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우울한 분위기에서 장례식이 거행 중이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하준과 이주혁이 차에서 내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검은 세단에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이번 사태에서 목숨을 구한 강여경이었다.“훗, 내가 미리 알아서 진짜 지다빈하고 바꿔치기했기 망정이지. 너희들은 내가 가짜 지다빈이었다는 건 꿈에도 모를 거다.”강여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최하준, 강여름, 너희들이 날 괴롭힌 만큼 모두 되갚아 주겠어.”“잘했어.”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이제 지다빈이 죽고 백소영이 감옥에 가면서 최하준, 강여름, 송영식 사이에 틈이 생겼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결과가 나왔군. 아주 만족스러워.”강여경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하지만 이 얼굴은 이제 못쓰게 되었네…”“일단 해외로 나가. 나중에 당신을 쓸 데가 또 있을 거야.”남자가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울리자 기사가 시동을 걸었다.“왜 그래?”이주혁이 물었다.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누가 몰래 우릴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총수인데 언제 어디서든 누가 훔쳐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냐?”“… 들어가자.”하준이 돌아섰다.장례식장에 들어서서 향을 피우던 송영식과 마주쳤다. 송영식이 싸늘하게 하준을 한번 노려보더니 시선을 피했다.이주혁은 다가가 인사말을 건네고 하준은 조용히 다가가 묵념했다.지다빈의 어머니가 대놓고 무례하게 말했다.“최 회장은 향 피웠으면 가요.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지영수도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는 참에 밖에서 들어오던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손에 들고 있던 초를 떨어트리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지…지안이? 백지안이 돌아왔어….”“무슨 헛소리니? 지안이 죽은 지가 언제인데?”지다빈의 어머니가 돌아보다가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송영식, 이주혁, 최하준 세 사람도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검은 원피스는 입구에서 걸어 들어오
백지안은 마음이 괴로운 듯 입술을 꽉 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만하자, 영식아. 지안이도 무슨 고충이 있겠지.”이주혁이 송영식의 말을 끊었다.송영식은 물끄러미 백지안을 바라보더니 결국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돌아왔어?”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익숙한 얼굴을 보니 백지안은 얼굴이 울컥했다. 백지안은 서서히 시선을 그 뒤의 영정사진으로 옮겼다.“다빈이가 죽을 줄은 몰랐거든. 내가 가장 아끼던 사촌 동생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다들 할 말이 없었다.지영수가 갑자기 다가와 백지안을 안더니 대성통곡했다.“지안아! 왜 이제서야 왔니? 다빈이가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삼촌, 지안이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어요?”백지안이 울먹이며 물었다.그 말을 듣더니 지영수가 하준을 노려보았다.“다 저 인간의 와이프와 백소영이 우리 애를 모함해서 생긴 일이다.”백지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을 깜빡이며 하준을 돌아보았다.“하준아….”하준은 백지안의 눈을 피했다.“백소영이….”“네 와이프라고 강여름 감싸는 것도 이제 작작 해!”송영식이 화를 냈다.“강여름은 너무 못된 인간이라 너에게는 안 어울린다고 내가 한두 번 얘기했냐? 이제 지안이도 돌아왔고, 이제 걔랑은 헤어져.”하준의 미간에 세로줄이 생겼다. 막 한 소리 하려는데 백지안이 급히 끼어들었다.“영식아, 그런 소리 그만해. 어떻게 결혼을 한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이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이제 나하고 하준이는 이미 끝난 사이야.”“끝나긴 뭐가 끝나? 하준이 마음속에는 여전히 너밖에 없는데. 설마 너 이제 하준이를 사랑하지 않…”“됐어.”하준이 굳은 얼굴로 송영식의 말을 잘랐다.“지안이가 살아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난 이제 아내가 있는 사람이야.”“싸우지들 말고, 지안이가 돌아왔으니 기쁜 일이잖아. 밤에 우리 환영식하러 가야지.”이주혁이 말했다. “고마워,
