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세게 깨문 탓에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소원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디가 아파서인지 알 수 없이 허리, 손, 입술 모든 곳이 상처투청이였다.육경한은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움켜쥐며 피가 더 많이 흐를 수 있게 했다.너무 아팠지만 피할 수 없었다. 육경한은 수백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 작은 방안의 수많은 장난감은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기 때문이다.“아파?”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피를 닦으며 물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순종은 보다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고 소씨 가문도 덜 힘들 수 있었다.육경한은 그녀는 물론 소씨 가문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그를 기분 좋게 해야만 소씨 가문이 숨을 쉴 수 있었고 아버지의 혈압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그를 자극하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방금 그를 자극한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것을 소원도 인지했다.지금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육경한과 진아연이 결혼하기만 하면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다시 벗어날 궁리를 하면 된다.나름 잘 짠 계획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녀가 한참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완전히 잘못된 방향이었다.육경한은 사람이 아니었고 인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피로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던 육경한은 눈을 반짝였다.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붉은 입술을 맛보았다. 깊숙이 탐하는 대신 그녀의 상처를 부드럽게 달랬다.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자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깊은 키스로 소원의 피가 그의 입술을 물들였다.악마가 다름없었다.소원은 얌전하지 못한 그의 손을 잡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입맞췄다.“장소를 바꾸는 거 어때?”오늘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병실에서는 할 수 없다.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던 육경한은 평소보다 순종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두 사람은 육경한의 오피스텔로 갔다.안으로
이미 두 번이나 한 상태여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은 무리다.육경한은 냉소를 짓더니 그녀의 목을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그녀는 벽을 마주 선 채로 그의 등을 마주하고 있었다.“진아연이 네가 부르는 이름이야?”소원은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무시할 의도는 아니었어.”육경한 차갑게 경고했다.“규칙은 내가 정해. 넌 그저 따르기만 하면 돼.”소원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표했다.육경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식은땀이 났다.어떻게 또 시작하려는 걸까...진아연이 곧 도착할 텐데 여전히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그녀의 온몸이 경직되었다.육경한은 그녀를 때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너무 조이지 말라고.”소원: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육경한은 서둘러 하던 것을 마쳤다.소원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옷장에 들어가 있었다.옷장은 어두웠다.소원은 납치를 당해 산골짜기에 떨어졌을 때부터 폐소공포증에 시달렸다.공포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그녀는 그저 무릎을 껴안고 한껏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아직 씻지도 못했다. 그런 자신이 너무 더럽다고 느꼈다.곧 밖에서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읍...조금만 천천히 해줘요...”소원은 발끝까지 모조리 얼어붙었다. 그녀는 실소를 터뜨렸다.진아연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 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그런데 왜 그녀와 했던 그 상태로 진아영을 안으려 하는가?소원은 두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 소리는 전혀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육경한에게 발각되면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이 될 것이다.그녀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됐다.문밖에서 흐느낌. 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육경한이 만족스럽게 복무하고 있는 것 같았다.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진아연은 벌써 3번 이상 가버린 것 같다.소원은 날이 밝을 때까지 옷장 속에 있었고 육경한이 옷장 문을 열었을
진아연의 손이 육경한의 넓은 등을 어루만지자, 그의 몸이 불편한 듯 굳어버렸다.그의 등은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잘생긴 얼굴을 제외하면 도저히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진아연은 사실 그것들이 조금 역겹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잘생김 때문에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밤 기술도 훌륭했고 그녀에게 잘했다.어느 정도냐면?육경한이 자신을 찌른다 해도 망설이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여자라면 누구나 기가 막힌 잠자리를 선물해 주는 지고지순한 사람을 마다할 리 없었다.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녀는 진짜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만약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흙탕 속의 육경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그 바보 같은 여자가 너무 많이 베푼 탓이었다.진씨 가문이 무너진 지금은 육경한만이 유일한 생명줄이다. 그래야만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그녀는 반드시 이 거대한 나무를 꽉 잡아야 한다.진아연은 남자를 뒤에서 껴안았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남자의 깊은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뭘 보고 있는 거예요?”육경한의 목을 본 그녀는 표정이 급변했다.