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내가 데리고 갈게.”하준은 백지안을 안아올렸다. 민정화가 따라갔다.차에 태우려는데 갑자기 백지안이 하준의 목을 부여잡더니 울었다.“준, 내 손 놓지 마. 날 떠나지 마. 과거가 있다고 날 건드리기 싫어하는 거 알아.”“아니야. 그런 적 없어.”하준은 마음이 고통스러웠다.“말 안 해도 다 알아.”백지안이 검지를 하준의 입술에 댔다.“나도 다 안다고. 요 며칠 계속 강여름에게 갔던 거. 나한테 출장간다고 거짓말하고…. 하지만 난 할 말이 없긴 하지. 내가 널 만족시켜 줄 수 없으니까. 너만 만족한다면 난 평생 가려진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없어. 그냥 너하고 함께 있게만 해줘. 매일 아침 눈 뜨고 널 볼 수만 있다면 난 다 상관없어.”백지안이 계속 줄줄 읊어댔다.“사랑해. 난 어쩌자고 그렇게 널 사랑하는 걸까? 처음 널 봤을 때부터 완전히 널 사랑하게 되었어. 너와 한 번만 결혼할 수 있으면 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백지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준의 품에서 잠들었다.민정화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말했다.“회장님, 사실 어제 출장 가신다고 거짓말하셨을 때 얼마나 괴로우셨던지 대표님이 우시더라고요. 그런데도 회장님께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뭐든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 같아요. 심지어 내연녀로라도 남고 싶다고 하시고….”“그만 해.”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다음 달에는 지안이와 결혼식을 올리겠어.”“너무 좋네요. 하지만… 아직 이혼도 안 하셨잖아요.”“내일 당장 가서 이혼할 거야.”하준이 냉정하게 말했다.----다음날.성운빌, 아침 8시,여름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다급한 벨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입구에 여럿이 와서 서 있었다.최하준, 김상혁, 민정화, 그리고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지룡파 2명이 서 있었다.“이 기세로… 뭘 하시려고?”여름은 깊이 한숨을 쉬며 앞치마를 벗었다. 눈에는 경계하는 빛이 떠올랐다.민정화는 무표정하게 하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최하준은 눈을 피하면서 돌아서서 민정화에게 말했다.“혼인관계증명서는 찾아내고 이혼합의서에 사인시켜. 난 밖에서 기다리지.”그러더니 나가 버렸다.“알겠습니다.”민정화는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애진작부터 강여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여기거지 몸을 뒤지는 척하며 여름의 니트를 벗겨내 안에 입은 얇은 슬립이 드러났다. 여름은 바닥에 눕혀진 상태라 순식간에 노출이 심하게 되었다.옆에는 죄 남자들이었다. 여름은 수치심에 고개를 쳐들었다.“이게 대체….”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정화가 여름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저 ‘읍읍’소리가 날 뿐이었다.문정화는 하준이 들어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입에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아무리 욕해봤자 입만 아플 뿐입니다. 저는 그냥 혼인관계증명을 찾으려는 것뿐이에요.”그렇게 말하면서 청바지를 더듬어 갔다.“이 안에 숨긴 거 아니야?”옆에 있던 지룡파 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이미 보이는 것만 해도 꽤나 화끈한 장면이었다.여름의 흰자에 핏발이 올라오더니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어찌나 몸이 꽉 눌려있는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여름이 부끄러워할수록 문정화는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여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서두르지 마세요. 내가 하나하나 다 벗겨줄 테니까. 남자 유혹하는 게 강여름 씨 전문 아니던가? 함 해보자고요. 도와드릴 테니까.”문정화가 하는 짓을 보고 상혁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문정화 씨, 옷 벗기러 왔습니까? 수색하러 왔습니까?”강여름을 철저히 괴롭히려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서자 문정화가 상혁을 한번 쳐다보더니 억울하다는 듯 답했다.“어디 몸 안에 숨겼을 것 같아서 그러죠. 내가 잘 못하는 것 같거든 김상혁 씨가 직접 해보시던 가요.”상혁은 순간 당황했다. 어쨌든 하준이 다른 남자가 여름에게 손대는 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이때 문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문정화가 여름에게 얼른 외투를 덮었다.