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친자 감별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소영이가 누명을 쓰지도 않았을 텐데.’“너희들이 와줄 줄 몰랐다.”백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셋은 서로 친구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판에 와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우린 네가 안 그랬다는 걸 믿어.”임윤서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우리가 꼭 항소해 줄게. 그리고 네 부모님도 돌봐드리고.”“고맙다. 혹시 해줄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을 벗어나 줄래?”백소영이 미처 말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데려가려고 사람이 왔다.백소영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백지영 조심해….”그러나 이미 저만치 끌려가 버린 데다 백소영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못했기 때문에 여름은 그저 백소영의 입 모양을 간신히 읽을 뿐이었다.“뭐라는 거지? 나한테 뭘 조심하라는 것 같은데.”“그러게.”임윤서가 백소영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패..시…연 조심해?”“……”그러나 옆에서 연화정이 너무 울다가 기절을 할 지경이라 여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둘은 급히 연화정을 부축했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소영이가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은 있어요. 저희가 반드시 소영이 꺼내올게요. 1년으로 안 되면, 2년이고 3년이고 노력할 거예요.”“고맙구나.”연화정은 둘이 너무 고마웠다.“그런데요 어머님, 아버님하고 서둘러 서울을 떠나시는 게 좋겠어요.”여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아까 소영이가 저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소영이는 뭔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위험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연화정은 좀 망연자실했다.“우리 부부가 평생 누구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어쨌든 아까 소영이랑 얘기할 때 보니까 뭔가 다급해 보이더라고요.”임윤서도 덧붙였다.“어머님하고 아버님 동성으로 가세요. 저희 집이 거기에 있거든요. 저랑 오빠가 잘 모실게요.”“얘들아 정말 고맙다.”연화정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일단 가서 짐을 챙기세요. 빨리
“최하준 씨, 나야말로 참을 만큼 참았어요. 여름이는 당신 애까지 가졌는데 좀 잘해주면 안 되겠어요? 매일 여름이만 집에다 잡아두다니, 어떻게 애한테 이래요? 여름이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고요.”임윤서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사람이 자꾸 그러면 안 돼요. 잘 해줬다가 괴롭혔다가, 얘도 사람이에요. 계속 그런 식으로 하는데 버틸 사람이 어디 있어요?”“우리 부부 일에 끼어들지 마시죠.”하준은 임윤서를 지나서 여름에게 가더니 그대로 안아서 차로 갔다.여름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하준이 자기 친구를 무시하는 듯 말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아마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서 한 번도 나랑 내 친구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 거겠지.”“왜, 이제는 내 꼴도 보기 싫습니까?”하준이 여름의 양 볼을 잡더니 그 깊은 눈으로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눈 떠요.”여름은 하준의 명령에 완벽한 무력감에 사로잡혀서 눈을 뜨고 말았다.여전히 익숙한 그 얼굴인데 그 눈에 떠오른 낯선 싸늘함에 여름은 마음이 아팠다.“최하준 씨, 윤서 말이 맞아요. 계속 그런 식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아요. 잘해줄 때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날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이젠 정말 지쳤다고요.”“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압니까?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까? 내가 그렇게 백소영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배 속의 아이와 당신 목숨을 가지고 날 협박해야 되겠습니까?”하준도 나름 화가 났다.“당신에게 우리 아이들은 백소영보다도 못한 존재입니까? 어떻게 백소영을 보러 가겠다고 아이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여름은 처연하게 웃었다.“나는 그러고 싶었겠냐고요. 나도 사람이에요. 그렇게 새장에 새 가두듯이 집에 가둬주고 자유를 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어요? 당신하고 결혼해서 산다는 게 이런 건 줄 진작 알았더라면 당신 아이를 가지지 않았을 텐데.”하준은 놀라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한참 동안
