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아니어서 가도 도움이 안 돼요. 끊을게요.”뚜뚜뚜-전화는 끊어졌다.김성훈은 그 자리에 벙졌다.손에 들어 온 요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그는 요트를 위해 한 번 더 노력해 보고 싶었다.“어쨌든 오기만 하면 내가 이겨.”뚜뚜뚜...“전화가 이미 꺼져있어...”연속으로 5번 전화를 건 결과 윤혜인은 전화를 꺼버렸다.김성훈은 할말을 잃었다.“또 건드린 거야? 그럴 수는 없잖아...”그는 홀로 중얼거렸다.어젯밤 초점을 잃고 망연자실한 윤혜인이 이준혁 때문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쨍그랑!거대한 소음과 함께 남자가 테이블을 엎었다.그의 표정은 너무 공포스러웠다. 손은 깨진 유리 조각으로 피가 흥건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술 가져와!”김성훈은 미친 듯이 날뛰는 이준혁을 방관할 리 없었다. 그는 직원을 돌려보냈다.더 이상 마시면 저승길이다.하지만 육경한은 병을 따며 말했다.“여자는 오냐오냐하면 안 돼. 마셔.”이준혁은 술을 낚아채 그대로 들이마셨다.독한 술이 그의 위장을 맹렬히 태웠다.한 병, 두 병, 세 번째 병까지 비운 그는 마침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그가 말했다.“왜. 왜 난 안되는 거야.”청월 아파트.침대에 누워 뒤척이고 있는 윤혜인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눈을 감으면 상처받은 눈을 하고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또 헛된 상상을 했군.이준혁은 상처받을 사람이 아니다. 임세희만이 그의 기분을 좌우지할 수 있다...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떠 천장을 바라봤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그곳으로 향했다.김성훈의 목소리는 농담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술을 피 토할 때까지 마셨다라...왜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아직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그의 머릿속에 문씨 가문에서 이준혁이 몸으로 그녀를 구했던 모습이 떠올랐다.윤혜인은 침대에서 일어났
“혜인 씨.”김성훈은 기뻐하며 덧붙였다.“왔어요? 빨리 따라와요.”그는 한구운과 그의 비서를 아니꼽게 흘겼다.윤혜인이 다른 사람을 보러 병원에 온 걸 이준혁이 알게 된다면 병원을 통째로 부수려 할 것이다.누구를 위해서 여기에 왔든 이준혁은 그녀를 만나야 한다.그는 윤혜인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한구운이 뒤를 따르려 했지만, 그의 비서가 제지했다.“대표님, 그냥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엘리베이터 안.윤혜인은 걱정스럽게 물었다.“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당신 말고 또 누구 때문에 마시겠어요? 그의 이런 모습은 본 적 없어요.”“저요?”윤혜인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당연하죠. 전에 괜찮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예요?”윤혜인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성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준혁이는 혜인 씨를 좋아하고 있는데 뭐가 그리 복잡해요?”윤혜인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김성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김성훈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들어가서 얘기 나눠 봐요.”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 윤혜인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방금 전, 그들은 관계를 정리한 사이였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그가 무사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걱정을 안고 문을 두드렸다.단단히 닫혀 있지 않아 그녀가 두드리자 자동으로 열렸다.하지만 안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거기에는 임세희가 옷이 흐트러진 채로 이준혁의 몸 위에 엎드려 있었다. 둘의 입술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만약 자신이 문을 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을 것이다.윤혜인의 손이 핏기를 잃었다.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침대 위의 두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치 그녀
“어떻게 혜인 씨에 비교할 수 있겠어요?”김성훈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그녀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상대란 말인가?임세희는 한 발짝도 나설 필요 없이 이름만으로도 그녀를 무찔러버렸다.윤혜인은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놔주세요. 몸이 안 좋아 돌아갈게요.”김성훈은 그제야 그녀의 이상함을 캐치 했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그녀를 놓아준 김성훈이 무슨 일인지 물으려는데 전화가 울렸다.윤혜인은 자리를 떠났다.김성훈은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이 잡아.”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아직 가지 않았어. 지금 문 앞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 된 거...”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문이 열리고 이준혁은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인세희만이 뒤에서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한참 후, 그녀는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선물을 준비하고 있으니 윤혜인, 너 기대해....우르르 쾅쾅-번개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드디어 택시가 도착했다.택시에 막 타려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거기 서.”이준혁의 목소리였다.그녀는 멈칫했다.왜 쫓아온 거야? 그녀가 방해했다고, 무턱대고 찾아와서 혼내려는 걸까?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지금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방금 찔린 상처가 너무 깊어서 더 이상의 자극을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차에 오른 그녀는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했다.“서둘러 주세요.”“윤혜인!”이미 길에 뛰어든 이준혁은 간발의 차이로 택시를 놓쳤다.택시는 빠르게 달렸다.쏟아지는 빗물에 온몸이 흠뻑 젖었고 목에 두른 붕대가 모두 젖었다.진 붉은 피는 빗물과 섞여 흘러내려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김성훈은 우산을 들고 다가와 화를 냈다.“죽고 싶어 환장했어?”이렇게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본 적 없다.그는 이준혁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준