하준은 들어오더니 가라앉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문정화의 눈에 짜증이 스쳤다. 지룡파 둘은 조용히 여름을 풀어주었다.여름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눌려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려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았다.하준의 다리가 움찔하더니 하마터면 후다닥 다가가서 여름을 부축할 뻔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더니 냉정한 얼굴로 합의서를 건넸다.“사인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마. 위자료는 넉넉하게 준비해 줄게. 이혼하자고.”여름이 비웃듯 웃음을 띠었다.하준은 여름을 보고 있을수록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일부러 더욱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나중에 질척거릴 생각이 안 들게 하려는 것뿐이야. 얼른 사인해. 나 바쁘다고.”“그래.”결심한 듯 여름이 펜을 들고 합의서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가만히 사인하는 여름의 손을 보고 있던 하준은 여름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수시로 여름에게 이혼해 달라고 했었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오자 해방감이 느껴지기는커녕 문득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몰려왔다.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자, 가져가.”여름이 건넸다. 시선은 사뭇 평온해졌다.“오후에는 처리될 거야.”하준은 서류를 들고 돌아서 가버렸다.문정화는 기세등등하게 여름을 한번 꼬아 보더니 모두를 따라 갔다.집에 조용해지자 여름은 문에 등을 기대고 손에 든 펜을 보며 웃었다.‘결국 이혼했구나.이것도 괜찮지. 어쨌든 복수하러 온 거잖아. 최하준에게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최하준은 1층으로 내려오더니 이혼합의서를 상혁에게 주었다.“처리해.”“알겠습니다.”상혁은 문정화를 흘끗 보고는 자리를 떴다. 상혁은 은근히 여름에게 차라리 더 잘되었다고 생각했다.‘이제는 회장님과 얽히지 않아도 되시겠구나. 이미 눈이 멀어버린 우리 회장님은 더 이상 강여름 씨에게 어울리지 않지.회장님 주변에 있는 저 불여우들은 정말이지 못 봐주겠다고.’곧 이혼결과가 하준에게 통보되었다. 하준은 마음이 텅 빈 것만 같았다.문정화가 말을 건넸다.“회장님, 저…
여름은 담담히 웃고는 TV를 껐다.‘지금은 행복하겠지. 기다려. 결혼식 날 내가 아주 큰 선물을 해줄게.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맛이 어떤 건지 보여주겠어.’----한편 최근 내내 세상의 온갖 악플의 대상이던 위자영, 서유인, 서경재 세 사람은 이 소식을 듣고 은근히 통쾌했다.특히나 위자영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강여름, 지가 돌아왔으면 어쩔 거야? 최하준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데.”“맞아. 전에 내게서 최하준을 뺏어 가더니 결과적으로 나보다 결혼을 잘 한 것도 아니네.”서유인도 속 시원한 듯 말했다.그러나 서경재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둘이 그렇게 허구한 날 남의 가십에 열 올리지 말라고. 지금 당장 우리에게 급한 일은 어떻게 벨레스를 되찾아 오느냐 하는 문제잖아.”위자영은 태연자약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서경주는 지금 하루하루 몸이 허약해져서 곧 벨레스를 경영할 수준이 안 될 거예요. 강여름은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고요. 때가 되면 여론은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다 잊어버리고 문제삼지 않을 거예요.”서경재가 인상을 썼다.“우리 형님만 죽어주면 강여름 따위야 걱정할 것 없지. 하지만… 그 감유한이라는 사람은 정말 문제 없겠어?”“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내가 그 인간 약점을 꽉 잡고 있으니까. 그리고 벨레스 별장에는 내가 다른 눈도 심어 놔서 감유한이 발각된다면 바로 알 수 있어요.”위자영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때 바로 전화가 울렸다.“감유한입니다. 지난 번에 주셨던 약이 없어졌습니다.”“없어졌다고?”위자영이 인상을 썼다.“이번에 한 달 분량만 주셨잖아요. 지난 번에 커피에 타려다가 너무 긴장해서 손이 떨리는 바람에 왈칵 쏟아서 커피를 다시 내렸거든요.”“내일, 늘 만나던 데.”위자영이 조심스럽게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위자영이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려 교외의 외딴 창고에 나타났다. 곧 감유한도 차를 몰고 나타났다.위자영은 곧 뭔가로 싼 물건을 감유한의 손에 쥐여주었다.“6개월 뒤에는 서경
