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준혁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그의 눈이 차갑게 변하더니 입을 열었다.“그건 안 돼요.”그 눈빛이 너무 사나워 임향숙은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은 그렇게 너무한 것도 아닌데 이준혁이 동의하지 않으니, 그녀는 이해되지 않았다.이준혁은 예전에 임세희를 지극히 아끼지 않았던가?비록 침대 옆의 사람이 윤혜인이라지만 이 정도쯤이야 아가씨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지 않는가?분위기는 갑자기 무거워졌다.임세희는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얼굴에 표현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착함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됐어요. 오빠를 힘들게 하지 말아요. 그 사람 성격에 동의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사과만 받기로 해요.”그녀의 말속에는 윤혜인은 소인이고 품격 있는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동시에 이준혁의 호감도 끌 수 있었다.그 몹쓸 년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 급한 것 없다.이 손해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임세희의 너그러움에 이준혁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그가 입을 열었다.“내가 대신 사과할게.”뭐?!임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환청인 줄 알았다.이준혁이 대신 사과하다니!그녀에겐 자격이 없다.그녀는 더 이상 고상한 척할 수 없었다. 그녀는 끝내 울부짖었다.“그 사람에 뺨을 두 번이나 맞았고 나를 밀쳐서 뇌진탕으로 진단받았어. 그런데도 사과 정도 못 해?”임향숙도 합세했다.“너무하시네요. 우리 어르신이 아가씨의 억울함을 알게 된다면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이준혁은 강경하게 대답했다.“어르신께서 의견이 있으시다면 내가 직접 사과할 거예요.”임세희의 눈물이 비 내리듯 흘러내렸다.“내가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난 그저 속상해서 그래. 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어? 괴롭힘을 당해도 가볍게 넘어갈 거야?”“네가 속상해하는 걸 알고 있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약속해.”“됐고 시간도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어.”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이준혁이
눈을 뜬 윤혜인 앞에 온통 흰검회로 가득 찬 낯선 방이 보였다.잔뜩 인상을 쓴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깼어?”한구운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윤혜인은 이마를 만졌다.“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넌 쓰러졌어. 의사는 단지 과로 때문이라며 집에서 조금 쉬면 된다고 했어. 네가 사는 곳을 몰라 우리집으로 온 거야.”윤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외딴 남자의 집에서 깬 사실에 대해 이해해 보려 했다.한구운은 약간 미안한 듯 말했다.“미안해. 부적절한 행동이라 느껴져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어.”한구운의 말에 윤혜인이 오히려 더 어쩔 바를 몰랐다.선배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바닥에서 잠들었을 것이다.그녀가 가볍게 말했다.“괜찮아요. 고마워요. 선배.”야윈 그녀의 모습에 한구운은 마음이 아팠다.“내가 도착했을 때 너의 남편이 어떤 여자를 안고 떠나는 걸 봣어. 그...”눈썹을 치켜세운 한구운이 덧붙였다.“사이가 안 좋은 거야?”잠시 침묵하던 윤혜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됐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한구운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쉬고 싶다면 지금 데려다줄게.”그녀는 돌아가겠다고 했다.날이 어두워졌으니,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함께 있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한구운은 신사답게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그리고 차에 오른 후 병뚜껑을 딴 물병을 건넸다.“고마워요.”윤혜인은 한모금 들이키고 컵홀더에 넣었다.한참을 달린 후 차가 조금씩 막혔다.한구운이 상황을 살펴보니 앞쪽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그는 천천히 운전하며 해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말재주가 좋았던 터라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그녀도 즐거워했다.재미있는 구간에서는 박장대소했다.한구운은 그녀의 명랑한 모습을 힐끔 보았다. 마치 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고 한눈에 이 후배를 알아보았다.앞쪽을 응시하고 있는 그가
도로에 차들이 적어 이제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아마 차가 평온하게 달려서 윤혜인은 잠이 쏟아졌던 것 같다.임신으로 잠이 많아졌다. 견뎌보려 했지만 결국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 회색 벤츠가 천천히 멈춰 섰다.한구운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차 시동만 껐다.그는 에어컨을 적당한 온도에 놓고 여자를 바라보았다.윤혜인은 대학 시절보다 성숙된 모습이었다. 그땐 볼살이 빠지지 않은 귀여움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선명한 턱선으로 한층 고급스러워졌다.순수함이 어지럽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 남자의 이성을 자극했다.한구운의 눈빛이 짙어졌다.기다란 손가락이 코에 걸린 안경테를 살짝 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물병을 집어 목을 축였다.그 물맛이 입술과 혀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유독 물맛이 꿀맛이었다.차창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다.여자는 뒤척이며 깨려 했다.한구운은 갑자기 몸을 기울고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 자세가 너무 친밀해 밖에서 봤을때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 같았다.때마침 윤혜인이 깼다.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남자의 손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그녀는 멈칫했다.“선배...”막 깬 그녀는 어린양처럼 어리둥절했다. 한구운의 심장이 겉잡을 수없이 뛰기시작했다.그는 손을 거두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머리카락이 상처에 닿을 것 같았어.”“고마워요.”윤혜인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임세희가 가방으로 흠집 낸 상처가 있었다.한구운은 대신 차 문을 열어주었다.바람이 너무 세서 그녀를 위해 바람을 막아주었다.윤혜인은 오늘 너무 많이 도와준 선배가 감사했다.예의상 안으로 들여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일찍 쉬어.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돌아갈게.”한구운이 적절한 타이밍에 대신 입을 열었다.“오늘 고마웠어요. 선배.”“그래. 다음에 봐.”“조심히 돌아가세요.”윤혜인은 손을 흔들었다.