그러다 기사가 외쳤다.“누굴 찾아가 돈 받아요?”그때 주훈이 기사에게 다가와 말했다.“저를 따라가시죠.”뒷좌석에 앉은 윤혜인은 동공이 풀렸다.폭우 소리는 그녀의 마음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너무 차가웠다.이준혁과 임세희의 관계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견딜 수 없었다.이런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자신을 마비시키며 속였던 것이다.빵-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렸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다면 튕겨 나갔을 것이다,급브레이크를 밟은 기사는 차를 멈추고 욕설을 내뱉었다.“미쳤어? 운전할 줄 알기나 해?”휘몰아치는 빗줄기 속에서.훤칠한 키의 남자가 걸어왔다.그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한껏 움츠린 여자에게 말했다.“내려.”윤혜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가 진짜 쫓아올 줄 몰랐다.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은 엉망이어도 여전히 멋졌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그가 잡아당겼다.당황한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돌아가요.”남자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왜 왔어?”윤혜인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신 보러 온 거 아니에요.”그는 단호하게 물었다.“왜 도망가는 거야? 질투해? 아직 나를 걱정하는 거지?”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다시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다시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오바하는 것 같네요. 그런 상황에서 피하지 않으면 구경이라도 해야 할까요?”비는 더욱더 거세게 쏟아졌다.기사는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영화 찍어요?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요.”남자는 계좌번호를 입력하라고 핸드폰을 건넸다.딩-“이제 충분해요?”입금된 숫자를 보니 아주 만족스러운 숫자였다. 그가 한달 동안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기사는 웃으며 말했다.“밖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으니 들어와서 천천히 얘기해요. 3박 3일도 문제없어요.”“당신!”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않으니 그냥 넘어
불과 몇초였지만 입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그의 옷은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뜨거워졌다.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곧 죽을 것 같은 느낌.나이가 많은 기사는 너무 낯 뜨거운 광경에 부지런히 열을 식히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조용한 차 안,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선명했다.윤혜인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을 때 이준혁은 그녀 위로 무너졌다.그의 하반신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안았을 때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남자의 목뒤에서 어깨를 타고 흐르는 피가 그녀의 손에 흘러내렸다.윤혜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기사님, 병원으로 빨리 가주세요.”병원 침실.이준혁은 비로 인해 상처가 감염되어 열이 조금 났다.김성훈은 짧게 주의 사항만 일깨워주었다. 그러다 떠나기 전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준혁이는 혜인 씨를 많이 아껴요.”이준혁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오랫동안 별거했고 애정 결핍과 가족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많이 서툴렀다.김성훈은 이런 이준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무의식중에 나오는 행동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그는 진짜 윤혜인은 누구보다 아꼈다.침대 옆에 앉은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았다.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진짜일까?그럼, 왜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걸까?왜 항상 그녀의 마음을 짓밟는 것일까?하지만 또 아끼지 않는 것이라면 왜 놓아주지 않은 걸까?왜 그녀를 곁에 두려는 걸까?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던 윤혜인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한편, 김성훈과 육경한도 그의 곁을 지켰다.둘은 복도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김성훈이 입을 열었다.“소씨 가문에 너무한 거 아니야? 방금 그 집 아가씨가 아빠와 함께 응급실에 들어가는 것을 봤어. 이러저리 뛰어다니다가 무릎을 긁히고 신발도 하나 잃어버린 것 같아.”육경한의 얼굴이 연기에 가려졌다
병실, 소원은 아버지가 잠시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녀의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흰머리로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에 자신이 점점 더 미워졌다.이렇게 년로하신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그녀가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는 육경한에게 도발하려고 남자를 찾은 것이었다.열흘 후면 결혼할 몸인데 왜 아직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결혼 후에도 그녀와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녀를 제삼자로 만들려는 건가?”생각만으로도 역겨운 일이었다.그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육경한이란 쓰레기를 사랑한 것이다.긴장이 풀리니 졸음이 몰려왔다.그때 갑자기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맴돌더니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눈을 번쩍 뜬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육경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겁먹은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그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소원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당신이 여긴 어떻게?”