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애원했다.“도와줘.”그날 밤, 윤혜인은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자신을 탓했다.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귀신도 속이려는 것이 남자의 혀인 것 같다....전날 밤의 피로 때문에 윤혜인은 10시가 되어서도 깨어나질 못했다.주훈도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주훈은 옷을 배달하러 온 것이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있었고 머리카락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으며 어깨는 반쯤 드러나 있었다.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너무 매력적인 한 쌍이었다.대표님이 부상당한 것이 아니었나?이 자세는 누가 누굴 보살피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고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테이블에 옷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매우 낮은 인기척이었지만 윤혜인은 끝내 뒤척였다.비몽사몽한 상태로 이준혁의 품속을 파고들었다.그녀의 행동은 이준혁을 기쁘게 했다.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윤혜인이 눈을 떴을 때 이준혁의 한 손이 태블릿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다가 몸을 빼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더욱 가까이 감쌌다.그는 한 손으로 태블릿을 끄고 옆에 둔 후 몸을 내려 그녀의 머리에 입맞춤했다.“배고파?”이런 다정함은 너무 당황스러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이준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난 배고파.”그녀의 착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준혁의 ‘배고픔’은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먹을 것 좀 사 올게요.”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자신은 남자의 셔츠를 입고있고 자신의 옷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이준혁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남아있었다. 하여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주훈더러 옷을 가져오게 했고 식사도 곧 도착할 거야.”윤혜인은 황급히 환복하러 사라졌다.식사를 마친 후
“이혼 하지 않을 거야.”그가 말했다.윤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네?”“너에게 빠졌어.”간단한 한마디에 폭발적인 정보력이 숨어있었다. 윤혜인은 멍하니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그가 이혼을 물리며 그녀에게 빠졌다고 한다...그녀의 심장이 멈추었다가 다시 소생했다.그녀 앞에 어둠이 드리웠고 어느새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가 집은 포도가 그의 입으로 향했다.윤혜인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온몸이 무형의 충격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나른해졌다.이준혁의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내렸다.다음의 목표는 그녀의 입술이다.그는 포도를 맛나게 먹으며 윤혜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잘생긴 얼굴은 욕망에 불타오르게 했다.윤혜인은 마치 전기충격을 맞은 것같이 발끝 마디마디까지 찌릿찌릿했다.그녀는 이대로는 잠식되어 죽을 것 같았다.포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술을 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달아.”윤혜인은 여전히 구름 속을 걷는 듯했다.혀가 마비되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그녀의 긴장한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버리고 올게요.”이준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일하는 아줌마를 부르면 돼.”하지만 윤혜인은 이미 문을 연 뒤였다.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밖에 나가 열기를 가라앉혀야 했다.쓰레기를 버린 그녀는 베란다에서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이준혁은 다른 여자와 키스한 적이 없다고 했다...그녀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다...임세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임세희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녀는 자신을 경멸하기 시작했다.전에 얻은 교훈으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남자는 육체와 감정을 이성적으로 분간한다. 하지만 여자는 항상 뜨거운 스킨쉽이 더욱 가까
주훈이 앞으로 다가섰다. 전에 얻은 교훈을 잊지 않았던 그도 임세희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정중하게 말했다.“제가 모실게요.”임세희는 당연히 원치 않았다.그녀는 울며불며 애원했다.“여기에 있게 해줘. 난 괜찮으니까 내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이준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난 이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러니 너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나를 찾아오지 마.”“뭐?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임세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환청인 줄 알았다.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는 더욱 통곡했다.“잠시 이혼하지 않는 거잖아.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우리는 어울리지 않아.”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은 결심을 내린 듯했다.“난 널 동생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 널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동생은 싫어! 난 오빠의 와이프가 될 거라고!”임세희는 그에게 매달렸다.“내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고칠게.”“그만해. 돌아가서 내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봐. 너만 원한다면 너를 남주처럼 대해줄 수 있어.”“싫어! 여동생은 싫다고! 오빠 난 오빠의 동생은 하고 싶지 않아.”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싫다면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금전으로 보상해 줄 수도 혹은 다른 요구도 들어줄게.”흥분한 듯한 임세희는 이준혁의 팔을 잡고 실성한 듯 소리쳤다.“나에게 오빠 하나면 된단 말이야!”“진정해!”이준혁은 성질을 죽이고 있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이선그룹의 후계자로 자라왔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고 감정에 대해서도 시간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임세희에 대해선 책임감이 있었기에 그의 옆자리를 원하는 그녀를 만족시켜 주려 했었다.하지만 요즘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예를 들면 윤혜인을 향한 그의 마음 같은..그것이 소유욕인지 질투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아직 이혼하기 싶지 않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미안, 오빠.