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주변에 신맛 나는 원두 좋아하는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하준은 백지안의 맞은편에 앉다가 갑자기 집에 있는 사람이 생각났다. 여름은 달달한 맛을 좋아한다. 커피를 마셔도 꼭 캬라멜마끼아또를 찾고는 했다.백지안은 생각에 잠긴 하준을 보자 자신을 앞에 앉혀 두고도 정신을 팔다니 필시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백지안은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의료 기록을 덮으며 웃었다.“네 증상은 재발 없이 80% 치료할 자신 있어.”하준의 눈이 빛났다. 막 뭐라고 하려고 하는데 차윤에게서 전화가 왔다.“회장님, 사모님께서 법원에 가셨습니다.”하준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못 나가게 잘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칼을 들고 살기 싫다고 하시는 바람에….”차윤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했다.“아주 잘하는 짓들이다.”하준은 화가 나서 전화기를 집어 던질 뻔했다.‘아기까지 있는데 그런 식으로 협박을 한다고? 정말 아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어떻게 우리 쌍둥이보다 백소영이 더 소중할 수가 있지?”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하준이 벌떡 일어섰다.“치료는 내일 하자.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그래. 하지만 너무 미루면 안 돼. 늦어질수록 치료효과가 떨어지거든.”백지안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두 사람은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다른 쪽 복도에서 나오던 서유인이 두 사람의 옆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는 구석으로 피하더니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자기, 거기 숨어서 뭐 해?”추성호가 다가와 서유인의 허리를 안으며 물었다.“봐요, 이게 누군가.”서유인이 사진을 열어 보여주었다.“백지안, 안 죽었더라고요.”추성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확실히 백지안이네. 지다빈처럼 그냥 닮은 사람이 아니라.”“흥, 남자랑 여자가 아침 9시에 호텔 방에서 나왔는데 밤새 룸에서 뭘 했겠어요?”서유인은 강여름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신이 났다.“강여름이 이 사진을 보면 어떨까?”
‘내가 친자 감별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소영이가 누명을 쓰지도 않았을 텐데.’“너희들이 와줄 줄 몰랐다.”백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셋은 서로 친구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판에 와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우린 네가 안 그랬다는 걸 믿어.”임윤서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우리가 꼭 항소해 줄게. 그리고 네 부모님도 돌봐드리고.”“고맙다. 혹시 해줄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을 벗어나 줄래?”백소영이 미처 말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데려가려고 사람이 왔다.백소영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백지영 조심해….”그러나 이미 저만치 끌려가 버린 데다 백소영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못했기 때문에 여름은 그저 백소영의 입 모양을 간신히 읽을 뿐이었다.“뭐라는 거지? 나한테 뭘 조심하라는 것 같은데.”“그러게.”임윤서가 백소영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패..시…연 조심해?”“……”그러나 옆에서 연화정이 너무 울다가 기절을 할 지경이라 여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둘은 급히 연화정을 부축했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소영이가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은 있어요. 저희가 반드시 소영이 꺼내올게요. 1년으로 안 되면, 2년이고 3년이고 노력할 거예요.”“고맙구나.”연화정은 둘이 너무 고마웠다.“그런데요 어머님, 아버님하고 서둘러 서울을 떠나시는 게 좋겠어요.”여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아까 소영이가 저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소영이는 뭔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위험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연화정은 좀 망연자실했다.“우리 부부가 평생 누구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어쨌든 아까 소영이랑 얘기할 때 보니까 뭔가 다급해 보이더라고요.”임윤서도 덧붙였다.“어머님하고 아버님 동성으로 가세요. 저희 집이 거기에 있거든요. 저랑 오빠가 잘 모실게요.”“얘들아 정말 고맙다.”연화정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일단 가서 짐을 챙기세요. 빨리
