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살짝 열려 있었기에 이준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나중에 돌아가면 너 보러 갈게. 지금은 못 가.”상대방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준혁은 조용히 듣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윤혜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샤워 가운을 두르던 윤혜인은 오늘 입을 옷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입었던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으며 더군다나 그 변태의 손길이 닿았기에 다시는 입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준혁이 방으로 들어왔고 전혀 눈치채지 못한 윤혜인은 그의 정장 외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그의 옷이 너무 큰 탓에 소매는 그녀의 무릎까지 닿았으며 그 모습은 마치 어른 옷을 몰래 입은 어린아이 같았다.이준혁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그의 존재를 발견한 윤혜인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말했다.“입을 옷이 없어요.”서울이었다면 이준혁은 사람을 시켜 새 옷을 준비했을 텐데 이곳은 옷을 살 곳마저 마땅치 않았다.“저랑 같이 집에 옷 가지러 가요.”윤혜인은 옷을 챙기긴 했지만 전부 집에 두고 왔다.“이대로 나가려고?”이준혁은 윤혜인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안 돼요?”윤혜인은 곁에 있던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준혁의 커다란 옷이 무릎까지 덮었으니 차에 타도 춥지는 않을 것이다.“뭐 문제 있어요?”윤혜인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목에 퍼렇게 멍든 자국만 제외하면 전혀 상관없었다. 이준혁 저 남자는 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딸기를 심는다고 하던데 저 남자는 그녀의 목에 포도를 심어버렸다.입을 삐죽거리던 윤혜인은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를 살짝 가렸다.이때, 이준혁이 뒤에서 그녀를 와락 안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뭘 가리고 있어?”윤혜인은 그와 말을 걸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했다. 이준혁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살짝 누르더니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을 보탰다.“이렇게 발가
“안 돼. 아이와 이혼만 빼고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어.”이준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윤혜인도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이 두가지를 제외하면 저도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생긴 거지? 어젯밤에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더니.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침대에 눕혀 화가 풀릴 때까지 뽀뽀를 하고 싶었다.한편, 이준혁의 무릎에 앉은 윤혜인은 그의 다리 근육들이 너무 딱딱해서 엉덩이가 불편했다.“저랑 옷 가지러 집에 가기 싫으면 저 혼자 다녀올게요.”말을 하던 윤혜인이 벌떡 일어나자 이준혁은 그녀를 덥석 잡아당기더니 샤워 가운으로 그녀를 꼼꼼하게 둘러싼 뒤 어깨에 업고 호텔을 나섰다.저택으로 돌아온 윤혜인은 옷을 챙기러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엉망진창이 된 방을 보자 어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이준혁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가지 마요.”윤혜인을 힐끗 쳐다본 이준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물렀다.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윤혜인은 문을 비스듬히 열어 두었기에 이준혁은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의 얇고 아름다운 등을 볼 수 있었다.이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동공이 흔들렸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윤혜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이준혁은 부서진 문을 수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 찾다가 나사를 발견하게 되었고 옷소매를 위로 거두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나사를 박기 시작했다.은은한 햇빛이 이준혁의 옆모습에 비춰 들었고 조각 같은 외모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수려했다.윤혜인은 나사를 박던 이준혁을 보며 살짝 놀라웠다. 그가 이런 일까지 할 줄 알다니.“이리와.”이때, 이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윤혜인에게 말했고 윤혜인이 다가가자 그는 나사 하나를 그녀에게 건넨 뒤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이준혁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한 방울의 땀은 윤혜인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괜히 부끄러워진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대충
이준혁은 윤혜인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내가 말한 첫경험은 남이 남긴 음식을 처음 먹는 거랑 설거지를 처음 하는 거였는데?”“일부러 그러는 거죠?”이준혁은 지금 일부러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이때, 이준혁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날을 톡 치더니 눈썹을 들썩였다.“하지만 그것도 사실이지.”“뭐가요?”“내 첫경험이 너라는 말.”이준혁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지만 윤혜인은 귀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첫날밤이 떠올랐고 그날 처음 잠자리를 해본 이준혁은 익숙하지 않은 듯 매우 빨리 끝났다.그때 당시 두 사람은 서로 너무 어색했고 술을 마셨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둘 다 정신은 멀쩡한 상태였다.윤혜인도 첫경험이었지만 책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이준혁이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준 덕에 허리만 조금 쑤실 뿐이었다.그날 밤, 왠지 울적해 보이는 이준혁의 표정을 보고 나서 윤혜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채게 되었다.