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는...”망설이던 윤혜인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가 정식으로 이혼 절차를 밟기 전에는 아이 같은 건 만들지 말아줘요. 나도, 할아버지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부디 안전 조치를 꼼꼼히 하길 바래요.”사실 말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었으니 명확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결혼 생활 중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아버지였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그녀도 아기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이준혁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넷째는 없는 거야? 그럼 내가 대신 만들어줄까? 내가 너희들의 행복을 빌어줘야 한다. 어때?”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나와 선배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말을 가로챘다.“할아버지가 어떻게 되실 거란 걸 생각해 봤어? 그 남자를 위해 할아버지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한순간.너무 나 큰 죄명이 쓰였다.정상적인 교제가 어떻게 할아버지의 안위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되어버렸는지 윤혜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할아버지도 친구들과의 교제를 제한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준혁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뿐이었다.“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할아버지도 모를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과 임세희의 일도 제가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절대 비밀 지킬게요.’이준혁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그녀의 착한 모습이 처음으로 짜증이 났다.윤혜인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점점 일그러지는 표정에 그의 상처에 대한 김성훈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려갈게요.”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준혁이 그녀를 확 잡아당겨 품속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돌려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내 침대에 오르고 마음대로 내려가려고 해?”그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윤혜인의 등이 그의 가슴에 닿아있었지만, 그녀의 턱은 돌아가고 힘겹
이게 무슨 말인가?윤혜인은 그가 임세희랑 침대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해외는 뭐 하러 갔단 말인가?이준혁과 2년을 함께한 그녀이기에 그가 혈기가 왕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순수한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이혼도 그녀에게 통보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이준혁은 그녀의 얌전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는 그녀를 넘어뜨리고 품속에 안았다. “화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윤혜인은 그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임세희랑 잔 적 없다고요?”이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느리게 말했다.“그래.”“진짜요?”윤혜인은 다시 한번 물었다.이준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뭘 의심하는 거야?”“하지만...”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몸을 내렸다.“이리 와.”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를 괴롭혔다.유난히 부드러웠다.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윤혜인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이제는 더욱 혼란스러워 다정한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피하려는 그녀를 눈치챈 그가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헙...”깜짝 놀란 그녀는 신음을 뱉어냈다.“하고 싶어?”그녀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무방비 상태인 그녀 속으로 마구 침입한다.VIP 병동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너무나 조용해서 두 사람의 얽힌 신음소리가 특히 선명하게 들렸다.윤혜인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고 심장이 터질 듯 조여왔다.그녀는 문밖의 주훈에게 들릴까 봐 노심초사했다.그러나 구름 속을 걷는 듯한 느낌에 제대로 사고 할 수 없다.이준혁은 그녀를 너무 잘 다뤘다. 정확했고 거침이 없다.경험이 없는 그녀에겐 비교 대상이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이준혁은 마스터레벨일 거라 생각했다.훌륭한 비주얼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그녀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부상에도 불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아마 그가 그녀에게는 유일했기에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거의 도망치다시피 화장실로 달려갔다.‘탕!’ 문이 닫혔다.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물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그녀의 흔적을 닦았다.그녀는 즐겼지만, 그는 아직이다...화장실에 나온 그녀는 감히 침대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리 와.”머뭇거리고 있는 그녀에 남자가 명령조로 말했다.“나, 아직 피곤하지 않아요. 먼저 쉬어요.”“실컷 즐겨 놓고 책임은 지지 않으시겠다?”다소 격한 그의 말투는 금욕적인 그의 이미지와 완전 달랐다.방금 찬물로 세수 한 그녀지만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대로 거기에 서 있기도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이준혁은 서두르지 않고 침대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이 상태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윤혜인의 얼굴이 다시 화르륵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아직 부부이기에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은 불법도 아니었다.거기에 이준혁은 부상을 입었고 자신도 임신한 상태인데 이대로 의자에서 밤을 보낼 순 없다.그녀가 침대에 오르자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아까 좋았어?”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유혹적이었다.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끌었다.“이준혁, 그만해요.”이준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렇게까지 모셨는데 호칭 바꿀 수 없어?”그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그들은 지금 무슨 사이일까?“피곤해요.”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허리에 놓인 그의 손이 살짝 움직였다. 뜨겁던 열기도 조금 식은 듯하다.그가 화 났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그녀였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다.그녀는 무서웠다...이준혁이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도 그녀의 심장은 겉잡을 수없이 요동쳤다.상처가 아문 후에는 고통을 잊어버린다는 말이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인듯하다.가까스로 억눌렀던 마음이 또다시 흔들릴 것
