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이라면 아마 누구도 이준혁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회의를 끝낸 이준혁은 노트북 화면에 비친, 잠에서 깬 윤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휠체어를 조작해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깼어? 왜 나 안 불렀어?”윤혜인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방해되는 거 아니야.”이준혁은 그녀에게서 컵을 받아들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좀 더 잘래?”이 말에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안 자요. 나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기력이 좀 부족한 건데 더 자면 안 돼요.”“그래. 그럼 자지 말자.”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그 눈빛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을 잡은 채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준혁 씨, 우리 어머님 보러 가요.”윤혜인이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번 일 끝나면 우리 서울로 돌아가서 아기들 데리고 어머니 보러 가자.”문현미는 현재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다.이천수로부터 문현미를 지키기 위해, 이준혁은 중상을 입은 그녀를 다른 개인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고 얼마 전 그녀는 깨어났다.아직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문현미는 자신의 손자, 손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문현미는 이준혁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를 친아들처럼 보살피고 가르쳤다.과거 문현미는 아들 이준혁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윤혜인을 내쫓은 일을 한평생 후회하며 살아왔다.하지만 다행히 그 납치 사건 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름이와 윤혜인을 구하며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어냈다.때문에 문현미를 무조건 용서할 수 없는 악인으로만 볼 순 없었다.그녀는 단지 아들을 사랑한 어머니였고 조금 이기적일 뿐이지 수많은 어머니들의 모습과 다르지
이 일은 윤혜인을 놀라게 했다.과거 원진우를 그토록 강하게 거부하던 모습과는 달리, 윤아름이 이신우를 신뢰하는 모습은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무엇보다 이신우가 폭탄 같은 소식을 전했다.그가 오랜 시간 키워온 아들 이하진이 사실 윤혜인의 친동생이라는 것이다.그런데 윤혜인과 이하진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윤아름이 원진우에게 강제로 당해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이하진은 어머니인 윤아름을 서울로 데려가 자신과 이신우가 함께 돌보겠다고 제안했고 곽진명과 곽경천 모두 이에 동의했다.그들의 목표는 하나, 윤아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서울로 가는 것이니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었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윤아름 스스로도 원했다는 점이었다.윤혜인에게도 의견을 물었을 때 그녀는 동의했다.기억을 잃은 윤아름이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윤혜인은 그녀가 평생 동안 과거의 감옥 같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또한 이하진과 이신우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말했듯 서울에 있으니 언제든지 살펴볼 수 있고 말이다.그 후 경찰 쪽에서 대표를 보내 병원에 찾아와 윤혜인 일행에게 감사를 전했다.그들의 협조 덕분에 국제 범죄자인 원진우를 검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원진우의 죄는 살인뿐만 아니라 뇌물공여 및 수수, 국제 비밀 거래를 통한 사익 추구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원진우의 잔당은 경찰에 의해 모두 일망타진되었다.그의 유골은 아무도 인수하지 않았고 이하진 역시 마지막으로 그를 보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하여 윤혜인은 경찰에게 그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라 했다.모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곽경천은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윤혜인과 이준혁은 가장 먼저 문현미가 요양 중인 요양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아름이만 데려갔다.쌍둥이 아기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돌보기 힘들 것 같아 이후 문현미를 집으로 모신 뒤에 보여드리기로 했다.아름이는 문현미를 보자마자 기쁘게 달려
문현미는 충격을 받았다.윤혜인이 설령 자신을 용서한다 해도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윤혜인은 과거의 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고 오히려 함께 아기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문현미는 감동에 벅차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고마워, 혜인아... 정말 고맙다...”문현미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그러자 윤혜인은 이런 문현미를 안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저랑 아름이도 어머님께 감사드려요.”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 뒤, 문현미는 처음의 어색함을 잊고 한결 편안해졌다.윤혜인이 진심으로 자신을 용서했음을 깨달은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기쁨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윤혜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하여 문현미는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준혁아, 너는 도대체 언제 혜인이에게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해줄 생각이니?”윤혜인은 깜짝 놀랐고 이준혁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문현미는 두 사람의 반응만 봐도 이 주제에 대해 둘 다 한번도 말을 꺼낸 적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내가 말했지? 혜인이에게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해주지 않으면 시댁에서 절대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계획 빨리 세워. 그렇지 않으면 나도 혜인이가 너한테 이런 대접받는 거 두고 볼 수 없으니까.”이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혜인을 바라보기만 했다.“너 왜 말이 없어? 설마 결혼식을 할 생각이 없는 거야?”“아니에요. 당연히 하고 싶죠. 하지만 혜인이가 원할지 모르겠어서...”이준혁은 결혼식을 간절히 원했다.두 사람은 이미 한 차례 이혼 후 다시 재결합했지만 정작 결혼식은 한 적이 없었다.이전에 있었던 원지민과의 가짜 결혼식도 경찰의 해명을 통해 국제 범죄자를 잡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그 때문에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이준혁은 여전히 ‘황금 싱글남’으로 여겨지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여러 차례의 이별과 재회를 겪으면서 세상에 대놓고 윤혜인이 자신의 아
