡아 떼어놓았다.이 행동은 소원에게도 뜻밖이었다. 육연주는 평소 남을 위해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육연주는 말했다.“그만 좀 해. 오늘 내 생일 파티야. 곧 다른 사람도 올 거라고.”그녀의 친구도 육연주의 생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분위기를 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얌전히 따랐다.그러나 여전히 소원을 노려보며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두고 보자.”소원은 그녀의 분노를 무시한 채 육연주를 바라보았다. 막 떠나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방 문이 다시 열렸다.바깥에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너무도 익숙한 발소리였다.소원이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정장을 차려입은 육경한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지난번 병원에서 그를 본 이후로 소원은 한동안 육경한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 뒤로 의료비를 납부하며 연락했던 소종이 한 말이 떠올랐다.“대표님은 앞으로 소원 씨와 엮일 일이 없을 겁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거고 아이 역시 소원 씨에게 절대 넘기지 않을 거예요.”육경한은 아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고 소원에게도 아이를 보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두 사람의 현재 위치가 너무 다르다 보니 육경한이 만나기를 원치 않으면 그는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지낼 수 있었다.소원은 아이의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었고 육경한이 아이를 돌보는 아주머
“그...”소원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으로 손님 잔에 술을 따르던 중이었다.최근 만난 두세 명의 손님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모두 방씨 가문이나 육씨 가문과 관련된 비즈니스를 다루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작은 방에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소원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해 대화 내용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소원은 그들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정보들을 듣는 것이 흥미로웠다.방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한편 손님은 영숙과 소원의 대화 소리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영숙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영숙 씨. 체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그러자 영숙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쪽 방에서 한 단골 손님이 체리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손님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지금 체리 여기서 잘 서비스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부른다고 해서 데려가려고? 내가 돈이 없어서 서비스 비용을 못 낼까 봐 그러는 거야?”이 말에 영숙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양 대표님이 돈이 없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면 제가 바보죠.”“근데 왜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 돈 때문이 아니면 날 무시하는 거야?”손님이 더욱 화를 내며 공격적으로 나오자 영숙은 가슴에 손을 얹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억울합니다, 양 대표님. 제가 그쪽에도 예약 없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오늘 그쪽 방에 있는 한 여성 손님의 생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여기는 제가 술 한 병 더 드리면서 보상해드릴게요. 이렇게 하면 괜찮으실까요?”손님은 상대방이 생일이라는 말을 듣자 더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만 넘어가겠어. 하지만 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해.”“당연하죠. 정말 감사합니다.”영숙은 싹싹하게 고개를 숙이며 소원을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문밖으로 나온 소원은 영숙에게 물었다.“대체 누가 절 지목한 거예요?”소원
진아연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작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부족해서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신비로운 사람은 차갑게 명령했다.“당장 소원에게 접근해.”그러자 진아연은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선생님?”소원만 보면 겁이 덜컥 나는 그녀였다.과거에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이 이제 자신을 알아봤으니 불리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고 싶은데 오히려 다가가야 하다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러나 신비로운 사람은 단호했다.“그래야 육경한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겨. 그 약은 반드시 정해진 횟수만큼 먹여야 효과가 나.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소용없어. 알겠어?”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진아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신비로운 사람은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투로 경고했다.“진짜 그렇게 하길 바라.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건 너도 약을 먹었다는 거야. 네 생사는 내가 정해!”진아연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겁먹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반드시 따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끊을게. 앞으로는 나한테 먼저 연락하지 마.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네, 네. 알겠습니다.”진아연은 마치 병아리가 쪼아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곧이어 전화가 끊겼고 진아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러더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보고 그 년한테 접근하라고? 대체 왜?! 내가 원하는 건 그년이 죽는 거야!”휴게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혼잣말은 정신이 이상해 보일 정도로 날카로웠다.한편으로는 소원이 죽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죽기를 바랐다.하지만 육경한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면서도 그녀의 말투에서는 어딘가 미련과 아쉬움이 묻어났다.소원은 이어폰을 통해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혼란스러웠다.‘진아연이 아직도 육경한을 좋아한다고? 정말 정신
소원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과거 진아연은 육경한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채 도망쳤다.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니, 얼마나 비정상적인 집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하지만 선미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네 말도 이해할 수 없어.”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휴게실에서 뛰쳐나갔다.그 뒷모습은 마치 도망치듯 허겁지겁이었다.소원은 선미의 반응이 너무나 뚜렷하다고 생각했다.‘육경한한테 당한 뒤에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그녀가 성형을 하고 모습을 바꿀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누군가 그녀를 도왔다는 뜻일 것이다.‘도대체 누가 도와준 거지? 진아연을 돕는 목적은 뭐고?’소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휴게실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가방에서 작은 이어폰 모양의 장치를 꺼내 귀에 꽂았다.조금 전 선미의 턱을 잡을 때, 얇은 형태의 초소형 도청기를 그녀의 옷깃 아래쪽에 붙여두었던 것이다.이제 선미가 누군가와 접촉하면 그 대화를 통해 그녀가 숨겨온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예상대로 이어폰에서는 곧 진아연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저예요.”“누가 너보고 전화하라고 했어!”상대방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쉰 듯했으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저... 저를 누군가 알아챘어요.”진아연이 말했다.“뭐라고?”“소원이 저를 알아봤어요. 제가 진아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이제 어떡하죠...”그녀는 겁에 질린 듯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인정했어?”상대방이 물었다.“아니요. 아니요.”진아연은 상대를 두려워하는 듯 여러 번 부인하며 말했다.“그래, 그럼 된 거야. 기억해, 진아연은 이미 죽었어. 이 세상에 진아연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너는 지금 임선미야. 아무도 네가 진아연이라는 걸 증명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