“최하준 씨, 나야말로 참을 만큼 참았어요. 여름이는 당신 애까지 가졌는데 좀 잘해주면 안 되겠어요? 매일 여름이만 집에다 잡아두다니, 어떻게 애한테 이래요? 여름이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고요.”임윤서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사람이 자꾸 그러면 안 돼요. 잘 해줬다가 괴롭혔다가, 얘도 사람이에요. 계속 그런 식으로 하는데 버틸 사람이 어디 있어요?”“우리 부부 일에 끼어들지 마시죠.”하준은 임윤서를 지나서 여름에게 가더니 그대로 안아서 차로 갔다.여름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하준이 자기 친구를 무시하는 듯 말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아마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서 한 번도 나랑 내 친구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 거겠지.”“왜, 이제는 내 꼴도 보기 싫습니까?”하준이 여름의 양 볼을 잡더니 그 깊은 눈으로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눈 떠요.”여름은 하준의 명령에 완벽한 무력감에 사로잡혀서 눈을 뜨고 말았다.여전히 익숙한 그 얼굴인데 그 눈에 떠오른 낯선 싸늘함에 여름은 마음이 아팠다.“최하준 씨, 윤서 말이 맞아요. 계속 그런 식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아요. 잘해줄 때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날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이젠 정말 지쳤다고요.”“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압니까?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까? 내가 그렇게 백소영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배 속의 아이와 당신 목숨을 가지고 날 협박해야 되겠습니까?”하준도 나름 화가 났다.“당신에게 우리 아이들은 백소영보다도 못한 존재입니까? 어떻게 백소영을 보러 가겠다고 아이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여름은 처연하게 웃었다.“나는 그러고 싶었겠냐고요. 나도 사람이에요. 그렇게 새장에 새 가두듯이 집에 가둬주고 자유를 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어요? 당신하고 결혼해서 산다는 게 이런 건 줄 진작 알았더라면 당신 아이를 가지지 않았을 텐데.”하준은 놀라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한참 동안
의사가 나가고 나서 하준은 피곤한 듯 병상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마지막으로 여름을 이렇게 가만히 들여다본 게 언제였더라….’요즘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각을 세웠었다.가만히 여름을 보던 하준은 그제야 여름이 매우 마르고 초췌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임신하면 몸무게가 느는 게 정상 아닌가?’내내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던 차윤이 한참을 망설이가 결국 말했다.“솔직히 제 생각에는 요즘 사모님하고 말다툼하실 때 회장님이 좀 심하시긴 했습….”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하준이 차윤을 싸늘하게 노려봤다.“그게… 사모님이 괜히 친구를 만났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못 만나게 하고 싶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계속 별장 안에만 갇혀 계셨으니 사모님이 얼마나 무료하고 외로우셨겠습니까? 회장님은 집에도 안 오시지, 전화도 한 통 없으시지…. 사모님은 매일 그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보기 어찌나 불쌍하던지….”‘불쌍해?’하준은 속이 쓰렸다.‘천하의 최하준 와이프가 불쌍하다는 말을 듣다니….’“말만 꺼내면 백소영 일로 싸우려고 드니 전화를 할 수가 있어야지.”“하지만 사모님은 회장님이 그런 마음을 정확하게 모르시잖습니까? 사모님은 회장님이 자신을 싫어해서 전화도 안 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차윤이 작은 소리로 전했다.하준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20여 분이 지나서 여름이 서서히 눈을 떴다.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의식적으로 배로 손을 가져갔다.‘우리 아기가….’“걱정하지 마. 아기는 무사해.”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최하준이 왜 또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여름은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꿈이 아닌가 싶었다.“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하준이 가볍게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여름의 손을 잡아 입가에 가져갔다.“자기야, 내가 다 잘못했어. 당신은 임신했는데 당신 곁에 있어 주지도 않고, 내가 조금 물러서면 될 걸 사사건건 당신이랑 싸우고…. 하지만 나도 일부
