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병원에서.임세희는 병실 침대에 기대서 실실 웃으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그녀는 일부러 무릎과 손바닥에 찰과상까지 만들었다.많이 아프긴 하지만 윤혜인 그 계집애를 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임세희가 아침 일찍 이준혁이 윤혜인과 함께 그녀 외할머니를 보러 마을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녀는 절대 윤혜인 뜻대로 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이때, 병실 문 앞에서 복도를 지켜보고 있던 임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가씨, 오고 계십니다.”임세희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내려놓은 채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준혁의 비서 송휘재가 병실에 들어서자 임씨 아주머니는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휘재 씨, 준혁 도련님은요?”송휘재가 헛기침을 살짝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대표님은 지금 많이 바쁘셔서 저에게 임세희 씨를 보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누워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언성을 높였다.“뭐라고?”조금 전의 말을 다시 반복한 송휘재는 마지막에 말을 조금 보탰다.“대표님이 임세희 씨에게 최고의 의사를 붙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임세희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도 이준혁이 대충 비서만 보낼 줄은 몰랐다.임세희는 곁에 놓인 컵을 들어 송휘재에게 던지더니 소리를 질렀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준혁 오빠를 데려왔어야지!”재빨리 피한 송휘재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대표님의 결정을 제가 좌우지할 수는 없습니다.”이때, 임씨 아주머니가 중재에 나섰다.“휘재 씨,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저희 아가씨가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아주머니, 저놈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저 버러지 같은 놈은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자식이에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송휘재가 말했다.“맞아요. 전 임세
임세희의 부탁을 들은 송휘재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녀를 홱 밀쳐냈다.“대표님 스케줄을 알아내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부탁은 절대 못해요. 그러다가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예요.”더군다나 송휘재는 윤혜인의 가르침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 윤혜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이준혁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일일이 알려줬기에 그가 이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임세희가 지금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짓을 시키다니. 그는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절대 윤혜인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잔뜩 흥분해 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화가 나서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고 송휘재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빨간 손자국이 생겼다.“왜? 감옥 가고 싶어?”임세희의 말에 송휘재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가족들의 유일한 희망이기에 절대 감옥에 갈 수는 없다.“한가지 부탁만 들어줄게요.”송휘재가 덜덜 떨면서 말하자 임세희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 이 구렁텅이에 빠져놓고 쉽게 발을 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꿈도 참 야무지네.임세희는 송휘재 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를 꼬셨다.“휘재 오빠, 나 아직 만족 못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얼른…”말을 하던 임세희는 차오르는 흥분에 얼굴까지 일그러졌고 눈빛에는 원망과 독기로 가득했다.나쁜 계집애, 넌 이제 곧 내연녀 타이틀을 달고 평생을 살게 될 거야.한편, 인하 마을에서.마을에 도착한 윤혜인은 꽃집에서 하얀 국화꽃을 주문한 뒤 떡집에 가서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떡까지 구매했다.떡집 사장님은 바로 윤혜인을 알아보았다. 사장님은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가 인상이 깊었다.“아가씨, 지금 막 나온 떡이에요. 가래떡도 한 팩 줄 테니 먹어봐요. 이번에는 절대 울면서 먹지 말고.”사장님은 떡을 챙겨주며 허허 웃었고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카드 결제요.”이준혁이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고집을 부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여기서 잘 거예요. 제가 잔다고 했지 준혁 씨에게 자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그녀는 이곳에 어렸을 때의 즐거움 추억들이 많았다. 이준혁은 이곳을 누추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윤혜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건 안 돼. 여긴 습기가 너무 심각하고 세균들도 많아. 넌 지금 임신 상태…”윤혜인은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참다못해 그의 말을 끊었다.“준혁 씨, 이럴 필요 없어요.”찬물을 확 끼얹은 윤혜인을 보며 이준혁이 실눈을 뜬 채 물었다.“내가 어쨌는데?”“아이를 신경 쓰는 척하지 않아도 돼요.”“내가 신경 쓰는 척한다고?”표정이 살짝 변한 이준혁은 가까스로 차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듯했다.