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확신에 찬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김성훈은 전에 자궁 냉증이 있는 여자에게 임신한 날짜도 오차가 있을 거라고 했다. 물론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이준혁은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윤혜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년 동안 이준혁은 윤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 비춰진 그림자는 언제나 이준혁이었다.그는 턱으로 윤혜인의 머리카락에 비비적거리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미안해. 우리 앞으로 잘 살아보자. 응?”다정하고 자상한 이준혁의 목소리에 윤혜인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체내에 있는 가장 약한 곳이 바늘에 찔린 듯했다.윤혜인은 매번 이준혁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그를 온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이 남자는 그녀가 10년 동안 사랑한 사람이다.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그녀의 희로애락이 결정되었다.하지만 이준혁에게 받은 상처 또한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다.이 순간, 윤혜인은 한 마리의 어린 새 마냥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녀에게 뱃속의 아이는 온전한 가정이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고, 이준혁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의 소유욕이 장난을 치는 거라고 타일렀다.너무 많은 생각을 하던 윤혜인은 어느새 스르르 눈이 감겼지만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던 이준혁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야심한 밤, 윤혜인은 갑자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눈을 번쩍 떴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그녀의 꿈속에 나타나 향기가 좋다고 하면서 그녀를 쫓아다녔다.“왜 그래?”침대 곁에 설치된 전등을 켠 이준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돌리며 물었고 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의 눈가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이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고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윤혜인은 발그레한 표정으로 말했다.“소파에 가서 자요.”무섭지만 않았다면 윤혜인은 절대 이준혁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반응이 확실했다.조금 전에 많이 놀란 윤혜인을 배려하는 마음에 이준혁은 그녀를 그만 놀리기로 했다. “샤워 좀 하고 올게.”침대에서 내려온 이준혁은 욕실로 들어가 찬물 샤워를 했고 나와보니 윤혜인은 또다시 자는 척하고 있었다.윤혜인은 진짜 잠든 모습과 자는 척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달랐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그녀는 오늘밤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침대로 다가가 허리를 숙인 이준혁은 그녀의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개띠에요?”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깨물지?이준혁은 핏자국이 난 팔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담담하게 말했다.“너한테 전염된 거 같은데?”윤혜인은 이준혁의 팔을 보며 반박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그녀가 깨문 것이 조금 더 심각했기 때문이다.이준혁은 아무 대꾸도 없는 윤혜인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네 그 튼튼한 이에 보험 좀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 어떤 무기보다 효과가 확실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윤혜인은 이준혁이 왜 이 늦은 밤에 잠도 안 자고 이렇게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윤혜인이 귀찮은 듯 다시 눈을 감자 갑자기 다가온 이준혁은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빚 독촉하러 왔어.”“빚은 무슨…”흠칫하던 윤혜인은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이 남자… 아니야! 절대 그럴 리는 없어!“날 네 번이나 깨물었으니 나도 한 번쯤은 복수해야지.”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요.”윤혜인은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은은한 불빛 아래 그녀의 팔은 가늘고 백옥같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 이준혁은 그녀가 내민 팔을 꾹 누르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가까이 잡아당겼고 이내 고개
문이 살짝 열려 있었기에 이준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나중에 돌아가면 너 보러 갈게. 지금은 못 가.”상대방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준혁은 조용히 듣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윤혜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샤워 가운을 두르던 윤혜인은 오늘 입을 옷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입었던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으며 더군다나 그 변태의 손길이 닿았기에 다시는 입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준혁이 방으로 들어왔고 전혀 눈치채지 못한 윤혜인은 그의 정장 외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그의 옷이 너무 큰 탓에 소매는 그녀의 무릎까지 닿았으며 그 모습은 마치 어른 옷을 몰래 입은 어린아이 같았다.이준혁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그의 존재를 발견한 윤혜인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말했다.“입을 옷이 없어요.”서울이었다면 이준혁은 사람을 시켜 새 옷을 준비했을 텐데 이곳은 옷을 살 곳마저 마땅치 않았다.“저랑 같이 집에 옷 가지러 가요.”윤혜인은 옷을 챙기긴 했지만 전부 집에 두고 왔다.“이대로 나가려고?”이준혁은 윤혜인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안 돼요?”윤혜인은 곁에 있던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준혁의 커다란 옷이 무릎까지 덮었으니 차에 타도 춥지는 않을 것이다.“뭐 문제 있어요?”윤혜인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목에 퍼렇게 멍든 자국만 제외하면 전혀 상관없었다. 이준혁 저 남자는 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딸기를 심는다고 하던데 저 남자는 그녀의 목에 포도를 심어버렸다.입을 삐죽거리던 윤혜인은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를 살짝 가렸다.이때, 이준혁이 뒤에서 그녀를 와락 안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뭘 가리고 있어?”윤혜인은 그와 말을 걸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했다. 이준혁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살짝 누르더니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을 보탰다.“이렇게 발가