“요즘 출근 안 합니다.”하준이 대답했다.최대범이 듣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아직까지 추동현을 감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정말 걔 때문에 화가 나서 죽겠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최란은 바보가 아니다. 그저 너무 추동현을 믿고 사랑했을 뿐.“와, 식사하시네요, 할아버지, 할머니? 어제 제가 호텔에서 누굴 봤는지 아세요?”최윤형과 최양하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내가 백….”그러나 테이블에 앉은 여름과 하준을 보더니 최윤형이 귀신이라도 본 듯 얼어붙었다.‘요즘 집에 안 오더니, 어쩐 일로 집에 있어?’최양하는 그저 평온하게 최하준을 흘깃 보더니 최대범 옆에 앉았다.“누굴 만났는데?”장춘자가 최윤형에게 물었다.최윤형은 깊이 한숨을 쉬더니 답했다.“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배고프다. 이모님, 저도 밥 주세요.”최대범이 최윤형을 노려보더니 흥 했다.“온종일 술집이나 돌아다니고, 넌 나날이 자회사 실적 떨어지는 게 안 보이니? 너희 둘은 대체 언제나 하준이를 본받을래? 하준이가 FTT 전자 키우는 거 봐라.”최양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아버지 눈에는 최하준밖에 안 보인다니까.’그러나 최윤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했다.“할아버지, 누구나가 다 그런 별종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부자가 몇이나 나오겠어요?”“하긴, 그도 그렇네.”장춘자가 한숨을 쉬더니 여름의 배를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었다.“그래도 여름이 배 속에 아가는 제 아빠의 좋은 유전자를 받았겠지.”하준은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물려받던 말던 상관 없습니다. 그저 아이가 편히 살면 좋겠습니다.”“그건 그렇네.”이쪽을 흘깃 보는 최양하의 마음이 뭐가 복잡해 보였다.“아 참, 얘, 양하야. 하준이는 벌써 애까지 생겼는데 넌 대체 언제 여자친구라도 하나 생기니? 이제 슬슬 결혼을 해야지”장춘자가 갑자기 화살의 방향을 다른 손자에게로 향했다.“요즘 보니까 노 회장 네 딸이….”
여름은 정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진숙이 담요를 가지고 나와 어깨에 덮어주었다.여름이 앉아 있는 자리는 서명산의 경치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밤에 부는 바람 속에서 은은하게 초여름의 냄새가 났다.“임신 축하합니다.”최양하가 천천히 걸어왔다.여름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아이고, 아직도 화내시는 겁니까? 이제 FTT의 사모님이 되셨는데.”최양하가 여름 곁에 와서 앉았다.“그래도 저한테 고맙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아직 빛도 못 보는 신세일 수도 있었다고요.”여름은 아무 말 없이 최양하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인간이 다 있나, 그래?’그러나 예전에 최양하가 저질렀던 짓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는 여름이 신경 써야 할 인간이 정말이지 너무 많았다.그래도 여름의 얼굴에 흉터를 보니 최양하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다.“아, 뭐…. 그래도 제가 뭐 하나 말씀은 드리려고요. 조심하세요.”“뭘요?”“최하준말입니다. 와이프가 임신했을 때 밖에서 딴짓하는 남편이 많다잖습니까? 그러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세요. 아하핫!”최양하가 농담하듯 웃었다.“……”“저기…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긴 바람길이라 바람이 세니 너무 오래 앉아 계시지 마세요.”여름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그따위 소리를 하려고 여기까지 나왔어?’생각해 보니 오늘 조심하라고 경고한 사람이 두 번째였다.‘소영이도 조심하라고 그러고, 대체 누굴 조심하라는 거야?’여름은 알 수가 없었다.“쟤가 당신한테는 무슨 일이지?”최하준은 카디건을 하나 들고나오다가 멀어져 가는 최양하의 뒷모습을 보고 미간에 깊게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별말 안 했어요.”여름은 얼굴을 피했다.“걔가 뭐라고 했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쟤는 당신이 내 약점인 걸 알고 있어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그러는 거야.”하준이 말을 마치더니 공주님 안기로 여름을 안아 올렸다.“한참 앉아 있었네 이제 들어 갑시다.