그가 애원했다.“도와줘.”그날 밤, 윤혜인은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자신을 탓했다.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귀신도 속이려는 것이 남자의 혀인 것 같다....전날 밤의 피로 때문에 윤혜인은 10시가 되어서도 깨어나질 못했다.주훈도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주훈은 옷을 배달하러 온 것이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있었고 머리카락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으며 어깨는 반쯤 드러나 있었다.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너무 매력적인 한 쌍이었다.대표님이 부상당한 것이 아니었나?이 자세는 누가 누굴 보살피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고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테이블에 옷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매우 낮은 인기척이었지만 윤혜인은 끝내 뒤척였다.비몽사몽한 상태로 이준혁의 품속을 파고들었다.그녀의 행동은 이준혁을 기쁘게 했다.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윤혜인이 눈을 떴을 때 이준혁의 한 손이 태블릿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다가 몸을 빼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더욱 가까이 감쌌다.그는 한 손으로 태블릿을 끄고 옆에 둔 후 몸을 내려 그녀의 머리에 입맞춤했다.“배고파?”이런 다정함은 너무 당황스러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이준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난 배고파.”그녀의 착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준혁의 ‘배고픔’은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먹을 것 좀 사 올게요.”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자신은 남자의 셔츠를 입고있고 자신의 옷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이준혁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남아있었다. 하여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주훈더러 옷을 가져오게 했고 식사도 곧 도착할 거야.”윤혜인은 황급히 환복하러 사라졌다.식사를 마친 후
“이혼 하지 않을 거야.”그가 말했다.윤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네?”“너에게 빠졌어.”간단한 한마디에 폭발적인 정보력이 숨어있었다. 윤혜인은 멍하니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그가 이혼을 물리며 그녀에게 빠졌다고 한다...그녀의 심장이 멈추었다가 다시 소생했다.그녀 앞에 어둠이 드리웠고 어느새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가 집은 포도가 그의 입으로 향했다.윤혜인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온몸이 무형의 충격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나른해졌다.이준혁의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내렸다.다음의 목표는 그녀의 입술이다.그는 포도를 맛나게 먹으며 윤혜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잘생긴 얼굴은 욕망에 불타오르게 했다.윤혜인은 마치 전기충격을 맞은 것같이 발끝 마디마디까지 찌릿찌릿했다.그녀는 이대로는 잠식되어 죽을 것 같았다.포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술을 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달아.”윤혜인은 여전히 구름 속을 걷는 듯했다.혀가 마비되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그녀의 긴장한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버리고 올게요.”이준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일하는 아줌마를 부르면 돼.”하지만 윤혜인은 이미 문을 연 뒤였다.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밖에 나가 열기를 가라앉혀야 했다.쓰레기를 버린 그녀는 베란다에서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이준혁은 다른 여자와 키스한 적이 없다고 했다...그녀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다...임세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임세희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녀는 자신을 경멸하기 시작했다.전에 얻은 교훈으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남자는 육체와 감정을 이성적으로 분간한다. 하지만 여자는 항상 뜨거운 스킨쉽이 더욱 가까
주훈이 앞으로 다가섰다. 전에 얻은 교훈을 잊지 않았던 그도 임세희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정중하게 말했다.“제가 모실게요.”임세희는 당연히 원치 않았다.그녀는 울며불며 애원했다.“여기에 있게 해줘. 난 괜찮으니까 내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이준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난 이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러니 너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나를 찾아오지 마.”“뭐?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임세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환청인 줄 알았다.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는 더욱 통곡했다.“잠시 이혼하지 않는 거잖아.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우리는 어울리지 않아.”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은 결심을 내린 듯했다.“난 널 동생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 널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동생은 싫어! 난 오빠의 와이프가 될 거라고!”임세희는 그에게 매달렸다.“내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고칠게.”“그만해. 돌아가서 내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봐. 너만 원한다면 너를 남주처럼 대해줄 수 있어.”“싫어! 여동생은 싫다고! 오빠 난 오빠의 동생은 하고 싶지 않아.”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싫다면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금전으로 보상해 줄 수도 혹은 다른 요구도 들어줄게.”흥분한 듯한 임세희는 이준혁의 팔을 잡고 실성한 듯 소리쳤다.“나에게 오빠 하나면 된단 말이야!”“진정해!”이준혁은 성질을 죽이고 있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이선그룹의 후계자로 자라왔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고 감정에 대해서도 시간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임세희에 대해선 책임감이 있었기에 그의 옆자리를 원하는 그녀를 만족시켜 주려 했었다.