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에 차들이 적어 이제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아마 차가 평온하게 달려서 윤혜인은 잠이 쏟아졌던 것 같다.임신으로 잠이 많아졌다. 견뎌보려 했지만 결국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 회색 벤츠가 천천히 멈춰 섰다.한구운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차 시동만 껐다.그는 에어컨을 적당한 온도에 놓고 여자를 바라보았다.윤혜인은 대학 시절보다 성숙된 모습이었다. 그땐 볼살이 빠지지 않은 귀여움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선명한 턱선으로 한층 고급스러워졌다.순수함이 어지럽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 남자의 이성을 자극했다.한구운의 눈빛이 짙어졌다.기다란 손가락이 코에 걸린 안경테를 살짝 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물병을 집어 목을 축였다.그 물맛이 입술과 혀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유독 물맛이 꿀맛이었다.차창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다.여자는 뒤척이며 깨려 했다.한구운은 갑자기 몸을 기울고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 자세가 너무 친밀해 밖에서 봤을때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 같았다.때마침 윤혜인이 깼다.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남자의 손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그녀는 멈칫했다.“선배...”막 깬 그녀는 어린양처럼 어리둥절했다. 한구운의 심장이 겉잡을 수없이 뛰기시작했다.그는 손을 거두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머리카락이 상처에 닿을 것 같았어.”“고마워요.”윤혜인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임세희가 가방으로 흠집 낸 상처가 있었다.한구운은 대신 차 문을 열어주었다.바람이 너무 세서 그녀를 위해 바람을 막아주었다.윤혜인은 오늘 너무 많이 도와준 선배가 감사했다.예의상 안으로 들여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일찍 쉬어.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돌아갈게.”한구운이 적절한 타이밍에 대신 입을 열었다.“오늘 고마웠어요. 선배.”“그래. 다음에 봐.”“조심히 돌아가세요.”윤혜인은 손을 흔들었다.
에어백이 터졌다.회색 벤츠의 뒷부분이 뭉개졌고 앞으로 세게 밀려나 난간에 부딪힌 후 멈췄다.차량의 안전 시스템이 제때 작동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복되었을 것이다.반면 검정색 벤틀리는 적절한 그립 덕분에 범퍼가 반쯤 내려앉은 것 외에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제자리에 얼어붙은 윤혜인은 손발이 차가워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눌리고 변형된 벤츠의 문이 열렸다.한구운이 천천히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머리를 움켜쥔 그의 손에 피가 흥건했다.정확한 부상 부위는 파악할 수 없었다.경직되어 있던 윤혜인은 재빨리 달려가 한구운의 어깨를 부축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손이 떨렸고 입술도 떨려서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했다.오히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향해 한구운이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괜찮아, 혜인아, 난 괜찮아.”격렬한 충격으로 깨진 유리에 팔이 긁혔고, 다른 부상은 없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그때 벤틀리 문도 열렸다.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는 이준혁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이리 와!”그녀 얼굴에서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당신 미쳤어요?”이준혁의 분노가 정점을 찍었다. 그는 윤혜인의 손목을 낚아채 품 안으로 그녀를 안았다.그리고 한구운에게 으르렁거렸다.“죽고 싶어서 환장했군.”말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어려있다.충격으로 한구운의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물었다.“진짜 혜인이를 아끼나요?”“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 가족이 할머니의 지인이라고 내가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 여자는 내 사람이고 또 선을 넘는다면 오늘처럼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이준혁의 부리부리한 눈은 두 사람의 얽힌 인연을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한구운이 이주혁의 먼 친척임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이 남자 미쳤다고 생각했다.“이준혁!”그녀는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린 한구운은 윤혜인이 혹시라도 괴롭힘을 당할까 봐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주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대표님과 사모님은 사이가 좋으셔서 걱정할 것 없어요. 외부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것을 좋을 것 같네요. 진짜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6촌도 나 몰라라 할 분이에요.”안경 속에 숨겨진 눈에 차가움이 서렸다.잠시 후 그는 자리를 떠났다.차가 떠난 후에야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며 숨을 쉴 공간을 주었다.