의사가 나가고 나서 하준은 피곤한 듯 병상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마지막으로 여름을 이렇게 가만히 들여다본 게 언제였더라….’요즘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각을 세웠었다.가만히 여름을 보던 하준은 그제야 여름이 매우 마르고 초췌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임신하면 몸무게가 느는 게 정상 아닌가?’내내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던 차윤이 한참을 망설이가 결국 말했다.“솔직히 제 생각에는 요즘 사모님하고 말다툼하실 때 회장님이 좀 심하시긴 했습….”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하준이 차윤을 싸늘하게 노려봤다.“그게… 사모님이 괜히 친구를 만났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못 만나게 하고 싶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계속 별장 안에만 갇혀 계셨으니 사모님이 얼마나 무료하고 외로우셨겠습니까? 회장님은 집에도 안 오시지, 전화도 한 통 없으시지…. 사모님은 매일 그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보기 어찌나 불쌍하던지….”‘불쌍해?’하준은 속이 쓰렸다.‘천하의 최하준 와이프가 불쌍하다는 말을 듣다니….’“말만 꺼내면 백소영 일로 싸우려고 드니 전화를 할 수가 있어야지.”“하지만 사모님은 회장님이 그런 마음을 정확하게 모르시잖습니까? 사모님은 회장님이 자신을 싫어해서 전화도 안 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차윤이 작은 소리로 전했다.하준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20여 분이 지나서 여름이 서서히 눈을 떴다.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의식적으로 배로 손을 가져갔다.‘우리 아기가….’“걱정하지 마. 아기는 무사해.”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최하준이 왜 또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여름은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꿈이 아닌가 싶었다.“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하준이 가볍게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여름의 손을 잡아 입가에 가져갔다.“자기야, 내가 다 잘못했어. 당신은 임신했는데 당신 곁에 있어 주지도 않고, 내가 조금 물러서면 될 걸 사사건건 당신이랑 싸우고…. 하지만 나도 일부
“요즘 출근 안 합니다.”하준이 대답했다.최대범이 듣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아직까지 추동현을 감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정말 걔 때문에 화가 나서 죽겠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최란은 바보가 아니다. 그저 너무 추동현을 믿고 사랑했을 뿐.“와, 식사하시네요, 할아버지, 할머니? 어제 제가 호텔에서 누굴 봤는지 아세요?”최윤형과 최양하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내가 백….”그러나 테이블에 앉은 여름과 하준을 보더니 최윤형이 귀신이라도 본 듯 얼어붙었다.‘요즘 집에 안 오더니, 어쩐 일로 집에 있어?’최양하는 그저 평온하게 최하준을 흘깃 보더니 최대범 옆에 앉았다.“누굴 만났는데?”장춘자가 최윤형에게 물었다.최윤형은 깊이 한숨을 쉬더니 답했다.“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배고프다. 이모님, 저도 밥 주세요.”최대범이 최윤형을 노려보더니 흥 했다.“온종일 술집이나 돌아다니고, 넌 나날이 자회사 실적 떨어지는 게 안 보이니? 너희 둘은 대체 언제나 하준이를 본받을래? 하준이가 FTT 전자 키우는 거 봐라.”최양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아버지 눈에는 최하준밖에 안 보인다니까.’그러나 최윤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했다.“할아버지, 누구나가 다 그런 별종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부자가 몇이나 나오겠어요?”“하긴, 그도 그렇네.”장춘자가 한숨을 쉬더니 여름의 배를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었다.“그래도 여름이 배 속에 아가는 제 아빠의 좋은 유전자를 받았겠지.”하준은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물려받던 말던 상관 없습니다. 그저 아이가 편히 살면 좋겠습니다.”“그건 그렇네.”이쪽을 흘깃 보는 최양하의 마음이 뭐가 복잡해 보였다.“아 참, 얘, 양하야. 하준이는 벌써 애까지 생겼는데 넌 대체 언제 여자친구라도 하나 생기니? 이제 슬슬 결혼을 해야지”장춘자가 갑자기 화살의 방향을 다른 손자에게로 향했다.“요즘 보니까 노 회장 네 딸이….”
