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는...”망설이던 윤혜인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가 정식으로 이혼 절차를 밟기 전에는 아이 같은 건 만들지 말아줘요. 나도, 할아버지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부디 안전 조치를 꼼꼼히 하길 바래요.”사실 말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었으니 명확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결혼 생활 중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아버지였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그녀도 아기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이준혁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넷째는 없는 거야? 그럼 내가 대신 만들어줄까? 내가 너희들의 행복을 빌어줘야 한다. 어때?”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나와 선배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말을 가로챘다.“할아버지가 어떻게 되실 거란 걸 생각해 봤어? 그 남자를 위해 할아버지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한순간.너무 나 큰 죄명이 쓰였다.정상적인 교제가 어떻게 할아버지의 안위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되어버렸는지 윤혜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할아버지도 친구들과의 교제를 제한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준혁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뿐이었다.“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할아버지도 모를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과 임세희의 일도 제가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절대 비밀 지킬게요.’이준혁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그녀의 착한 모습이 처음으로 짜증이 났다.윤혜인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점점 일그러지는 표정에 그의 상처에 대한 김성훈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려갈게요.”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준혁이 그녀를 확 잡아당겨 품속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돌려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내 침대에 오르고 마음대로 내려가려고 해?”그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윤혜인의 등이 그의 가슴에 닿아있었지만, 그녀의 턱은 돌아가고 힘겹
이게 무슨 말인가?윤혜인은 그가 임세희랑 침대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해외는 뭐 하러 갔단 말인가?이준혁과 2년을 함께한 그녀이기에 그가 혈기가 왕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순수한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이혼도 그녀에게 통보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이준혁은 그녀의 얌전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는 그녀를 넘어뜨리고 품속에 안았다. “화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윤혜인은 그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임세희랑 잔 적 없다고요?”이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느리게 말했다.“그래.”“진짜요?”윤혜인은 다시 한번 물었다.이준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뭘 의심하는 거야?”“하지만...”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몸을 내렸다.“이리 와.”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를 괴롭혔다.유난히 부드러웠다.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윤혜인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이제는 더욱 혼란스러워 다정한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피하려는 그녀를 눈치챈 그가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헙...”깜짝 놀란 그녀는 신음을 뱉어냈다.“하고 싶어?”그녀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무방비 상태인 그녀 속으로 마구 침입한다.VIP 병동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너무나 조용해서 두 사람의 얽힌 신음소리가 특히 선명하게 들렸다.윤혜인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고 심장이 터질 듯 조여왔다.그녀는 문밖의 주훈에게 들릴까 봐 노심초사했다.그러나 구름 속을 걷는 듯한 느낌에 제대로 사고 할 수 없다.이준혁은 그녀를 너무 잘 다뤘다. 정확했고 거침이 없다.경험이 없는 그녀에겐 비교 대상이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이준혁은 마스터레벨일 거라 생각했다.훌륭한 비주얼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그녀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부상에도 불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아마 그가 그녀에게는 유일했기에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거의 도망치다시피 화장실로 달려갔다.‘탕!’ 문이 닫혔다.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물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그녀의 흔적을 닦았다.그녀는 즐겼지만, 그는 아직이다...화장실에 나온 그녀는 감히 침대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리 와.”머뭇거리고 있는 그녀에 남자가 명령조로 말했다.“나, 아직 피곤하지 않아요. 먼저 쉬어요.”“실컷 즐겨 놓고 책임은 지지 않으시겠다?”다소 격한 그의 말투는 금욕적인 그의 이미지와 완전 달랐다.