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검사를 마쳤다. 뇌진탕이 살짝 온 상태라 몸조리를 하면 된다고 했다.짙은 눈빛의 이준혁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임세희는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불빛 아래 더욱 빛나고 있었다.빼어나게 잘생긴 외모는 너무 매력적이라 움직이지 않아도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을 자극했다.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그녀가 절대 놓을 리 없다.그녀의 눈이 또다시 붉어졌다.“오빠... 왜 아직도 아픈 거지? 너무 불편해.”이준혁은 차갑게 물었다.“아직도 불편해? 상훈이를 불러줄게.”“아,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상훈 오빠도 바쁜데 괜히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임세희는 당황했다. 그녀는 김상훈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여우인 그 사람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괜찮다니 다행이야.”이준혁은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다.“오늘 혜인이가 왜 널 때린 거야?”임세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내가 계획한 거라고 나를 모함하고 있어. 오빠,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조사해도 난 상관없어.”임세희는 두렵지 않았다. 파티에서 있었던 일에서 손을 깨끗이 씻었기 때문이다.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일시적으로 흥분했던 것 같아.”눈물을 훔치고 있는 그녀의 행동이 움찔했다.오빠의 말투가 왜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가?그 몹쓸 년은 그녀의 뺨을 두 번이나 때렸고 얼굴은 아직 부어있었다.응당 윤혜인을 끌고 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게 해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는가?그녀는 너무 억울했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그때 임향숙이 들어왔고 임세희를 보고 깜짝 놀라며 한탄했다.“아가씨, 누구한테 맞은 거예요? 어르신께서 아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세상에 언제 한번 이런 일을 당한 적 없고 가족들도 서울에 계시지 않는데 대표님께서 꼭 대신 본때를 줘야 해요!”임향숙은 문밖에서 모든 내용을 엿들었다. 이준혁은 그 몹쓸 년 편을 들고 있었다.하지만 그
하지만 이준혁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그의 눈이 차갑게 변하더니 입을 열었다.“그건 안 돼요.”그 눈빛이 너무 사나워 임향숙은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은 그렇게 너무한 것도 아닌데 이준혁이 동의하지 않으니, 그녀는 이해되지 않았다.이준혁은 예전에 임세희를 지극히 아끼지 않았던가?비록 침대 옆의 사람이 윤혜인이라지만 이 정도쯤이야 아가씨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지 않는가?분위기는 갑자기 무거워졌다.임세희는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얼굴에 표현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착함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됐어요. 오빠를 힘들게 하지 말아요. 그 사람 성격에 동의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사과만 받기로 해요.”그녀의 말속에는 윤혜인은 소인이고 품격 있는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동시에 이준혁의 호감도 끌 수 있었다.그 몹쓸 년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 급한 것 없다.이 손해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임세희의 너그러움에 이준혁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그가 입을 열었다.“내가 대신 사과할게.”뭐?!임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환청인 줄 알았다.이준혁이 대신 사과하다니!그녀에겐 자격이 없다.그녀는 더 이상 고상한 척할 수 없었다. 그녀는 끝내 울부짖었다.“그 사람에 뺨을 두 번이나 맞았고 나를 밀쳐서 뇌진탕으로 진단받았어. 그런데도 사과 정도 못 해?”임향숙도 합세했다.“너무하시네요. 우리 어르신이 아가씨의 억울함을 알게 된다면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이준혁은 강경하게 대답했다.“어르신께서 의견이 있으시다면 내가 직접 사과할 거예요.”임세희의 눈물이 비 내리듯 흘러내렸다.“내가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난 그저 속상해서 그래. 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어? 괴롭힘을 당해도 가볍게 넘어갈 거야?”“네가 속상해하는 걸 알고 있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약속해.”“됐고 시간도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어.”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이준혁이
눈을 뜬 윤혜인 앞에 온통 흰검회로 가득 찬 낯선 방이 보였다.잔뜩 인상을 쓴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깼어?”한구운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윤혜인은 이마를 만졌다.“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넌 쓰러졌어. 의사는 단지 과로 때문이라며 집에서 조금 쉬면 된다고 했어. 네가 사는 곳을 몰라 우리집으로 온 거야.”윤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외딴 남자의 집에서 깬 사실에 대해 이해해 보려 했다.한구운은 약간 미안한 듯 말했다.“미안해. 부적절한 행동이라 느껴져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어.”한구운의 말에 윤혜인이 오히려 더 어쩔 바를 몰랐다.선배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바닥에서 잠들었을 것이다.그녀가 가볍게 말했다.“괜찮아요. 고마워요. 선배.”야윈 그녀의 모습에 한구운은 마음이 아팠다.“내가 도착했을 때 너의 남편이 어떤 여자를 안고 떠나는 걸 봣어. 그...”눈썹을 치켜세운 한구운이 덧붙였다.“사이가 안 좋은 거야?”잠시 침묵하던 윤혜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됐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한구운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쉬고 싶다면 지금 데려다줄게.”그녀는 돌아가겠다고 했다.날이 어두워졌으니,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함께 있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한구운은 신사답게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그리고 차에 오른 후 병뚜껑을 딴 물병을 건넸다.“고마워요.”윤혜인은 한모금 들이키고 컵홀더에 넣었다.한참을 달린 후 차가 조금씩 막혔다.한구운이 상황을 살펴보니 앞쪽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그는 천천히 운전하며 해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말재주가 좋았던 터라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그녀도 즐거워했다.재미있는 구간에서는 박장대소했다.한구운은 그녀의 명랑한 모습을 힐끔 보았다. 마치 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고 한눈에 이 후배를 알아보았다.앞쪽을 응시하고 있는 그가
