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이준혁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렸다.그는 윤혜인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의사의 증언과 검사 보고서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저 남자까지 보고 있으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이준혁의 망설임을 눈치챈 윤혜인은 마음에 큰 돌이 박힌 듯 너무 답답했다. 그녀가 진실을 얘기해도 역시나 그는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래도 윤혜인은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했다. 이러다가 한구운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당신이 날 안 믿어주는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이 아이는 정말 당신 아이가 맞아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구운을 보며 울먹였다.“그러니까 제발 선배가 치료부터 받을 수 있게 해줘요.”윤혜인이 매번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구운이 그녀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지금은 그녀 때문에 이렇게 다치기까지 하다니.윤혜인은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한편, 이를 지켜보던 이준혁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확 낚아채더니 그녀의 고개를 돌린 채 싸늘하게 말했다.“윤혜인, 지금 저 남자를 위해 또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을 힘껏 밀어내며 가까스로 말했다.“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한구운은 고통스러운 윤혜인의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그 손 놔요! 당신은 남자도 아니에요!”“그래요, 그래요!”싸늘하게 웃던 이준혁은 곁에 있던 경호원에게 명령을 내렸다.“때려. 죽어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멈추지 말고 때려!”이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한구운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했다. 구타 소리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만 한구운은 윤혜인이 걱정할까 봐 끝까지 이를 꽉 깨물고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참고 있었다.“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윤혜인은 오열하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경호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이준혁에게 싹싹 빌었다.“이준혁 씨, 제발 그만하라고 해요
선배의 도움도 받지 말고 폭우속에서 죽을 때까지 서있으라는 건가?“그러니까 네 말은 저자가 네가 임신한 걸 알고 네 남편인 척했던 게 다 오해라는 거야?”이준혁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꼬았다. 윤혜인은 그런 이준혁을 보며 그가 전혀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이준혁 씨, 이 모든 건 처음부터 오해였어요. 선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믿지 않을 뿐이에요.”씁쓸하게 웃던 윤혜인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 말을 한 사람이 임세희 씨였다면 당신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믿었겠죠.”임세희가 언급되자 이준혁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여기서 세희가 왜 나와?”밤은 깊었고 바람도 차가웠다. 윤혜인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언제든지 날아갈 잎새 같았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냥 궁금해서요. 왜 이준혁 씨는 임세희 씨를 그렇게 굳게 믿고 있으면서 내 말은 한마디도 믿어주지 않는 건지. 2년이에요. 이준혁 씨, 2년이라는 시간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엔 부족해요?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 더러운 사람이에요?”실망 가득한 윤혜인의 목소리에 이준혁은 가슴에 뭔가 박힌 듯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이준혁도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상황에서 만약 상대방이 윤혜인이 아닌 임세희였다면 그는 그녀를 위해 혼수까지 챙겨줬을 것이다.하지만 윤혜인에 대해서만은 그럴 수가 없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몰래 보는 것만으로도 이준혁은 그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이 순간, 이준혁은 설마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그는 자신이 평생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살게 될 줄 알았다.한편, 눈앞에 있는 이준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윤혜인은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생기지 않았다.지금까지 벌어진 일들로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그녀가 바람을 피워서 창피하다고 생각된 것뿐이다. 윤혜
품에 안긴 윤혜인은 종이장 마냥 가벼웠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순간 긴장한 이준혁은 겁이 나서 손바닥에 힘조차 주지 못했다.“왜 그래? 어디 아파?”윤혜인은 그의 손목을 잡더니 힘겹게 말을 꺼내며 애원했다.“배… 배가 너무 아파요… 제발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말을 하던 윤혜인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이준혁은 바로 그녀를 안아 들더니 병원안으로 들어갔다.“이준혁 씨.”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한구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 좀 잘 지켜줘요.”걸음을 멈춘 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대꾸했다.“당신 걱정이나 해요. 다시 한번 내 여자를 넘보면 그땐 손 하나 부러트리는 걸로 안 끝납니다.”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기에 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이내 이준혁은 병원안으로 들어갔고 뒤따라가던 경호원은 상처투성이가 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그들은 죽일 각오로 때렸는데 한구운은 한쪽 팔이 빠진 것 말고는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다니. 경호원은 한구운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숨긴 게 아닌가 의심됐다.하지만 한구운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한구운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운전할 사람 한 명 보내. 그리고 그 사람한테 얘기해. 내가 그 일을 동의한다고.”전화를 끊은 한구운은 다리를 쫙 뻗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약점이 생긴 남자는 휘두르기 너무 쉽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준혁이 벌써 저렇게 미쳐 날뛰다니. 그럼 나중에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르면 과연 이준혁은 어떻게 될까?어두운 불빛속에 눈을 감고 있던 한구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생각만 해도 너무 흥미진진했다.한편, 병원에서.응급실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보며 주치의가 이준혁에게 물었다.“이준혁 씨, 몸에 부작용이 가장 적은 약물로 낙태를 진행할까요?”“일단 어른부터 살려요. 어른에게 문제없으면 그때…”말을 하던 이준혁