여름은 정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진숙이 담요를 가지고 나와 어깨에 덮어주었다.여름이 앉아 있는 자리는 서명산의 경치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밤에 부는 바람 속에서 은은하게 초여름의 냄새가 났다.“임신 축하합니다.”최양하가 천천히 걸어왔다.여름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아이고, 아직도 화내시는 겁니까? 이제 FTT의 사모님이 되셨는데.”최양하가 여름 곁에 와서 앉았다.“그래도 저한테 고맙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아직 빛도 못 보는 신세일 수도 있었다고요.”여름은 아무 말 없이 최양하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인간이 다 있나, 그래?’그러나 예전에 최양하가 저질렀던 짓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는 여름이 신경 써야 할 인간이 정말이지 너무 많았다.그래도 여름의 얼굴에 흉터를 보니 최양하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다.“아, 뭐…. 그래도 제가 뭐 하나 말씀은 드리려고요. 조심하세요.”“뭘요?”“최하준말입니다. 와이프가 임신했을 때 밖에서 딴짓하는 남편이 많다잖습니까? 그러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세요. 아하핫!”최양하가 농담하듯 웃었다.“……”“저기…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긴 바람길이라 바람이 세니 너무 오래 앉아 계시지 마세요.”여름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그따위 소리를 하려고 여기까지 나왔어?’생각해 보니 오늘 조심하라고 경고한 사람이 두 번째였다.‘소영이도 조심하라고 그러고, 대체 누굴 조심하라는 거야?’여름은 알 수가 없었다.“쟤가 당신한테는 무슨 일이지?”최하준은 카디건을 하나 들고나오다가 멀어져 가는 최양하의 뒷모습을 보고 미간에 깊게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별말 안 했어요.”여름은 얼굴을 피했다.“걔가 뭐라고 했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쟤는 당신이 내 약점인 걸 알고 있어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그러는 거야.”하준이 말을 마치더니 공주님 안기로 여름을 안아 올렸다.“한참 앉아 있었네 이제 들어 갑시다.
30분쯤 영화를 보고 나자 하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하준이 전화를 들다 여름은 흘끗 보았다.‘나드쟈’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나가서 좀 받고 올게.”하준은 휴대 전화를 들고 나가서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이제는 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하는 사이가 됐어?”백지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그런 게 아니라….”백지안이 ‘푸흣’하고 웃었다.“농담이야, 농담. 낮에 의료 기록을 좀 더 살펴보고 널 위한 치료 솔루션을 만들어 봤어. 오늘 밤에 바로 시작하자.”“오늘?”하준이 흠칫했다.“응. 일단 30단계로 준비했거든. 타임테이블에 따라서 진행되는데 밤에 좀 스트레스도 덜하고 하니까. 내가 보니까 넌 이 시간이 제일 이완되는 시간대더라고. 그래서 제일 순수한 감정이 나오기 좋은 시간이거든. 그리고 네 증상은 미루면 미룰수록 치료하기 힘들어져. 오늘 바로 시작하자.”하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미안, 오늘은 내가 일이 좀 있어서….”“아, 그렇구나. 와이프랑 있어 줘야 하나 보지? 미안해….”백지안이 갑자기 당황했다.“내가 깜빡했다. 너 이제 유부남이지.”하준이 답했다.“… 미안. 내일 저녁에 하자.”“그래.”백지안이 쓴웃음을 지었다.“네 와이프가 정말 부럽다.”하준은 흠칫하더니 복잡한 얼굴이 됐다. 백지안은 전에 자신의 아내가 될 뻔한 사람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둘은 헤어지게 된 것이다.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백지안이 먼저 ‘안녕!’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준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영상실로 들어갔다.여름이 고개를 들더니 하준을 쳐다봤다.“드디어 그 나드쟈라는 의사를 찾았군요?”“응, 치료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하준이 여름을 안았다.“여자예요?”여름이 망설이다가 물었다.“또 질투하는 거야?”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짝 놀리듯 물었다.“자기야, 날 믿어야 해. 내 마음속에는 이제 당신이랑 아기밖에 없어.”그렇게 말하더니 하준