30분쯤 영화를 보고 나자 하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하준이 전화를 들다 여름은 흘끗 보았다.‘나드쟈’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나가서 좀 받고 올게.”하준은 휴대 전화를 들고 나가서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이제는 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하는 사이가 됐어?”백지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그런 게 아니라….”백지안이 ‘푸흣’하고 웃었다.“농담이야, 농담. 낮에 의료 기록을 좀 더 살펴보고 널 위한 치료 솔루션을 만들어 봤어. 오늘 밤에 바로 시작하자.”“오늘?”하준이 흠칫했다.“응. 일단 30단계로 준비했거든. 타임테이블에 따라서 진행되는데 밤에 좀 스트레스도 덜하고 하니까. 내가 보니까 넌 이 시간이 제일 이완되는 시간대더라고. 그래서 제일 순수한 감정이 나오기 좋은 시간이거든. 그리고 네 증상은 미루면 미룰수록 치료하기 힘들어져. 오늘 바로 시작하자.”하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미안, 오늘은 내가 일이 좀 있어서….”“아, 그렇구나. 와이프랑 있어 줘야 하나 보지? 미안해….”백지안이 갑자기 당황했다.“내가 깜빡했다. 너 이제 유부남이지.”하준이 답했다.“… 미안. 내일 저녁에 하자.”“그래.”백지안이 쓴웃음을 지었다.“네 와이프가 정말 부럽다.”하준은 흠칫하더니 복잡한 얼굴이 됐다. 백지안은 전에 자신의 아내가 될 뻔한 사람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둘은 헤어지게 된 것이다.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백지안이 먼저 ‘안녕!’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준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영상실로 들어갔다.여름이 고개를 들더니 하준을 쳐다봤다.“드디어 그 나드쟈라는 의사를 찾았군요?”“응, 치료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하준이 여름을 안았다.“여자예요?”여름이 망설이다가 물었다.“또 질투하는 거야?”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짝 놀리듯 물었다.“자기야, 날 믿어야 해. 내 마음속에는 이제 당신이랑 아기밖에 없어.”그렇게 말하더니 하준
이진숙은 여름이 한결 좋아진 것을 보더니 웃으며 놀렸다.“역시나 회장님이 같이 계셔줘야 되겠네요.”여름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줏대 없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하준이 어리석게 눈이 멀어서 백소영과 임윤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은 미우면서도, 임신한 상황에서 하준이 자신의 곁을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저녁이 되자 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은 야근이야. 저녁 먹으러 못 갈 것 같네. 이따가 접대도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그냥 시내에서 하루 자고 들어갈게.”“그래요.”전화를 끊고 나자 여름은 갑자기 최양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여름은 자신이 최양하 따위가 했던 말조차 신경이 쓰이는 것이 짜증 나서 이마를 문질렀다.‘지다빈도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또 백지안을 닮은 사람을 만났을 리도 없잖아.’저녁 8시, 여름이 샤워를 하러 가려는데 휴대 전화가 ‘띠링’하고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서 사진이 와 있었다.눌러보니 사진 속에는 최하준과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함께 호텔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자는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윤기 나는 긴 머리가 어깨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완벽한 모습이었다.그러나 더욱 여름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여자와 양유진이 전에 보여준 적이 있었던 사진 속 인물이 너무나 똑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지다빈이 그 사진의 인물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목구비가 사진 속 여자처럼 또렷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었다.‘하지만 이 사람은 완전히 백지안과 똑같이 생겼어. 아니, 완전히 백지안 본인인데?게다가 여자를 보는 최하준의 눈빛이 너무나 다정하잖아!’여름은 사진이 찍힌 날짜를 보았다. 어제 아침 9시였다.여름이 차를 타고 법원에 나가던 시간이었다.그 시간에 최하준과 그 여자는 호텔에 있었다는 말이었다.‘대체 누구야?’발밑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지난번에 지다빈이 백지안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