흠칫하던 윤혜인이 되물었다.“뭐가 아니에요?”이때,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304호 윤혜인 환자분 약물 교체해 드릴게요.”들어오던 간호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 놀라다가 이내 빠르게 달려와 이준혁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환자분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몰라요? 그렇게 자극하면 어떡해요! 얼굴도 반반하게 생기신 분이 여자한테 손찌검을 해요?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를 겁니다!”말을 하던 간호사는 살짝 겁이 났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기세 등등한 모습에 고고한 자태까지 자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때리는 걸 보고도 방관할 수는 없다. 환자가 겨우 깨어났는데 이렇게까지 폭력을 쓰는 걸 보면 집에서도 주먹을 자주 휘두르는 게 분명하다.간호사는 자신의 딸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윤혜인을 보며 순간 연민이 두려움을 이겨버렸다.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환자분 괴롭히지 말고 당장 병실에서 나가요!”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진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화가 잔뜩 났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병실을 나섰다.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혜인 손등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이때, 이준혁의 말이 마음에 걸린 윤혜인은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제 뱃속의 아이는…”간호사는 알코올 솜으로 손등을 닦으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문제없습니다. 다만 환자분 몸 자체에 영양가가 많이 없어서 아이의 발육이 조금 늦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환자분께 영양액을 수액하는 겁니다.”윤혜인은 간호사의 손을 덥석 잡더니 흥분한 듯 다시 물었다.“그럼 제 뱃속의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씀인가요?”“그럼요.”간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며 대답했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윤혜인은 자신의 귀가 믿어지지 않았다.이때, 간호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남편분이 참 너무하네요. 아침에 젊은 간호사들이 남편분이 잘생기고 아내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이준혁은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죽을 받아먹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언제 이혼할 건지 물을 줄은 몰랐다.그는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코웃음 쳤다.“배부르니까 이제 다시 싸울 힘이 생긴 거야?”“이준혁 씨, 이런 싸움이 우리에게 아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진 만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우린 이런 무의미한 싸움과 의심을 계속 하기보다는 평화롭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나아요.”“평화롭고 깔끔하게 헤어지자고?”이준혁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곱씹자 윤혜인은 희망이라도 본 듯 얼른 말을 보탰다.“준혁 씨가 이혼을 동의하기만 하면 어떤 조건을 걸든 전 상관없어요.”뱃속의 아이는 이제 윤혜인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고 위로였기에 그녀는 절대 이 아이를 잃을 수 없다. 만약 이준혁이 정말 아이를 빼앗으려고 마음먹으면 그녀는 이선 그룹의 법무팀을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다.그럼 그녀는 부양권을 받을 수 없다.이준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윤혜인, 이렇게까지 나를 벗어나고 싶은 거야? 한구운 그 남자에게 가고 싶어?”윤혜인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배와 상관이 없다는 말을 입이 아프게 반복했는데 이준혁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그냥 그가 생각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은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덥석 잡더니 차갑게 말했다.“윤혜인, 너 너무 단순한 거 아니야? 내가 네 소원대로 이뤄지게 내버려둘 거 같아?”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은 울먹이면서 물었다.“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어떻게 하길 바라냐고?”차갑게 코웃음을 치던 이준혁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넌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돼. 괴롭더라도 참아.”윤혜인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무력하게 말했다.“서
기껏 보러 왔는데 윤혜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자 이준혁은 또다시 화가 났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불을 홱 거둔 뒤 침대위로 올라갔고 깜짝 놀란 윤혜인은 굳어버린 표정으로 물었다.“왜 올라와요?”“그럼? 설마 내가 어젯밤에 침대 곁에 계속 앉아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이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윤혜인은 거부감이 확 들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렇게까지 감정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같은 침대에 눕는다는 건 너무 불편했다.침대에는 어느새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찼다.“씻었어요?”이준혁은 윤혜인의 물음에 흠칫했다. 병실 욕실은 너무 불편했기에 그는 집에서 씻고 왔다.윤혜인 곁으로 슬쩍 다가간 이준혁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냄새 맡아볼래?”너무 가까이 붙어있은 탓에 윤혜인은 향기를 정확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씻고 온 게 분명하다. 이 남자 몸에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이때, 이준혁의 뜨거운 입김이 윤혜인의 귓가에 쏟아졌고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병실 침대에서 야릇한 짓을 했던 게 떠올라서 어느새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좀 옆으로 가면 안 돼요?”병실 침대가 작은 사이즈는 아닌데 이준혁이 올라오니 왠지 어린이 침대처럼 작게 느껴졌다.“안 돼.”이준혁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기에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저 내일…”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일 너랑 같이 외할머니 보러 갈 거야.”