에어백이 터졌다.회색 벤츠의 뒷부분이 뭉개졌고 앞으로 세게 밀려나 난간에 부딪힌 후 멈췄다.차량의 안전 시스템이 제때 작동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복되었을 것이다.반면 검정색 벤틀리는 적절한 그립 덕분에 범퍼가 반쯤 내려앉은 것 외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제자리에 얼어붙은 윤혜인은 손발이 차가워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눌리고 변형된 벤츠의 문이 열렸다.한구운이 천천히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머리를 움켜쥔 그의 손에 피가 흥건했다.정확한 부상 부위는 파악할 수 없었다.경직되어 있던 윤혜인은 재빨리 달려가 한구운의 어깨를 부축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손이 떨렸고 입술도 떨려서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했다.오히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향해 한구운이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괜찮아, 혜인아, 난 괜찮아.”격렬한 충격으로 깨진 유리에 팔이 긁혔고, 다른 부상은 없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그때 벤틀리 문도 열렸다.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는 이준혁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이리 와!”그녀 얼굴에서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당신 미쳤어요?”이준혁의 분노가 정점을 찍었다. 그는 윤혜인의 손목을 낚아채 품 안으로 그녀를 안았다.그리고 한구운에게 으르렁거렸다.“죽고 싶어서 환장했군.”말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어려있다.충격으로 한구운의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물었다.“진짜 혜인이를 아끼나요?”“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 가족이 할머니의 지인이라고 내가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 여자는 내 사람이고 또 선을 넘는다면 오늘처럼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이준혁의 부리부리한 눈은 두 사람의 얽힌 인연을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한구운이 이주혁의 먼 친척임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이 남자 미쳤다고 생각했다.“이준혁!”그녀는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린 한구운은 윤혜인이 혹시라도 괴롭힘을 당할까 봐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주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대표님과 사모님은 사이가 좋으셔서 걱정할 것 없어요. 외부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것을 좋을 것 같네요. 진짜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6촌도 나 몰라라 할 분이에요.”안경 속에 숨겨진 눈에 차가움이 서렸다.잠시 후 그는 자리를 떠났다.차가 떠난 후에야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며 숨을 쉴 공간을 주었다.윤혜인은 온몸이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준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그의 눈은 곧 사람을 집어삼킬 듯 차가웠다.그는 다른 남자 때문에 그에게 맞서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그는 이를 악물었다.결국 험한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다른 남자를 찾은 거야?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다.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이내 후회가 밀려왔지만 방금전 그 장면은 칼이 되어 그를 찌르고 있었다.윤혜인은 그의 소유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 누구도!윤혜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래요! 난 원래 이런 년이에요.”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겠는가!조금만 다정해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윤혜인, 너무 최악이다.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남자를 노려보았다.“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말아요.”이준혁은 그전 냉소를 지었다.“나와 정리하고 선배에게 달려가려는 거겠지.”그는 한발 한발 다가서며 그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 데 그럴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쓰다 버려도 아무도 건들리 못해.”윤혜인은 분노했다.“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난
차는 경산파크에 들어섰다.이곳은 일출을 보기에 완벽한 장소였고, 전에도 왔던 적 있었다.하지만 특정 관람 일을 제외하고는 밤에는 문을 닫았다.이준혁은 S급 패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출입할 수 있었다.그는 차를 언덕에 주차하고 윤혜인을 안은 채 보닛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두 볼을 만지작거리며 이준혁이 물었다.“기억나?”윤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결혼 1주년이 되던 날, 그녀는 답례로 그와 세 번이나 사랑을 나눴었다.지금 그가 자신을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은 무슨 뜻일까?그녀가 잠깐 혼란에 빠져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를 보닛 위에 눌렀다. 등이 차갑고 딱딱한 알루미늄 표면에 닿았다.윤혜인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쳤지만 그의 힘에 의해 더 강하게 눌려버렸다.그의 입술이 이마에서 코끝, 목까지 이동했다. 그의 흔적이 남는 곳마다 얼룩지고 침범당했다.탐욕스러운 키스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은 차가운 욕망으로 들끓었다.“욕구불만이면 나에게 오면 되잖아? 왜 다른 사람을 찾는 거야?”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볼을 가볍게 깨물었다.“다른 놈이 나보다 널 더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좋아하는 자세는 나만 알아.”윤혜인의 표정이 급변했다.그는 그녀를 모욕하고 있었다.그녀는 분노했다.“난 원하지 않아요! 이렇게 날 강요할 수 없어요!”이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았다.“넌 나에게 애원하게 될 거야.”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안아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버튼을 누르자 선루프가 열리고 앞좌석이 앞으로 이동했다. 뒷공간이 훨씬 넓어졌다.하지만 광야에 누워있는 것 같아 더 굴욕적이었다.이준혁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 같았다.당황한 그녀는 옷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난 몸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난...”하마터면 실토할뻔했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바닥에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 ‘한 선배’ 란 세글자가 뜨자 이준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준혁은 그녀의 옷을 정리해 준 훈 그녀를 안고 조수석에 앉혔다.