“이건 뭐죠?”그녀는 육경한이 밖에서 여자들과 잠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절대 자신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건 여자가 할퀸 것이다.여자가 그에게 흔적을 남기도록 내버려뒀을 리 없다.“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고양이한테 할퀸 거야.”육경한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왜 이렇게 일찍 깬 거야?”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어차피 결혼한 후에는 다른 여자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지금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당신이 없어서 잠이 오지 않아요.”진아연은 육경한의 목을 감싸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육경한은 미소를 지었다.“하고 싶어?”“뭐라는 거예요? 아침인데...”진아연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나무랐다.약간 만족스럽지
그녀가 처녀막 재생 수술을 해서 너무 다행이었다.아니면 그는 다소 충격받을지도 모른다.그녀도 더 이상 고민에 빠지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그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느꼈다....날이 밝았다.윤혜인은 손을 뻗어 이준혁의 이마를 만졌다. 열은 내린 것 같다.그제야 안도의 숨을 쉰 그녀는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갑자기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윤혜인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이준혁은 이미 문 앞까지 왔고 걸상 하나를 넘어뜨렸다.그녀가 소리쳤다.“이준혁?”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잘생긴 눈이 반짝였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았다. 힘이 너무 세서 윤혜인의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그녀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자 이준혁이 입을 열었다.“도망친 줄 알았어.”윤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는 그를 밀치며 말했다.“놔 줘요. 아직 몸에 상처가 있잖아요.”하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껴안았다.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자식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네?”윤혜인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성이 한씨, 그 자식을 건드리지 않을게.”그제야 윤혜인은 이해했다.이준혁은 썩 내키지 않아 보였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아.”이준혁은 갑자기 화가 났다. 이것은 그가 큰마음 먹고 양보한 것이다.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고작 ‘아.’라니!그는 그녀를 놓아주며 그녀의 양 볼을 꼬집으며 으르렁거렸다.“뭐라도 표현해야 하는 거 아니야?”윤혜인은 자신이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원래부터 그는 선배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그저 자신을 도왔단 이유로 꼬투리를 잡으려 했으니 사과해야 한다고 느꼈다.하지만 그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그것은 이준혁이 너무 변덕스러웠기 때문이다.“선배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아무것도 아니라고? 입까지 맞췄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이준혁은
윤혜인이 자리를 떠나려는데 이준혁이 그녀를 잡았다.“어딜 가.”윤혜인은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곁을 지킬 사람이 왔잖아요.”이준혁: “세희는 내가 부른 거야.”윤혜인은 멈칫했다. 임세희는 어느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혜인 씨, 난 오늘 해명하러 온 거예요. 어제 난 부주의로 오빠 품에 넘어진 거였어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 오해하지 말아요.”당황한 윤혜인은 아무 말도 못 했다.그저 임세희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나 때문에 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다는 걸 알아요. 오빠는 나를 항상 동생으로 생각했으니 더 이상 나 때문에 오빠에게 화내지 말아요.”임세희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전의 거만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콜록...”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기침하기 시작했다.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이 물었다,“왜 그래?”“어제 잠을 설쳤더니 감기 걸린 것 같아요...콜록...”“이만 돌아가서 쉬어.”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슬퍼 보이는 임세희는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 같았다.“네. 행복하길 바라요.”문이 닫혔다.윤혜인은 아직 생각에 잠겨있었다.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감싼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무슨 뜻이에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아직도 모르겠어?”윤혜인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뭔가 예상이 갔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또 혼자 착각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이준혁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이혼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그의 목소리는 너무 듣기 좋았고 품속은 매우 따뜻했다.윤혜인의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그녀는 너무 못난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까?그녀는 이준혁을 밀어내며 물었다.“왜 내가 오해할까 봐 두려운 거죠?”이준혁은 조금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억눌렀다.“그건 네가 내 와이프니까.”와이프란 단어는 너무 약했다. 오늘 그의 와이프는 그녀이지만 내일은 다른 여자일 수도 있었다.그녀는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누군가의 대체품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은 그는 그녀가 숨을 헐떡일 때까지 쉼 없이 맛보았다.그러고도 여전히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거친 목소리로 유혹했다.“더 해 줄까?”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준혁은 옆으로 몸을 돌려 그녀의 귓볼을 깨물었다. 그의 혀가 귀 연골의 내벽을 부드럽게 쓸었다. 윤혜인은 짜릿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너무 민감한 그녀의 반응에 이준혁이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더 이상은 안 돼.”