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난 먼저 내 몸을 챙기도록 할게. 오빠가 한 말은 생각해 보겠지만 시간을 좀 줘.”그녀의 눈에 슬픔이 담겼고 얼굴은 창백했다.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그녀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감안해 이준혁도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어.”임세희는 부드러워진 남자의 태도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마음속의 화도 많이 사그라들었다.임수향이 말했듯이 이준혁은 절대 그녀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잠깐 그 여우에게 홀린 것뿐이다.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기다리며 그 여우와 배 속의 아이를 없앨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빠, 난 그럼 이만 갈게. 비서님도 여기에 남아 보살피는 것이 낫겠어. 기사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힘없이 걸어 나갔다.그녀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준혁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주훈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까 사모님이 문밖에 계시다가 밖으로 뛰쳐나가셨어요.”...윤혜인은 홀로 주변을 오랫동안 거닐었다.그녀도 이곳에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휴대폰을 깜빡했다.가더라도 휴대폰은 챙겨야 했다.밖은 너무 추웠고 바람이 쌀쌀했다.그녀는 주훈에게 부탁해 휴대폰을 받으려 했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임세희와 마주쳤다.윤혜인을 본 임세희는 달려가 뺨을 때리려 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잡히고 말았다.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미쳤어요?”임세희는 다소 노골적으로 윤혜인을 노려보았다.얼굴을 팔아 사람을 홀리는 이따위 인간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임세희였다.송소미가 할머니까지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그녀를 단단히 교육시키지는 못할망정 되려 호되게 당했다.지금, 이준혁은 송소미를 서울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하여 그녀의 어머니는 출국 수속을 급히 진행시켰다.이용하기 좋았는데 이렇게 무력해졌다.그
화가 난 임세희를 보니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윤혜인을 못마땅해하며 아무것도 못 하는 임세희의 모습을 보면 너무 즐거웠다.화가 나 임세희는 가방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갑자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당신을 고의로 자극한 걸 인정할게요.”“하지만 그건 오빠가 저를 너무 아껴서 신혼 첫날밤에 하나가 될 거라고 약속했던 거예요. 저를 너무 사랑해서 성스러운 낭만을 안겨주고 싶었나 봐요.”임세희는 두렵지 않았다.그녀는 윤혜인이 그녀를 모함하려 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그녀는 윤혜인에 다가서며 으시댔다.“오빠 곁에 당신이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저 결벽증이 있는 오빠이기에 밖에서 다른 여자를 찾기 싫은 것뿐이에요.”“뭘 그렇게 잘난 척을, 당신은 그저 욕정을 푸는 도구일 뿐이에요.”아무 말 않는 윤혜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세희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알아요?”윤혜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무슨 뜻이죠?”그녀의 표정을 읽은 임세희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아이를 원하지 않기에 임신을 해도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비록 오빠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오빠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확실했다.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오직 나와의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원하기 때문이죠.”윤혜인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가 완강하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아이는 꼭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여야 한다는 것이다.비록 신경 쓰지 않으려고 자신을 위로했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임세희는 경고했다.“경고하는데 하루빨리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식을 앞세워 신분 상승하려고 애쓰지 말아요. 엄마의 수준을 자식이 따라가는 거라서 못난 아이가 태어날 수 밖에 없어요. 이를테면 기형, 저능아...”임세희 말이 끝
몸을 부르르 떨고 있던 임세희는 하마터면 놀라 까무러칠뻔했다.말을 마친 윤혜인은 임세희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임세희는 그녀에게 덮치며 그녀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으려 했다.하지만 그때 이준혁이 다가오고 있었다.임세희는 급히 손을 풀고 윤혜인의 팔을 잡고 바닥으로 넘어졌다.“악!!”비명이 울려 퍼졌다.뒤통수가 난간에 부딪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소리는 가볍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분노를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구세주를 만난 임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오빠, 너무 아파...”윤혜인 앞에 다가선 이준혁이 물었다.“네가 때린 거야?”차가운 그의 얼굴을 마주한 윤혜인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그는 왜 때렸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때렸냐고 묻고 있다.이유는 상관없고 결과만 중요한 것 같으니 그녀가 해명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그래요. 내가 때렸어요.”윤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고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고개를 든 이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윤혜인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지 못했던 임세희는 더욱 소리 높여 울음을 터뜨렸다.“오빠, 나 너무 아파!...”이준혁은 아무 말 않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준혁!”윤혜인이 그를 불렀다.걸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윤혜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다. 그녀는 조금의 희망을 걸어보았다.“가지 말아요.”눈이 마주친 순간, 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병실에 가 있어.”윤혜인은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그녀의 수려한 얼굴에 실망이 가득 찼다.“이준혁, 당신이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얼마나 지났다고 한 입으로 두말 하는 거야?왜 희망을 안겨주고 또다시 깨뜨리는 거야?소중하지 않아서 마음대로 상처를 내는 거야?임세희는 고통을 참으며 끊임없이 울먹였다.“머리가 너무 아파.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이준혁은 다시