윤혜인은 인형처럼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그가 운전석으로 돌아와 물티슈로 천천히 손을 닦을 때 그녀는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있었고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준혁이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정리 하려하자 그녀는 움찔하며 경계했다.“뭐 하는 거예요!”이준혁이 표정이 굳어졌다.“아직도 화 내고 있는 거야? 사과의 의미로 즐겁게 해줬잖아?”그리고 덧붙였다.“나를 배려한 적 있어? 난 아직 환자야. 몸이 안 좋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참았잖아.”그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울고 있는 그녀때문에 즐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탈진할까 봐 걱정되었다.“당신... 너무 해요! 그 선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거예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콧방귀를 뀌었다.“한 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왜 못 받는단 거야? 내가 없다면 더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었나? 네가 누구의 와이프인지는 기억하고 있는 거야? 매번 딴 놈때문에 싸우고 있잖아. 내가 그 놈을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윤혜인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신이 더 우스꽝스러웠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이 안중에도 없었다.임세희가 사모님 자리를 노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앞에서 임세희를 안고, 쓰다듬으며 심지어 임세희를 위해 그녀를 버리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친구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다.이런 이중 잣대에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는 대꾸한 힘이 없었다.“청월 아파트로 돌아갈래요.”이준혁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보아 그저 침묵했다.차 문을 연 그는 늘 그랬듯이 그녀를 안으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밀쳤다.“만지지 말아요.”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쌓였던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그 통화 때문에 이런 반응이라면 그들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비꼬았다.“아까 만졌
윤혜인은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나를 뭐로 보는 거예요! 당신의 눈에 난 그저 인형인가요? 당신의 욕정을 풀어주고 아무때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했던 거야?”“그게 아니면요? 당신의 행동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잖아요? 오늘 임세희를 마주했다면 이렇게 대할 수 있겠어요?”“아니야!”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처음부터 그는 임세희와 그 어떤 관계도 발생하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은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어떻게 또 잊을 수 있단 말인가?이준혁에게 그녀는 임세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하찮은 존재였다. 그가 임세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 말대로 너무 아껴서이다.너무 소중하면 가장 좋은 것을 해주지 못할 때에는 상처 주고 싶지 않는 법이다.그는 임세희에 제 3자란 타이틀을 안겨주고 싶지 않는 것이다.피식 웃음을 터뜨린 윤혜인은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았다.“어떻게 하면 저를 놓아줄 건가요?”그녀의 말투가 변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자의 목을 졸랐다. 마치 야수처럼 달려들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이런 거면 돼요? 어디서 할래요? 차에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남자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하지만 윤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뜨거운 입김을 불며 정성을 들였다.“하고 나면 놔줘요.”남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는 욕망이 없었고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그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고 싶었다.2년이다, 그녀도 이준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반항할수록 그를 더 자극할 뿐이다.그를 화나게 하면 떠나기가 더 어려워진다.사랑이 아니어도 그녀를 자신 곁에 묶어 두려하고 있다.이혼 전, 편하게 지내려면 그를 만족시켜야 했다.그녀는 그를 놓아주고 그의 앞에서 단추를 풀었다. 하얀 쇄골이 드러나고 점점 아래로 향했다...이준혁의 눈이
방씨 가문에서 지키려 한다 해도 방민아의 인생은 별로 희망이 없었다.육연주는 적게 연루되기도 했고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구치소에 한 달 구금되었다가 나왔다. 육경한이 육연주에게 변호사를 찾아줬지만 육연주 모녀는 이를 소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한사코 거절하면서 일부러 육연주를 구치소에 들여보냈고 육경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하지만 육연주 모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원칙인 방씨 가문은 방민아가 이 지경까지 된 게 다 육연주 탓이라고 생각한 이상 복수를 준비할 것이고 그 후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그다음은 서씨 가문이었다. 육연주가 서씨 가문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오라지 않았지만 서현재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이 점점 이상해진 데다 원래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재벌 집 아가씨라 서씨 가문에 척을 진 사람이 많았다.지금의 서씨 가문은 몰락하게 되었고 서현재가 암 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서씨 가문에서 몰아내긴 했지만 줄곧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그 어떤 미친 생각을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육연주가 계속 서울에서 나댄다면 앙심을 품은 서씨 가문 사람들이 기회를 노리고 복수해 올 수도 있기에 아예 이지애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 피신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모녀는 육경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소원에게 홀려 인사불성이라고만 생각했다.이지애는 끌려가면서 육경한에게 원망을 퍼붓기도 했다.“경한아,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우리가 잘해준 거 다 잊은 거야? 여자 하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를 내치겠다고? 가족인데 어떻게 그래?”사실 잘해줬다고 할 것도 없었다. 상대편에 서서 손가락질하지 않고 돈 몇십만 원 쥐여준 게 전부였다. 이지애도 그때는 살만했기에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었고 조금의 ‘선심’을 베풀었지만 육경한은 갚아야 할 돈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많은 돈으로 보답했다.다만 이지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빚쟁이 대하듯 대했다. 돈이 많으니 이걸로는