“안 돼. 아이와 이혼만 빼고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어.”이준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윤혜인도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이 두가지를 제외하면 저도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생긴 거지? 어젯밤에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더니.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침대에 눕혀 화가 풀릴 때까지 뽀뽀를 하고 싶었다.한편, 이준혁의 무릎에 앉은 윤혜인은 그의 다리 근육들이 너무 딱딱해서 엉덩이가 불편했다.“저랑 옷 가지러 집에 가기 싫으면 저 혼자 다녀올게요.”말을 하던 윤혜인이 벌떡 일어나자 이준혁은 그녀를 덥석 잡아당기더니 샤워 가운으로 그녀를 꼼꼼하게 둘러싼 뒤 어깨에 업고 호텔을 나섰다.저택으로 돌아온 윤혜인은 옷을 챙기러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엉망진창이 된 방을 보자 어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이준혁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가지 마요.”윤혜인을 힐끗 쳐다본 이준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물렀다.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윤혜인은 문을 비스듬히 열어 두었기에 이준혁은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의 얇고 아름다운 등을 볼 수 있었다.이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동공이 흔들렸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윤혜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이준혁은 부서진 문을 수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 찾다가 나사를 발견하게 되었고 옷소매를 위로 거두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나사를 박기 시작했다.은은한 햇빛이 이준혁의 옆모습에 비춰 들었고 조각 같은 외모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수려했다.윤혜인은 나사를 박던 이준혁을 보며 살짝 놀라웠다. 그가 이런 일까지 할 줄 알다니.“이리와.”이때, 이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윤혜인에게 말했고 윤혜인이 다가가자 그는 나사 하나를 그녀에게 건넨 뒤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이준혁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한 방울의 땀은 윤혜인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괜히 부끄러워진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대충
이준혁은 윤혜인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내가 말한 첫경험은 남이 남긴 음식을 처음 먹는 거랑 설거지를 처음 하는 거였는데?”“일부러 그러는 거죠?”이준혁은 지금 일부러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이때, 이준혁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날을 톡 치더니 눈썹을 들썩였다.“하지만 그것도 사실이지.”“뭐가요?”“내 첫경험이 너라는 말.”이준혁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지만 윤혜인은 귀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첫날밤이 떠올랐고 그날 처음 잠자리를 해본 이준혁은 익숙하지 않은 듯 매우 빨리 끝났다.그때 당시 두 사람은 서로 너무 어색했고 술을 마셨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둘 다 정신은 멀쩡한 상태였다.윤혜인도 첫경험이었지만 책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이준혁이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준 덕에 허리만 조금 쑤실 뿐이었다.그날 밤, 왠지 울적해 보이는 이준혁의 표정을 보고 나서 윤혜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채게 되었다.그때 윤혜인은 꽤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선 그룹의 대표가 여색을 즐기지 않는 이유가 스킬이 부족해서라니.이준혁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윤혜인을 보며 그때 당시 얼굴이 퍼렇게 질려버렸다.술을 마신 데다가 첫경험이라 그는 갈팡질팡했던 것인데 상대방이 오해라도 할까 봐 이준혁은 바로 다시 윤혜인을 침대에 눕혔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었다.한편, 이준혁은 넋이 나간 채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윤혜인의 표정에 그녀가 또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고 순간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졌다.그는 이를 악문 채 윤혜인을 살짝 꼬집었다.“옛날 생각하지 마. 딱 그때 한 번이었어.”그 뒤로 이준혁은 단 한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이준혁에게 안겨 있던 윤혜인은 불편한 듯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좀 비켜봐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그