윤혜인은 온몸이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준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그의 눈은 곧 사람을 집어삼킬 듯 차가웠다.그는 다른 남자 때문에 그에게 맞서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그는 이를 악물었다.결국 험한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다른 남자를 찾은 거야?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다.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이내 후회가 밀려왔지만 방금전 그 장면은 칼이 되어 그를 찌르고 있었다.윤혜인은 그의 소유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 누구도!윤혜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래요! 난 원래 이런 년이에요.”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겠는가!조금만 다정해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윤혜인, 너무 최악이다.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남자를 노려보았다.“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말아요.”이준혁은 그전 냉소를 지었다.“나와 정리하고 선배에게 달려가려는 거겠지.”그는 한발 한발 다가서며 그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 데 그럴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쓰다 버려도 아무도 건들리 못해.”윤혜인은 분노했다.“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난
차는 경산파크에 들어섰다.이곳은 일출을 보기에 완벽한 장소였고, 전에도 왔던 적 있었다.하지만 특정 관람 일을 제외하고는 밤에는 문을 닫았다.이준혁은 S급 패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출입할 수 있었다.그는 차를 언덕에 주차하고 윤혜인을 안은 채 보닛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두 볼을 만지작거리며 이준혁이 물었다.“기억나?”윤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결혼 1주년이 되던 날, 그녀는 답례로 그와 세 번이나 사랑을 나눴었다.지금 그가 자신을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은 무슨 뜻일까?그녀가 잠깐 혼란에 빠져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를 보닛 위에 눌렀다. 등이 차갑고 딱딱한 알루미늄 표면에 닿았다.윤혜인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쳤지만 그의 힘에 의해 더 강하게 눌려버렸다.그의 입술이 이마에서 코끝, 목까지 이동했다. 그의 흔적이 남는 곳마다 얼룩지고 침범당했다.탐욕스러운 키스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은 차가운 욕망으로 들끓었다.“욕구불만이면 나에게 오면 되잖아? 왜 다른 사람을 찾는 거야?”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볼을 가볍게 깨물었다.“다른 놈이 나보다 널 더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좋아하는 자세는 나만 알아.”윤혜인의 표정이 급변했다.그는 그녀를 모욕하고 있었다.그녀는 분노했다.“난 원하지 않아요! 이렇게 날 강요할 수 없어요!”이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았다.“넌 나에게 애원하게 될 거야.”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안아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버튼을 누르자 선루프가 열리고 앞좌석이 앞으로 이동했다. 뒷공간이 훨씬 넓어졌다.하지만 광야에 누워있는 것 같아 더 굴욕적이었다.이준혁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 같았다.당황한 그녀는 옷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난 몸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난...”하마터면 실토할뻔했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바닥에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 ‘한 선배’ 란 세글자가 뜨자 이준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준혁은 그녀의 옷을 정리해 준 훈 그녀를 안고 조수석에 앉혔다.윤혜인은 인형처럼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그가 운전석으로 돌아와 물티슈로 천천히 손을 닦을 때 그녀는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있었고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준혁이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정리 하려하자 그녀는 움찔하며 경계했다.“뭐 하는 거예요!”이준혁이 표정이 굳어졌다.“아직도 화 내고 있는 거야? 사과의 의미로 즐겁게 해줬잖아?”그리고 덧붙였다.“나를 배려한 적 있어? 난 아직 환자야. 몸이 안 좋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참았잖아.”그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울고 있는 그녀때문에 즐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탈진할까 봐 걱정되었다.“당신... 너무 해요! 그 선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거예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콧방귀를 뀌었다.“한 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왜 못 받는단 거야? 내가 없다면 더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었나? 네가 누구의 와이프인지는 기억하고 있는 거야? 매번 딴 놈때문에 싸우고 있잖아. 내가 그 놈을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윤혜인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신이 더 우스꽝스러웠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이 안중에도 없었다.