그때 윤혜인은 꽤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선 그룹의 대표가 여색을 즐기지 않는 이유가 스킬이 부족해서라니.이준혁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윤혜인을 보며 그때 당시 얼굴이 퍼렇게 질려버렸다.술을 마신 데다가 첫경험이라 그는 갈팡질팡했던 것인데 상대방이 오해라도 할까 봐 이준혁은 바로 다시 윤혜인을 침대에 눕혔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었다.한편, 이준혁은 넋이 나간 채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윤혜인의 표정에 그녀가 또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고 순간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졌다.그는 이를 악문 채 윤혜인을 살짝 꼬집었다.“옛날 생각하지 마. 딱 그때 한 번이었어.”그 뒤로 이준혁은 단 한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이준혁에게 안겨 있던 윤혜인은 불편한 듯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좀 비켜봐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그
윤혜인이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했지만 이준혁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잡더니 그대로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윤혜인은 두 손으로 이준혁의 가슴을 몇 번이나 밀어냈지만 되레 더욱 꽉 잡히고 말았다.그러다가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이준혁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의 턱을 들고 있던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역시 이래야 좀 화가 덜 나네.”“이준혁 씨… 아니…”윤혜인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내려고 하자 이준혁은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윤혜인이 쓰러지려고 하자 그제야 그녀를 놔주었다.“계속 말 할 거야?”이준혁은 눈썹을 살짝 들썩이며 물었다. 그녀가 한마디라도 더 하면 그는 다시 키스를 할 게 뻔하기에 윤혜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조용해지자 만족스럽게 웃던 이준혁은 그녀를 차에 태우며 말했다.“이제 집에 가자.”차에 앉은 윤혜인은 거친 입맞춤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에 안전 벨트를 묶어주는 이준혁에게 반항조차도 하지 못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모든 걸 나한테 맡겨.”그의 한마디에 꽁꽁 얼어붙었던 윤혜인의 마음은 또다시 격렬하게 흔들렸다.하지만 이번엔 마음 한 켠에 자꾸 불안했으며 구름 위에 둥둥 떠있다가 추락하는 듯한 이 기분이 너무 무서웠다.가는 길 내내 윤혜인은 자지도 않고 창문에 기대 바깥 풍경을 쳐다보았다.인하 마을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깨끗한 강물이 흐르고 전체적으로 고전미가 넘쳐났다.이준혁은 창밖을 쳐다보는 윤혜인에게 말을 걸었다.“너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이 꽤 예쁘네.”“예전에 인하 마을에 와본 적이 있어요?”윤혜인의 질문에 이준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역시나 전혀 기억을 못하는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눈빛이 조금 울적해졌다.하긴, 그땐 그녀가 겨우 열세 살 소녀였으니 기억이 안 날 수밖
순간, 이준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매년 임세희의 생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챙겨줬는데 올해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그때 당시 이준혁이 더러운 일을 목격했을 때도 임세희의 생일날이었다. 그날 망연자실한 이준혁은 얼음장 마냥 차가운 호수에 빠져버렸고 임세희가 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준 것이다.그래서 매년 임세희의 생일날이면 이준혁은 아무리 바빠도 그녀와 함께 생일을 보냈다.이때, 임세희가 이준혁의 옷소매를 살짝 당겼고 이준혁이 밀어내지 않자 그녀는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나 오후 세시부터 여기서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곧 겨울에 진입할 쌀쌀한 날씨에 임세희는 얇은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코는 빨갛게 얼어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불쌍해 보였다.이준혁은 손을 슬쩍 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짓이야?”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린 채 불쾌한 듯 말했지만 임세희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 말투는 분명히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말투다.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추위속에 서있은 보람이 있다.임세희는 고개를 살짝 돌려 차 안에 앉아있는 윤혜인을 보며 의기양양했다.저 나쁜 계집애가 준혁 오빠를 끌고 묘지로 간 것도 분명히 준혁 오빠의 동정을 유발하려고 한 짓이 확실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준혁 오빠는 오늘 그녀와 함께 생일을 보낼 것이니까.이때, 곁에 서있던 임씨 아주머니도 말을 보탰다.“준혁 도련님, 저희 아가씨가 아침 다섯시부터 일어나서 직접 케익을 만들었습니다. 도련님과 함께 먹고 싶다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몰라요.”“그래서 이렇게 당신 아가씨가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걸 보고만 있은 거예요?”이준혁이 임씨 아주머니를 보며 별다른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임씨 아주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정이 남아있지만 임씨 아주머니에게는 전혀 없으니 실수로 이준혁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도련님, 제가 아가씨를 말리긴 했는데…”임씨