육경한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자기?”소원은 당황했다. 사실 육경한의 미소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그들이 함께했던 그 시기에는 항상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봐 주었었다.하지만 이마부근의 상처가 차갑고 사악한 인상을 주었다.입꼬리만 올라간 이런 웃음이 제일 두려운 법이다.“아버님은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정신을 차린 소원은 경계하며 말했다.“육경한,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육경한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너 말고 내가 또 뭘 원하겠어?”쉽게 내뱉기에는 다소 낯 뜨거운 말이었지만 소원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침대 위에서는 이보다 더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정색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여기는 병원이야.”“응, 그래서?”눈썹을 치켜세우는 육경한은 눈
‘쿵-’하는 소리와 함께 소원은 침대 옆 탁자의 모서리에 부딪혔다.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마치 잘 익은 새우를 방불케 했다.심하게 부딪혔다.소원은 한참 동안 설 수 없었고 벽에 간신이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잠시 짙어졌다. 그는 휴대폰을 내리며 촬영을 멈췄다.하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으며 웃었다.“뭘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그저 친구가 매력적이라며 너와 데이트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는 거잖아.”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는 얼굴이 상기되었다.육경한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친구와 공유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그럼, 예전에도 본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고 생각하니 목구멍에서 녹슨 맛이 솟구쳤고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당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녀는 힘없이 물었다.또다시 악마의 덫에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내 친구랑 데이트 안 할래?”육경한은 아주 흔한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그가 말하는 친구는 이준혁, 김성훈과 같은 상류층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육경한처럼 가리지 않고 만나며 다른 사람의 여자에게 침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그의 친구란 사람을 그녀도 전에 육경한을 찾으러 갔을 때 만난 적 있었다.그 남자와는 외국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고 검은 피부에 우람진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를 한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그런 유였다.그 남자는 지난번에도 그녀를 희롱했고 심지어 나가는 길에 그녀를 슬쩍 만지기까지 했다.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만약 그런 사람과 데이트하라고 하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이제 결혼할 건데 왜 아직도 날 내버려두지 않는 거야!”“그건 네가 재밌기 때문이야.”윤경한은 그녀를 자신의 장난감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화가 났다. 그녀는 갑자기 덮쳐들어 그를 할퀴었다.“육경한 이 개자식! 내가 빚진 건
너무 세게 깨문 탓에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소원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디가 아파서인지 알 수 없이 허리, 손, 입술 모든 곳이 상처투청이였다.육경한은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움켜쥐며 피가 더 많이 흐를 수 있게 했다.너무 아팠지만 피할 수 없었다. 육경한은 수백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 작은 방안의 수많은 장난감은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기 때문이다.“아파?”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피를 닦으며 물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순종은 보다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고 소씨 가문도 덜 힘들 수 있었다.육경한은 그녀는 물론 소씨 가문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그를 기분 좋게 해야만 소씨 가문이 숨을 쉴 수 있었고 아버지의 혈압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그를 자극하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방금 그를 자극한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것을 소원도 인지했다.지금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육경한과 진아연이 결혼하기만 하면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다시 벗어날 궁리를 하면 된다.나름 잘 짠 계획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녀가 한참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완전히 잘못된 방향이었다.육경한은 사람이 아니었고 인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피로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던 육경한은 눈을 반짝였다.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붉은 입술을 맛보았다. 깊숙이 탐하는 대신 그녀의 상처를 부드럽게 달랬다.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자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깊은 키스로 소원의 피가 그의 입술을 물들였다.악마가 다름없었다.소원은 얌전하지 못한 그의 손을 잡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입맞췄다.“장소를 바꾸는 거 어때?”오늘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병실에서는 할 수 없다.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던 육경한은 평소보다 순종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두 사람은 육경한의 오피스텔로 갔다.안으로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