윤혜인은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이준혁이 언제부터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보기 시작한 거지?내일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7일째 되는 날이기에 윤혜인은 외할머니를 보러 가고 싶었다.그런데 이준혁도 같이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침묵이 흐르던 그때, 이준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외할머니 일은 내가 잘못한 게 맞아.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돌아왔을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이 다시 한번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준혁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어떻게 된 일이에요?”이준혁이 다급하게 묻자 임씨 아주머니는 엉엉 울면서 대답했다.“아가씨가 일어나자마자 어지럽다고 하시더니 계단을 내려올 때 정신을 잃고 굴러 떨어졌어요.”“구급차는 불렀어요?”“네.”이내 차량 스피커로 임세희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흑…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다리고 너무 아프고… 준혁 오빠 어디 있어요? 나 준혁 오빠 보고 싶어요…”혀 짧은 임세희의 목소리에 윤혜인은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으며 속이 울렁거렸다.이준혁처럼 여자를 많이 겪어보지 않은 남자만 이 사실을 모르고 이런 수법에 번번히 넘어갈 것이다.“어느 병원이에요?”이준혁의 물음에 윤혜인은 자신이 이 차안에 계속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상대방에게 쫓겨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내려가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에 차문을 연 윤혜인은 길거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핸드폰이 망가진 관계로 윤혜인은 기차표를 예매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갈 생각이었다.이때, 뒤에 서있던 고급 외제차가 거대한 엔진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었고 그 모습에 윤혜인은 씁쓸하게 웃었다.역시 그녀의 추측대로 버림을 받은 것이다.임세희 이름 세자는 그녀가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지만 이미 여러 번 버림을 받은 덕분에 이제는 큰 감흥도 없었으며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이내 윤혜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췄고 윤혜인은 자연스럽게 차문을 열고 택시에 타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택시 뒤에서 귀를 자극하는 경적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에 떠났던 고급 외제차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차량 앞 유리창을 통해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창문을 내리더니 윤혜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리와.”멍하니 서있던 윤혜인 뒤로 다른 손님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재촉했다.“저기요, 타실 거예요 말 거예요? 안
한편, 병원에서.임세희는 병실 침대에 기대서 실실 웃으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그녀는 일부러 무릎과 손바닥에 찰과상까지 만들었다.많이 아프긴 하지만 윤혜인 그 계집애를 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임세희가 아침 일찍 이준혁이 윤혜인과 함께 그녀 외할머니를 보러 마을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녀는 절대 윤혜인 뜻대로 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이때, 병실 문 앞에서 복도를 지켜보고 있던 임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가씨, 오고 계십니다.”임세희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내려놓은 채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준혁의 비서 송휘재가 병실에 들어서자 임씨 아주머니는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휘재 씨, 준혁 도련님은요?”송휘재가 헛기침을 살짝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대표님은 지금 많이 바쁘셔서 저에게 임세희 씨를 보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누워있던 임세희는 송휘재의 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언성을 높였다.“뭐라고?”조금 전의 말을 다시 반복한 송휘재는 마지막에 말을 조금 보탰다.“대표님이 임세희 씨에게 최고의 의사를 붙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임세희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도 이준혁이 대충 비서만 보낼 줄은 몰랐다.임세희는 곁에 놓인 컵을 들어 송휘재에게 던지더니 소리를 질렀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준혁 오빠를 데려왔어야지!”재빨리 피한 송휘재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대표님의 결정을 제가 좌우지할 수는 없습니다.”이때, 임씨 아주머니가 중재에 나섰다.“휘재 씨,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저희 아가씨가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아주머니, 저놈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저 버러지 같은 놈은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자식이에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송휘재가 말했다.“맞아요. 전 임세
“경한아, 연주 좀 도와줘... 부탁이야.”이지애의 입장에서는 소원이 고소를 철회하는 일쯤은 육경한에게 한마디면 충분한 일이었다.육경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이지애는 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배경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분명 어딘가 치밀한 술수를 써서 그 몰래 낳은 아이를 빌미 삼아 육경한을 유혹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지애는 그 여자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육경한은 이미 가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지금 그녀들과 육경한의 관계는 어떻게 봐도 피보다 진한 관계였다.육경한이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때문에 그녀들에게 등을 돌릴 리 없다고 믿었다.그럴 리가 없었다.한참 후, 육경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나, 연주가 전에 피아노에 관심 많다고 했잖아요. 제가 이미 국제적인 피아노 대가 이엘 선생님과 연결해 뒀습니다. 연주 나중에 외국에서 그분께 배우면 성격도 좀 가라앉을 겁니다.”이지애는 이 일은 이미 확실히 해결됐다고 여겼다.육경한이 이렇게 말했으니 연주를 돕겠다는 뜻 아니겠는가?그녀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경한아, 내가 뭐랬어? 너는 정말 연주에게 최고야. 