하지만 요즘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예를 들면 윤혜인을 향한 그의 마음 같은..그것이 소유욕인지 질투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아직 이혼하기 싶지 않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미안, 오빠.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난 먼저 내 몸을 챙기도록 할게. 오빠가 한 말은 생각해 보겠지만 시간을 좀 줘.”그녀의 눈에 슬픔이 담겼고 얼굴은 창백했다.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그녀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감안해 이준혁도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어.”임세희는 부드러워진 남자의 태도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마음속의 화도 많이 사그라들었다.임수향이 말했듯이 이준혁은 절대 그녀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잠깐 그 여우에게 홀린 것뿐이다.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기다리며 그 여우와 배 속의 아이를 없앨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빠, 난 그럼 이만 갈게. 비서님도 여기에 남아 보살피는 것이 낫겠어. 기사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힘없이 걸어 나갔다.그녀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준혁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주훈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까 사모님이 문밖에 계시다가 밖으로 뛰쳐나가셨어요.”...윤혜인은 홀로 주변을 오랫동안 거닐었다.그녀도 이곳에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휴대폰을 깜빡했다.가더라도 휴대폰은 챙겨야 했다.밖은 너무 추웠고 바람이 쌀쌀했다.그녀는 주훈에게 부탁해 휴대폰을 받으려 했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임세희와 마주쳤다.윤혜인을 본 임세희는 달려가 뺨을 때리려 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잡히고 말았다.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미쳤어요?”임세희는 다소 노골적으로 윤혜인을 노려보았다.얼굴을 팔아 사람을 홀리는 이따위 인간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임세희였다.송소미가 할머니까지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그녀를 단단히 교육시키지는 못할망정 되려 호되게 당했다.지금, 이준혁은 송소미를 서울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하여 그녀의 어머니는 출국 수속을 급히 진행시켰다.이용하기 좋았는데 이렇게 무력해졌다.그
화가 난 임세희를 보니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윤혜인을 못마땅해하며 아무것도 못 하는 임세희의 모습을 보면 너무 즐거웠다.화가 나 임세희는 가방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갑자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당신을 고의로 자극한 걸 인정할게요.”“하지만 그건 오빠가 저를 너무 아껴서 신혼 첫날밤에 하나가 될 거라고 약속했던 거예요. 저를 너무 사랑해서 성스러운 낭만을 안겨주고 싶었나 봐요.”임세희는 두렵지 않았다.그녀는 윤혜인이 그녀를 모함하려 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그녀는 윤혜인에 다가서며 으시댔다.“오빠 곁에 당신이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저 결벽증이 있는 오빠이기에 밖에서 다른 여자를 찾기 싫은 것뿐이에요.”“뭘 그렇게 잘난 척을, 당신은 그저 욕정을 푸는 도구일 뿐이에요.”아무 말 않는 윤혜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세희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알아요?”윤혜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무슨 뜻이죠?”그녀의 표정을 읽은 임세희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아이를 원하지 않기에 임신을 해도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비록 오빠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오빠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확실했다.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오직 나와의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원하기 때문이죠.”윤혜인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가 완강하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아이는 꼭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여야 한다는 것이다.비록 신경 쓰지 않으려고 자신을 위로했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임세희는 경고했다.“경고하는데 하루빨리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식을 앞세워 신분 상승하려고 애쓰지 말아요. 엄마의 수준을 자식이 따라가는 거라서 못난 아이가 태어날 수 밖에 없어요. 이를테면 기형, 저능아...”임세희 말이 끝
방씨 가문에서 지키려 한다 해도 방민아의 인생은 별로 희망이 없었다.육연주는 적게 연루되기도 했고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구치소에 한 달 구금되었다가 나왔다. 육경한이 육연주에게 변호사를 찾아줬지만 육연주 모녀는 이를 소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한사코 거절하면서 일부러 육연주를 구치소에 들여보냈고 육경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하지만 육연주 모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원칙인 방씨 가문은 방민아가 이 지경까지 된 게 다 육연주 탓이라고 생각한 이상 복수를 준비할 것이고 그 후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그다음은 서씨 가문이었다. 육연주가 서씨 가문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오라지 않았지만 서현재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이 점점 이상해진 데다 원래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재벌 집 아가씨라 서씨 가문에 척을 진 사람이 많았다.지금의 서씨 가문은 몰락하게 되었고 서현재가 암 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서씨 가문에서 몰아내긴 했지만 줄곧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그 어떤 미친 생각을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육연주가 계속 서울에서 나댄다면 앙심을 품은 서씨 가문 사람들이 기회를 노리고 복수해 올 수도 있기에 아예 이지애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 피신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모녀는 육경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소원에게 홀려 인사불성이라고만 생각했다.이지애는 끌려가면서 육경한에게 원망을 퍼붓기도 했다.“경한아,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우리가 잘해준 거 다 잊은 거야? 여자 하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를 내치겠다고? 가족인데 어떻게 그래?”사실 잘해줬다고 할 것도 없었다. 상대편에 서서 손가락질하지 않고 돈 몇십만 원 쥐여준 게 전부였다. 이지애도 그때는 살만했기에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었고 조금의 ‘선심’을 베풀었지만 육경한은 갚아야 할 돈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많은 돈으로 보답했다.다만 이지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빚쟁이 대하듯 대했다. 돈이 많으니 이걸로는