그때, 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이준혁이 물었다.“목마르지 않아? 여기 밀크티 가게가 있네. 마실래?”윤혜인은 가게 베스트 메뉴가 크림치즈 포도 밀크티라는 것을 보고 눈빛이 반짝였다.이건 윤혜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하지만 수유 중이라 그녀는 오랫동안 끊고 있었다.마셔도 되는지 확신이 없어 그녀는 이준혁을 돌아보며 물었다.“마셔도 돼요?”“당연히 되지.”이준혁은 목발을 짚고 그녀의 손을 잡아 차에서 내렸다.가게 앞에 도착하자 그들은 직원에게 밀크티 한 잔을 주문했다.밀크티가 완성된 후, 이준혁은 그녀를 데리고 공원 벤치에 앉아 함께 음료를 마셨다.윤혜인은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밀크티를 다 마신 뒤, 이준혁이 물었다.“공원 좀 걸어볼래?”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공원을 천천히 거닐었다.그러다 우연히 꽃으로 뒤덮인 공간에 들어서게 되었다.수천 송이의 붉은 장미가 거대한 하트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고 두 사람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윤혜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이 꽃들 정말 너무 예쁜데요?”그러자 이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좋아하면 됐어.”윤혜인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꽃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준혁이 목발을 내려놓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그러고는 반지 상자를 꺼내 열었다.상자 안에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혜인아, 나랑 결혼해줄래?”윤혜인은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제야 그녀는 왜 이준혁이 조금 전 자신의 대답을 막았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금세 눈가가 붉어지더니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결혼할래요.”감격에 찬 이준혁도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번 프로포즈는 전혀 급조된 것이 아니었다.그는 미리 찾아둔 팀을 통해 철저히 준비해 두었고 그녀의 뜻을 확인하는 즉시 실행에 옮길 계획이었다.병원에서 그녀의 의사를 확인한 후, 이준혁은 준비 작
사실 윤혜인은 이준혁이 그 수술을 하는 게 싫었지만 이준혁이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그 수술은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어떤 상황이 닥치든 난 너희를 버리고 떠나지 않아.”시간은 윤혜인의 불안함도 모르고 야속하게 흘러가 결국 이준혁이 수술을 받는 날이 되었다. 윤혜인은 곽아름과 초롱, 그리고 파랑을 데리고 밖에서 이준혁의 수술이 끝나길 바랐다. 들어가기 전 곽아름은 잘생긴 이준혁이 환자가 입는 환자복을 입자 놀라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윤혜인이 한참 달래서야 곽아름은 울음을 그쳤지만 이준혁과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했다. 이준혁이 곽아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아름아, 왜?”“아빠, 왜 수술하는 거예요?”“다음에 아름이 안고 뛰고 싶어서.”곽아름은 예전처럼 이준혁이 안고 뛰는 걸 바라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이 꼭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기에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나지막이 말했다.“그래요. 아빠. 우리 반에도 아빠가 안아주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하지만 한 가족이 늘 함께니까 기분이 좋대요.”곽경천은 곽아름의 이마에 뽀뽀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아름아, 걱정하지 마. 아빠와 엄마는 영원히 네 곁을 지킬 거야.”이내 수술이 시작되었다. 윤혜인이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 모든 게 정상이었다. 이준혁은 수술실에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돌아왔다. 그 뒤로 며칠이 흐르고 김성훈이 와서 예후를 검사하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준혁아. 우리 성공한 것 같아. 너 정말 대단하다. 이걸로 수백수천의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야.”윤혜인은 성공은 뭐고 새로운 삶은 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성훈은 윤혜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마른기침하더니 말했다.“둘이 천천히 얘기 나눠요.”그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윤혜인이 이준혁을 바라봤다. 며칠 사이에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매일 30분 이상 서 있을 수 있었고 몇십 미터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 상황이 하루가 몰라보게 좋아지고 있었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늘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거기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윤혜인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이준혁은 회복이 빨랐다. 수술이 정말 성공적으로 잘된 것 같았다. 비록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지만 걷는 건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하루에 7, 8시간 이상 서 있는 건 문제 될 게 없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윤혜인은 예쁜 드레스를 입었다. 이 드레스는 윤혜인이 직접 그린 설계도였다. 대학 시절에 설계했지만 입을 기회가 없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18살에 설계한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윤혜인은 대기실에서 결혼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그때 대기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윤혜인은 가벼운 걸음 소리를 듣고 비서 도지훈인 줄 알고 이렇게 물었다.