연주도 너 이 삼촌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존경한다고. 피아노 공부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연주를 당장 풀어줘야지.”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 확신하며 이지애는 기분이 좋아졌다.하지만 육경한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이어졌다.“누나, 연주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행동이 늘 이렇게 무모한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번엔 좀 반성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이지애는 육경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연주를 풀어줄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경한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방금 연주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어?”“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육
이지애는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뭐라고? 결혼을 했다고? 난 왜 몰랐지?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가 있어? 그럼 민아 씨는?”해외여행을 갓 마치고 돌아온 이지애는 육경한과 방민아의 파혼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여전히 방민아가 육경한의 운명적인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지금까지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 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고 방민아는 자신과 딸 육연주를 기쁘게 해주는 데 능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방민아가 육경한의 아내가 되는 건 그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지애는 방민아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우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육경한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결혼은 조촐하게 했어요. 그냥 혼인신고만 한 거라서 누구도 몰라요.”그는 더 이상 뭐든 요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나이가 않았다. 무엇보다 설령 자신이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다고 해도 소원이 이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두 차례나 자멸했던 소원은 서울에서 이미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결혼식을 대대적으로 치르면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소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게 분명했다.그건 마치 소원을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세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하여 육경한은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지애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경한아, 그게 어떻게 작은 일이니? 네 결혼이 작은 일이라니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야? 민아 씨가 아니라도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결혼하면 안 되지 않니?”“아무 여자가 아니에요.”육경한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그 사람은 내가 오래 고민하고 선택한 사람이에요.”속으로는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걸 사촌 누나 이지애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그는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다.“연주 문제는 이미 확인했어요. 연주가 폭행에 가담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약물을 쓴 건 아니었으니 처벌은 그렇게 무겁지 않을 거예요. 아마 15일
이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소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소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래도 오랜 시간 육경한을 보좌하면서 익힌 대로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린 말은 모두 털어놓았다.“대표님, 어쨌든 전 사모님이 서현재 도련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둘이 약속해서 만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모님께서 꽤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소종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대표님, 사모님께 그렇게 잘해주는데 사모님은 그걸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아요. 서 도련님하고는 아직도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정말...”“그냥 우연히 만난 거겠지. 별일 아니야.”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는 모습에 놀랐다.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없었어요. 다만 제 생각엔 사모님이 대표님과 결혼했으면 서현재 도련님과는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서현재는 다른 남자들과는 성격이 달랐다.그는 과거에 소원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애매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원이 육경한과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결과였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소종은 이런 상황이 결국 다시 불씨가 될까 걱정했다.“게다가 대표님, 제가 보기엔 서현재 도련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소종은 말을 이어갔다.“사람을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깊어요. 누구를 봐도 같은 표정이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사모님과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굴더군요. 마치 나무 인형 같았습니다.”“서씨 가문에서 전에 서현재 도련님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결국 미우 그룹의 복지와 대우는 업계에서 최상위급이었고 요즘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런 직장을 떠나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소종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방씨 가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그는 육경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남자는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했고 그 모습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대표님, 방 대표님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밖에 퍼진 소문들은 전부 방씨 가문에서 흘린 겁니다.”