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쳐.”하준은 그간 꽤 품위있는 이미지를 지키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여름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매일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마흔을 못 채우고 열 받아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아까 당신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잖아!”“그랬구나.”여름은 의미 심장하게 특정 부위를 쳐다보던 ‘참 쓸모 없는 인간 같으니…’ 시선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산만한 덩치를 해가지고 살짝 부딪히기만 했는데 그렇게 약하다니….”하준은 울컥했다.“그게 어딜 봐서 살짝 부딪힌 거야. 하마터면 우리 집에 대가 끊길 뻔했다고!”여름의 가지런한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걱정하지 마. 대가 끊기면 내가 당신을 잘 책임져 줄게.”하준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내가 언제 당신한테 날 책임져 달라고 했나? 당신 같은 악녀는 같이 있기도 싫다고.”여름은 눈을 깜짝이며 순진한 얼굴을 했다.“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책임지겠다는 건 평생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아닌데. 내 말은… 백지안에게 돈 많고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를 찾아줘서 남은 반 평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지. 당신이 애를 못 낳게 되면 백지안이 제일 걱정될 거 아냐?”“……”하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더니 하얗게 질려버렸다.곁에 있던 상혁은 그 말을 듣고는 여름 앞에 완전히 여름 앞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와, 죽인다. 내가 회장님을 이렇게 오래 모셨지만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화 내시는 건 처음 본다.’“왜? 내 말이 틀렸나?”하준의 표정을 보고 여름은 겁을 먹은 듯 뒤로 몇 걸음 주춤주춤 물러섰다.“아, 맞다. 내가 그걸 깜빡 했네. 백지안은 당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니까 거길 못쓰게 되었어도 별로 개의치 않겠구나.”“입 닥치지 못 해!”하준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많은 사람이 오가던 병원 로비에서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따라와!”하준은 무거운 계단 문을 밀어 여름을 끌고 갔다.“뭐 하는 거야?
“최하준, 이거 못 놔?”여름은 있는 힘껏 하준의 등을 때렸다. 그러나 하준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그대로 여름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 차문을 열고 여름을 던져 넣었다.“뭐 하려고?”여름은 일어나 빠져 나가려고 했다. 하준이 한 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짓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셔츠 단추를 풀렀다.여름은 넋이 나가서 멍하니 있었다.“미쳤어. 당신에게는 백지안이 있잖아? 왜 자꾸 이러는 거야?”그러나 이미 정신이 나간 하준에게는 여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내가 병이 있어서 더럽다고 생각했다 이거잖아?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지? 내가 더 싫어지게 해주지."“……”----밤 11시.성운빌 주차장, 검은 세단이 들어와 섰다.하준은 뒷좌석을 돌아봤다. 여름은 창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웨이브가 어깨 양쪽으로 굽실굽실 늘어뜨려져 있었다. 하준이 실내등을 켜자 여름은 실눈을 떴다. 누런 등이 여름의 얼굴을 비추었다. 누구라도 두근거리게 만들 얼굴이었다.하준의 큰 쟈켓으로 가려진 가녀린 몸은 더욱 사랑스러웠다.하준은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어제는 약에 취해서 찾아왔다지만 오늘은 멀쩡한 정신이었다. 화가 나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어쩌다 보니 또 이성을 잃고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모든 것이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푹 빠져들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분명 오후에는 지안에게 상처 준 일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렇게나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강여름과 얽히지 말아야겠다고 맹세까지 했었다.그러나 하준은 또 다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이게 다 내가 강여름에게 중독되었기 때문이야.’하준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뒤에 찬 여름을 생각하고 다시 내려 놓았다.5분을 기다렸는데 여름은 깰 기색이 안 보이자 하준은 내려서 뒷좌석으로 가 여름을 안아 올렸다.오후에 들쳐멜 떼는 몰랐는데 이제 보이 엄청나게 가벼웠다. 하준이 안아 올리자 불만스럽다는 듯 살짝 부어 오른 입술이