“경한아... 억울해서 죽을 것 같구나. 쟤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날 욕하고 때리고...”이지애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소원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고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육경한은 이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지 차가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데려가.”육경한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경호원들은 두피가 저릿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데려가겠습니다.”이지애는 육경한이 자신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해 재빨리 다각 그의 손목을 잡았다.“역시 경한이가 최고야. 우린 가족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저 여자가 우리 남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연주가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살도 많이 빠졌어. 삼촌이 무시한다며 얼마나 울었는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애는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경호원이 왜 나한테 오지?’‘저 천박한 계집애를 끌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잠깐만... 지금 착각하는 모양인데 경한이는 저 여자를 끌어내라고 한 거야. 옆에 있는 변호사까지 묶어서 밖으로 쫓아내.”경호원들은 이지애처럼 눈치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육경한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이지애였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빽이 있다며 대표님과 미우 그룹을 언급하는지...’‘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경호원들은 이지애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를 끌고 나갔다.현실 부정 중인 이지애는 육경한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경한아, 말 좀 해봐. 저 여자 쫓아내려고 했잖아. 나는 네 누나야.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외부인 편을 들 수 있어? 경한아...”이지애는 눈물을 쏟았다.“말 좀 해봐.”“누나.”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진지하게 말했다.“여러 번 말했잖아요. 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대뜸 욕을 바가지째로 먹었다.그럼에도 이지애는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X신들. 멍청하기는.”방금까지 동정심을 느끼던 여자에게 심한 욕을 먹었으니 다들 어이가 없었고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말을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렇게 추잡스러운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그러니까요. 좋은 사람이었다면 구치소에 수감되었겠어요?”이지애는 여론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는지 더욱 흥분했다.“너희들이 뭘 알아. 이 여자가 내 딸을 해쳤고 내 딸은 피해자야. 이 여자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수감될 일도 없었어.”사람들은 더 이상 이지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 지르며 욕하는 모습은 정말 품위가 없어 보였다.“그쪽이 돈 많고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딸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으면 당연히 빼냈겠죠.”이때 한 아주머니가 일침을 놓았다.“맞는 말이에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잡았겠어요? 다 이유가 있는 거지.”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이유 없이 사람을 잡았다면 돈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가 일 순위이겠죠.”“됐어요. 됐어요. 이만하고 다들 들어갑시다. 구경났어요?”아파트 단지 관리자가 달려와 구경 중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그 시각.육경한은 고위급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황진수는 전화를 받고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육경한은 해외의 유명 대기업과 협상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황진수는 몇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회의실로 들어갔다.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육경한에게 다가가 보고 했다.그러자 육경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황진수를 회의석으로 끌어당겼다.“네가 해.”‘지금 나한테 이 중요한 회의를 떠맡기고 간 거야? 내가 이런 걸 할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소원 씨, 괜찮아요?”말을 건넨 사람은 주석훈이었다.오늘 아침 두 사람은 합의 사항을 만들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드는 이지애를 목격했고 소원이 중심을 못 잡고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부축했다.옆에서 발악하던 이지애는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에게 제압되었다.“너 누구야? 감히 날 막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경호원에게 꽉 붙잡힌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다.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당장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미우 그룹 대표가 내 동생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구나. 내 동생이 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서울에서 쫓겨날 거야.” 이지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반응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육경한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경호원들은 육경한과의 관계를 듣고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소원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기에 이지애가 해치지 못하게 손을 묶어두었다.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지애와 소원이 다투고 있을 때 곧바로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이지애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소원을 부축하는 주석훈을 보며 막말을 퍼부었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동생이랑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너는 남자를 꼬시는 게 취미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여튼 개 버릇 남 못 준다니까.”이지애의 말은 듣기 굉장히 거북했고 소원은 방금 한 대만 때리고 멈춘 자신을 원망했다.그 시각 주석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지애를 바라봤다.“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도 처벌 대상입니다. 제 의뢰인이 내연녀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일방적인 모함에 속하고 법에 의거하여 충분히 고소할 수 있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