소종이 말했다.“알고 있어.”육경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소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는 참다못해 물었다.“이대로 소문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육경한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고 소종은 답답한 듯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퍼뜨린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직원들조차 집중을 못 하고 일에 소홀해지고 있어요.”“그게 더 좋지 않나.”육경한은 담담히 말했다.소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육경한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깨끗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냉정히 말했다.“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부 팀을 정리할 수 있잖아. 방씨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라는 거야.”소종은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그동안 두 가문이 협력하며 방씨 가문과 연결된 사람이 그룹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일부는 방씨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익을 공유하며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다.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걸러내겠다는 것이었다.“그럼 방씨 가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소종이 물었다.“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기회를 줬어. 하지만
경호원들은 방현수를 봐주지 않았다. 그의 고성이 사무실 문밖으로 쫓겨났고 아무리 소리쳐도 문 안으로는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방현수는 멈추지 않고 쉰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육경한! 우리 민아한테 이렇게 할 수는 없어! 민아가 얼마나 자네를 좋아했는데, 저 여자가 우리 민아를 이렇게 망가뜨렸어! 자네가 민아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 경호원들에게 부축받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조차 희미하게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경호원들은 그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잘못하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일이 더 커질 우려가 있었다.대표 사무실이 있는 층에서는 직원들이 하나둘씩 수군대기 시작했다.“방 대표님 보니까 진짜 안쓰럽네. 육 대표님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니야?”“조용히 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육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뭐 어때, 자기가 한 행동인데 누가 뭐라 하면 안 돼? 난 차라리 이런 냉정한 사람 밑에서 일 안 한다. 잘리면 잘리는 거지.”“그러게. 방씨 가문이 예전에 위기에 처했을 때도 육 대표님이랑 미우 그룹을 버리지 않았잖아. 특히 민아 씨, 육 대표님한테 정말 헌신적이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진짜 불쌍하다.”“육 대표님 정말 과거는 전혀 생각도 안 하시는 분이네. 요즘 밖에서 우리 회사 소문 장난 아니야. 회사 대표는 냉혈한이라느니 직원들도 뭐 그리 좋은 사람들 아니라고 하더라.”직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외부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받았던 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그 와중에 다른 의견도 있었다.“근데 그 민아 씨도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 내가 전에 본 영상에서는 육 대표님 친척인 그 명문가 딸 육연주랑 같이 여자 하나 때리는 장면 있던데.”“근데 민아 씨는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하던데? 그 여자가 자기한테 남자 뺏어갔다나 뭐라나.”“누가 알겠어. 우리는 내막을 잘 모르니까 괜
‘이건 협박이잖아. 전부 육경한이 이미 써먹고 남긴 수작일 뿐이지.’그는 사람과 협박을 주고받으며 말싸움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실질적인 상업 전쟁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말 몇 마디로 강한 척하며 겁을 주는 방식은 방현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역시나 방현수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들까지 망하게 하겠다는 건가?”‘돌봐주긴 뭘!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육경한 이 녀석, 결국 내 자식과 손주들을 협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성대하게 열어주겠다고? 파렴치한 놈, 칼로 사람의 가슴에 직접 찔러 넣는 것처럼 아픈 곳만 골라 찌르다니!’분노한 방현수는 가슴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이놈의 자식, 내가 못할 줄 알아? 내 나이에 이 늙은 뼈다귀가 뭘 더 아끼겠어? 네가 그 여자 때문에 친척이고 뭐고 다 끊겠다면 난 자네 미우 그룹 대문 앞에서 죽어버리겠어! 정말 나한테 망신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정말 모든 사람들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하지만 육경한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해보시죠. 다만 그 뒤로는 대표님의 사생자들조차 돌볼 수 없게 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방현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가 알기로만 해도 서울에 세 명, 아르틴국과 리셀국에도 각각 있고 유학 중인 손주들도 세 명이 있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결혼하고 자식 낳는 걸 지켜보지도 못하고 떠나실 건가요?”그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아마 대표님께선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육경한이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조사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방현수는 말을 잃었다.심지어 사생자들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니, 육경한은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육경한! 자네 정말 그 미친 여자를 위해 우리 방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거야?”방현수는 분노에
