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향기는 그 남자에게서만 나는 것이었다.‘설마...’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윤혜인은 창가로 달려갔다.아래에는 한 남자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 주변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그 외의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오빠...”윤혜인이 막 소리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좀 끌어 올려 주지 않을래?”윤혜인은 옆을 돌아보았다.이준혁이 두 손으로 교회 옆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눈을 두 번 깜빡여보았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이준혁이었다!조금 전 그가 원진우를 붙잡고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었다!윤혜인은 십여 미터 높이에 있는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옆에 있는 남자를 다시 바라봤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너무나 위험한 행동이었어. 미친 게 분명해...’그때 곽경천이 올라와 윤혜인을 밀어내고 이준혁을 십자가에서 끌어 올렸다.무사히 땅에 내려오자 곽경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히 성공했군.”사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계획이었다.한 명은 아래에서 원진우의 주의를 끌고 다른 한 명은 위에서 습격을 가하려는 전략이었다.하지만 이 계획은 너무나도 위험했다.윤혜인이 말했다.“오빠, 엄마는...”하지만 윤혜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경천이 말을 잘랐다.“걱정 마. 엄마는 이미 찾았고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고 계셔. 곧 가서 뵐 수 있을 거야.”가장 위험하다 생각하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윤혜인은 윤아름을 차 근처 덤불 속에 숨겨 두었었다.그녀는 일부러 흔적을 남겨 원진우를 교회로 유인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이제 남은 건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곽경천 일행이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이준혁까지 올 줄은 몰랐다.윤혜인의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바닥에 내던져진 지팡이를 보며 그 남자가 얼마나 다급해 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조금 전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이준혁은 윤혜인이 고통 속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는 다급히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혜인아, 혜인아...”윤혜인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눈앞에 서 있는 이준혁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를 꼭 끌어안았다.그러고는 흐느끼며 말했다.“준혁 씨,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남자는 윤혜인이 자신을 꼭 안고 있는 동안, 그녀를 더 단단히 안아주며 떨리는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괜찮아, 나 괜찮아...”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러 번 윤혜인을 달래며 이준혁은 그녀가 조금씩 진정되기를 기다렸다.하지만 그녀의 울먹임을 멈출 줄을 몰랐다.“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다음엔 절대 하지 마요...”그러자 이준혁은 그녀의 귀 옆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봐. 나 이렇게 멀쩡하잖아.”자신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이준혁의 태도에 윤혜인은 화가 났다.“다음에도 그런 일이 또 있게 된다면 나 진짜 준혁 씨랑 다시는 안 볼 거예요. 농담 아니에요!”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 다음부터는 정말 신중하게 행동할게.”그러나 속으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너랑 관련된 일은 예외고.’이준혁은 윤혜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절대 침착할 수 없었다.그녀가 곁에 없으면 매 순간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으니 말이다.잠시 후,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혜인아, 나랑 함께할 생각 있어?”‘함께’라는 말이 마치 끝없는 힘을 지닌 주문처럼 들렸다.이 말을 다시 듣자 윤혜인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지기 시작했다.‘함께’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만이 아닌 고난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돌아온 이후, 이준혁은 모든 고난을 혼자 견디며 윤혜인에게는 그 고난의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아니,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윤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준혁을 사랑하고 있었다.윤혜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준혁 씨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것뿐일 수도 있죠.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아보는 게...”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가볍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도 두 입술이 강렬하게 얽혀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바닥 난방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공기는 그들의 숨결을 더욱 뜨겁게 달궜고 공기 속에는 짙은 긴장감과 설렘이 가득 찼다.이준혁의 단단한 손이 윤혜인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가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녀에게 다가섰다.처음에 입맞춤은 따뜻하고 차분했지만 점차 이준혁의 강한 의지가 실려 진하게 변해갔다.그에게 이끌려 정신을 놓아버린 윤혜인이 무의식적으로 가벼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윤혜인이 막 회복한 게 아니었다면 이준혁은 이 순간을 더 오래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그가 마침내 자신을 놓아주었을 때,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려 이준혁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붉게 물든 작은 얼굴이 물방울이 맺힌 복숭아처럼 빛났다.이준혁은 굳게 다물어진 입을 조금 풀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알겠어? 