“아니에요?”윤혜인이 되물었다.그는 그녀 뱃속의 아이가 원망스럽고 싫어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했던 사람이다. 뱃속의 아이가 그의 아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전혀 믿지 않았으면서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일 필요는 전혀 없다.이준혁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며 억지로 화를 눌렀다.“윤혜인, 괜히 시비 걸지 마.”그는 그녀와 싸우기 위해 몇 백 킬로미터를 달려 이곳으로 온 건 아니다. 한편, 윤혜인은 저택에서 하루 지내고 싶다는 게 왜 이준혁에게는 시비로 들리는건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모든 걸 이준혁의 뜻대로 해야 할까?뱃속의 아이를 살리고 없애는 것조차 그의 뜻대로 해야 한다니. 그녀는 이렇게 구속받는 인생이 너무 지긋지긋했다.“이준혁 씨, 대체 누가 시비를 거는 건데요? 시간이 그렇게 많으면 계단에서 떨어진 애인이나 보러 가요. 어차피 준혁 씨는 그 여자가 하는 연기도 좋아하잖아요. 이곳에서 괜한 소리 듣지 말고 가요.”윤혜인의 말에 이준혁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네 그 잘난 선배에게 고자질하려고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거 아니야?”“좋을 대로 생각해요.”윤혜인은 어차피 믿지도 않은 이준혁에게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반대로 화가 잔뜩 치밀어
잔뜩 긴장한 윤혜인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유일한 무기인 손전등을 손에 꼭 쥐었다.이때, 철컥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윤혜인은 집안 곳곳을 살폈지만 큰 가구도 별로 없었고 몸을 숨길 만한 곳도 없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안방 문 뒤에 숨어서 손전등을 높이 치켜들었다. 문밖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고 상대방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윤혜인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렸으며 온몸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상대방이 금전을 노리는 도둑이길 바랐다. 그러면 아무도 없는 듯한 집안 꼴을 보고 포기할 수도 있으니.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옆방 문이 조금씩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그 공포스러운 발걸음 소리는 안방 입구에서 멈췄다.조금씩 비추는 달빛에 윤혜인은 문의 손잡이가 조심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녀는 손전등을 꼭 잡은 채 주위 모든 것을 경계했다.그녀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밖에 없다. 실수를 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끼익.”나무로 만든 낡은 문이 조금씩 열렸고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의 얼굴이 윤혜인 앞에 나타났다.팍!윤혜인은 온 힘을 다해 손전등을 내리쳤다. 손전등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남자는 손전등에 맞아 뒷걸음질을 쳤다.윤혜인은 그 기회에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발을 내딛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헤헤… 우리 예쁜이… 헤헤…”상대방은 지력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였다. 힘이 굉장히 강한 그 남자는 단번에 윤혜인을 자신의 곁으로 확 잡아당겼고 휘청거리던 윤혜인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팔꿈치로 바닥을 지탱하고 있었기에 배가 부딪치지는 않았다.그 남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발목을 잡은 채 침대로 끌어당겼다.깜짝 놀란 윤혜인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다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떨어지면서 발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
윤혜인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정장 외투안에 숨어 있었고 등 뒤에서는 주먹을 날리는 소리와 집으로 몰래 들어왔던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이 순간, 윤혜인은 마음이 완전히 놓였다.이내 경찰차의 경적소리가 들렸다. 옆집에 있던 사람이 살려달라는 윤혜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남자를 경찰차에 태운 경찰은 윤혜인과 이준혁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이 사람은 전과범입니다. 전에도 노숙자로 위장해서 예쁜 여자분들만 공격했거든요.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연기를 하면서 여자를 괴롭히는 게 저 사람 관용 수법입니다.”아마도 윤혜인이 오후에 밖에 나와서 이불을 털 때 범인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경찰의 말을 들은 뒤 남자의 험악한 얼굴을 다시 마주하자 윤혜인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범인이 경찰에 끌려갈 땐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예뻐… 향기가 너무 좋아…”윤혜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범인을 보며 온몸이 덜덜 떨렸고 속도 울렁거렸다.이준혁은 재빨리 윤혜인을 안아서 차에 태운 뒤, 그녀를 위해 안전벨트를 묶어주었다. 이때, 윤혜인이 손을 거두려던 이준혁을 덥석 잡더니 울먹거리면서 말했다.“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요.”“내일 와서 챙기자.”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다독이며 달랬고 윤혜인은 말없이 눈을 꼭 감았다.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그녀는 속눈썹마저 덜덜 떨었다.이준혁은 마을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 그녀를 데리고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일단은 가까운 곳에 방 하나를 얻어서 얼른 쉬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호텔 방에 들어선 이준혁은 엉망진창인 시설과 환경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호텔은 마을에서 가장 평점이 높은 호텔이었다.이준혁은 호텔 직원에게 방에 있는 모든 물품들을 일회용 물품으로 바꿔달라고 한 뒤 욕조에 물을 받았다.그리고는 윤혜인에게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라고 했지만 조금