하준은 나가자 마자 휴대 전화를 켰다. 받지 않은 전화가 몇 통 있었다.위챗을 열어보니 하준이 30분 전 지안에게 보낸 톡이 마지막이었다. -저녁에 급한 일로 출장 가서 못 올 것 같아. 먼저 자.하준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자냐? 나오. 한잔하자.”“싫어. 어제 야간 수술해서 지금 너무 피곤해.”이주혁이 무정하게 거절했다.“그럼 내가 네 집으로 갈게.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결국 하준이 도착해서 보니 이주혁은 완전히 골아 떨어져서 자고 있었다.이주혁을 그대로 침대에서 잡아 끌어내렸다.“일어나. 한잔해.”봉두난발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모를 발산하는 이주혁이 이 사이로 뱉었다.“왜 또 이러냐? 어젯밤에 안 들어갔으면 반성을 해야지 오늘은 또 왜 나한테 와서 이래? 어라? 이거 무슨 냄새야?”이주혁은 확 어이가 없어졌다.“여자 냄새… 이거 강여름 냄새잖아?”“네가 강여름에게서 나는 냄새를 어떻게 알아?”하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 아침에 걔네 집 문 열고 들어가는데 딱 이 냄새 나던걸. 하도 좋아서 기억이 난다.”이주혁이 말을 마치자 하준이 눈으로 싸늘한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잊어버리시지.”이주혁은 할 말을 잃었다.“대체 어쩌려고 이래? 아침에 얘기 잘 했잖아? 왜 또….”“옷 입어.”하준이 이주혁에게 옷을 던지더니 돌아서 걸어나갔다.이주혁은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 나가 보았다. 하준이 10년 된 샤또 라피트 로칠드를 따고 있었다.“야,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내려 놔!”그러나 하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뻥하고 따버렸다.이주혁이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아 이 자식아, 왜 영식이한테 안 가고, 여기 와서 이래.”“내가 영식이한테 강여름이랑 이틀 연속 잤다고 하면 완전히 나랑 절교할 걸.”이주혁에게 한잔을 따라주었다.“내가 굳이 걔랑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냐?”“……”이주혁이 마른 세수를 하더니 하준이 다 마셔버릴까 싶어 얼른 와인을 꿀꺽꿀꺽
이주혁이 눈을 살짝 부릅떴다.“내가 사귄 여자 친구가 많아서 남들이 바람둥이라고는 해도 난 꼭 한 명 끝내고 그 다음 사람 사귀었다.”“좋은 생각 있으면 좀 말해 봐.”하준은 언제나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라 이런 일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주혁이 담담히 말을 받았다.“나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어쨌든 지안이는 내게는 동생 같은 애야. 난 걔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솔직히 네가 계속 그렇게 지안이를 안을 수 없다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 아니냐? 그렇다고 그 두 여자를 네가 다 끼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안이가 그렇게 오래 네 곁에 있느라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고 그 나이가 되었는데 참 이래저래 곤란하네.”하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결국 술을 한잔 더 따라 주혁과 잔이나 부딪힐 뿐이었다.이주혁은 불쌍하게도 밤새 하준과 술을 마셔주었다.다음날. 하준은 정신을 못 차리고 뻗어서 12시까지 잠만 잤다.상혁이 옷을 가지고 왔을 때에야 겨우 일어나서 씻고 출근을 했다. 가다가 밖에 병원이 보이자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내려달라고 하더니 뛰어 들어가서 약을 하나 처방 받더니 약국에 들러 약을 가지고 나왔다.회사에 도착해 보니 얼마나 기다렸는지 지안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정성스럽게 싼 보온도시락이 놓여있었따.“준, 나 1시간이나 기다렸어. 안 오는 줄 알았네.”지안은 하준을 보자마자 반가워서 웃으며 얼른 다가왔다.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게 보였다. 머리를 내려 슬쩍 가렸는데도 다 보였다.하준은 입안이 씁쓸했다. 어제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시작한 것이 결국 또 강여름과 잠자리를 해버리다니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나쁜 짓이었다.“지안아, 이럴 필요 없어. 다쳤는데 집에서 좀 쉬지 그랬어?”“하지만 어제 네가 집에 안 와서 너무 보고 싶었다 말이야.”지안은 한껏 감정을 담아 하준을 바라보더니 가슴에 살풋 기댔다.고개 숙여 지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어젯밤 그 가슴에 여름이 기대