방금 찬물로 세수 한 그녀지만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대로 거기에 서 있기도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이준혁은 서두르지 않고 침대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이 상태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윤혜인의 얼굴이 다시 화르륵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아직 부부이기에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은 불법도 아니었다.거기에 이준혁은 부상을 입었고 자신도 임신한 상태인데 이대로 의자에서 밤을 보낼 순 없다.그녀가 침대에 오르자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아까 좋았어?”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유혹적이었다.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끌었다.“이준혁, 그만해요.”이준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렇게까지 모셨는데 호칭 바꿀 수 없어?”그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그들은 지금 무슨 사이일까?“피곤해요.”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허리에 놓인 그의 손이 살짝 움직였다. 뜨겁던 열기도 조금 식은 듯하다.그가 화 났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그녀였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다.그녀는 무서웠다...이준혁이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도 그녀의 심장은 겉잡을 수없이 요동쳤다.상처가 아문 후에는 고통을 잊어버린다는 말이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인듯하다.가까스로 억눌렀던 마음이 또다시 흔들릴 것
그가 애원했다.“도와줘.”그날 밤, 윤혜인은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자신을 탓했다.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귀신도 속이려는 것이 남자의 혀인 것 같다....전날 밤의 피로 때문에 윤혜인은 10시가 되어서도 깨어나질 못했다.주훈도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주훈은 옷을 배달하러 온 것이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있었고 머리카락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으며 어깨는 반쯤 드러나 있었다.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너무 매력적인 한 쌍이었다.대표님이 부상당한 것이 아니었나?이 자세는 누가 누굴 보살피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고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테이블에 옷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매우 낮은 인기척이었지만 윤혜인은 끝내 뒤척였다.비몽사몽한 상태로 이준혁의 품속을 파고들었다.그녀의 행동은 이준혁을 기쁘게 했다.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윤혜인이 눈을 떴을 때 이준혁의 한 손이 태블릿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다가 몸을 빼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더욱 가까이 감쌌다.그는 한 손으로 태블릿을 끄고 옆에 둔 후 몸을 내려 그녀의 머리에 입맞춤했다.“배고파?”이런 다정함은 너무 당황스러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이준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난 배고파.”그녀의 착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준혁의 ‘배고픔’은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먹을 것 좀 사 올게요.”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자신은 남자의 셔츠를 입고있고 자신의 옷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이준혁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남아있었다. 하여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주훈더러 옷을 가져오게 했고 식사도 곧 도착할 거야.”윤혜인은 황급히 환복하러 사라졌다.식사를 마친 후
“이혼 하지 않을 거야.”그가 말했다.윤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네?”“너에게 빠졌어.”간단한 한마디에 폭발적인 정보력이 숨어있었다. 윤혜인은 멍하니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그가 이혼을 물리며 그녀에게 빠졌다고 한다...그녀의 심장이 멈추었다가 다시 소생했다.그녀 앞에 어둠이 드리웠고 어느새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가 집은 포도가 그의 입으로 향했다.윤혜인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온몸이 무형의 충격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나른해졌다.이준혁의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내렸다.다음의 목표는 그녀의 입술이다.그는 포도를 맛나게 먹으며 윤혜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잘생긴 얼굴은 욕망에 불타오르게 했다.윤혜인은 마치 전기충격을 맞은 것같이 발끝 마디마디까지 찌릿찌릿했다.그녀는 이대로는 잠식되어 죽을 것 같았다.포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술을 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달아.”윤혜인은 여전히 구름 속을 걷는 듯했다.혀가 마비되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그녀의 긴장한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버리고 올게요.”이준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일하는 아줌마를 부르면 돼.”하지만 윤혜인은 이미 문을 연 뒤였다.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밖에 나가 열기를 가라앉혀야 했다.쓰레기를 버린 그녀는 베란다에서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이준혁은 다른 여자와 키스한 적이 없다고 했다...그녀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다...임세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임세희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녀는 자신을 경멸하기 시작했다.전에 얻은 교훈으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남자는 육체와 감정을 이성적으로 분간한다. 하지만 여자는 항상 뜨거운 스킨쉽이 더욱 가까