윤혜인은 작은 체구는 아니었으나 이준혁의 목까지만 오는 키였다.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니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너무나 익숙한 느낌은 그녀가 더욱 깊이 빠져들게 했다.만약 이 순간적인 따뜻함에 이끌리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만족이거나 실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10년을 사랑했던 사람이다.그녀는 다시 한번 내기하고 싶었다.“다시 실망하게 될까 두려워요.”“실망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할게.”윤혜인은 너무 혼란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내 마음은 하나에요.”다시는 상처 주지 말고 지금 한 말을 잊지 말아요.“알았어.”남자는 대답했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쇄골에 내렸다. 그녀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이내 그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섰다!급히 그를 밀쳐낸 윤혜인은 얼굴을 붉혔다.“당신은 아직 환자예요.”이준혁은 불만스럽게 말했다.“남자가 이럴 수 있다는 건 모두 나았다는 걸 몰라?”그는 또다시 다가오며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너무 간지러웠다.“똑똑-”김성훈은 예의를 갖춰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너무 낯 뜨거운 광경에 헛기침하며 말했다.“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계속 해.”입만 그렇게 말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재밌는 구경이라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할 말이 있어 보이는 김성훈에 윤혜인은 급히 이준혁을 밀어냈다.“얘기 나눠요.”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남자의 그윽한 시선이 누군가의 뒷모습을 쫓아가는
윤혜인이 아무 말 없자 임세희가 말했다.“오빠가 나더러 해명하라고 해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오빠가 절 어느 정도 아끼고 있는지 서울에서 모르는 이 없을 정도예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오빠는 당장 당신을 버릴 거예요.”윤혜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물었다.“두려워요?”“당신!”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이 하찮은 년이 그녀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하지만 뭔가 생각난 그녀는 입씨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임세희는 웃으며 한마디 했다.“우리 두고 보자고요.”떠나기 전, 임세희는 아니꼽게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오빠의 옆에서 잠들고 배속에 그의 씨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그 자리는 원래 그녀의 것이다.멀지 않아 이 나쁜 년은 처참하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임세희가 떠난 후 윤혜인은 그 자리에 서서 마음을 진정시켰다.방금 임세희는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그녀는 두려운지 물었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당연히 두렵다.그녀는 임세희보다 더 두려웠다.임세희는 이준혁이 떠나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녀와 함께 할 것이지만 그녀에게는 외할머니를 제외하곤 이준혁밖에 없다.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매우 고집이 세서 항상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이것도 윤혜인이 직접 경험한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두 발짝도 떼지 못했는데 윤혜인은 한구운을 만났다.그의 팔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손에 들었던 물병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허리를 굽히기 불편해 보였다.윤혜인이 앞으로 다가가 물병을 집어 건네주었다.그녀를 본 한구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혜인아.”그녀가 왜 병원에 있는지 묻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윤혜인은 자신 때문에 선배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물병을 열려고 하는 그의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윤혜인은 다급히 뚜껑을 열고 다시 건넸다.한구운은 바로 물병을
윤혜인은 그의 가슴을 때리며 나무랐다.“그럼, 이후에도 맛볼 생각하지 말아요.”남자는 가슴을 움겨 쥐며 인상을 썼다.윤혜인은 다급히 물었다.“어디 아파요?”“마음이 아파.”윤혜인: ?“더 아찔한 것이 없어서.”윤혜인의 주먹이 울었다.그녀가 움직이자, 허리가 조금 드러났고 참을 수 없었던 이준혁이 허리를 꼬집었다.“살쪘어?”당황한 윤혜인이 급히 옷을 아래로 내렸다.“아니에요.”아직 2달밖에 안 되었기에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요즘 식욕이 좋아졌고 헛구역질이 많이 줄었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섭취 중이었다.전과 비교하면 약간 통통해졌다.아기에 대한 일을 끝까지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둘의 관계로 보아 윤혜인은 안정기를 무사히 지난 다음 이준혁에게 알리려 했다.그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도 그녀는 꼭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만지면 기분이 좋아.”그는 다시 손을 뻗어 윤혜인의 허리를 잡았고 그녀가 애원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그 후 며칠 동안 윤혜인은 매일 병원에서 이준혁의 곁을 지켰고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이준혁은 정상적인 출근을 할 수 있었다.다만 일이 너무 바빠서 연속 3일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윤혜인은 조금 불안했지만, 사소한 것에 목메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렀다.요즘 그녀는 매일 외할머니를 보러 갔다.하지만 할머니는 몸이 아파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여 오늘은 오후에 할머니가 깨어 있는 시간에 맞춰서 찾아가 얘기 좀 나누려 했다.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윤혜인은 먼저 회사로 갔다.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상태로 고강도의 일을 처리하는 이준혁이 걱정되어 그녀는 아줌마의 지도 아래 직접 보신탕을 끓였다.가는 길에 그녀는 이준혁에게 문자로 바쁘냐고 물었다.하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회사에 도착한 윤혜인은 대표전용 엘리베이터로 대표실로 향했다.그녀를 마주친 주훈이 살짝 당황하는 것을 보았다.윤혜인은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대표님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