임세희가 사모님 자리를 노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앞에서 임세희를 안고, 쓰다듬으며 심지어 임세희를 위해 그녀를 버리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친구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다.이런 이중 잣대에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는 대꾸한 힘이 없었다.“청월 아파트로 돌아갈래요.”이준혁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보아 그저 침묵했다.차 문을 연 그는 늘 그랬듯이 그녀를 안으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밀쳤다.“만지지 말아요.”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쌓였던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그 통화 때문에 이런 반응이라면 그들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비꼬았다.“아까 만졌
윤혜인은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나를 뭐로 보는 거예요! 당신의 눈에 난 그저 인형인가요? 당신의 욕정을 풀어주고 아무때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했던 거야?”“그게 아니면요? 당신의 행동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잖아요? 오늘 임세희를 마주했다면 이렇게 대할 수 있겠어요?”“아니야!”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처음부터 그는 임세희와 그 어떤 관계도 발생하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은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어떻게 또 잊을 수 있단 말인가?이준혁에게 그녀는 임세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하찮은 존재였다. 그가 임세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 말대로 너무 아껴서이다.너무 소중하면 가장 좋은 것을 해주지 못할 때에는 상처 주고 싶지 않는 법이다.그는 임세희에 제 3자란 타이틀을 안겨주고 싶지 않는 것이다.피식 웃음을 터뜨린 윤혜인은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았다.“어떻게 하면 저를 놓아줄 건가요?”그녀의 말투가 변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자의 목을 졸랐다. 마치 야수처럼 달려들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이런 거면 돼요? 어디서 할래요? 차에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남자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하지만 윤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뜨거운 입김을 불며 정성을 들였다.“하고 나면 놔줘요.”남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는 욕망이 없었고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그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고 싶었다.2년이다, 그녀도 이준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반항할수록 그를 더 자극할 뿐이다.그를 화나게 하면 떠나기가 더 어려워진다.사랑이 아니어도 그녀를 자신 곁에 묶어 두려하고 있다.이혼 전, 편하게 지내려면 그를 만족시켜야 했다.그녀는 그를 놓아주고 그의 앞에서 단추를 풀었다. 하얀 쇄골이 드러나고 점점 아래로 향했다...이준혁의 눈이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욕구가 가라앉은 그는 몸을 일으켰다.문이 ‘쾅’하고 닫혔다.소파에 누워 있는 윤혜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윤혜인, 또다시 홀로 남겨졌네.”...청월 아파트를 벗어난 검정색 벤틀리는 술집으로 향했다.김성훈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테이블 위에 빈 와인병이 7.8 개나 쌓여있었다.이준혁은 잔뜩 흐트르러 진 모습으로 술잔을 들었고 옆에는 육경한이 있었다.김성훈은 마치 미치광이를 본 눈빛이었다.그는 이준혁의 술잔을 빼앗으며 버럭 화를 냈다. “이준혁, 살고 싶지 않은 거야?”육경한도 얼큰히 취해 있었다.“이 정도는 괜찮아.”김성훈이 뭐라 하려는데 이준혁이 벌떡 일어서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는 바텐더에 술잔을 가득 채우라고 눈치 주었다.직원은 난감해하며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김성훈의 눈빛이 살벌해졌다.“나가.”직원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자리에 앉은 김성훈이 육경한을 나무랐다.“어제 막 수술을 받은 상태라 이렇게 술을 마시면 안 돼.”이준혁이 비밀로 하는 바람에 육경한은 정말 몰랐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김성훈이 콧방귀를 꼈다.“잘 난 척이지 뭐겠어. 아름다움을 구해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거지.”육경한은 자연스럽게 임세희가 떠올랐다.“세희가 왜?”“세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김성훈이 대답했다.육경한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혜인 씨?”“그래.”김성훈은 직원더러 따뜻한 차를 올리라고 했다. 그리고 이준혁 가까이에 밀며 물었다.“왜 이러는 건데? 말해 봐.”오전에 그가 확인하러 갔을 때까지만 해도 깨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불과 몇 시간만에 문제가 생겼다.이준혁은 차를 마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하는 이준혁에 김성훈은 고의로 자극했다.“혜인 씨가 싫으면 이혼 도장 찍어버려. 너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다른 여자에게도 베풀란 말이야.”