그러나 같은 블랙 수트라도 하준이 입고 붉은 카펫 위에 서 있으니 더없이 기품 있어 보여 시선을 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하준이 고개를 들어 그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친 순간 여름은 흠칫했다.이때 옆집 남자아이가 문을 열고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오다가 갑자기 여름을 보더니 눈을 찡긋거리고 웃었다.“누나, 이제 와요? 남자친구가 여기서 1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아까 나 학교 끝나고 집에 올 때부터 저기 서 있더라고요.”“남친 아닌데.”여름이 민망한 듯 말했다.“에이~ 뭘 부끄러워 하세요? 지난 번에 뽀뽀하는 것도 다 봤는데~”남자아이는 헤헤거리더니 곧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문 밖으로 그 집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소리가 다 흘러나왔다.“이 녀석아! 쓰레기 버리고 오랬더니 뭔 실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실없는 소리 아닌데? 어제 아침에 학교 갈 때도 그 형이랑 같이 엘리베이터 탔단 말이에요. 엄마랑 이모들이랑 만날 그래잖아. 결혼도 안 하면서 연애하면 나쁜 놈이라고.”하준은 민망함에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올 지경이었다.여름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열쇠를 들고 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왜 또 왔어?”하준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저도 모르게 생각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왜? 반갑지도 않은가 봐?”말을 하고 나니 짜증이 또 밀려왔다.‘아니,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여름은 하준을 한 번 흘겨 보더니 냉소를 지었다.“아주 여기 올 때마다 날 안을 수 있는 줄 아나 본데, 미안. 오늘은 피곤해서 못 놀아주겠어.”“오늘은 그런 거 아니야.”하준은 여름의 말에 화가 났다.“됐어, 괜히 사람 쓰레기 만들지 말라고”“만들다니? 원래부터 쓰레기거든!”여름이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통통한 볼이 부어 오른 모습을 보니 화가 났는데도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하준은 다시 심장이 간질거렸다.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그제는 당신도 알다시피 나도 피치 못해 왔었지만 어제는… 어제는 당신이
“… 아니, 일단 약은 빨리 먹어. 먹는 거만 보고 갈게.”하준도 이러는 자신이 싫었지만 십 수년간 지안을 기다리게만 한 것을 생각하면 차마 져버릴 수 없었다.“알겠어. 먹으면 되잖아.”여름은 흥분해서 돌아서더니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혀 위에 놓인 약을 보여주더니 꿀꺽 넘겼다.“이제 가!”여름은 힘껏 하준을 밀어내더니 탁하고 문을 닫아버렸다.하준은 영 속이 말이 아닌 채로 뭍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겨우 억지로 돌아갔다.그러나 하준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은 곧 눈물을 닦고 밥을 하러 갔다는 사실은 몰랐다.‘아, 나쁜 놈에게 눈물 연기 보여주는 것도 나름 힘드네.’배부르게 먹고 나서 얼마 있자 임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계획은 순조롭게 잘 굴러가고 있어?”“뭐, 그런 대로. 차근차근 해야지. 그런데 내가 너무 쪼아서 백지안인 뭔 수를 쓰지 싶네. 그리고 서경재랑 서유인이 요즘 너무 조용한 것도 수상하고.”여름은 요거트에 과일을 넣고 저어서 막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참이었다.“그러면 너 혼자서 거기 있기는 좀 위험한 거 아니야?”임윤서가 걱정했다.“그래도 육민관이 있으니까.”“하긴 그러네. 그리고 양 대표도 있고, 재하 선배며 최양하도 있고. 다들 너의 수호자들 아니냐.”임윤서가 큭큭 웃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오슬란에서 일자리 오퍼가 들어왔어. 어마어마한 연봉을 제시하면서 같이 항노화 라인을 개발하자는 거 있지?”여름이 이 상황을 즐기듯 입꼬리를 올렸다.“그거 재미있네. 그쪽에서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뜨고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다크 호스 조향사가 자기네가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모함했던 너라는 걸 알면 어떤 얼굴이 될지 정말 궁금하다.”“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다고.”임윤서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그러면 너도 돌아올 거야?”“아니, 일단 아시아 SE에서 강연을 의뢰 받아서 월말에 한 번 가기는 할 건데, 너네 애들은 어떡할까? 애들이 너 되게 보고 싶어 하던데.”“그것도 좋