도로에 차들이 적어 이제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아마 차가 평온하게 달려서 윤혜인은 잠이 쏟아졌던 것 같다.임신으로 잠이 많아졌다. 견뎌보려 했지만 결국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 회색 벤츠가 천천히 멈춰 섰다.한구운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차 시동만 껐다.그는 에어컨을 적당한 온도에 놓고 여자를 바라보았다.윤혜인은 대학 시절보다 성숙된 모습이었다. 그땐 볼살이 빠지지 않은 귀여움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선명한 턱선으로 한층 고급스러워졌다.순수함이 어지럽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 남자의 이성을 자극했다.한구운의 눈빛이 짙어졌다.기다란 손가락이 코에 걸린 안경테를 살짝 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물병을 집어 목을 축였다.그 물맛이 입술과 혀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유독 물맛이 꿀맛이었다.차창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다.여자는 뒤척이며 깨려 했다.한구운은 갑자기 몸을 기울고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 자세가 너무 친밀해 밖에서 봤을때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 같았다.때마침 윤혜인이 깼다.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남자의 손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그녀는 멈칫했다.“선배...”막 깬 그녀는 어린양처럼 어리둥절했다. 한구운의 심장이 겉잡을 수없이 뛰기시작했다.그는 손을 거두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머리카락이 상처에 닿을 것 같았어.”“고마워요.”윤혜인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임세희가 가방으로 흠집 낸 상처가 있었다.한구운은 대신 차 문을 열어주었다.바람이 너무 세서 그녀를 위해 바람을 막아주었다.윤혜인은 오늘 너무 많이 도와준 선배가 감사했다.예의상 안으로 들여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일찍 쉬어.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돌아갈게.”한구운이 적절한 타이밍에 대신 입을 열었다.“오늘 고마웠어요. 선배.”“그래. 다음에 봐.”“조심히 돌아가세요.”윤혜인은 손을 흔들었다.
에어백이 터졌다.회색 벤츠의 뒷부분이 뭉개졌고 앞으로 세게 밀려나 난간에 부딪힌 후 멈췄다.차량의 안전 시스템이 제때 작동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복되었을 것이다.반면 검정색 벤틀리는 적절한 그립 덕분에 범퍼가 반쯤 내려앉은 것 외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제자리에 얼어붙은 윤혜인은 손발이 차가워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눌리고 변형된 벤츠의 문이 열렸다.한구운이 천천히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머리를 움켜쥔 그의 손에 피가 흥건했다.정확한 부상 부위는 파악할 수 없었다.경직되어 있던 윤혜인은 재빨리 달려가 한구운의 어깨를 부축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손이 떨렸고 입술도 떨려서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했다.오히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향해 한구운이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괜찮아, 혜인아, 난 괜찮아.”격렬한 충격으로 깨진 유리에 팔이 긁혔고, 다른 부상은 없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그때 벤틀리 문도 열렸다.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는 이준혁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이리 와!”그녀 얼굴에서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당신 미쳤어요?”이준혁의 분노가 정점을 찍었다. 그는 윤혜인의 손목을 낚아채 품 안으로 그녀를 안았다.그리고 한구운에게 으르렁거렸다.“죽고 싶어서 환장했군.”말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어려있다.충격으로 한구운의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물었다.“진짜 혜인이를 아끼나요?”“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 가족이 할머니의 지인이라고 내가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 여자는 내 사람이고 또 선을 넘는다면 오늘처럼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이준혁의 부리부리한 눈은 두 사람의 얽힌 인연을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한구운이 이주혁의 먼 친척임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이 남자 미쳤다고 생각했다.“이준혁!”그녀는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린 한구운은 윤혜인이 혹시라도 괴롭힘을 당할까 봐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주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대표님과 사모님은 사이가 좋으셔서 걱정할 것 없어요. 외부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것을 좋을 것 같네요. 진짜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6촌도 나 몰라라 할 분이에요.”안경 속에 숨겨진 눈에 차가움이 서렸다.잠시 후 그는 자리를 떠났다.차가 떠난 후에야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며 숨을 쉴 공간을 주었다.윤혜인은 온몸이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준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그의 눈은 곧 사람을 집어삼킬 듯 차가웠다.그는 다른 남자 때문에 그에게 맞서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그는 이를 악물었다.