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안, 최하준이 꿈결에서도 부르던 그 이름.백지안은 보통이 아니라고, 살아 있었으면 여름은 상대가 안 될 거라고 했던 소영의 말이 기억났다.‘아, 어제 소영이가 ‘패시연 조심해.’라고 했었지?패, 시, 연…백, 지, 안?’머리가 띵했다.여름은 놀라서 온몸이 굳어졌다.‘그래, ‘백지안 조심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그러니까 소영이는 백지안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소영이는 알고 있었어.그리고 최양하도 어제 갑자기 조심하라고 했었지?다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최하준은 다시 백지안의 곁으로 돌아갈까?’갑자기 심장이 확 조여드는 듯했다. 손으로 가만히 배를 만졌다.‘안 되겠어. 최하준이 전에는 어떤 인간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내 배 속에 있는 아가들의 아빠라고! 애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다 있는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여름이 휴대 전화를 들어 바로 최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되지 않습니다…”‘뭘 하는 거지? 뭘 하고 있길래 전화를 꺼 놔?설마 백지안과 함께 있는 건 아니겠지?’여름의 망상은 이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이번에는 상혁에게로 걸어보았다.“하준 씨 전화가 꺼져 있어서요.”회사에서 야근을 하던 상혁은 깜짝 놀랐다.“회, 회장님은 지금 심리 치료 중이시라 전화를 못 받으십니다. 의사가 치료에 방해된다고 꺼놓으라고 했거든요.”“치료라고요? 그 나드쟈라는 의사 말이에요?”“네. 선생님께서 치료를 너무 미루면 점점 더 치료하기 어려워진다고 빨리빨리 치료를 진행하고 싶어 하시더라고요.”상혁은 조심해서 말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하준의 병이 빨리 치료되기도 바랐지만 그 과정에서 나드쟈가 죽었다던 백지안이라는 사실을 사모님이 눈치라도 챘다가는 큰일이었다.여름은 잠시 아무 말 없더니 다시 물었다.“오늘 밤에 새 아파트에서 잔다고 했죠?”“네, 그렇습니다.”전화를 내려놓고 여름은 당장 새 아파트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십중팔구 누군가가 여
백지안은 하준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아무리 어두운 곳에서 봐도 저 콧날과 턱선은 여전히 또렷하구나. 이 남자는 아무래도 내가 다시 찾아와야겠어.’“준,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 영하를 이제 좀 풀어줘.”“왜? 네가 이제 회사 가져 가게?”“그런 건 아니지. 난 이제 내 일하기도 바쁜데 회사 관리할 시간이 어디 있어?”백지안이 쓴웃음을 지었다.“우리 아빠 심장병도 재발했는데 소영이는 감옥까지 갔잖니? 그래도 우리 아빠가 회사를 엄청 아끼셨는데 회사까지 없어지면 정말 무너지실 것 같아서 그래.”하준의 눈에 따스함이 스며들었다.“너 외국에서 그 고생을 하는 동안 네 아버지가 널 그렇게 모질게 대했는데도 넌 참 여전하구나.”“아버지가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야 아버지의 일이고, 난 그냥 딸로서 내가 할 도리를 해서 내 양심에 걸리지만 않으면 돼.”백지안이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어른이 되었는데도 오빠가 아직 저러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좀 그래서, 내가 예전처럼 그러고 사고 치지 않게 딱 잡아서 사람 좀 만들어 보게.”백윤택 이야기가 나오니 하준은 혐오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그래, 인간 만들긴 해야지.”백지안이 갑자기 하준을 보며 웃었다.“난 한참은 설득해야 할 줄 알았는데 이거 너무 쉽게 넘어 오는걸?”“난 너에게 빚진 게 있잖아.”하준이 말했다.“없어. 넌 나한테 빚 같은 거 진 적 없어.”백지안이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30분 뒤, 하준과 백지안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컴컴한 펍 구석에서 양유진이 걸어 나오더니 손에 든 사진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오후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양유진에게 저녁에 이 펍으로 오라는 수신자 불명의 문자가 왔었다.“강여름, 보아하니 이제 네 처지가 점점 더 위태롭게 되는 것 같구나.”양유진은 톡으로 여름에게 사진을 보냈다.-저녁에 친구랑 ‘Ever After’라는 펍에서 술 한잔하다가 이 둘 사람이 펍 2층의 룸으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여름 씨