“이제 나갈 시간이야?”하지만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윤혜인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하얀 턱시도를 입은 남자는 준수하면서도 점잖았는데 꾸밈새를 보아하니 신랑처럼 보였다.“한구운 씨?”윤혜인이 한구운의 이름을 부르며 경계했다.“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이천수가 잡히면서 한구운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일을 다 인정했지만 나쁜 짓을 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을 리는 없었다. 이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했던 짓거리가 경찰에게 들키면서 경찰에게 수배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윤혜인은 한구운이 외국으로 도망쳤을 줄 알았는데 결혼식에서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너의 결혼식인데 신랑이 되지는 못해도 꼭 와봐야지.”한구운이 덤덤하게 말했다.“한구운 씨, 우리는 서로의 결혼식에 참가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한구운이 웃으며 말했다.“혜인아, 너무 매몰찬 거 아니야? 나 뭐 하러 온 거 아니야.”한구운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한구운이 어떤 사람인지 윤혜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가 굳이 관심하지 않아도 한구운 씨와 관련된 일은 이미 뉴스 사회면에 나오고 있어요.”사실 한구운을 따르던 사람들이 떠나간 건 필연이었다. 이익으로 이어진 관계니 그렇게 끈끈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한구운에게 진심인 이천수는 지금 감옥에 있었다. 다만 갑자기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깨달은 이천수가 한구운을 지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천수가 그런 결정을 한 건 한구운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았다. 두 사람 다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기에 일단 혼자 다 뒤집어쓰고 들어가면 한구운이 밖에서 그를 꺼내줄 기회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천수도 한구운처럼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에야 혼자 감내하길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천수가 한구운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랑에 가치와 조건이 붙을 뿐이었다.윤혜인이 유일하게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서민주였다. 한마음 한뜻으로 한구운을 사랑하고 믿었지만 한구운은 이익을 위해 손수 서민주를 파트너의 침대로 보냈다. 20살이 갓 된 서민주는 한구운이 준 ‘음료수’에 취해 50살이 넘는 아저씨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당했다. 서민주가 깨어났을 때 한구운은 알리바이가 있어 성공적으로 혐의를 벗을 수 있었고 서민주에게 손을 댄 파트너를 감옥에 처넣고 그 파트너가 하던 프로젝트를 앗아갔다. 그리고 서민주에게 자기를 만나려면 불의의 사고를 견뎌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서민주는 한구운을 정말 사랑했기에 꾹 참고 문제 삼지 않았지만 한구운이 그런 말을 내뱉자 하루 만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첫날밤을 다른 사람에게 허망 뺏기고 말았는데 약혼자가 된다는 사람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신을 완전히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오락가락하고 버벅거리기까지 했다. 서민주의 부모님도
윤혜인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안 그러면 경비 부를 거예요.”말하는 동안에 윤혜인은 이미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인 채 핸드폰을 찾으며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한구운은 거울로 윤혜인이 뭘 하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혜인아, 너 어떻게 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너 보러 온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한구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가라니까요?”윤혜인은 한구운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고 문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한구운이 다 봤다면 더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얼른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한구운이 성큼 다가와 핸드폰을 빼앗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아악, 살려주세요.”윤혜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핸드폰을 뺏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며 한구운과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한구운이 느긋하게 윤혜인을 향해 걸어왔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무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도 이미 당했다는 의미였다. 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한구운을 자극하는 건 그릇된 처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윤혜인은 남자와 겨룰 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한구운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인 물컵에 아무렇게나 던져넣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혜인아, 결혼 취소하고 나랑 가면 안 돼?”윤혜인은 내심 당황하며 한구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미쳤어요? 나를 협박해서 억지로 끌고 나간다면 이곳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한구운이 이를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혜인아, 우리는 서로 좋아해서 사랑의 도피를 하는 거지 억지는 아니잖아.”이 말에 윤혜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미 다 준비한 것 같았다. 윤혜인이 사라지면 기자들이 단체로 사랑의 도피라도 했다고 보도할 게 뻔했다. 이런 뉴스가 뜬다면 이선 그룹의 주가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구운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선 그룹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