이준혁은 확신에 찬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김성훈은 전에 자궁 냉증이 있는 여자에게 임신한 날짜도 오차가 있을 거라고 했다. 물론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이준혁은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윤혜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년 동안 이준혁은 윤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 비춰진 그림자는 언제나 이준혁이었다.그는 턱으로 윤혜인의 머리카락에 비비적거리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미안해. 우리 앞으로 잘 살아보자. 응?”다정하고 자상한 이준혁의 목소리에 윤혜인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체내에 있는 가장 약한 곳이 바늘에 찔린 듯했다.윤혜인은 매번 이준혁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그를 온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이 남자는 그녀가 10년 동안 사랑한 사람이다.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그녀의 희로애락이 결정되었다.하지만 이준혁에게 받은 상처 또한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다.이 순간, 윤혜인은 한 마리의 어린 새 마냥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녀에게 뱃속의 아이는 온전한 가정이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고, 이준혁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의 소유욕이 장난을 치는 거라고 타일렀다.너무 많은 생각을 하던 윤혜인은 어느새 스르르 눈이 감겼지만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던 이준혁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야심한 밤, 윤혜인은 갑자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눈을 번쩍 떴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그녀의 꿈속에 나타나 향기가 좋다고 하면서 그녀를 쫓아다녔다.“왜 그래?”침대 곁에 설치된 전등을 켠 이준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돌리며 물었고 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의 눈가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이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고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윤혜인은 발그레한 표정으로 말했다.“소파에 가서 자요.”무섭지만 않았다면 윤혜인은 절대 이준혁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반응이 확실했다.조금 전에 많이 놀란 윤혜인을 배려하는 마음에 이준혁은 그녀를 그만 놀리기로 했다. “샤워 좀 하고 올게.”침대에서 내려온 이준혁은 욕실로 들어가 찬물 샤워를 했고 나와보니 윤혜인은 또다시 자는 척하고 있었다.윤혜인은 진짜 잠든 모습과 자는 척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달랐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그녀는 오늘밤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침대로 다가가 허리를 숙인 이준혁은 그녀의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개띠에요?”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깨물지?이준혁은 핏자국이 난 팔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담담하게 말했다.“너한테 전염된 거 같은데?”윤혜인은 이준혁의 팔을 보며 반박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그녀가 깨문 것이 조금 더 심각했기 때문이다.이준혁은 아무 대꾸도 없는 윤혜인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네 그 튼튼한 이에 보험 좀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 어떤 무기보다 효과가 확실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윤혜인은 이준혁이 왜 이 늦은 밤에 잠도 안 자고 이렇게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윤혜인이 귀찮은 듯 다시 눈을 감자 갑자기 다가온 이준혁은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빚 독촉하러 왔어.”“빚은 무슨…”흠칫하던 윤혜인은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이 남자… 아니야! 절대 그럴 리는 없어!“날 네 번이나 깨물었으니 나도 한 번쯤은 복수해야지.”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요.”윤혜인은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은은한 불빛 아래 그녀의 팔은 가늘고 백옥같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 이준혁은 그녀가 내민 팔을 꾹 누르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가까이 잡아당겼고 이내 고개