병실.검사를 마쳤다. 뇌진탕이 살짝 온 상태라 몸조리를 하면 된다고 했다.짙은 눈빛의 이준혁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임세희는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불빛 아래 더욱 빛나고 있었다.빼어나게 잘생긴 외모는 너무 매력적이라 움직이지 않아도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을 자극했다.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그녀가 절대 놓을 리 없다.그녀의 눈이 또다시 붉어졌다.“오빠... 왜 아직도 아픈 거지? 너무 불편해.”이준혁은 차갑게 물었다.“아직도 불편해? 상훈이를 불러줄게.”“아,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상훈 오빠도 바쁜데 괜히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임세희는 당황했다. 그녀는 김상훈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여우인 그 사람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괜찮다니 다행이야.”이준혁은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다.“오늘 혜인이가 왜 널 때린 거야?”임세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내가 계획한 거라고 나를 모함하고 있어. 오빠,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조사해도 난 상관없어.”임세희는 두렵지 않았다. 파티에서 있었던 일에서 손을 깨끗이 씻었기 때문이다.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일시적으로 흥분했던 것 같아.”눈물을 훔치고 있는 그녀의 행동이 움찔했다.오빠의 말투가 왜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가?그 몹쓸 년은 그녀의 뺨을 두 번이나 때렸고 얼굴은 아직 부어있었다.응당 윤혜인을 끌고 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게 해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는가?그녀는 너무 억울했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그때 임향숙이 들어왔고 임세희를 보고 깜짝 놀라며 한탄했다.“아가씨, 누구한테 맞은 거예요? 어르신께서 아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세상에 언제 한번 이런 일을 당한 적 없고 가족들도 서울에 계시지 않는데 대표님께서 꼭 대신 본때를 줘야 해요!”임향숙은 문밖에서 모든 내용을 엿들었다. 이준혁은 그 몹쓸 년 편을 들고 있었다.하지만 그
하지만 이준혁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그의 눈이 차갑게 변하더니 입을 열었다.“그건 안 돼요.”그 눈빛이 너무 사나워 임향숙은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은 그렇게 너무한 것도 아닌데 이준혁이 동의하지 않으니, 그녀는 이해되지 않았다.이준혁은 예전에 임세희를 지극히 아끼지 않았던가?비록 침대 옆의 사람이 윤혜인이라지만 이 정도쯤이야 아가씨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지 않는가?분위기는 갑자기 무거워졌다.임세희는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얼굴에 표현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착함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됐어요. 오빠를 힘들게 하지 말아요. 그 사람 성격에 동의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사과만 받기로 해요.”그녀의 말속에는 윤혜인은 소인이고 품격 있는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동시에 이준혁의 호감도 끌 수 있었다.그 몹쓸 년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 급한 것 없다.이 손해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임세희의 너그러움에 이준혁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그가 입을 열었다.“내가 대신 사과할게.”뭐?!임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환청인 줄 알았다.이준혁이 대신 사과하다니!그녀에겐 자격이 없다.그녀는 더 이상 고상한 척할 수 없었다. 그녀는 끝내 울부짖었다.“그 사람에 뺨을 두 번이나 맞았고 나를 밀쳐서 뇌진탕으로 진단받았어. 그런데도 사과 정도 못 해?”임향숙도 합세했다.“너무하시네요. 우리 어르신이 아가씨의 억울함을 알게 된다면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이준혁은 강경하게 대답했다.“어르신께서 의견이 있으시다면 내가 직접 사과할 거예요.”임세희의 눈물이 비 내리듯 흘러내렸다.“내가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난 그저 속상해서 그래. 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어? 괴롭힘을 당해도 가볍게 넘어갈 거야?”“네가 속상해하는 걸 알고 있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약속해.”“됐고 시간도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어.”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이준혁이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
윤혜인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이준혁과 함께했던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윤혜인을 위해 이준혁은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사랑의 증표였다.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다.그러니 더 이상 윤혜인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윤혜인의 마음은 이제 분명했다.이준혁에 대한 감정은 결코 동정이 아니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준혁을 사랑하기 때문에.외롭고 긴 밤마다 끝없는 악몽 속에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를 잃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을 사랑했다.그와 함께, 그리고 한 가족으로 평화롭게 함께 지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하여 윤혜인은 이준혁의 사무실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마음을 전하려 했다.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윤혜인은 남자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의 다리를 덮었던 듯한 어두운색 담요를 집어 스스로를 덮었다.곧 그의 독특하고 따뜻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며 윤혜인은 그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회의가 끝난 후 이준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비서에게 물었다.“제 사무실에 아직 사람이 있나요?”비서가 답했다.“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결국... 갔구나.’윤혜인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준혁은 그녀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잠깐의 동행 후에 떠나는 것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길 테니 차라리 짧은 고통이 나을 것이었다.‘내가 고집을 부리면 우리 두 사람 결국 모두 불행하게 될 거야. 차라리 혼자 그 고통을 감당하는 편이 낫지.’...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한기를 느껴 깨어났다.밤이 된 북안도는 얼음 창고나 다름없었다. 난방이 없으면 젊고 강한 사람이라도 얼어 죽을 수 있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에