“됐어. 내가 데리고 갈게.”하준은 백지안을 안아올렸다. 민정화가 따라갔다.차에 태우려는데 갑자기 백지안이 하준의 목을 부여잡더니 울었다.“준, 내 손 놓지 마. 날 떠나지 마. 과거가 있다고 날 건드리기 싫어하는 거 알아.”“아니야. 그런 적 없어.”하준은 마음이 고통스러웠다.“말 안 해도 다 알아.”백지안이 검지를 하준의 입술에 댔다.“나도 다 안다고. 요 며칠 계속 강여름에게 갔던 거. 나한테 출장간다고 거짓말하고…. 하지만 난 할 말이 없긴 하지. 내가 널 만족시켜 줄 수 없으니까. 너만 만족한다면 난 평생 가려진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없어. 그냥 너하고 함께 있게만 해줘. 매일 아침 눈 뜨고 널 볼 수만 있다면 난 다 상관없어.”백지안이 계속 줄줄 읊어댔다.“사랑해. 난 어쩌자고 그렇게 널 사랑하는 걸까? 처음 널 봤을 때부터 완전히 널 사랑하게 되었어. 너와 한 번만 결혼할 수 있으면 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백지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준의 품에서 잠들었다.민정화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말했다.“회장님, 사실 어제 출장 가신다고 거짓말하셨을 때 얼마나 괴로우셨던지 대표님이 우시더라고요. 그런데도 회장님께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뭐든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 같아요. 심지어 내연녀로라도 남고 싶다고 하시고….”“그만 해.”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다음 달에는 지안이와 결혼식을 올리겠어.”“너무 좋네요. 하지만… 아직 이혼도 안 하셨잖아요.”“내일 당장 가서 이혼할 거야.”하준이 냉정하게 말했다.----다음날.성운빌, 아침 8시,여름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다급한 벨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입구에 여럿이 와서 서 있었다.최하준, 김상혁, 민정화, 그리고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지룡파 2명이 서 있었다.“이 기세로… 뭘 하시려고?”여름은 깊이 한숨을 쉬며 앞치마를 벗었다. 눈에는 경계하는 빛이 떠올랐다.민정화는 무표정하게 하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최하준은 눈을 피하면서 돌아서서 민정화에게 말했다.“혼인관계증명서는 찾아내고 이혼합의서에 사인시켜. 난 밖에서 기다리지.”그러더니 나가 버렸다.“알겠습니다.”민정화는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애진작부터 강여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여기거지 몸을 뒤지는 척하며 여름의 니트를 벗겨내 안에 입은 얇은 슬립이 드러났다. 여름은 바닥에 눕혀진 상태라 순식간에 노출이 심하게 되었다.옆에는 죄 남자들이었다. 여름은 수치심에 고개를 쳐들었다.“이게 대체….”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정화가 여름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저 ‘읍읍’소리가 날 뿐이었다.문정화는 하준이 들어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입에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아무리 욕해봤자 입만 아플 뿐입니다. 저는 그냥 혼인관계증명을 찾으려는 것뿐이에요.”그렇게 말하면서 청바지를 더듬어 갔다.“이 안에 숨긴 거 아니야?”옆에 있던 지룡파 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이미 보이는 것만 해도 꽤나 화끈한 장면이었다.여름의 흰자에 핏발이 올라오더니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어찌나 몸이 꽉 눌려있는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여름이 부끄러워할수록 문정화는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여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서두르지 마세요. 내가 하나하나 다 벗겨줄 테니까. 남자 유혹하는 게 강여름 씨 전문 아니던가? 함 해보자고요. 도와드릴 테니까.”문정화가 하는 짓을 보고 상혁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문정화 씨, 옷 벗기러 왔습니까? 수색하러 왔습니까?”강여름을 철저히 괴롭히려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서자 문정화가 상혁을 한번 쳐다보더니 억울하다는 듯 답했다.“어디 몸 안에 숨겼을 것 같아서 그러죠. 내가 잘 못하는 것 같거든 김상혁 씨가 직접 해보시던 가요.”상혁은 순간 당황했다. 어쨌든 하준이 다른 남자가 여름에게 손대는 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이때 문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문정화가 여름에게 얼른 외투를 덮었다.하준은 들어오더니 가라앉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