이건 단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게 아니야.”그러고는 진지하게 덧붙였다.“난 너를 원해. 매 순간, 항상.”그러자 얼굴이 더 붉어진 채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또... 또 그 소리예요?”그녀는 수줍어하며 남자를 나무랐고 이준혁은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농담이 아니야. 비록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내 인생에서 너만이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는 다시 단단한 팔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빨갛게 달아오른 작은 얼굴이 이준혁의 어깨에 기대진 채 윤혜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고요한 침묵이 이어진 후, 이준혁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혜인아, 나는 수년간 너를 잃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살았어. 한 번, 또 한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혼란스러웠어. 네가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게 아니라 순수한 사랑을 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어젯밤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작은 몸으로 웅크리고 있던 네 모습이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돌아. 지금 네가 이렇게 멀쩡히 내 앞에 앉아 있는데도 난 여전히 두려워.”이준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에 섞인 떨림을 가라앉히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내가 너를 찾지 못했거나 늦게 도착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그 결말이 너무 두려워.”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정말 말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설령 네가 나를 가엾게 여긴다고 해도 괜찮아.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너와 아이들을 지켜줄 거야.”이제 와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는 것을 이준혁은 잘 알고 있었다.어제는 윤혜인에게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했던 그가, 지금은 그녀의 동정을 간절히 구하고 있으니 말이다.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었다.심지어 그 강한 자존심도 윤혜인의 앞에서는 망설임 없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그는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혜인아, 이기적인 부탁인 건 알지만 너한테 부탁하고 싶어...”잠긴 듯한 이준혁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다시 나와 함께해주면 안 돼?”방 안에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윤혜인은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윤혜인은 생각했다.‘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내가 마음이 부족해 보였나? 그래서 자신감을 잃었나?’곧 윤혜인은 이준혁의 허리를 감싸며 손끝으로 그의 어깨뼈를 만졌다.뼈마디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깡마른 몸이었다.그곳에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싸우며 생긴 수많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이 사실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가슴은 미칠 듯이 아파왔다.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던 남자는 천천히 그녀를 꼭 붙잡았던 손을 풀었다.그러고는 숨을 가다듬으며 가능한 침착한
이준혁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윤혜인이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살짝 얹으며 막았다.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예전에 내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고 준혁 씨를 거듭 거절했던 건 어쩌면 본능적인 자기방어였던 것 같아요.”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더 일찍 깨달았다면 덜 상처받을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차분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말했다.“난 준혁 씨랑 함께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요.”“이건 동정이 아니에요. 그저... 내가 준혁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그러자 이준혁은 윤혜인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녀를 자신의 몸에 깊이 새겨버리겠다는 듯이 강한 포옹이었다.윤혜인이 실제로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이준혁은 그녀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이 세상에 방법이 있다면 내 마음속을 보여주고 싶어. 그 안은 온통 너로 가득 차 있고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야.”이 말과 함께 그는 진심이 담긴 입맞춤을 그녀에게 전했다.이번 입맞춤은 서두르지 않았고 완벽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그 안에는 끝없는 갈망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입술과 혀가 얽히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며 공기는 더욱 짙어졌다.다리가 아직 불편했기에 이준혁은 윤혜인과 함께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이어갔다.곧이어 이준혁이 윤혜인의 환자복을 풀려는 순간, 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막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흉터가 있어서 보기 흉해요.”윤혜인은 제왕절개로 출산했다.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흉터가 남지 않을 수는 없었다.게다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라, 의사에게 문의해보니 흉터 연고를 최소 반년 이상 사용해야 눈에 띄는 효과가