문이 살짝 열려 있었기에 이준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나중에 돌아가면 너 보러 갈게. 지금은 못 가.”상대방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준혁은 조용히 듣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윤혜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샤워 가운을 두르던 윤혜인은 오늘 입을 옷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입었던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으며 더군다나 그 변태의 손길이 닿았기에 다시는 입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준혁이 방으로 들어왔고 전혀 눈치채지 못한 윤혜인은 그의 정장 외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그의 옷이 너무 큰 탓에 소매는 그녀의 무릎까지 닿았으며 그 모습은 마치 어른 옷을 몰래 입은 어린아이 같았다.이준혁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그의 존재를 발견한 윤혜인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말했다.“입을 옷이 없어요.”서울이었다면 이준혁은 사람을 시켜 새 옷을 준비했을 텐데 이곳은 옷을 살 곳마저 마땅치 않았다.“저랑 같이 집에 옷 가지러 가요.”윤혜인은 옷을 챙기긴 했지만 전부 집에 두고 왔다.“이대로 나가려고?”이준혁은 윤혜인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안 돼요?”윤혜인은 곁에 있던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준혁의 커다란 옷이 무릎까지 덮었으니 차에 타도 춥지는 않을 것이다.“뭐 문제 있어요?”윤혜인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목에 퍼렇게 멍든 자국만 제외하면 전혀 상관없었다. 이준혁 저 남자는 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딸기를 심는다고 하던데 저 남자는 그녀의 목에 포도를 심어버렸다.입을 삐죽거리던 윤혜인은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를 살짝 가렸다.이때, 이준혁이 뒤에서 그녀를 와락 안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뭘 가리고 있어?”윤혜인은 그와 말을 걸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했다. 이준혁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살짝 누르더니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을 보탰다.“이렇게 발가
영숙은 차갑게 말했다.“그 셋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참을 수 있으면 참아. 아니면 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져도 내가 대신 해결해줄 일은 없을 거야!”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는지라 영숙의 말 속에 담긴 선의를 금세 알아챘다.다음에 또 그 셋을 마주친다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서로 계산만 가득한 곳에서 같은 여성이 보여주는 호의는 그녀에게 작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소원은 영숙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언니. 절대 폐 끼치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영숙은 잠시 멍해 하더니 어딘가 어색한 듯 담배를 끄며 고개를 돌렸다.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면서 넌지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너 도와주는 거 아니라니까.”소원은 영숙이 떠난 후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영숙은 선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왜 자신을 돕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심과 가식은 구분할 수 있었다.그렇게 씻고 나서 소원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걸어가던 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서현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정말 현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번 기억 상실이 현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서현재는 분명 싸울 것이었다.서씨 가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통제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뒤편 문 근처에 도착했다.그 순간, 2층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속에 ‘서씨 가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소원은 멈춰 서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서씨 가문에서 요즘 그 사생아를 꽤 중시하는 것 같더라.”“사생아라니? 그 자식은 사생아보다도 더 낮은 존재야. 사생아조차도 못 되는 잡종이지.”“야,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서씨 가문 어르신이 그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데... 네가 그
소원은 손에 있는 10만 원의 현금을 꽉 움켜쥐었다.정말 ‘특별한 선물’이라는 게 대체 뭘 의미하는지 뻔했다.유진이, 그 아이가 그들의 손에 있다는 사실 말고 또 뭐가 있을까.소원은 고개를 약간 들어 방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머릿속 생각은 복잡해졌다.그때 진아연이 우연을 가장하며 소원 곁으로 다가왔다.“체리, 무슨 일이야? 오늘 손님이 그렇게 힘들게 했어? 어쩌다 이렇게 됐대?”진아연은 일부러 따라온 것이었다. 그녀는 방금 육경한의 태도와 방민아가 말하는 것을 전부 지켜보았다.육경한이 소원에게 보이는 태도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한때 그는 소원에게 미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달랐다.현재 육경한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방민아였다.그리고 진아연의 생각에 오직 방민아만이 그와 어울릴 자격이 있었다.진아연은 속으로 흡족해했다.한때 육경한이 소원에게 보였던 미친 행동이 정말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도 그저 지나가는 집착에 불과했던 것이다.육경한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에 금방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었다.‘그럼 내가 저질렀던 죄도 언젠가는 용서받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소원은 아무 말 없이 진아연을 외면했다.그녀와 대화하고 싶지도, 그녀의 속셈을 지금 당장 폭로하고 싶지도 않았다.소원은 진아연이 어떤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그리고 그녀 뒤에 누가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경솔하게 누군가와 한편이 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겉으로 도와주는 척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자신을 이용해 다른 악행을 저지르려는 경우가 많았다.그리고 그런 일이 드러나면 결국 죄를 뒤집어쓰는 건 자신이었다.진아연은 소원이 말을 하지 않자 어딘가 거리감을 느꼈다.사실 그녀는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는 게 두려웠지만 지금까지 소원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걸 보며 안심했다.소원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이 여전히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증거는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다만 그 사람으로