모두들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니 대표라는 사람이 조제사 하나 정도 밟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는 잘 알았다.게다가 임윤서가 정말 레시피를 표절했다면 어떻게 갑자기 국제적으로 최고로 인정받는 조제사가 될 수 있었겠는가?임윤서는 실력만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인 것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송영식은 화나 가서 무릎에 올려 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시퍼렇게 변했다.“당시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이 뭔가 오해했던 모양입니다.”송영식은 한참 만에야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변명해 보았다.“그래군요.”임윤서가 시원스럽게 웃더니 놀리듯 말했다.“잘 몰랐다는 말씀 한 마디면 날 그렇게 모함해도 되는 건가요? 하지만 어쨌든 저는 송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대표님께서 제 발목을 잡아주신 덕에 제가 해외로 나가 심슨 선생님께 사사받을 기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이어서 임윤서는 화장품 브랜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송영식은 발로 확 차주고 싶을 정도로 윤서가 미웠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강의 자체에 빠져들게 되었다.지금의 임윤서는 지식이 풍부해서 자기 회사의 어느 조제사 보다고 훌륭했다.포럼이 끝나갈 때쯤 기자가 질문했다.“이제 보니 생각났는데, 3년 전 임윤서 씨는 영하 그룹의 백윤택 대표를 꼬셔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지 않았습니까?”SE 한 대표의 안색이 확 번하더니 기자를 노려보았다.“어디서 온 기자인데 함부로 말 하는 거야?”“저는 사실 대로 말씀 드리는 건데요. 당시 그 사건은 매우 큰 사건이었죠. 병원에 입원도 하셨었잖아요?”기자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러나 끝까지 떠들었다.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윤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임윤서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느긋하게 무대에서 내려와 기자에게로 걸어갔다.전혀 두려워 하거나 당황한 빛이 없었다.“그래서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해요. 사람이 힘이 없으면 잘못한 게 없어도 누군가가 권력으로 내려 찍어 누르는 경우 무자비한 폭력을 당
보도가 나가자 다시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세상에, 대체 뭔 매력이냐? 벨레스 회장과 결혼해서 시동생을 가지고 놀더니 그 비서와 얽히다니, 벨레스 회장은 아주 제대로 당했네.-이거 서경재는 아는 거야? 완전 피를 토하고 있겠네.-다른 남자 더 있다는 데 500원 건다.-그래서 서유인도 바람둥이 기질 타고 나지 않았을까? 추성호도 각오해야 하는 거 아님?-서유인 모녀가 서경주를 독살하려고 했던 일을 서경재는 모를까? 아무래도 다 알 것 같은데.- 아주 집안이 시궁창이구먼. 추신은 어쩌다가 저런 집이랑 사돈을 맺어가지고, 쯧쯧…“……”댓글을 보고 서유인은 폭발하기 일보진전이었다. 침실에 있던 컵을 냅다 집어 던졌다.“어디서 물건을 집어 던지고 이래?”마침 들어서던 추성호가 그 장면을 보고 별안간 벌컥했다.“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이야? 아주 망신스러워 죽겠다고. 지난번에 나온 추문만 해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이제는 아주 내 평판까지 있는 대로 다 잃었어. 내가 어쩌다가 저런 사람이랑 결혼을 해가지고.”“나랑 결혼한 게 뭐 어쨌다고요? 우리 벨레스가 아니었으면 추신이 그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나 있었고?”서유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추성호의 말에 있는 대로 약이 올라서 마구 쏘아 붙였다.추성호의 눈에 혐오스럽다는 빛이 스쳤다. 말투도 점점 무시가 짙어졌다.“뭐라는 거야? 당신 아버지는 서경재고, 보유한 벨레스 주식도 서경주와는 비교도 안 되잖아? 당신 아버지가 서경주가 아니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애초에 결혼하지도 않았어.”“이… 이런 나쁜!”서유인이 발작적으로 베개를 잡아 추성호에게 집어 던졌다.“당신이 지금 날 칠 수 있는 상황이야? 결혼하고 몇 년 째 애가 안 생기는 거 보면 어디 나가서 다른 놈이랑 노느라고 피임하고 있는 거 아냐?”“뭐… 뭐라고?”서유인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내 말이 틀려? 내가 진작부터 당신이 어려서부터 남자들이랑 어울려 노는 거 좋아해서 집에도 안 들어 간다는 말은 듣고 있었다고. 벨레스라는