최양하는 이마를 문질렀다.‘하아, 가끔 여자들 육감은 정말 무서울 때가 있다니까.’“실은 저도 형님이랑 송영식 일행이 요즘 매일 백지안을 만난다고 누구한테 들었어요. 다른 건 저도 잘 모릅니다.”“옛날 애인을 만나서 피하지 않고 계속 만나려고 든다면 바람 나는 건 시간 문제 아닌가요?”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쓰렸다.“난 우리 쌍둥이가 아빠 없이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알겠습니다.”최양하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40분 뒤, 차는 펍 주차장에 멈췄다.여름이 차문을 열고 나왔다.“잠깐만 기다리세요.”최양하는 아무래도 배 속의 아기가 걱정이 되서 급히 따라왔다.여름은 2층으로 올라가서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네 번째 방문을 열자 소파 위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훤칠한 키에 그 이목구비는 최하준이었다. 하준은 얼굴을 온통 백지안의 가슴에 묻고 백지안은 하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문이 벌컥 열리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가만히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여름은 완전히 속이 울렁거렸다.‘더러워. 토하고 싶어!’여름이 사랑하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의 몸에 안겨 있었다.여름은 하준이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백지안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하준이 난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아이들이 있잖아?’가슴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여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백지안이 급히 하준을 밀쳤다.“준 와이프예요? 이건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여름은 테이블에 있던 술잔을 들어서 백지안의 얼굴에 부었다.“꺄악!”백지안이 비명을 질렀다.소파에 기대어 있던 하준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하준은 가장 괴로웠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돌리고 있다가 갑자기 비명소리에 깬 것이었다.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지안의 머리에서부터 옷과 몸이 온통 젖어 있었다.그리고 그 앞에는 완전히 분노에 찬 여름이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하준이 벌떡 일어서서 여름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당신이랑 첫사랑이 사이에 끼어든 건가요?”여름이 울먹이며 비꼬았다.“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당신 왜 앞뒤 가리지도 않고 무작정 사람을 모욕해? 당장 백지안 씨에게 사과하지.”하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사과하라고?’여름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준, 됐어.”백지안이 급히 말렸다.“얼른 아내 분이랑 돌아… 엣취!”백지안은 말을 하다 말고 재체기를 하면서 몸을 웅크렸다.하준이 급히 자기 쟈켓을 벗어 백지안에게 덮어 주었다.여름은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전에 백지안과 닮은 지다빈이 나타났을 때 두 사람은 죽도록 싸우고 이혼까지 할 뻔했었다.이제는 백지안 본인이 나타났으니 여름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여름은 망연자실해졌다.‘오늘 여기를 오지 말았어야 했나?’내내 문 앞에 가만히 서서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최양하는 홀로 남겨진 채 덜덜 떠는 여름의 뒷모습을 보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정말 너무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와이프인데. 유부남이 되어가지고 오밤중에 집에 들어올 생각은 안 하고 다른 여자랑 품에서 부둥켜안고 뒹굴다니, 형수님 기분은 생각이나 해봤습니까?”“대체 누가 부둥켜안고 뒹굴었다는 거야?”하준은 짜증스럽게 여름을 노려보았다.“최양하가 당신을 여기 데리고 왔나? 아직도 저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 몰라? 당신이랑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녀석이라고. 왜 이렇게 번번이 녀석의 간계에 빠지는 거야?”“누가 이간질한다고 이럽니까?”최양하도 이제는 화가 났다.“됐어요. 우리 가요.”여름이 최양하를 잡았다.‘지친다. 이런 자리,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누가 그 녀석 손 잡으라고 했어?”최하준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여름을 잡아채서 자기 쪽으로 당겼다.“최양하, 경고하는데, 내 와이프에게서 떨어져.”저만치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백지안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가만히 주먹을 꽉 쥐었다. 눈에 질투심이 어렸다.“당신은 백지안 씨랑 붙어 있으면서 최양하 씨는 왜 내게서 떨어지라고 하는 거