주훈이 앞으로 다가섰다. 전에 얻은 교훈을 잊지 않았던 그도 임세희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정중하게 말했다.“제가 모실게요.”임세희는 당연히 원치 않았다.그녀는 울며불며 애원했다.“여기에 있게 해줘. 난 괜찮으니까 내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이준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난 이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러니 너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나를 찾아오지 마.”“뭐?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임세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환청인 줄 알았다.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는 더욱 통곡했다.“잠시 이혼하지 않는 거잖아.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우리는 어울리지 않아.”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은 결심을 내린 듯했다.“난 널 동생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 널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동생은 싫어! 난 오빠의 와이프가 될 거라고!”임세희는 그에게 매달렸다.“내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고칠게.”“그만해. 돌아가서 내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봐. 너만 원한다면 너를 남주처럼 대해줄 수 있어.”“싫어! 여동생은 싫다고! 오빠 난 오빠의 동생은 하고 싶지 않아.”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싫다면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금전으로 보상해 줄 수도 혹은 다른 요구도 들어줄게.”흥분한 듯한 임세희는 이준혁의 팔을 잡고 실성한 듯 소리쳤다.“나에게 오빠 하나면 된단 말이야!”“진정해!”이준혁은 성질을 죽이고 있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이선그룹의 후계자로 자라왔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고 감정에 대해서도 시간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임세희에 대해선 책임감이 있었기에 그의 옆자리를 원하는 그녀를 만족시켜 주려 했었다.하지만 요즘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예를 들면 윤혜인을 향한 그의 마음 같은..그것이 소유욕인지 질투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아직 이혼하기 싶지 않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미안, 오빠.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난 먼저 내 몸을 챙기도록 할게. 오빠가 한 말은 생각해 보겠지만 시간을 좀 줘.”그녀의 눈에 슬픔이 담겼고 얼굴은 창백했다.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그녀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감안해 이준혁도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어.”임세희는 부드러워진 남자의 태도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마음속의 화도 많이 사그라들었다.임수향이 말했듯이 이준혁은 절대 그녀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잠깐 그 여우에게 홀린 것뿐이다.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기다리며 그 여우와 배 속의 아이를 없앨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빠, 난 그럼 이만 갈게. 비서님도 여기에 남아 보살피는 것이 낫겠어. 기사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힘없이 걸어 나갔다.그녀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준혁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주훈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까 사모님이 문밖에 계시다가 밖으로 뛰쳐나가셨어요.”...윤혜인은 홀로 주변을 오랫동안 거닐었다.그녀도 이곳에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휴대폰을 깜빡했다.가더라도 휴대폰은 챙겨야 했다.밖은 너무 추웠고 바람이 쌀쌀했다.그녀는 주훈에게 부탁해 휴대폰을 받으려 했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임세희와 마주쳤다.윤혜인을 본 임세희는 달려가 뺨을 때리려 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잡히고 말았다.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미쳤어요?”임세희는 다소 노골적으로 윤혜인을 노려보았다.얼굴을 팔아 사람을 홀리는 이따위 인간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임세희였다.송소미가 할머니까지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그녀를 단단히 교육시키지는 못할망정 되려 호되게 당했다.지금, 이준혁은 송소미를 서울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하여 그녀의 어머니는 출국 수속을 급히 진행시켰다.이용하기 좋았는데 이렇게 무력해졌다.그