소원은 육경한을 바라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육경한, 너희가 현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너희 스스로가 잘 알겠지! 여기서 도덕적인 척하며 남 심판하지 마. 진짜 가장 비도덕적인 건 너희 같은 인간들이니까!”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육경한은 갑자기 손을 뻗어 소원의 목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그래, 내가 쓰레기라면 너네 현재는 뭐... 착한 사람이라는 거야?”소원은 목이 졸려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소원, 네가 그렇게 서현재가 착한 사람이라 믿는다면 나는 끝까지 너를 실망시키고 말 거야!”곧 육경한은 손을 거칠게 놓으며 소원을 벽에 내팽개쳤다.소원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헐떡였다.“똑똑히 봐. 남자는 변하지 않을 것 같지? 서현재도 변할 거야. 나 같은 쓰레기보다도 더 못한 인간으로.”그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소원은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생각도 할 수 없었다.육경한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그들은 서현재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만들어 서현재를 평생 후회하게 할 것이다.그리고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이다.소원은 바닥에 주저앉아 목을 감싸 쥐었다.목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또각또각.누군가가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방민아가 소원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소원 씨, 이렇게 보니까 정말 개 같아요. 꼬리를 흔드는 한심한 개 말이에요.”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제 가식을 벗어던진 방민아와 얘기할 가치는 없다고 느꼈다.방민아는 가방에서 10만 원을 꺼내 소원의 머리 위에 던지며 경멸스럽게 말했다.“이건 경한 씨를 대신해 소원 씨에게 주는 팁이에요. 소원 씨가 어떤 존재인지 잊지 않길 바랍니다.”클럽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서비스 요금이 바로 한 시간에 10만 원이었다.이 말은 방민아가
육연주의 두 친구가 분위기를 띄우는 듯 샴페인을 마구 뿌리며 축하하기 시작했다.물이 섞인 술이 소원의 온몸을 적셨다.모두가 환호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소원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그 물기가 가슴속까지 스며들어 얼음처럼 차가웠다.마음 깊은 곳까지 차갑고 그 차가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과거를 잊었기를 바랐음에도 육연주가 그의 인생에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서현재가 육연주와 함께한다면 그는 서씨 가문의 완벽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될 뿐 아니라 육연주의 지배 아래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지금도 서현재의 고통과 갈등이 그녀에게 보였는데 앞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만약 언젠가 서현재가 과거를 기억해낸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의 시작일 것이다.그를 너무나 잘 알기에 소원은 미리부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만약 서현재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고통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 분명했다.소란이 끝난 후, 모두가 술을 꽤 많이 마신 상태였다.서현재도 붙잡혀 적지 않게 술을 마셨고 육경한과 방민아 역시 몇 잔 마셨다.특히 육연주와 그녀의 친구들은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셔버렸다.육연주는 친구를 서현재로 착각하며 안긴 채 사랑을 속삭였다.“현재 씨, 나 정말 현재 씨 사랑해요... 정말로... 근데 현재 씨는 왜 나를 신경도 안 써요...”“헤헤... 그래도 결국 현재 씨는 내 사람이 됐잖아요... 이제 내 거잖아요...”친구를 안고 입맞춤까지 하며 정신없이 울부짖는 육연주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서현재는 그런 그녀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고 자신의 상태도 좋지 않아 가슴을 누르며 비틀거리더니 방을 나갔다.소원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아무도 서현재의 이탈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간 그녀는 그의 뒷모습이 복도 모퉁이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손님, 케이크 좀 드세요.”소원이 다시 한번 방민아를 불러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계속해서 케이크를 나눠주던 소원이 서현재에게 건네려고 할 때, 육연주가 갑자기 그것을 가로채며 말했다.“현재 씨, 현재 씨가 사 온 케이크가 얼마나 달콤한지 한번 먹어봐요.”이 케이크는 분명 서씨 가문에서 준비한 것이었다.서현재는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받았다.