말을 마친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추위에 떨고 있던 윤혜인의 작은 손은 이준혁 덕분에 너무 따듯했다.이때, 뒤에서 털썩 소리가 들렸다.“어머! 아가씨! 휠체어에서 떨어지셨어요!”임씨 아주머니의 다급한 외침과 임세희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이준혁은 걸음을 살짝 멈칫했다가 다시 차로 향했다.한편, 이준혁이 차에 올라타려고 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임세희는 오열하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나 너무 아파. 제발 가지 마… 나 무릎이 너무 아파… 제발 날 버리고 가지 말아줘… 오늘 내 생일이란 말이야… 내 생일이라고…”임세희는 한번 또 한번 이준혁에게 그녀의 생일이 뭘 의미하는지 각인해주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목숨으로 얻어낸 약속이다.결국 걸음을 멈춘 이준혁은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며 뭔가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의 안타까운 눈빛을 못 본 척하며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잘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오늘 그가 임세희를 위해 돌아선다면 앞으로도 같은 상황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그럼 윤혜인은 평생 임세희의 트라우마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이때, 고개를 숙인 이준혁은 가볍게 대답했다.“그래.”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운전석으로 올라탔지만 윤혜인은 차에 오르지 않았다.“먼저 가요.”“뭐 하려고?”“임세희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이준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별장 방향으로 향했고 멍하니 쳐다보던 임세희는 충격을 받은 듯 소리를 질렀다.“준혁 오빠…!”하지만 이준혁이 타고 있던 차는 멈추지 않았다.온몸이 굳어버린 임세희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멀어져가는 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녀는 오늘 분명 필승의 자신감으로 이곳에 온 건데! 준혁 오빠가 어떻게 그녀의 생일을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임세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윤혜인 탓이라고 생각됐고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주문을 건 탓에 이
윤혜인의 차갑게 얼어붙은 눈이 그녀를 향해있었다.또 모른척하려고? 그녀에게도 그런 이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과거에 그녀는 너무 온순하고 착했기에 그들이 외할머니에게까지 함부로 했던 것 같다.그들은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살고 있는데 왜 평생 선량하게 살아온 할머니만 고통받아야 하는가?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손녀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떠나야 했다.할머니는 그녀를 걱정하며 씩씩하게 잘 살아내라며 당부했다.오늘부터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정상적인 교류가 통하지 않으니 별수 없다.윤혜인의 서늘한 눈빛에 임세희는 소름이 돋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이 뭘 할 수 있지? 증거 있어?”윤혜인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준혁 와이프로서 당신의 행정을 말한다면 당신이 내 남편을 유혹했다는 증거를 찾아줄 거야. 그때 되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네티즌들이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임세희는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고얀년이 언제 이렇게 똑똑해 진 거지?저 두려움 없는 표정을 보니 이전에 온화함은 확실히 모두 거짓이었다.준혁오빠가 저 기세등등한 모습을 봤어야 했다.아무 말도 못하는 임세희를 보던 옆에 있던 임향숙은 윤혜인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아가씨와 도련님은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냈고 사이도 좋았어요. 분명 당신이 아가씨와 도련님의 사이가 나빠진 틈을 타서 도련님을 유혹해 침대에 오른 거잖아요!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우리 아가씨를 제삼자로 말하는 거죠? 당신이야말로 제삼자잖아요!”윤혜인은 임향숙의 뻔뻔한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그녀처럼 낯 두껍고 사상이 삐뚤어진 사람은 처음이다.윤혜인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그녀는 임향숙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유부남을 유혹한 짓을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요. 아주머니의 사상이 특이한 것을 보니 임씨 가문은 정말 개방적인가봐요.”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조롱하는 윤혜인에
“저리 안 꺼져!”임세희는 인상을 쓰며 소리 질렀다.“이 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당장 오빠더러 와서 보라고 해.”임향숙도 보란 듯이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고....아이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죠? 머리도 아프고 얼굴도 아파 죽겠네...” 윤혜인은 가식적인 그들을 더 이상 마주하기 싫어 자리를 뜨려 했다.그러자 앞쪽에서 이준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윤혜인은 씁쓸했다. 예상대로 그의 마음속엔 여전히 임세희가 살고 있었다.이준혁을 발견한 임세희는 구세주를 만난 듯이 재빨리 휠체어에 탄 몸을 움직이며 그에게로 향했다.그리고 멈춰서 이준혁에 울면서 불평하기 시작했다.임향숙도 불쌍한 얼굴로 임세희의 맞장구를 쳤다.주인과 하인의 모습은 비참해 보였다.반면에 윤혜인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마치 괴롭힌 사람처럼 보였다.가까이 다가온 그는 무덤덤하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송휘재는 그에게 묻는 줄 알고 급히 대답했다.“전 방금 도착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임향숙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빨갛게 부은 얼굴로 이준혁에게 하소연했다.“도련님, 혜인 아가씨가 방금 우리 아가씨에게 도련님을 유혹한 제삼자라며 인터넷에 폭로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저 좋은 말로 타일렀는데 이렇게 손찌검을 당했어요. 제 얼굴은 아파도 상관없지만 우리 아가씨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참을 수 없잖아요? 도련님이 대신 단단히 혼 내주셔야 해요?”“무슨 말로 타일렀죠?”이준혁이 물었다.“네?”임향숙은 당황했다.윤혜인이 아가씨를 괴롭혔다고 그녀가 말했는데 먼저 아가씨를 걱정해야 하지 않나?왜 자신이 한 말을 궁금해하는 걸까?임향숙은 말을 더듬었다.“그, 그게....”이준혁은 굳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뭐라고 타일렀는지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요?”임향숙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 떨며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 임세희는 급히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줌마는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