결국 험한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다른 남자를 찾은 거야?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다.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이내 후회가 밀려왔지만 방금전 그 장면은 칼이 되어 그를 찌르고 있었다.윤혜인은 그의 소유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 누구도!윤혜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래요! 난 원래 이런 년이에요.”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겠는가!조금만 다정해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윤혜인, 너무 최악이다.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남자를 노려보았다.“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말아요.”이준혁은 그전 냉소를 지었다.“나와 정리하고 선배에게 달려가려는 거겠지.”그는 한발 한발 다가서며 그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 데 그럴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쓰다 버려도 아무도 건들리 못해.”윤혜인은 분노했다.“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난
차는 경산파크에 들어섰다.이곳은 일출을 보기에 완벽한 장소였고, 전에도 왔던 적 있었다.하지만 특정 관람 일을 제외하고는 밤에는 문을 닫았다.이준혁은 S급 패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출입할 수 있었다.그는 차를 언덕에 주차하고 윤혜인을 안은 채 보닛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두 볼을 만지작거리며 이준혁이 물었다.“기억나?”윤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결혼 1주년이 되던 날, 그녀는 답례로 그와 세 번이나 사랑을 나눴었다.지금 그가 자신을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은 무슨 뜻일까?그녀가 잠깐 혼란에 빠져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를 보닛 위에 눌렀다. 등이 차갑고 딱딱한 알루미늄 표면에 닿았다.윤혜인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쳤지만 그의 힘에 의해 더 강하게 눌려버렸다.그의 입술이 이마에서 코끝, 목까지 이동했다. 그의 흔적이 남는 곳마다 얼룩지고 침범당했다.탐욕스러운 키스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은 차가운 욕망으로 들끓었다.“욕구불만이면 나에게 오면 되잖아? 왜 다른 사람을 찾는 거야?”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볼을 가볍게 깨물었다.“다른 놈이 나보다 널 더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좋아하는 자세는 나만 알아.”윤혜인의 표정이 급변했다.그는 그녀를 모욕하고 있었다.그녀는 분노했다.“난 원하지 않아요! 이렇게 날 강요할 수 없어요!”이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았다.“넌 나에게 애원하게 될 거야.”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안아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버튼을 누르자 선루프가 열리고 앞좌석이 앞으로 이동했다. 뒷공간이 훨씬 넓어졌다.하지만 광야에 누워있는 것 같아 더 굴욕적이었다.이준혁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 같았다.당황한 그녀는 옷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난 몸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난...”하마터면 실토할뻔했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바닥에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 ‘한 선배’ 란 세글자가 뜨자 이준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준혁은 그녀의 옷을 정리해 준 훈 그녀를 안고 조수석에 앉혔다.윤혜인은 인형처럼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그가 운전석으로 돌아와 물티슈로 천천히 손을 닦을 때 그녀는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있었고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준혁이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정리 하려하자 그녀는 움찔하며 경계했다.“뭐 하는 거예요!”이준혁이 표정이 굳어졌다.“아직도 화 내고 있는 거야? 사과의 의미로 즐겁게 해줬잖아?”그리고 덧붙였다.“나를 배려한 적 있어? 난 아직 환자야. 몸이 안 좋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참았잖아.”그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울고 있는 그녀때문에 즐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탈진할까 봐 걱정되었다.“당신... 너무 해요! 그 선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거예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콧방귀를 뀌었다.“한 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왜 못 받는단 거야? 내가 없다면 더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었나? 네가 누구의 와이프인지는 기억하고 있는 거야? 매번 딴 놈때문에 싸우고 있잖아. 내가 그 놈을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윤혜인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신이 더 우스꽝스러웠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이 안중에도 없었다.임세희가 사모님 자리를 노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앞에서 임세희를 안고, 쓰다듬으며 심지어 임세희를 위해 그녀를 버리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친구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다.이런 이중 잣대에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는 대꾸한 힘이 없었다.“청월 아파트로 돌아갈래요.”이준혁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보아 그저 침묵했다.차 문을 연 그는 늘 그랬듯이 그녀를 안으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밀쳤다.“만지지 말아요.”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쌓였던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그 통화 때문에 이런 반응이라면 그들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비꼬았다.“아까 만졌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