“아빠, 그런 게 아니에요. 엄마가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서유인이 고개를 흔들며 열심히 변호했다.“유인아, 그만 하거라. 나도 다 알아보았다.”서경재의 분노가 폭발했다.“경찰이 현장을 덮쳤을 때 네 엄마는 감유한의 옷을 막 잡아 당기고 있더란다. 백주대낮에 창고에서 말이다! 경찰에서 감유한에게도 물어보았는데 둘은 4~5년 전부터 그런 관계를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매달 평균 한두 번은 만났는데, 호텔, 차 안, 야외에서도 만났다고 하더라.”그 말을 들은 서유인은 얼굴이 백지장이 됐다.서경재는 점점 흥분해서 완전히 이성을 잃은 짐승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모든 물건을 집어 던졌다. 두 눈에 잔혹한 빛이 가득했다.“날 무시하는 거야. 내내 나 같은 병신을 우습게 알았던 거지.”서경재는 자신의 두 다리를 마구 내리쳤다.“나는 위자영을 위해서 강신희까지 죽였는데! 위자영 때문에 식구들 모두와 맞서고 오명을 뒤집어 썼는데, 나한테 감사하기는커녕 날 도구로 이용해 먹었어.”서유인은 깜짝 놀랐다.“가…강신희를 아빠가 해치웠다는 게 사실이에요?”서경재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나는 네 엄마를 좋아했다. 하지만 네 엄마는 서경주를 사랑해서 죽어도 서경주와 결혼하고 싶어했어. 난 네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내가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래서 서경주와 네 엄마가 같이 하룻밤을 지내도록 만들었지. 사실 그날 밤 서경주는 네 엄마를 건드리지도 못했따. 하지만 네 엄마는 아이를 가져서 서경주와 결혼하고 싶어 해서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어.”서유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엄마는 정말 미쳤어….’서경재가 한탄했다.“기상국에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태풍의 경로를 파악하고 있다가 일부러 태풍이 몰아치는 시기에 강신희에게 전화해서 형님이 외국에서 술에 취해 사람을 다치게 만들어 놓고 계속 강신희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해서 강신희가 당장 그곳으로 무리해서 달려가게
“추성호 이 자식이….”위자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경재 씨가 널 도와 주면 벨레스는 네 손에 들어올 거고, 추신에서 널 떠받들게 될 거다.”“엄마, 아빠랑 제가 엄마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서우ㅠ인이 울먹이며 말했다.----여름은 링거를 맞는 서경주 옆에 있었다.위자영이 잡혀가면서 서경주는 한을 풀기는 했지만 크게 충격을 받아서 다시 몸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얼마 되지 않아 서신일과 박재연이 서둘러 왔다. 서경주의 모습을 보더니 박재연이 눈물을 흘렸다.“위자영 그 정신 나간 것,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 해주었는데, 3년 전 자동차 사고도 고것하고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때 나랑 네 아버지가 여름이 더러 널 돌보라고 했기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서신일도 치를 떨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새삼 여름에게 고마웠다.“우리가 너에게 빚이 많구나.”여름은 담담하게 웃었다.“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벨레스에 기대하는 게 없었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안았어요.”“얘야….”서신일은 갑자기 너무나 여름을 볼 면목이 없었다.박재연이 서신일을 슬쩍 잡아당겼다.“여름이 말이 맞아요. 우리가 한 짓이 확실히 잔인한 짓을 했죠. 다 내 탓이다. 애초에 우리 경주랑 네 엄마가 결혼하는 걸 말리지 말았어야 해. 내가 정말 너무나 미안하구나.”서신일이 난처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네 할머니 말이 맞다. 앞으로는 본가에 자주 들리거라. 거긴 네 집이기도 하다.”여름은 적잖이 놀랐다. 심경이 복잡해졌다.’막 서울에 왔을 때 얼마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얼마나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가? 하지만… 아니, 난 영원이 저분들에게 가족이 아니야. 외부인이야.’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서유인이 서경주의 휠체어를 밀면서 들어왔다.“너희가 여기는 무슨 일이야?”서경주는 서유인 부녀를 보더니 노기가 올라 극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얘야, 너무 흥분하지 말거라. 네 몸에 해롭다.”서신일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