이준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멈칫하던 김성훈은 다시 말했다.“그때 가서 안달 나 하지 말라고!”이준혁의 미간에 주름 잡혔다.“마음대로 해.”이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듣고 있던 육경한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윤혜인이 널 좋아한다잖아!”“세상에!”김성훈은 충격에 휩싸이며 물었다.“몰랐던 거야?”이준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이내 굳었다.“잘못 짚었어.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술잣을 움켜쥐었다.한구운때문에 그에게 맞서는 윤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지난 2년 동안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모든 것이 거대한 돌덩이가 되어 그를 짓누른 것 같아 숨을 쉴 수 없다.치욕스러웠다.당장이라도 그 놈의 목을 꺾고 싶다.김성훈은 어이가 없었다.“어제 네가 쓰러졌을 때 혜인 씨 수술실 밖에서 3시간 동안 내내 울었어. 네가 깨어나지 않자 너의 곁을 지키며 한시도 떠나려 하지 않았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그런데도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조금 흔들리던 이준혁은 곧바로 부인했다.“좋아하는 사람이 너인 것에 내 목을 걸 수 있어.”진정한 사랑을 해본 사람으로서 김성훈은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보아낼 수 있었다.이준격은 차갑게 말했다.“네 목은 값 없어.”“이..”김성훈은 화가 치밀었다.“내기 해! 내가 지금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혜인 씨에게 말할 거야. 무조건 한달음에 달려올 거야.”이준혁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김성훈의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 싶어 휴대폰을 꺼내 윤혜인에 전화를 걸었다.“그럼 한번 지켜봐. 이기면 네 요트는 내거야.”그는 예전부터 이준혁의 요트에 눈독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단종되어 구할 수 없었다.이준혁은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좋은 대로.”연결음이 들리고 전화가 연결되었다.김성훈은 돌변하며 연기력을 뽐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혜인 씨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
윤혜인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이준혁과 함께했던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윤혜인을 위해 이준혁은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사랑의 증표였다.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다.그러니 더 이상 윤혜인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윤혜인의 마음은 이제 분명했다.이준혁에 대한 감정은 결코 동정이 아니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준혁을 사랑하기 때문에.외롭고 긴 밤마다 끝없는 악몽 속에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를 잃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을 사랑했다.그와 함께, 그리고 한 가족으로 평화롭게 함께 지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하여 윤혜인은 이준혁의 사무실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마음을 전하려 했다.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윤혜인은 남자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의 다리를 덮었던 듯한 어두운색 담요를 집어 스스로를 덮었다.곧 그의 독특하고 따뜻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며 윤혜인은 그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회의가 끝난 후 이준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비서에게 물었다.“제 사무실에 아직 사람이 있나요?”비서가 답했다.“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결국... 갔구나.’윤혜인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준혁은 그녀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잠깐의 동행 후에 떠나는 것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길 테니 차라리 짧은 고통이 나을 것이었다.‘내가 고집을 부리면 우리 두 사람 결국 모두 불행하게 될 거야. 차라리 혼자 그 고통을 감당하는 편이 낫지.’...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한기를 느껴 깨어났다.밤이 된 북안도는 얼음 창고나 다름없었다. 난방이 없으면 젊고 강한 사람이라도 얼어 죽을 수 있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에
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이 그녀를 휘감았다.이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밖의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시간 맞춰서 갈 겁니다.”비서는 대답을 듣자마자 얼른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품에서 몸을 떼려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그러자 당황한 윤혜인이 물었다.“그... 회의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태연히 대답했다.“1분 정도는 문제없어.”윤혜인의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조금 전의 용기도 사라지고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듯했다.“일단 회의에 가세요. 우린 이따가 얘기해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날렵하고 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물었다.“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야?”이 질문 하나로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준혁 씨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동정하고 있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잠시 동안 윤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에는 점차 어두운 빛이 어렸다.