육경한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방현수의 말은 듣는 사람을 우롱하는 태도로 육경한을 바보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오랜 시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단단히 단련된 육경한은 누구보다도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제가 대표님을 존경하는 건 사실입니다. 대표님은 저희보다 먼저 사업을 시작하셨고 경험도 풍부하시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 대표님께서도 충분히 이익과 손실을 따져본 후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때 대표님께서 그 프로젝트를 받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제 죄책감을 조금 더 이용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프로젝트를 수락하신 순간, 저희 관계는 돈과 물건이 모두 깨끗이 정리된 상태가 된 겁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가져간 이익은 투자 대비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됩니다. 지금 와서 이 일을 다시 꺼내 드시는 건 저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신다면 저도 공공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할 겁니다. 상관없거든요.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육경한의 긴 발언은 방현수를 완전히 말문 막히게 만들었다.그는 육경한이 평소 강단 있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침착한 목소리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하지만 방현수도 노련한 사람이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그는 표정을 비틀며 말을 꺼냈다.“육경한, 자네 말은 내가 잘못했다는 뜻인가? 내가 늙은 몸으로 직접 찾아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나온다니... 나더러 죽으라는 건가?”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방현수는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쳤다.그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바로 죽음을 빌미로 하는 협박이었다.그는 자신의 나이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방씨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방현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민기는 어찌 됐
육경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통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키가 큰 체구와 균형 잡힌 몸은 우뚝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서른 살이라는 남자의 가장 좋은 시기에 성숙함과 재력, 자신감까지 더해져 그의 매력은 한층 빛났다.그는 알고 있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또 하나의 배은망덕하다는 낙인이 찍힐 거라는 것을.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왜냐하면 방씨 가문을 등지는 또 다른 한쪽에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그의 곧은 자세와 당당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응접실 안에서 방현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육 대표, 요즘은 당신 얼굴 보기가 이렇게나 힘들어졌네.”육경한은 그에게 다가가며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찾아오시니 미우 그룹으로서는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언제든 들러주시면 좋겠습니다.”방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여기 앉아 있는다고 해서 방씨 가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우리 방씨 가문에는 고작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둘 다 감옥에 들어갔어. 이봐, 육 대표.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육경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전 방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해칠 이유도, 의도도 없습니다.”하지만 방현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그 여자가 한 짓이나 네가 한 짓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야? 자네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여자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어? 자네는 그냥 작게라도 손을 써서 그 여자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야 했어.”육경한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그 영상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이 말은 완
소원은 진아연의 방 한가운데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 사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진이었다.게다가 사진 위에는 자신을 저주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이로써 소원은 선미가 진아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원한도 없는데 왜 소원을 저주했겠는가?밖에서 집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분노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던 중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아! 귀신이다! 아아아악!”소원은 놀라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비명 소리가 난 곳은 화장실이었다.화장실로 다가간 소원은 욕조 안에 누워 있는 선미를 발견했다.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선미의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고 욕조의 물은 그녀의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차 있었다.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물이 코까지 차올라 익사할 뻔한 상황이었다.그 끔찍한 장면은 누구라도 충격과 공포를 느낄 만큼 끔찍했다.하지만 소원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그리고 집주인 아주머니를 부축해 집 밖으로 나왔다.집 안은 발을 딛을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아주머니를 계단에 앉혔다.아주머니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셔츠의 단추를 풀어준 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진아연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어 숨을 확인했다.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이 상황을 보며 소원은 진아연 스스로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대체 누구의 원한을 샀길래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걸까?’소원은 진아연을 미워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악인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경찰은 현장을 조사했고 진아연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소원과 집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차를 타고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했다.한편, 미우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