화가 난 임세희를 보니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윤혜인을 못마땅해하며 아무것도 못 하는 임세희의 모습을 보면 너무 즐거웠다.화가 나 임세희는 가방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갑자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당신을 고의로 자극한 걸 인정할게요.”“하지만 그건 오빠가 저를 너무 아껴서 신혼 첫날밤에 하나가 될 거라고 약속했던 거예요. 저를 너무 사랑해서 성스러운 낭만을 안겨주고 싶었나 봐요.”임세희는 두렵지 않았다.그녀는 윤혜인이 그녀를 모함하려 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그녀는 윤혜인에 다가서며 으시댔다.“오빠 곁에 당신이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저 결벽증이 있는 오빠이기에 밖에서 다른 여자를 찾기 싫은 것뿐이에요.”“뭘 그렇게 잘난 척을, 당신은 그저 욕정을 푸는 도구일 뿐이에요.”아무 말 않는 윤혜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세희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알아요?”윤혜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무슨 뜻이죠?”그녀의 표정을 읽은 임세희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아이를 원하지 않기에 임신을 해도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비록 오빠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오빠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확실했다.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오직 나와의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원하기 때문이죠.”윤혜인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가 완강하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아이는 꼭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여야 한다는 것이다.비록 신경 쓰지 않으려고 자신을 위로했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임세희는 경고했다.“경고하는데 하루빨리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식을 앞세워 신분 상승하려고 애쓰지 말아요. 엄마의 수준을 자식이 따라가는 거라서 못난 아이가 태어날 수 밖에 없어요. 이를테면 기형, 저능아...”임세희 말이 끝
육경한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26년이든 36년이든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은 오래 함께한 사람이라도 내겐 쓸모없는 사람이야.”소종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은 소종의 주인이었고 소종은 늘 육경한을 하느님처럼 높이 받들며 오랫동안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그 여자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자줏빛으로 물든 소종의 손이 감각을 잃어갈 때쯤 육경한이 차창을 다시 내렸다. 소종의 손은 이제 완전히 감각을 잃었기에 다른 손으로 겨우 옮겨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다음은 없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차에 시동을 걸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소종은 떠나가는 차를 보며 바닥에 털썩 꿇어앉았다.소종은 아직도 자기가 정말 잘못한 게 맞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악독하기 그지없는 소원은 안 그래도 매일 육경한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고 있을 텐데 아이까지 뺏겼으니 더 독하게 의지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소종은 그저 육경한을 위해 미리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육경한은 아직도 소원을 잊지 못해 끙끙 앓고 있었다.방민아는 정말 여러모로 완벽한 선택지였다. 육경한의 사업에 도움이 될뿐더러 일편단심이었다. 방민아에 비하면 소원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였다.소종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육경한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소원이어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소종의 눈빛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소원의 차는 안지철의 차와 충돌하고 전복된 상태였지만 다행히 옆에 있는 진흙탕에 빠지면서 폭신한 진흙이 일부 충격을 흡수했고 에어백도 제대로 터졌고 안전벨트도 제대로 하고 있은 덕분에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그래도 소원은 큰 충격에 잠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척수뼈가 부러졌는지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너무 아파 미간을 찌푸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기어 나오려 했다.차창이 깨지긴 했지만 완전히 깨진 건 아니었기에 맨손으로 깨진 유리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원을 더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소원이 육경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독단적으로 행동한 건 소원이 하루가 멀다 하게 육경한을 무너트리려고 악을 쓰는 게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소송에서 지고 유진이 육경한의 손에 들어갔으니 소원도 얌전해지겠거니 했지만 패소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감정소로 가서 조사하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감정소에 입사까지 하면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다.이런 시련을 겪고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소원을 보며 소종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소원의 끈기에 놀랐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소원이 육경한을 해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궁지에 몰린 안지철이 전화했을 때 성급하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소종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육경한이 어떻게 처벌할지는 두렵지 않았다. 일이 성공하지 않는다 해도 후회는 없었다. 그저 소원이 육경한을 무너트리려고 날뛰는 게 너무 싫어서 따끔하게 혼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이를 들은 육경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그런 지시를 내린 거야, 아니면 누가 그렇게 지시하라고 한 거야?”소종은 심장이 철렁했다. 육경한이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육경한이 소종의 목숨을 구해준 뒤로 소종에게 육경한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는데 절대 배신할 리가 없었다.“대표님,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소종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육경한은 인내심을 잃었다.“어디야?”소종은 육경한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얼른 이렇게 답했다.“저도 잘 모릅니다. 안지철은 저와 통화한 뒤로 자취를 감췄고 다시 전화해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실종된 지점과 녹음파일 나한테 보내.”육경한이 말했다.소종의 핸드폰은 특수 제작이라 통화 내용이든 문자든 클릭 한 번에 저장할 수 있었고 돌발 상황이 생기면 클릭 한 번에 삭제할 수도 있었다. 그 과정은 고작 몇초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이