“네 동정은 필요 없어.”이준혁이 말했다.그는 그녀가 자비로운 마음에 얽매이는 걸 원치 않았다.감정이란 단순한 감동이나 연민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동정으로 얻게 되는 감정이라면, 이준혁은 차라리 윤혜인을 자유롭도록 놓아주고 자신이 홀로 평생 아픔을 감수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곧 이준혁은 윤혜인은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제대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이제 돌아가.”그런 다음 스위치를 눌러 휠체어를 움직여 윤혜인 앞에서 천천히 떠났다.윤혜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조금 전 왜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마음속으로는 이 감정이 동정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이준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많은 고통이 함께 밀려올
이준혁은 모든 과정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한눈에 보기에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이 분명했다.동작이 빨랐지만 윤혜인은 그의 한쪽 다리가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걸 분명히 보았다.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며 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표정을 본 이준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혹시 주 비서가 뭔가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건가?”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도 눈이 있으니까...”하지만 이준혁은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했다.요즘 주훈이 점점 겉으로는 알아듣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항상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주훈이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지금 모습만 봐도 주훈이 분명 무슨 말을 했구나 싶었다.‘탄페니아에서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네? 아직 더 단련시켜야겠어.’윤혜인이 주훈에게서 아무 말도 들은 게 없다고 부정하자 이준혁도 굳이 그 말을 들춰내지는 않았다.대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다리는 괜찮아. 보이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그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문득 자신이 미워졌다.‘준혁 씨는 자신의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늘 자존심 강하고 뛰어났던 사람인데...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거야.’정말이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이준혁은 혼자서 견뎌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을 떠나고 그를 밀어내는 동안, 이준혁은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순간 윤혜인은 모든 것을 잊고 이준혁을 껴안았다.뒤이어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양복을 적셨다.“준혁 씨... 많이 아팠죠?”‘많이 아팠죠?’라는 말은 이준혁의 마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이준혁이 일하는 회의장 밖에 도착했다.이미 소식을 들은 주훈이 미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주 비서님,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요?”주훈은 순간 멈칫하며 혹시 이준혁이 자신의 피의 대부분을 헌혈한 사실을 윤혜인이 알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는 약간 망설였다.지난번에도 사실을 말하다가 이준혁에게 한 소리 듣고 근 반년 동안 탄페니아에 보내져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급여나 처우는 그대로였지만 황토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고단한 생활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 하나 찾기 힘든 환경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그곳의 여자들은 주훈을 보고 마치 신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여기며 하룻밤에도 서너 명이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친해지려 하는 일들이 많았다.겁이 난 나머지 주훈은 급히 벽돌로 집을 짓고 문을 굳게 닫고 지냈다.물론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주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말씀하세요.”윤혜인은 물었다.“대표님의 다리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요.”주훈은 두어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다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이준혁이 어떻게 다리를 다쳤는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였다.‘그럼 이제 그 얘기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곧 주훈은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대표님은... 북안도의 전문가들 소견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거라네요.”“회복 불가능하다고요?”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고 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술받으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 하지 않았나? 심지어 퇴원하기 전에는 혼자 서 있는 모습까지 봤었는데?’그녀는 주훈의 팔을 꽉 쥐고 다급히 물었다.“그날 밤, 오빠 보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