백지안이 와인잔을 꽉 잡았다.“그렇지만 그런 생각해 본 적 있니? 젊은 여자가 납치되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술잔을 쥔 하준이 손이 떨렸다.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백지안을 쳐다봤다.“세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을게. 너무 힘드니까.”백지안은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당하고 또 당하고… 얼마나 당했는지 모르겠어. 한참 만에야 겨우 기회를 잡아서 탈출했지만 난… 난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비자도 취소되고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방법이 없었어. 식구들에게 간신히 연락을 했었는데 식구들은 날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서 그냥 그대로 외국에서 사라졌으면 하더라고.”“너무 하잖아.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에게!”송영식이 벌떡 일어섰다.“하준이에게 연락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난 이미 하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백지안이 눈을 깜빡이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하준이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인데 나는… 그런 몸이 되어버려서 하준이가 날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했어.”하준은 두 눈을 감았다. 심장이 기름에 덴 것 같았다.자신이 백지안을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지안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제는 여름이 아이를 가졌고 하준의 마음도 달라졌다.“됐어. 거기까지만 얘기하자.”이주혁이 손수건을 건넸다.송영식은 심장을 에는 것 같았다.“지안아, 걱정하지 마. 네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널 버리지 않아. 넌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순수한 소녀야.”“고맙다.”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백지안이 웃었다.“사실은 이번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돌아왔어.”그러더니 백지안은 명함을 석 장 내밀었다.하준은 백지안의 명함을 받아 들고 흠칫했다.“네가 그 글로벌한 명성을 떨친다는 정신의학 박사 나드쟈야?”“명성까지는 좀 과장이지만 이쪽 방면에서 나쁘진 않은 편이야.”백지안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최 회장.
나가서 누가 왔는지 자세히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백지안? 안 죽었어?”“그래. 안 죽었지. 돌아왔어.”백지안이 즐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 백소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런데 네가 이런 꼴일 줄은 몰랐다. 쯧쯧. 불쌍하게도.”“뭐 하려고 돌아왔어?”백소영은 혐오스럽다는 듯 백지안을 노려봤다.‘늘 이런 식이었어. 저 인간만 나타나면 내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고 다쳤다고.’백소영은 마침내 백지안에게 하늘의 심판이 내렸다고 생각했으나 그 인간이 다시 돌아왔을 줄이야….“난 그냥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되찾으러 왔어.”즐겁다는 듯 백지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네 엄마가 내 가족을 망가트렸잖아. 있지, 이번에는 네가 당할 차례야.”“뭘 어쩌려고 그래?”백소영이 분노에 찬 시선을 보냈다.“백지안, 우리 엄마는 한 번도 널 홀대한 적 없어. 언제나 나보다 너에게 잘해주셨다고.”“그저 다 우리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것뿐이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영하를 손에 넣었겠어? 너희 모녀가 아주 온갖 궁리를 다 한 거잖아? 하하, 이제 우리 아빠는 심장병이 도져서 혼수상태로 입원하셨으니, 연화정은 의지가지없게 되어 버렸지. 우리 엄마가 당했던 고생을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하나하나 맛보게 해줄 거야.”“네 엄마가 아빠한테 버림받은 건 네 엄마가 바람 나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녀…”“닥쳐!”백지안이 갑자기 소리 질러 말을 끊었다.“넌 그 꼬라지를 하고도 잘도 조잘거리네.”“백지안, 잘 들어. 우리 엄마를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가 죽어서라도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다.”백소영이 철장을 잡고 흔들며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백지안을 노려봤다.“아하하, 걱정하지 마. 죽어도 난 널 상대할 방법이 다 있거든.”백지안은 하찮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너랑 하준이 와이프랑 사이좋다며?”