윤혜인이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했지만 이준혁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잡더니 그대로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윤혜인은 두 손으로 이준혁의 가슴을 몇 번이나 밀어냈지만 되레 더욱 꽉 잡히고 말았다.그러다가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이준혁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의 턱을 들고 있던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역시 이래야 좀 화가 덜 나네.”“이준혁 씨… 아니…”윤혜인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내려고 하자 이준혁은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윤혜인이 쓰러지려고 하자 그제야 그녀를 놔주었다.“계속 말 할 거야?”이준혁은 눈썹을 살짝 들썩이며 물었다. 그녀가 한마디라도 더 하면 그는 다시 키스를 할 게 뻔하기에 윤혜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조용해지자 만족스럽게 웃던 이준혁은 그녀를 차에 태우며 말했다.“이제 집에 가자.”차에 앉은 윤혜인은 거친 입맞춤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에 안전 벨트를 묶어주는 이준혁에게 반항조차도 하지 못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모든 걸 나한테 맡겨.”그의 한마디에 꽁꽁 얼어붙었던 윤혜인의 마음은 또다시 격렬하게 흔들렸다.하지만 이번엔 마음 한 켠에 자꾸 불안했으며 구름 위에 둥둥 떠있다가 추락하는 듯한 이 기분이 너무 무서웠다.가는 길 내내 윤혜인은 자지도 않고 창문에 기대 바깥 풍경을 쳐다보았다.인하 마을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깨끗한 강물이 흐르고 전체적으로 고전미가 넘쳐났다.이준혁은 창밖을 쳐다보는 윤혜인에게 말을 걸었다.“너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이 꽤 예쁘네.”“예전에 인하 마을에 와본 적이 있어요?”윤혜인의 질문에 이준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역시나 전혀 기억을 못하는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눈빛이 조금 울적해졌다.하긴, 그땐 그녀가 겨우 열세 살 소녀였으니 기억이 안 날 수밖
순간, 이준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매년 임세희의 생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챙겨줬는데 올해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그때 당시 이준혁이 더러운 일을 목격했을 때도 임세희의 생일날이었다. 그날 망연자실한 이준혁은 얼음장 마냥 차가운 호수에 빠져버렸고 임세희가 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준 것이다.그래서 매년 임세희의 생일날이면 이준혁은 아무리 바빠도 그녀와 함께 생일을 보냈다.이때, 임세희가 이준혁의 옷소매를 살짝 당겼고 이준혁이 밀어내지 않자 그녀는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나 오후 세시부터 여기서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곧 겨울에 진입할 쌀쌀한 날씨에 임세희는 얇은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코는 빨갛게 얼어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불쌍해 보였다.이준혁은 손을 슬쩍 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짓이야?”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린 채 불쾌한 듯 말했지만 임세희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 말투는 분명히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말투다.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추위속에 서있은 보람이 있다.임세희는 고개를 살짝 돌려 차 안에 앉아있는 윤혜인을 보며 의기양양했다.저 나쁜 계집애가 준혁 오빠를 끌고 묘지로 간 것도 분명히 준혁 오빠의 동정을 유발하려고 한 짓이 확실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준혁 오빠는 오늘 그녀와 함께 생일을 보낼 것이니까.이때, 곁에 서있던 임씨 아주머니도 말을 보탰다.“준혁 도련님, 저희 아가씨가 아침 다섯시부터 일어나서 직접 케익을 만들었습니다. 도련님과 함께 먹고 싶다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몰라요.”“그래서 이렇게 당신 아가씨가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걸 보고만 있은 거예요?”이준혁이 임씨 아주머니를 보며 별다른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임씨 아주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정이 남아있지만 임씨 아주머니에게는 전혀 없으니 실수로 이준혁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도련님, 제가 아가씨를 말리긴 했는데…”임씨
말을 마친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추위에 떨고 있던 윤혜인의 작은 손은 이준혁 덕분에 너무 따듯했다.이때, 뒤에서 털썩 소리가 들렸다.“어머! 아가씨! 휠체어에서 떨어지셨어요!”임씨 아주머니의 다급한 외침과 임세희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이준혁은 걸음을 살짝 멈칫했다가 다시 차로 향했다.한편, 이준혁이 차에 올라타려고 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임세희는 오열하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나 너무 아파. 제발 가지 마… 나 무릎이 너무 아파… 제발 날 버리고 가지 말아줘… 오늘 내 생일이란 말이야… 내 생일이라고…”임세희는 한번 또 한번 이준혁에게 그녀의 생일이 뭘 의미하는지 각인해주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목숨으로 얻어낸 약속이다.결국 걸음을 멈춘 이준혁은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며 뭔가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의 안타까운 눈빛을 못 본 척하며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잘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오늘 그가 임세희를 위해 돌아선다면 앞으로도 같은 상황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그럼 윤혜인은 평생 임세희의 트라우마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이때, 고개를 숙인 이준혁은 가볍게 대답했다.“그래.”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운전석으로 올라탔지만 윤혜인은 차에 오르지 않았다.“먼저 가요.”“뭐 하려고?”“임세희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이준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별장 방향으로 향했고 멍하니 쳐다보던 임세희는 충격을 받은 듯 소리를 질렀다.“준혁 오빠…!”하지만 이준혁이 타고 있던 차는 멈추지 않았다.온몸이 굳어버린 임세희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멀어져가는 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녀는 오늘 분명 필승의 자신감으로 이곳에 온 건데! 준혁 오빠가 어떻게 그녀의 생일을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임세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윤혜인 탓이라고 생각됐고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주문을 건 탓에 이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