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이 그녀를 휘감았다.이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밖의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시간 맞춰서 갈 겁니다.”비서는 대답을 듣자마자 얼른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품에서 몸을 떼려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그러자 당황한 윤혜인이 물었다.“그... 회의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태연히 대답했다.“1분 정도는 문제없어.”윤혜인의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조금 전의 용기도 사라지고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듯했다.“일단 회의에 가세요. 우린 이따가 얘기해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날렵하고 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물었다.“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야?”이 질문 하나로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준혁 씨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동정하고 있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잠시 동안 윤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에는 점차 어두운 빛이 어렸다.“네 동정은 필요 없어.”이준혁이 말했다.그는 그녀가 자비로운 마음에 얽매이는 걸 원치 않았다.감정이란 단순한 감동이나 연민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동정으로 얻게 되는 감정이라면, 이준혁은 차라리 윤혜인을 자유롭도록 놓아주고 자신이 홀로 평생 아픔을 감수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곧 이준혁은 윤혜인은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제대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이제 돌아가.”그런 다음 스위치를 눌러 휠체어를 움직여 윤혜인 앞에서 천천히 떠났다.윤혜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조금 전 왜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마음속으로는 이 감정이 동정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이준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많은 고통이 함께 밀려올
이준혁은 모든 과정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한눈에 보기에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이 분명했다.동작이 빨랐지만 윤혜인은 그의 한쪽 다리가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걸 분명히 보았다.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며 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표정을 본 이준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혹시 주 비서가 뭔가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건가?”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도 눈이 있으니까...”하지만 이준혁은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했다.요즘 주훈이 점점 겉으로는 알아듣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항상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주훈이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지금 모습만 봐도 주훈이 분명 무슨 말을 했구나 싶었다.‘탄페니아에서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네? 아직 더 단련시켜야겠어.’윤혜인이 주훈에게서 아무 말도 들은 게 없다고 부정하자 이준혁도 굳이 그 말을 들춰내지는 않았다.대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다리는 괜찮아. 보이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그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문득 자신이 미워졌다.‘준혁 씨는 자신의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늘 자존심 강하고 뛰어났던 사람인데...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거야.’정말이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이준혁은 혼자서 견뎌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을 떠나고 그를 밀어내는 동안, 이준혁은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순간 윤혜인은 모든 것을 잊고 이준혁을 껴안았다.뒤이어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양복을 적셨다.“준혁 씨... 많이 아팠죠?”‘많이 아팠죠?’라는 말은 이준혁의 마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이준혁이 일하는 회의장 밖에 도착했다.이미 소식을 들은 주훈이 미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주 비서님,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요?”주훈은 순간 멈칫하며 혹시 이준혁이 자신의 피의 대부분을 헌혈한 사실을 윤혜인이 알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는 약간 망설였다.지난번에도 사실을 말하다가 이준혁에게 한 소리 듣고 근 반년 동안 탄페니아에 보내져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급여나 처우는 그대로였지만 황토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고단한 생활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 하나 찾기 힘든 환경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그곳의 여자들은 주훈을 보고 마치 신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여기며 하룻밤에도 서너 명이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친해지려 하는 일들이 많았다.겁이 난 나머지 주훈은 급히 벽돌로 집을 짓고 문을 굳게 닫고 지냈다.물론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주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말씀하세요.”윤혜인은 물었다.“대표님의 다리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요.”주훈은 두어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다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이준혁이 어떻게 다리를 다쳤는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였다.‘그럼 이제 그 얘기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곧 주훈은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대표님은... 북안도의 전문가들 소견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거라네요.”“회복 불가능하다고요?”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고 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술받으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 하지 않았나? 심지어 퇴원하기 전에는 혼자 서 있는 모습까지 봤었는데?’그녀는 주훈의 팔을 꽉 쥐고 다급히 물었다.“그날 밤, 오빠 보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