백소영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내가 돌아왔으니까 걘 꺼져야지.”백지안의 빨간 입꼬리가 의기양양하게 올라갔다.“꿈 깨시지. 최하준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내가 이것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절대!”----하준의 본가여름은 매일 새장에 갇힌 새처럼 지냈다.담장 안에서만 지내고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됐다.이미 일주일은 하준을 만나지도 못했다.‘나라 배 속의 쌍둥이는 이미 싹 잊었나 봐.’나날이 우울한 기분이 들어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장춘자와 최대범은 점점 초조해졌다.“하준이에게 전화 좀 걸어 봐.”저녁을 먹다가 장춘자가 집사에게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와이프랑 애를 이렇게 방치해서야 쓰나. 방을 따로 쓰라고 했지 와이프를 내팽개치라고 한 게 아닌데.”집사가 전화를 걸고 오더니 괴로운 얼굴을 했다.“야근이라고 합니다.”“아무리 야근을 해도 사람이 쉬는 시간도 있겠지. 이거 정말 너무 하는구먼.”최대범이 테이블을 탕하고 내리쳤다.“정말 바쁜가 보죠.”장춘자가 최대범에게 슬금슬금 눈짓을 해 보이더니 턱으로 여름을 가리켰다.최대범은 골치가 아팠다.‘아니, 제가 강여름 아니면 죽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와이프는 여기다 던져놓고 들여다 보지도 않다니, 마음이 바뀌었나.’최대범도 처음에는 여름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훌쩍 말라서 초췌해진 여름을 보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전화하실 것 없어요. 저희 싸웠거든요. 그래서 별로 제가 안 보고 싶은가 봐요.”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들었다.“그냥 여기 갇혀만 있으려니까 답답하긴 하네요. 내일 혹시 나가서 좀 친구랑 놀다 와도 될까요?”“…어, 그러렴. 하지만 진숙 이모랑 같이 나가거라.”장춘자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러나 다음 날 여름이 나가려고 했더니 차윤이 길을 막았다.“죄송합니다, 사모님. 회장님께서 나가지 못하시게 하라고 했습니다.”“날 연금하겠다는 건가요?”차윤을 보는 여름의 눈은 사뭇 실망에 차 있었다.‘아, 회장님은 정말 왜 이렇게 사모님께 잔인하게 이러실까….’차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오늘 백소
“아, 주변에 신맛 나는 원두 좋아하는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하준은 백지안의 맞은편에 앉다가 갑자기 집에 있는 사람이 생각났다. 여름은 달달한 맛을 좋아한다. 커피를 마셔도 꼭 캬라멜마끼아또를 찾고는 했다.백지안은 생각에 잠긴 하준을 보자 자신을 앞에 앉혀 두고도 정신을 팔다니 필시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백지안은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의료 기록을 덮으며 웃었다.“네 증상은 재발 없이 80% 치료할 자신 있어.”하준의 눈이 빛났다. 막 뭐라고 하려고 하는데 차윤에게서 전화가 왔다.“회장님, 사모님께서 법원에 가셨습니다.”하준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못 나가게 잘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칼을 들고 살기 싫다고 하시는 바람에….”차윤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했다.“아주 잘하는 짓들이다.”하준은 화가 나서 전화기를 집어 던질 뻔했다.‘아기까지 있는데 그런 식으로 협박을 한다고? 정말 아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어떻게 우리 쌍둥이보다 백소영이 더 소중할 수가 있지?”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하준이 벌떡 일어섰다.“치료는 내일 하자.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그래. 하지만 너무 미루면 안 돼. 늦어질수록 치료효과가 떨어지거든.”백지안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두 사람은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다른 쪽 복도에서 나오던 서유인이 두 사람의 옆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는 구석으로 피하더니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자기, 거기 숨어서 뭐 해?”추성호가 다가와 서유인의 허리를 안으며 물었다.“봐요, 이게 누군가.”서유인이 사진을 열어 보여주었다.“백지안, 안 죽었더라고요.”추성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확실히 백지안이네. 지다빈처럼 그냥 닮은 사람이 아니라.”“흥, 남자랑 여자가 아침 9시에 호텔 방에서 나왔는데 밤새 룸에서 뭘 했겠어요?”서유인은 강여름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신이 났다.“강여름이 이 사진을 보면 어떨까?”