“경한아... 억울해서 죽을 것 같구나. 쟤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날 욕하고 때리고...”이지애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소원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고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육경한은 이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지 차가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데려가.”육경한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경호원들은 두피가 저릿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데려가겠습니다.”이지애는 육경한이 자신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해 재빨리 다각 그의 손목을 잡았다.“역시 경한이가 최고야. 우린 가족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저 여자가 우리 남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연주가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살도 많이 빠졌어. 삼촌이 무시한다며 얼마나 울었는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애는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경호원이 왜 나한테 오지?’‘저 천박한 계집애를 끌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잠깐만... 지금 착각하는 모양인데 경한이는 저 여자를 끌어내라고 한 거야. 옆에 있는 변호사까지 묶어서 밖으로 쫓아내.”경호원들은 이지애처럼 눈치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육경한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이지애였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빽이 있다며 대표님과 미우 그룹을 언급하는지...’‘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경호원들은 이지애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를 끌고 나갔다.현실 부정 중인 이지애는 육경한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경한아, 말 좀 해봐. 저 여자 쫓아내려고 했잖아. 나는 네 누나야.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외부인 편을 들 수 있어? 경한아...”이지애는 눈물을 쏟았다.“말 좀 해봐.”“누나.”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진지하게 말했다.“여러 번 말했잖아요. 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대뜸 욕을 바가지째로 먹었다.그럼에도 이지애는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X신들. 멍청하기는.”방금까지 동정심을 느끼던 여자에게 심한 욕을 먹었으니 다들 어이가 없었고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말을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렇게 추잡스러운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그러니까요. 좋은 사람이었다면 구치소에 수감되었겠어요?”이지애는 여론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는지 더욱 흥분했다.“너희들이 뭘 알아. 이 여자가 내 딸을 해쳤고 내 딸은 피해자야. 이 여자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수감될 일도 없었어.”사람들은 더 이상 이지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 지르며 욕하는 모습은 정말 품위가 없어 보였다.“그쪽이 돈 많고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딸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으면 당연히 빼냈겠죠.”이때 한 아주머니가 일침을 놓았다.“맞는 말이에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잡았겠어요? 다 이유가 있는 거지.”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이유 없이 사람을 잡았다면 돈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가 일 순위이겠죠.”“됐어요. 됐어요. 이만하고 다들 들어갑시다. 구경났어요?”아파트 단지 관리자가 달려와 구경 중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그 시각.육경한은 고위급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황진수는 전화를 받고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육경한은 해외의 유명 대기업과 협상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황진수는 몇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회의실로 들어갔다.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육경한에게 다가가 보고 했다.그러자 육경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황진수를 회의석으로 끌어당겼다.“네가 해.”‘지금 나한테 이 중요한 회의를 떠맡기고 간 거야? 내가 이런 걸 할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소원 씨, 괜찮아요?”말을 건넨 사람은 주석훈이었다.오늘 아침 두 사람은 합의 사항을 만들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드는 이지애를 목격했고 소원이 중심을 못 잡고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부축했다.옆에서 발악하던 이지애는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에게 제압되었다.“너 누구야? 감히 날 막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경호원에게 꽉 붙잡힌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다.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당장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미우 그룹 대표가 내 동생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구나. 내 동생이 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서울에서 쫓겨날 거야.” 이지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반응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육경한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경호원들은 육경한과의 관계를 듣고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소원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기에 이지애가 해치지 못하게 손을 묶어두었다.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지애와 소원이 다투고 있을 때 곧바로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이지애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소원을 부축하는 주석훈을 보며 막말을 퍼부었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동생이랑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너는 남자를 꼬시는 게 취미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여튼 개 버릇 남 못 준다니까.”이지애의 말은 듣기 굉장히 거북했고 소원은 방금 한 대만 때리고 멈춘 자신을 원망했다.그 시각 주석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지애를 바라봤다.“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도 처벌 대상입니다. 제 의뢰인이 내연녀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일방적인 모함에 속하고 법에 의거하여 충분히 고소할 수 있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