여름은 복잡한 시선으로 최양하를 흘깃 쳐다보았다. 최양하가 이렇게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최양하도 여름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자 하준은 갑자기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이때 백지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오늘 치료는 여기까지만 하지. 준, 아내 분 모시고 일단 돌아가.”“그래.”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도 차마 여름과 최양하 둘이서만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지안이는 자기 차를 끌고 왔겠지.’입구까지 걸어가서 여름이 갑자기 백지안을 돌아봤다.“백지안 씨, 하준 씨를 치료를 계속하셔야겠다면 우리 집으로 와서 해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속이 이렇게 좁아서 미안하지만, 백지안 씨는 여전히 너무나 매력적인 분인데다가 하준 씨의 전 애인이라 불안하네요. 백지안 씨도 여자니까 이런 제 심정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어요.”“충분히 이해합니다.”백지안이 빙그레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하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완전히 자리를 뜨고 나자 백지안이 얼굴이 음험해졌다.‘준이 나만 두고 가버리다니….예전 같으면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야.내가 준의 마음속에 저 못생긴 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너무 얕봤나 보네. 방법을 바꿔야지 안 되겠어.’----술집에서 나오자 최양하는 눈치껏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그런데 갑자기 여름이 최양하를 불러세웠다.“오늘 고마워서 내가 야식을 쏠까 하는데요.”오랫동안 집에만 갇혀 있다가 나왔더니 갑자기 치킨이 확 먹고 싶었다.“이래 가지고 치킨집을 가겠다고?”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냥 나랑 같이 집으로 가지.”“당신이 동의하지 않을 걸 알고 있어서 내가 최하준 씨는 부르지 않았잖아요. 가려면 혼자 가세요.”여름이 최양하에게 눈짓을 하더니 두 사람은 저쪽으로 가버렸다.완전히 낭패한 얼굴의 최하준을 흘끗 돌아보고 최양하는 갑자기 의기양양해졌다.‘흥, 비즈니스에서 너한테 안 된다면 내가 네 아내라도 빼앗아 주지.’최하준은 화가서 소리 질렀다.“강여름, 예전에
하준은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뉴스에서 보니까 이런 데서는 더러운 기름을 쓴다고 하던데요.”“……”‘아니, 돌았나? 덩치만 좀 작고 제대로 차려입지만 않았어도 내가 발로 차서 내쫓는 건데.’“못 믿으셔도 할 수 없죠. 정 그러면 다른 집으로 가시죠.”주인이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아, 뭐 그럴 것까지는 없고, 우리 와이프 먹을 것은 기름을 새 걸로 바꿔서 튀겨 주십시오.”하준은 주인이 직접 기름을 다시 바꾸는 것을 확인했다.“두 마리 주문하셨던데, 아주 두 번째 것도 시름을 또 갈아서 튀겨 드릴까?”주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물었다.“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 먹을 것은 아까 버린 기름에 다시 튀겨서 줘도 상관없습니다.”“……”‘뭐야, 이거? 정신이 나갔나?’하준은 그제야 가뿐한 기분으로 침착하게 테이블로 돌아왔다.“자기야, 내가 자기 먹을 치킨은 새 기름에 튀겨 달라고 했어. 아주 맛있을 거야.”너무 어이가 없어서 여름은 헛웃음이 나왔다.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둥이들아, 이제 다 너희들 덕분이네.”“……”최양하는 ‘킥킥’ 웃었다.“아빠가 어떤지는 몰라도 우리 조카들, 삼촌이 많이 예뻐해 줄게.”“최양하, 넌 가만있어. 내가 지금 할 말 많은데도 꾹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하준이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제가 뭘요? 솔직히 옛 연인들이 오밤중에 집에는 안 가고 술집 룸에 들어가서, 뭐? 치료? 하하하! 난 그런 치료는 보도 듣고 못 했네. 형님, 조심하시라고요.”최양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넌 아직도 그 소리냐? 의사마다 다 자기만의 치료 방식이 있는 거야.”최하준이 짜증스럽게 말을 받았다.“좋아요. 형님은 당당한지도 모르지. 하지만 백지안도 형님에게 100% 아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최양하가 어깨를 으쓱했다.“예전 같았으면 나도 이런 소리 안 해요. 네, 나도 쓰레기였으니까.하지만 난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면 다른 여자들하고는 무조건 거리를 둘