“우리 연주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 나와요?”이지애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밝은 미래를 가진 그녀의 딸은 구타 사건으로 인해 30일간의 구속 처분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정신 상태에 큰 타격을 입었다.소문에 의하면 구치소 동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늘 부잣집 아가씨로만 살아왔던 육연주는 구치소에 들어가도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러다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말았다.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지켜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었지만 그 버릇을 구치소에서 똑같이 하는 건 죽자고 덤비는 거나 다름없다.게다가 이미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누굴 무서워하겠는가?육경한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기어코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이지애는 모든 자원이 국내에 있다. 해외로 나간다해서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상에 그녀보다 잘나가고 부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해외로 나가면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텐데, 엄마와 딸이 억울함을 당하고만 있겠는가?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고 이혼도 혼자서 처리했다. 서한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지었다.게다가 이혼했음에도 육연주를 해외로 보냈기에 이지애는 분노와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모든 걸 알게 된 소원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스웠다.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쪽 따님이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괴롭혔다면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은 저였겠죠.”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우리 사위한테 치근덕거리지 않았다면 연주가 때렸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죠. 얌치도 모르는 천박한 주제에.”소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증거 있으세요? 제가 서현재
소원이 이야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육경한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자세히 말해줬다.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임신중절 약은 소원의 손에 있었기에 그녀가 약을 먹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다.비록 위협을 한 거나 다름없지만 그 속에 섞인 두려움을 소원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다.어쩌면 더욱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다.이러한 끈기가 보통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분명 빛날 테지만, 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거듭 억압당해 모든 자존심이 닳아 없어졌다.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시들었을 텐데도 소원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썼다.육경한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것 뿐이다.한편으로는 전미영이 빨리 호전되길 원했다. 어머님의 호전이 소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마음을 약하게 하고 이로부터 순진한 아이를 지켜내길 바랐다....소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진찰받았던 의사였다.“선생님, 안녕하세요.”“소원 씨, 오늘 병원에 안 오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3일 동안 약 다 먹으면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할 거예요.”의사의 말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데 약을 먹은 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서 출혈이 발생하고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다.“아직 약을 안 먹었어요.”소원이 말했다.“안 먹었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나요?”의사가 물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민 중이라면 검사를 받는
전미영은 소원의 행동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점점 멍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소원의 복부를 가리키며 여전히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꽃이야... 꽃이 피었어...”소원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에는 하얀 데이지 한송이가 있었다.전미영은 복부 쪽 단추에 달린 작은 데이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소원의 외침은 간병인의 주의를 끌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간병인은 말하는 진미영을 보고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재빨리 달려가 요양원의 의사를 모셔 왔다.소원은 의사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했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검사를 해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런 반응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만약 간단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다만 기억 회복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때때로 많은 기억이 환자의 뇌에 부담을 주어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겠죠?”의사는 전미영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부담일 수 있으니 간단하게 사는 게 최고다.소원은 검사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만신창이된 그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전미영이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병실로 돌아온 소원은 전미영의 곁을 지켰지만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소원은 전미영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는 게 아니라 주차된 은색의 승용차로 향했다.창문을 두드리자 차장이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육경한이다.육경한은 놀라지 않은듯하다. 비서의 차를 타고 있다 한들 예민하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