육경한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방민아를 바라봤다.방민아가 싱긋 웃으며 얌전하게 말했다.“웨딩드레스랑 턱시도는 미리 피팅해봐야 하는데 바쁘면 혼자 다녀올게요.”육경한이 눈꺼풀을 들어 방민아의 표정을 살폈다. 방민아는 이 말을 하면서도 눈부시게 웃고 있어 억울한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이에 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요. 나는 바쁘니까 알아서 시간 정해서 가요.”“그래요. 조심해서 다녀와요.”육경한이 떠났지만 방민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약혼녀의 친절함을 드러내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배웅했다. 육경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방민아의 부드럽던 미소가 싸늘하게 식어갔다.쨍그랑.테이블에 올라온 요리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방민아는 육경한이 또다시 소원을 찾으러 갔다는 걸 알고 속이 뒤집어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떼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법정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진을 방민아에게 맡기지 않을 걸 봐서는 아직 방민아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방민아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니 아이를 맡기기 꺼리는 것이었다.육경한은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그건 소원도 마찬가지였다.방민아는 한꺼번에 두 사람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육씨 가문 사모님이 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할 바에는 이 약점을 잘 잡아 다시는 걱정할 일이 없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생각을 마친 방민아는 도우미에게 어질러진 주방을 치우라고 하더니 자기 전에 집사에게 리스트를 주며 내일 아침 육경한에게 국을 끓여줄 수 있게 제일 좋은 식재료를 사 오라고 지시했다.입에 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마음만 알아준다면 그걸로도 만족했다....육경한이 집을 나서자 소종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육경한에게 문을 열어줬다.육경한은 소종이 화면을 끄지 않은 채로 좌석에 놓아둔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눈빛을 돌리고는 소종에
윤혜인은 너무 감동해 마음이 따듯해졌다.“잘 다녀와. 비행기에서 최대한 한잠 자고.”윤혜인은 이준혁은 요즘 시차 적응하느라 잠도 잘 자지 못하면서 살인적인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마음 아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것뿐이었다.“그래. 알았어. 이 프로젝트 끝나면 길게 휴가 내고 너희들 옆에 꼭 붙어있을 거야.”결혼한 뒤로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이준혁은 거의 출장 가지 않았다. 아이가 어려 시터도 많고 홍 아줌마와 문현미도 같이 돌보고 있었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모유 수유하는 엄마들은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이준혁은 최대한 업무를 줄이고 윤혜인 곁을 지키려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해외 시장 개척이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라 어쩔 수 없었다.외국에서 여러 가지 기술로 한국의 경제 발전에 제한을 걸 때마다 이준혁은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 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 국가의 영향력을 높여주는 데 보탬이 될뿐더러 회사에서 진행하는 에너지 산업에 대한 외국의 의존도도 높일 수 있었기에 이준혁은 이 프로젝트를 매우 중시했고 여러 번 외국에 출장을 나갔다.하지만 매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어떤 때는 착륙한 지 12시간 만에 아이와 윤혜인의 안전을 걱정해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점이었기에 전화를 끊으면 시간을 쪼개 회의를 마치고는 비행기가 준비되자마자 바로 국내로 돌아오는 걸 반복했다.이준혁에게 프로젝트도 중요했지만 윤혜인의 정서도 중요했다. 결혼식을 올리며 윤혜인이 슬프고 힘들 때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곡 지키고 싶었다....육경한은 밥에 입도 별로 대지 않고 갑자기 나가봐야 한다며 일어났다.방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소원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기분이 잡쳤고 이내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경한 씨.”방민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육경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육경한은 그 자리에 우둑 선 채 방민아를 바라보며 방민아가 입을 열