이런 자리에서 굳이 육연주의 얼굴에 먹칠을 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돌아가 서진태와 분명히 얘기할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육연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원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케이크를 나눠줄 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그녀의 두 친구는 즉시 알아차리고 소원이 케이크를 나눠주고 돌아서기도 전에 양옆에서 그녀를 덮쳤다.“어머 어머!”모두들 단순한 생일 장난이라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두 친구는 일부러 더 심하게 장난을 쳤다.케이크를 얼굴에 던지고도 멈추지 않고 양손으로 얼굴에 더 세게 밀어붙이며 소원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연주야, 생일은 이렇게 즐겨야 재밌지 않겠어?”두 사람은 남은 케이크를 소원의 몸에 온통 문질러댔다.결국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케이크로 엉망이 되었고 마치 작은 밀가루 인형처럼 보일 때까지 괴롭힘을 당했다.곧 서현재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으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육연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꺅!”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자 육연주는 천천히 입에서 반지를 꺼냈다.눈부시게 빛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현재 씨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에요?”육연주는 서현재를 끌어안으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흑흑... 현재 씨, 정말 감동이에요.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이 반지는 서씨 가문에서 준비한 것이었지만 서현재는 전혀 몰랐다.반지가 번쩍이는 모습을 본 서현재는 무의식적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온몸이 케이크 범벅이 되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
육연주의 이런 행동은 남자들에게 더 미움을 살 뿐이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서현재가 싫어할 행동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만약 육경한이 든든히 그녀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서씨 가문조차 그녀 같은 질투 많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방민아에게는 이런 멍청한 아군이 필요한 존재였다.그녀는 육연주의 행동에 만족하며 손을 끌어 잡고 오늘 옷차림이 참 예쁘다고 열렬히 칭찬했다.그러자 육연주는 마치 깃털을 활짝 펼친 공작처럼 더욱 자랑스러워하며 우쭐해졌다.소원이 케이크를 자르러 오자 육연주는 일부러 서현재를 향해 말했다.“현재 오빠, 내가 방금 무슨 소망을 빌었는지 알아?”서현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충 반응해 줄 생각조차 없었다.그는 자신이 이런 자리에 다시 온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느꼈다.‘이렇게 강압적이고 몰상식한 여자가 과거 내가 사랑했던 사람일 리 없어.’최근 그는 자주 꿈을 꾸었다.꿈속의 여자는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웃을 때면 별조차 빛을 잃는 듯했다.그녀는 일반적인 여자들과 달리 애교를 부리지 않았고 자유롭고 거침없으면서도 용감했다.그 순간, 서현재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고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가슴 한구석의 공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때문에 서현재는 분명 누군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군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육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서현재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방민아가 나서며 분위기를 맞추려 했다.“연주야, 뭐 빌었는지 한번 말해 봐. 나랑 경한 씨도 듣고 싶거든.”그제야 덜 민망해진 육연주가 말했다.“현재 오빠랑 빨리 한 가족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방민아는 입을 가리더니 웃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망이야? 두 사람은 곧 가족이 될 거잖아.”그리고 육경한을 바라보며 농담하듯 말했다.“연주가 정말 못 참
소원은 순순히 점화기를 육연주에게 건넸다.곧 육연주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저리 가서 구석에 서 있어요!”오늘은 자신의 생일,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이런 재수 없는 여자가 가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소원은 고개를 숙이고 ‘네’라고 대답한 뒤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났다.어둠 속으로 물러나 섰지만 여전히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들이 따라오는 느낌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소원은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응시했다.이곳에는 소원을 미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선들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육연주는 소원을 무시한 채 소망을 빌었고 이어서 서현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현재 오빠, 우리 같이 촛불 불어요. 네?”잡힌 손이 약간 굳어 있는 것을 느낀 육연주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손을 더 꽉 잡았다.‘삼촌 앞이라 내 손을 뿌리치지는 못할 거야. 안 그럼 서씨 가문이 삼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테니까.’역시나 서현재는 살짝 손을 빼려 했지만 실패하자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눈을 내리깔며 육연주를 기다리지 않고 홀로 촛불을 꺼버렸다.“불 껐어.”서현재는 무심하게 말했다. 육연주의 굳어버린 얼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육연주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현재 오빠.”서현재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그 순간 소원이 고개를 살짝 든 것을 육연주가 보았다.육연주는 이를 악물며 억지로 웃음을 짓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아가씨, 와서 케이크 좀 잘라봐요.”그녀는 소원을 ‘소원 씨’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며 명령조로 말했다.이런 곳에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사람을 비하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소원은 평온한 얼굴로 다가가 케이크를 자르기 위해 플라스틱 칼을 들었다.그러나 육연주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잠깐! 손 멈춰요!”소원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육연주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손은