이진숙은 여름이 한결 좋아진 것을 보더니 웃으며 놀렸다.“역시나 회장님이 같이 계셔줘야 되겠네요.”여름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줏대 없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하준이 어리석게 눈이 멀어서 백소영과 임윤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은 미우면서도, 임신한 상황에서 하준이 자신의 곁을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저녁이 되자 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은 야근이야. 저녁 먹으러 못 갈 것 같네. 이따가 접대도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그냥 시내에서 하루 자고 들어갈게.”“그래요.”전화를 끊고 나자 여름은 갑자기 최양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여름은 자신이 최양하 따위가 했던 말조차 신경이 쓰이는 것이 짜증 나서 이마를 문질렀다.‘지다빈도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또 백지안을 닮은 사람을 만났을 리도 없잖아.’저녁 8시, 여름이 샤워를 하러 가려는데 휴대 전화가 ‘띠링’하고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서 사진이 와 있었다.눌러보니 사진 속에는 최하준과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함께 호텔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자는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윤기 나는 긴 머리가 어깨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완벽한 모습이었다.그러나 더욱 여름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여자와 양유진이 전에 보여준 적이 있었던 사진 속 인물이 너무나 똑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지다빈이 그 사진의 인물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목구비가 사진 속 여자처럼 또렷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었다.‘하지만 이 사람은 완전히 백지안과 똑같이 생겼어. 아니, 완전히 백지안 본인인데?게다가 여자를 보는 최하준의 눈빛이 너무나 다정하잖아!’여름은 사진이 찍힌 날짜를 보았다. 어제 아침 9시였다.여름이 차를 타고 법원에 나가던 시간이었다.그 시간에 최하준과 그 여자는 호텔에 있었다는 말이었다.‘대체 누구야?’발밑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지난번에 지다빈이 백지안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백지안, 최하준이 꿈결에서도 부르던 그 이름.백지안은 보통이 아니라고, 살아 있었으면 여름은 상대가 안 될 거라고 했던 소영의 말이 기억났다.‘아, 어제 소영이가 ‘패시연 조심해.’라고 했었지?패, 시, 연…백, 지, 안?’머리가 띵했다.여름은 놀라서 온몸이 굳어졌다.‘그래, ‘백지안 조심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그러니까 소영이는 백지안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소영이는 알고 있었어.그리고 최양하도 어제 갑자기 조심하라고 했었지?다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최하준은 다시 백지안의 곁으로 돌아갈까?’갑자기 심장이 확 조여드는 듯했다. 손으로 가만히 배를 만졌다.‘안 되겠어. 최하준이 전에는 어떤 인간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내 배 속에 있는 아가들의 아빠라고! 애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다 있는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여름이 휴대 전화를 들어 바로 최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되지 않습니다…”‘뭘 하는 거지? 뭘 하고 있길래 전화를 꺼 놔?설마 백지안과 함께 있는 건 아니겠지?’여름의 망상은 이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이번에는 상혁에게로 걸어보았다.“하준 씨 전화가 꺼져 있어서요.”회사에서 야근을 하던 상혁은 깜짝 놀랐다.“회, 회장님은 지금 심리 치료 중이시라 전화를 못 받으십니다. 의사가 치료에 방해된다고 꺼놓으라고 했거든요.”“치료라고요? 그 나드쟈라는 의사 말이에요?”“네. 선생님께서 치료를 너무 미루면 점점 더 치료하기 어려워진다고 빨리빨리 치료를 진행하고 싶어 하시더라고요.”상혁은 조심해서 말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하준의 병이 빨리 치료되기도 바랐지만 그 과정에서 나드쟈가 죽었다던 백지안이라는 사실을 사모님이 눈치라도 챘다가는 큰일이었다.여름은 잠시 아무 말 없더니 다시 물었다.“오늘 밤에 새 아파트에서 잔다고 했죠?”“네, 그렇습니다.”전화를 내려놓고 여름은 당장 새 아파트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십중팔구 누군가가 여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