이준혁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윤혜인은 전화가 오자마자 단 한 번의 신호음도 지나기 전에 받았다.“준혁 씨, 어떻게 됐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소원이 무슨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주 비서에게 최고의 인력을 동원해서 수색을 맡겼고 경찰에도 신고했어. 하지만 소원 씨가 실종된 장소에서는 소원 씨를 찾지 못했어. 아직 계속 수색 중이야.”이준혁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윤혜인의 성격상 무언가를 숨기려 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만약 소식이 계속 닿지 않는다면 그녀는 직접 나서서 소원을 찾으러 갈 것이었고 그러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소원이... 정말 위험한 상황인 건가요...”“걱정하지 마. 내가 경한이에게도 연락했거든. 경한이가 있으면 곧 소원 씨를 찾을 수 있을 거야.”이준혁이 차분히 말했다.“뭐라고요?!”그러자 깜짝 놀란 윤혜인이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육경한한테 그걸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그 살인자잖아요! 소원이가 서울에서 무슨 원한을 산 적이 있겠어요? 예전에 소원이네 아버지 회사가 망했을 때도, 빚을 내서 직원들에게 보상금까지 준 사람이에요. 서울에서 소원을 해치려는 사람은 육경한 말고는 없다고요!”“경한이가 아니야.”이준혁은 냉정하게 말했다.“혜인아, 나 믿어봐. 소원 씨는 경한이의 애 엄마야. 절대 소원 씨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 소원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경한이뿐이고.”1분, 아니 1초라도 더 지체하면 위험이 커질 수 있었다.그러나 이 말을 윤혜인에게 직접 전하면 그녀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뻔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이 정말 순수하게 유진이를 자기 아이로만 생각할 것 같아요?”하지만 윤혜인은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육경한은 항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그가 저지른 많은 행동들은 너무나 지나쳤고 윤혜인은 그가 유진이의 엄마라
이준혁은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한 후 주훈의 보고를 기다렸다.30분 후, 주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두 대가 있었지만 차 안이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원 씨의 핸드폰은 차 안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차량에서는 어떤 개인 물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차량의 번호판은 위조된 것으로 차량 소유자의 신원을 당장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이준혁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수색 범위를 넓혀 계속 찾아봐.”그러자 주훈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후, 이준혁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내심 그는 육경한이 소원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육경한과 소원의 관계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육경한이 소원을 향해 품은 감정은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컸다.아무리 얽히고설킨 감정이라도 그는 소원을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때문에 이준혁은 이 일이 단순한 오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하지만 자신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소원을 가장 빠르게 찾는 방법은 바로 육경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망설임 없이 그는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육경한은 마침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로 방민아와 함께 야식을 먹고 있었다.그와 이준혁은 최근 거의 교류가 없었다.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인연을 붙잡고 있는 김성훈이 아니었다면 이미 멀어졌을 관계였다.육경한은 이준혁이 중요한 용건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방민아 앞에서 대놓고 전화를 받았다.“응, 준혁아.”“어디야?”이준혁의 말투는 간결했다.“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지금 밥 먹고 있어.”육경한이 대답에 이준혁은 그가 소원의 실종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확신했다.그러나 분명 육경한 주변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소원이 서울로 돌아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았다.때문에 육경한이나 그의 주변 사람 외에는 의심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소원 씨에게 일이 생겼어
“말해봐, 서두르지 말고. 괜찮으니까 일단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내가 바로 갈게.”윤혜인은 애타는 목소리로 소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러자 소원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 사람이 잘 지내면 난 그걸로 충분히 행복해.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이 일로 죄책감 느끼지 않았으면 해...”이 말은 서현재에게 꼭 전하고 싶은 소원의 진심이었다.그녀는 서현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면 그는 자신을 원망하며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서현재가 하는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오히려 기억이 없기에 그는 복잡한 감정 없이 순조롭게 서진태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서진태 또한 그를 어렵게 만들지 않았다.소원은 유진을 되찾으려면 육경한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 싸움에 서현재가 엮이지 않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수월했다.무엇보다 소원은 서현재가 이 모든 일로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바랐다.그때 차에 간신히 시동이 걸렸고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통화가 끊어졌다.