‘내가 친자 감별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소영이가 누명을 쓰지도 않았을 텐데.’“너희들이 와줄 줄 몰랐다.”백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셋은 서로 친구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판에 와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우린 네가 안 그랬다는 걸 믿어.”임윤서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우리가 꼭 항소해 줄게. 그리고 네 부모님도 돌봐드리고.”“고맙다. 혹시 해줄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을 벗어나 줄래?”백소영이 미처 말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데려가려고 사람이 왔다.백소영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백지영 조심해….”그러나 이미 저만치 끌려가 버린 데다 백소영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못했기 때문에 여름은 그저 백소영의 입 모양을 간신히 읽을 뿐이었다.“뭐라는 거지? 나한테 뭘 조심하라는 것 같은데.”“그러게.”임윤서가 백소영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패..시…연 조심해?”“……”그러나 옆에서 연화정이 너무 울다가 기절을 할 지경이라 여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둘은 급히 연화정을 부축했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소영이가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은 있어요. 저희가 반드시 소영이 꺼내올게요. 1년으로 안 되면, 2년이고 3년이고 노력할 거예요.”“고맙구나.”연화정은 둘이 너무 고마웠다.“그런데요 어머님, 아버님하고 서둘러 서울을 떠나시는 게 좋겠어요.”여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아까 소영이가 저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소영이는 뭔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위험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연화정은 좀 망연자실했다.“우리 부부가 평생 누구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어쨌든 아까 소영이랑 얘기할 때 보니까 뭔가 다급해 보이더라고요.”임윤서도 덧붙였다.“어머님하고 아버님 동성으로 가세요. 저희 집이 거기에 있거든요. 저랑 오빠가 잘 모실게요.”“얘들아 정말 고맙다.”연화정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일단 가서 짐을 챙기세요. 빨리
“최하준 씨, 나야말로 참을 만큼 참았어요. 여름이는 당신 애까지 가졌는데 좀 잘해주면 안 되겠어요? 매일 여름이만 집에다 잡아두다니, 어떻게 애한테 이래요? 여름이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고요.”임윤서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사람이 자꾸 그러면 안 돼요. 잘 해줬다가 괴롭혔다가, 얘도 사람이에요. 계속 그런 식으로 하는데 버틸 사람이 어디 있어요?”“우리 부부 일에 끼어들지 마시죠.”하준은 임윤서를 지나서 여름에게 가더니 그대로 안아서 차로 갔다.여름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하준이 자기 친구를 무시하는 듯 말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아마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서 한 번도 나랑 내 친구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 거겠지.”“왜, 이제는 내 꼴도 보기 싫습니까?”하준이 여름의 양 볼을 잡더니 그 깊은 눈으로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눈 떠요.”여름은 하준의 명령에 완벽한 무력감에 사로잡혀서 눈을 뜨고 말았다.여전히 익숙한 그 얼굴인데 그 눈에 떠오른 낯선 싸늘함에 여름은 마음이 아팠다.“최하준 씨, 윤서 말이 맞아요. 계속 그런 식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아요. 잘해줄 때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날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이젠 정말 지쳤다고요.”“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압니까?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까? 내가 그렇게 백소영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배 속의 아이와 당신 목숨을 가지고 날 협박해야 되겠습니까?”하준도 나름 화가 났다.“당신에게 우리 아이들은 백소영보다도 못한 존재입니까? 어떻게 백소영을 보러 가겠다고 아이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여름은 처연하게 웃었다.“나는 그러고 싶었겠냐고요. 나도 사람이에요. 그렇게 새장에 새 가두듯이 집에 가둬주고 자유를 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어요? 당신하고 결혼해서 산다는 게 이런 건 줄 진작 알았더라면 당신 아이를 가지지 않았을 텐데.”하준은 놀라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한참 동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