육연주는 서현재와 단단히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재 오빠, 드디어 왔네요! 할아버지가 오빠 프로젝트 준비한다고 하던데 많이 힘들었죠?”서현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팔을 뽑아냈다. 이어서 손을 주머니에 깊이 넣어 육연주가 다시 끼지 못하게 만들었다.지난번 서현재가 결혼식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이후, 육연주는 분노에 차 사흘간 그를 무시했다.그러나 사흘이 지나자 참지 못하고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예상대로 서진태는 둘 사이의 갈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사실을 알게 된 뒤 서현재를 심하게 꾸짖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서현재가 처음으로 서진태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제가 이 여자를 사랑했다고요? 혹시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제가 이런 여자를 사랑할 수 있죠?”서현재가 무언가 기억해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서진태는 속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서현재는 과거와 달리 순종적이라 서진태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예전에는 그가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협력을 무시하며 소원의 손에 증거 자료를 넘기고 결국 함께 도망친 일까지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잃은 후 서현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만약 약물을 과다 사용할 시 부작용이 생긴다고 의사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서진태는 서현재가 평생 기억하지 못하도록 더 많이 투여하고 싶을 정도였다.의사는 기억 상실이 일시적이며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몇 년 혹은 10년이 지나도록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도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재가 이렇게 빨리 의심할 줄은 서진태도 예상치 못했다.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하겠냐? 네가 먼저 그 애와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린 거잖아. 이제 와서 싫다고 하면 그 애는 어딜 시집가겠니? 네가 그 애의 평판을 이렇게 망쳐놓았는데.”서현재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제 안목이 그렇게 없을 리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악독한 그런 여자를 좋아할 리 없잖아요.”서진태는 한숨을 내쉬며 서현재
소원은 말없이 있었지만 방민아는 내심 무척 즐거워했다.물론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육연주에게 다소 정색하며 말했다.“연주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그러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소원에게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어려운 일 생기면 꼭 말해주세요. 소원 씨랑 경한 씨 서로 동창이잖아요.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겁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방민아는 자신이 충분히 ‘배려 깊은’ 모습을 보였다고 느끼며 만족한 듯했다.이어서 그녀는 작은 보석 가방을 꺼내 육연주에게 건네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주야, 이건 나랑 네 삼촌이 같이 고른 거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그러자 육연주는 기쁘게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언니는 뭘 주셔도 다 좋아요. 언니 눈썰미는 최고니까요.”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제윤’ 브랜드 최신작 보석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이 목걸이는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 등급의 회원만이 예약 가능한 특별한 제품이었다.육연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 삼촌, 고마워요.”이 말에 방민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아직 그렇게 부를 때는 아니잖아, 연주야...”그러자 육연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곧 그렇게 부를 날이 오잖아요. 미리 연습하는 거예요.”“어머, 이 녀석 정말...”육연주는 방민아의 손을 잡고 앉으며 말했다.“어서, 저희 삼촌이랑 이모한테 술 한 잔 따라 드려요.”소원은 이 상황에서 육연주가 자신을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술잔을 채운 뒤 육경한에게 건넸다.“드세요.”하지만 육경한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잔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드세요.”소원이 다시 말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때 방민아가 잔을 대신 받아들며 말했다.“죄송해요. 경한 씨가 요즘 술을 끊었거든요. 담배도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