하지만 소원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오늘만 살아남으면 안지철의 무모한 행동만으로도 주석훈이 충분히 증거를 모아 재조사를 신청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윤혜인은 다급한 마음에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 제발 좀 도와줘요! 소원이 지금 위험해요! 누군가 소원이를 죽이려고 해요...육경한이에요. 틀림없어요. 그 나쁜 놈이 소원이를 죽이려고 하는 거라고요!”긴장한 나머지 윤혜인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진정해. 심호흡 한 번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말해봐.”이준혁은 태평양 건너편의 지사에서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윤혜인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은 그는 손짓으로 회의를 멈추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소원 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그러자 윤혜인은 눈물이 맺힌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 소
소원은 뒤에 있는 안지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그동안의 조사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안지철은 잔머리를 잘 굴리고 이익을 좇는 성격이긴 하지만 대단한 악행을 저지를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다.심지어 소원이 안지철의 이익을 건드렸다고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목숨을 노릴 이유는 없었다.결국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쫓아오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지시 때문일 것이다.‘설마...육경한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나한테 해를 끼치려는 걸까?’이때, 차 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보니 윤혜인이었다.소원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실수로 받기 버튼을 눌러버렸다.수화기 너머로 윤혜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아, 너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육경한 그 쓰레기가 너랑 아이를 뺏으려고 한다는 걸 말이야!”윤혜인은 오늘 주석훈을 찾아가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려다가 우연히 육경한의 소송장을 발견했다.주석훈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소송 내용을 본 윤혜인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육경한이 소원과 아이를 두고 싸움을 벌이려 한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주석훈에게 따지지 않았다.소원이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숨겼을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윤혜인은 육경한의 뻔뻔함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쓰레기 같은 놈, 내가 가서 그 자식한테 한마디 해야겠어! 정말 너무 화나!”분노에 가득 찬 그녀는 소원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흥분해서 말했다.소원은 간신히 차분하게 대답했다.“난 괜찮아. 그 사람 찾아가봤자 아무 소용 없어. 네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거야. 괜히 속만 상할 뿐이지.”“그래도 가서 욕이라도 해야겠어! 안 그러면 나 속 터질 것 같아. 요즘 이렇게 나쁜 사람 처음 봤다니까!”윤혜인은 단단히 결심한 듯 보였다.그리고 소원은 그녀의 말에 약간 안심했다.오랫동안 이렇게 악랄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이준혁에게서 잘 보호받고 있다는 뜻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안지철은 코피가 터져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병약한 여자 하나도 처리 못 해?”소종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운전 실력이 꽤 좋아 보였습니다. 저보다 나은 것 같아요. 저도 사람을 들이받은 적이 없어서... 감을 못 잡겠어요.”“빨리 끝내.”상대방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안지철은 몸을 떨며 말했다.“저 그만두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저는 오늘 밤이라도 바로 떠나겠습니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게요. 안 될까요?”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안지철은 그저 몰래 도망치고 싶었다.다른 방식이면 몰라도 사람을 죽이라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처음에 그는 소종에게 돈을 받고 유시연을 통해 혈액 샘플을 빼돌리게 했다.그러고는 일이 끝나면 바로 해외로 떠나겠다고 약속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하지만 유시연과 이전부터 내연 관계였던 그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다가 일이 지체되고 만 것이다.사실 안지철은 이미 내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정식 경로가 아니라도 은밀히 빠져나갈 방법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그런데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혼란스러워진 안지철은 소종에게 연락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소종은 그녀를 차로 들이받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라고요?”안지철은 살인을 저지를 용기가 전혀 없었다.그러자 소종은 말했다.“그래, 안 해도 돼.”안지철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안심하세요. 저 절대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겁니다...”“하지만 받은 돈은 전부 돌려줘야 할 거야. 잔금도 지급하지 않을 거고.”여전히 싸늘한 소종의 목소리에 안지철은 당황하며 외쳤다.“그건 안 됩니다!”“일은 제가 다 했잖아요. 약속을 어기시면 저도 입을 다물지 못할 겁니다!”안지철이 소종을 협박했다.“그럼 지금 당장 떠들어봐. 어차피 그 여자 오늘 죽지 않으면 당신 정체도 전부 탄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