꿈같던 시간이 지나고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혜인아, 사실 내 다리가 완치 불가능한 건 아니야.”잠시 멍하니 이준혁을 바라보던 윤혜인의 귀에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훈이가 이미 나를 위해 인공관절 치환 수술을 준비해 줬어. 그리고 그 성공률도 이미 검증된 상태야.”“뭐라고요? 진짜예요?”윤혜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진짜야. 일주일 전에 수술 계획을 확정했어. 봄이 오면 바로 수술할 수 있을 거야.”“일주일 전이요?”윤혜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며 물었다.“그럼 주 비서님은 알고 있었어요?”이준혁은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알고 있었어.”“그런데도 나한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결정적인 순간, 윤혜인은 일부러 더욱 과장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주 비서한테는 내가 벌을 줄 거야.”이준혁이 태연하게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를 탄페니아로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데에는 주훈의 역할이 컸음을 그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만약 윤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자신의 감정을 계속 숨겼더라면 이준혁은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또다시 그녀를 놓쳤을 것이다.“됐어요...”윤혜인은 주훈의 선의도 이해했다. 어쩌면 주훈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관계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자존심을 중시하는 두 사람이 함께하려면 외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벌하지 말고 나 대신 고맙다고 전해줘요.”윤혜인이 조용히 말했다.소중한 시간을 다행히 이제는 더 이상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만족해했다.“준혁 씨.”“응?”“내 손 꽉 잡아요. 이제 더는 놓으면 안 돼요?”“응. 이번에는 평생 놓지 않을게.”그렇게 며칠 동안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함께 다녔다.매번 윤아름을 만나고 돌아와 병실에 있을 때면 지독히도 붙어있었다.이준혁은 병실 한쪽을 아예 사무실로 만들, 윤혜인이 쉬는
이런 사랑이라면 아마 누구도 이준혁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회의를 끝낸 이준혁은 노트북 화면에 비친, 잠에서 깬 윤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휠체어를 조작해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깼어? 왜 나 안 불렀어?”윤혜인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방해되는 거 아니야.”이준혁은 그녀에게서 컵을 받아들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좀 더 잘래?”이 말에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안 자요. 나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기력이 좀 부족한 건데 더 자면 안 돼요.”“그래. 그럼 자지 말자.”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그 눈빛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을 잡은 채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준혁 씨, 우리 어머님 보러 가요.”윤혜인이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번 일 끝나면 우리 서울로 돌아가서 아기들 데리고 어머니 보러 가자.”문현미는 현재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다.이천수로부터 문현미를 지키기 위해, 이준혁은 중상을 입은 그녀를 다른 개인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고 얼마 전 그녀는 깨어났다.아직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문현미는 자신의 손자, 손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문현미는 이준혁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를 친아들처럼 보살피고 가르쳤다.과거 문현미는 아들 이준혁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윤혜인을 내쫓은 일을 한평생 후회하며 살아왔다.하지만 다행히 그 납치 사건 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름이와 윤혜인을 구하며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어냈다.때문에 문현미를 무조건 용서할 수 없는 악인으로만 볼 순 없었다.그녀는 단지 아들을 사랑한 어머니였고 조금 이기적일 뿐이지 수많은 어머니들의 모습과 다르지
이 일은 윤혜인을 놀라게 했다.과거 원진우를 그토록 강하게 거부하던 모습과는 달리, 윤아름이 이신우를 신뢰하는 모습은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무엇보다 이신우가 폭탄 같은 소식을 전했다.그가 오랜 시간 키워온 아들 이하진이 사실 윤혜인의 친동생이라는 것이다.그런데 윤혜인과 이하진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윤아름이 원진우에게 강제로 당해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이하진은 어머니인 윤아름을 서울로 데려가 자신과 이신우가 함께 돌보겠다고 제안했고 곽진명과 곽경천 모두 이에 동의했다.그들의 목표는 하나, 윤아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서울로 가는 것이니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었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윤아름 스스로도 원했다는 점이었다.윤혜인에게도 의견을 물었을 때 그녀는 동의했다.기억을 잃은 윤아름이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윤혜인은 그녀가 평생 동안 과거의 감옥 같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또한 이하진과 이신우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말했듯 서울에 있으니 언제든지 살펴볼 수 있고 말이다.그 후 경찰 쪽에서 대표를 보내 병원에 찾아와 윤혜인 일행에게 감사를 전했다.그들의 협조 덕분에 국제 범죄자인 원진우를 검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원진우의 죄는 살인뿐만 아니라 뇌물공여 및 수수, 국제 비밀 거래를 통한 사익 추구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원진우의 잔당은 경찰에 의해 모두 일망타진되었다.그의 유골은 아무도 인수하지 않았고 이하진 역시 마지막으로 그를 보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하여 윤혜인은 경찰에게 그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라 했다.모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곽경천은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윤혜인과 이준혁은 가장 먼저 문현미가 요양 중인 요양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아름이만 데려갔다.쌍둥이 아기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돌보기 힘들 것 같아 이후 문현미를 집으로 모신 뒤에 보여드리기로 했다.아름이는 문현미를 보자마자 기쁘게 달려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