그가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려는 이유는 단순히 공부를 시키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육연주가 집에 머무르는 상황에서는 이런 일들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어쨌든 육연주는 서씨 가문의 며느리였다.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진태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변형된 보호책이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속내를 이지애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이지애는 말이 많고 입이 가벼운 편이라 자칫 잘못하면 이 사실이 새어나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육경한은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방금 하려던 일을 떠올리고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아내’라는 이름이 떴다. 얼마 전 혼인신고를 마치자마자 그는 소원의 이름을 이렇게 저장해 두었다.그러나 전화는 한참 동안 울리기만 했고 끝내 받는 사람이 없었다.육경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얼굴이 굳어진 그는 내선 전화를 눌러 소종에게 지시했다.“병원에 가서 확인해. 사모님 아직 거기 계신지.”소종은 곧바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한편.이지애는 육경한이 전화를 끊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그녀는 육경한의 새 아내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자신과 딸을 외면할 정도로 말이다.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곧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령했다.“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아내.”서울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기반을 닦아온 이지애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의 눈에는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어디 한번 보자고. 그 여자한테 대체 어떤 능력이 있길래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는 건지.’...병원.진아연은 여전히 응급실에서 치료 중이었다.소원은 문밖에서 서현재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괜찮아?”그녀가 물었을 때 서현재
“경한아, 연주 좀 도와줘... 부탁이야.”이지애의 입장에서는 소원이 고소를 철회하는 일쯤은 육경한에게 한마디면 충분한 일이었다.육경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이지애는 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배경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분명 어딘가 치밀한 술수를 써서 그 몰래 낳은 아이를 빌미 삼아 육경한을 유혹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지애는 그 여자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육경한은 이미 가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지금 그녀들과 육경한의 관계는 어떻게 봐도 피보다 진한 관계였다.육경한이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때문에 그녀들에게 등을 돌릴 리 없다고 믿었다.그럴 리가 없었다.한참 후, 육경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나, 연주가 전에 피아노에 관심 많다고 했잖아요. 제가 이미 국제적인 피아노 대가 이엘 선생님과 연결해 뒀습니다. 연주 나중에 외국에서 그분께 배우면 성격도 좀 가라앉을 겁니다.”이지애는 이 일은 이미 확실히 해결됐다고 여겼다.육경한이 이렇게 말했으니 연주를 돕겠다는 뜻 아니겠는가?그녀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경한아, 내가 뭐랬어? 너는 정말 연주에게 최고야. 연주도 너 이 삼촌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존경한다고. 피아노 공부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연주를 당장 풀어줘야지.”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 확신하며 이지애는 기분이 좋아졌다.하지만 육경한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이어졌다.“누나, 연주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행동이 늘 이렇게 무모한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번엔 좀 반성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이지애는 육경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연주를 풀어줄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경한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방금 연주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어?”“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육
이지애는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뭐라고? 결혼을 했다고? 난 왜 몰랐지?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가 있어? 그럼 민아 씨는?”해외여행을 갓 마치고 돌아온 이지애는 육경한과 방민아의 파혼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여전히 방민아가 육경한의 운명적인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지금까지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 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고 방민아는 자신과 딸 육연주를 기쁘게 해주는 데 능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방민아가 육경한의 아내가 되는 건 그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지애는 방민아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우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육경한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결혼은 조촐하게 했어요. 그냥 혼인신고만 한 거라서 누구도 몰라요.”그는 더 이상 뭐든 요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나이가 않았다. 