하준은 짜증스러운 듯 입술을 핥았다.“네가 좀 잘 돌봐 줘.”통화가 끝나자 여름이 하준을 쳐다보았다.“왜요? 백지안 사고 났대요?”“들렸어?”하준의 눈이 당황한 듯 커졌다.‘아주 작은 소리로 통화했는데 들렸단 말이야.’‘들리기는 개뿔, 그냥 다 때려 맞춘 거지.역시나 백지안 만만치 않군.’여름이 답했다.“하, 백지안이 사고 났다고 송영식이 전화한 거 아녜요? 안 봐도 뻔하지. 송영식은 당신이 백지안을 데려다주지 않았어 사고 났다면서 백지안은 또 왜 다 젖었냐고 당신한테 한 소리 했겠지. 하지만 백지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송영식에게 한마디도 안 했을 테고.”“……”하준은 깜짝 놀랐다. 여름이 자기 전화기에 도청기라도 달아놓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어떻게 알았어?”여름의 양쪽 입꼬리가 축 내려갔다.‘뭐야, 다 맞췄어?’“다 예전에 강여경이 하던 짓이잖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하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여름은 어깨를 으쓱했다.“첫째, 사고로 최하준에게 깊은 자책감을 심어준다. 둘째, 송영식에게 왜 내가 술을 부었는지 말하지 않음으로서 최하준에게 자신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한다. 이게 다 그런 애들이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에요.”하준의 미간이 더 찌푸져졌다.“지안이를 안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자기가 지안이를 잘 몰라서 그래….”“됐어요. 그 사람이 착하다고 쳐요. 당신은 십수 년을 알았고 나는 어젯밤 처음 만났으니까. 그렇게 마음에 품도 못 잊던 첫사랑인데 그런 소리 들으면 당연히 기분 별로겠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하지만 내 눈에 백지안은 내 남편 빼앗아 가서 내 아이의 가정을 망치려는 사람으로 밖에는 안 보여요.”“왜 이렇게까지 날 안 믿어 주는 거야?”하준은 조금 화가 난 듯했다.“당신에게는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이나?”“믿음은 상대가 주는 거죠. 당신이 나에게 뭘 보여줬는데요? 지다빈 가니까 지안 온 거밖에 안 보이는데?”여름은 참지 못하고 계속했다
“내 몸에 무슨 흔적이라도 남아있는지 보라고. 난 정말 결백해.”하준이 팔을 활짝 벌리고 여름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여름은 도저히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하준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뭐야, 망나니같이. 빨리 들어가요.”“여보, 울지마. 내가 죽일 놈이야. 잘못했어.”하준은 그 틈에 여름을 품에 감아 안더니 얼굴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난 당신한테만 망나니이고 싶은데.”“아, 진짜. 당신 이러는 거 싫어!”여름이 손을 들여 하준의 어깨를 때렸다. 불안감을 해소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속상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허구한 날 날 비난하고 욕을 쏟아내다가 갑자기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대해주고! 앞으로는 백지안도 만나지 마!”“자기야, 그건 안 되지.”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지금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백지안밖에 없어. 내가 이 젊은 나이에 당신이랑 우리 아가들을 못 알아봐도 괜찮겠어?”여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당신이랑 그 사람이 둘만의 세계에 있는 거, 난 싫단 말이야. 정 그러면… 집으로 와서 치료하라고 해요. 내가 밖에서 지켜볼 거야.”하준이 여름이 얼굴을 쓰다듬었다.“이제 보니 우리 와이프가 이렇게 엄한 분이셨어. 전에는 내가 왜 몰랐을까?”여름이 하준을 노려봤다.“잘 들어요. 아기만 아니었으면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할 이유도 없어.”“무슨 뜻이야?”하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기 때문에 나랑 산다는 말이야?”“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 보라고. 지다빈을 곁에 두더니 이제는 백지안이라니. 나도 이제 지쳤어. 얼마나 더 당신에 대한 애정을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여름이 진짜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준은 은근히 씁쓸했다.하준도 지안이 자신을 치료할 정신과 의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러나 정말이지 백지안과 다시 합칠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우리 자기, 난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여름은 이미 침대에 누워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