“우리 연주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 나와요?”이지애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밝은 미래를 가진 그녀의 딸은 구타 사건으로 인해 30일간의 구속 처분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정신 상태에 큰 타격을 입었다.소문에 의하면 구치소 동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늘 부잣집 아가씨로만 살아왔던 육연주는 구치소에 들어가도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러다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말았다.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지켜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었지만 그 버릇을 구치소에서 똑같이 하는 건 죽자고 덤비는 거나 다름없다.게다가 이미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누굴 무서워하겠는가?육경한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기어코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이지애는 모든 자원이 국내에 있다. 해외로 나간다해서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상에 그녀보다 잘나가고 부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해외로 나가면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텐데, 엄마와 딸이 억울함을 당하고만 있겠는가?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고 이혼도 혼자서 처리했다. 서한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지었다.게다가 이혼했음에도 육연주를 해외로 보냈기에 이지애는 분노와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모든 걸 알게 된 소원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스웠다.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쪽 따님이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괴롭혔다면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은 저였겠죠.”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우리 사위한테 치근덕거리지 않았다면 연주가 때렸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죠. 얌치도 모르는 천박한 주제에.”소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증거 있으세요? 제가 서현재
소원이 이야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육경한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자세히 말해줬다.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임신중절 약은 소원의 손에 있었기에 그녀가 약을 먹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다.비록 위협을 한 거나 다름없지만 그 속에 섞인 두려움을 소원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다.어쩌면 더욱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다.이러한 끈기가 보통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분명 빛날 테지만, 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거듭 억압당해 모든 자존심이 닳아 없어졌다.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시들었을 텐데도 소원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썼다.육경한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것 뿐이다.한편으로는 전미영이 빨리 호전되길 원했다. 어머님의 호전이 소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마음을 약하게 하고 이로부터 순진한 아이를 지켜내길 바랐다....소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진찰받았던 의사였다.“선생님, 안녕하세요.”“소원 씨, 오늘 병원에 안 오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3일 동안 약 다 먹으면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할 거예요.”의사의 말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데 약을 먹은 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서 출혈이 발생하고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다.“아직 약을 안 먹었어요.”소원이 말했다.“안 먹었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나요?”의사가 물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민 중이라면 검사를 받는
전미영은 소원의 행동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점점 멍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소원의 복부를 가리키며 여전히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꽃이야... 꽃이 피었어...”소원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에는 하얀 데이지 한송이가 있었다.전미영은 복부 쪽 단추에 달린 작은 데이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소원의 외침은 간병인의 주의를 끌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간병인은 말하는 진미영을 보고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재빨리 달려가 요양원의 의사를 모셔 왔다.소원은 의사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했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검사를 해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런 반응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만약 간단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다만 기억 회복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때때로 많은 기억이 환자의 뇌에 부담을 주어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겠죠?”의사는 전미영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부담일 수 있으니 간단하게 사는 게 최고다.소원은 검사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만신창이된 그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전미영이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병실로 돌아온 소원은 전미영의 곁을 지켰지만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소원은 전미영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는 게 아니라 주차된 은색의 승용차로 향했다.창문을 두드리자 차장이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육경한이다.육경한은 놀라지 않은듯하다. 비서의 차를 타고 있다 한들 예민하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