무엇보다 설령 자신이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다고 해도 소원이 이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두 차례나 자멸했던 소원은 서울에서 이미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결혼식을 대대적으로 치르면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소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게 분명했다.그건 마치 소원을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세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하여 육경한은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지애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경한아, 그게 어떻게 작은 일이니? 네 결혼이 작은 일이라니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야? 민아 씨가 아니라도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결혼하면 안 되지 않니?”“아무 여자가 아니에요.”육경한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그 사람은 내가 오래 고민하고 선택한 사람이에요.”속으로는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걸 사촌 누나 이지애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그는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다.“연주 문제는 이미 확인했어요. 연주가 폭행에 가담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약물을 쓴 건 아니었으니 처벌은 그렇게 무겁지 않을 거예요. 아마 15일
이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소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소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래도 오랜 시간 육경한을 보좌하면서 익힌 대로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린 말은 모두 털어놓았다.“대표님, 어쨌든 전 사모님이 서현재 도련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둘이 약속해서 만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모님께서 꽤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소종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대표님, 사모님께 그렇게 잘해주는데 사모님은 그걸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아요. 서 도련님하고는 아직도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정말...”“그냥 우연히 만난 거겠지. 별일 아니야.”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는 모습에 놀랐다.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없었어요. 다만 제 생각엔 사모님이 대표님과 결혼했으면 서현재 도련님과는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서현재는 다른 남자들과는 성격이 달랐다.그는 과거에 소원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애매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원이 육경한과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결과였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소종은 이런 상황이 결국 다시 불씨가 될까 걱정했다.“게다가 대표님, 제가 보기엔 서현재 도련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소종은 말을 이어갔다.“사람을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깊어요. 누구를 봐도 같은 표정이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사모님과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굴더군요. 마치 나무 인형 같았습니다.”“서씨 가문에서 전에 서현재 도련님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결국 미우 그룹의 복지와 대우는 업계에서 최상위급이었고 요즘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런 직장을 떠나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소종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방씨 가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그는 육경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남자는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했고 그 모습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대표님, 방 대표님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밖에 퍼진 소문들은 전부 방씨 가문에서 흘린 겁니다.”소종이 말했다.“알고 있어.”육경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소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는 참다못해 물었다.“이대로 소문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육경한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고 소종은 답답한 듯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퍼뜨린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직원들조차 집중을 못 하고 일에 소홀해지고 있어요.”“그게 더 좋지 않나.”육경한은 담담히 말했다.소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육경한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깨끗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냉정히 말했다.“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부 팀을 정리할 수 있잖아. 방씨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라는 거야.”소종은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그동안 두 가문이 협력하며 방씨 가문과 연결된 사람이 그룹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일부는 방씨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익을 공유하며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다.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걸러내겠다는 것이었다.“그럼 방씨 가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소종이 물었다.“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기회를 줬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