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복잡한 시선으로 최양하를 흘깃 쳐다보았다. 최양하가 이렇게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최양하도 여름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자 하준은 갑자기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이때 백지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오늘 치료는 여기까지만 하지. 준, 아내 분 모시고 일단 돌아가.”“그래.”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도 차마 여름과 최양하 둘이서만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지안이는 자기 차를 끌고 왔겠지.’입구까지 걸어가서 여름이 갑자기 백지안을 돌아봤다.“백지안 씨, 하준 씨를 치료를 계속하셔야겠다면 우리 집으로 와서 해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속이 이렇게 좁아서 미안하지만, 백지안 씨는 여전히 너무나 매력적인 분인데다가 하준 씨의 전 애인이라 불안하네요. 백지안 씨도 여자니까 이런 제 심정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어요.”“충분히 이해합니다.”백지안이 빙그레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하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완전히 자리를 뜨고 나자 백지안이 얼굴이 음험해졌다.‘준이 나만 두고 가버리다니….예전 같으면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야.내가 준의 마음속에 저 못생긴 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너무 얕봤나 보네. 방법을 바꿔야지 안 되겠어.’----술집에서 나오자 최양하는 눈치껏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그런데 갑자기 여름이 최양하를 불러세웠다.“오늘 고마워서 내가 야식을 쏠까 하는데요.”오랫동안 집에만 갇혀 있다가 나왔더니 갑자기 치킨이 확 먹고 싶었다.“이래 가지고 치킨집을 가겠다고?”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냥 나랑 같이 집으로 가지.”“당신이 동의하지 않을 걸 알고 있어서 내가 최하준 씨는 부르지 않았잖아요. 가려면 혼자 가세요.”여름이 최양하에게 눈짓을 하더니 두 사람은 저쪽으로 가버렸다.완전히 낭패한 얼굴의 최하준을 흘끗 돌아보고 최양하는 갑자기 의기양양해졌다.‘흥, 비즈니스에서 너한테 안 된다면 내가 네 아내라도 빼앗아 주지.’최하준은 화가서 소리 질렀다.“강여름, 예전에
하준은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뉴스에서 보니까 이런 데서는 더러운 기름을 쓴다고 하던데요.”“……”‘아니, 돌았나? 덩치만 좀 작고 제대로 차려입지만 않았어도 내가 발로 차서 내쫓는 건데.’“못 믿으셔도 할 수 없죠. 정 그러면 다른 집으로 가시죠.”주인이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아, 뭐 그럴 것까지는 없고, 우리 와이프 먹을 것은 기름을 새 걸로 바꿔서 튀겨 주십시오.”하준은 주인이 직접 기름을 다시 바꾸는 것을 확인했다.“두 마리 주문하셨던데, 아주 두 번째 것도 시름을 또 갈아서 튀겨 드릴까?”주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물었다.“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 먹을 것은 아까 버린 기름에 다시 튀겨서 줘도 상관없습니다.”“……”‘뭐야, 이거? 정신이 나갔나?’하준은 그제야 가뿐한 기분으로 침착하게 테이블로 돌아왔다.“자기야, 내가 자기 먹을 치킨은 새 기름에 튀겨 달라고 했어. 아주 맛있을 거야.”너무 어이가 없어서 여름은 헛웃음이 나왔다.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둥이들아, 이제 다 너희들 덕분이네.”“……”최양하는 ‘킥킥’ 웃었다.“아빠가 어떤지는 몰라도 우리 조카들, 삼촌이 많이 예뻐해 줄게.”“최양하, 넌 가만있어. 내가 지금 할 말 많은데도 꾹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하준이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제가 뭘요? 솔직히 옛 연인들이 오밤중에 집에는 안 가고 술집 룸에 들어가서, 뭐? 치료? 하하하! 난 그런 치료는 보도 듣고 못 했네. 형님, 조심하시라고요.”최양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넌 아직도 그 소리냐? 의사마다 다 자기만의 치료 방식이 있는 거야.”최하준이 짜증스럽게 말을 받았다.“좋아요. 형님은 당당한지도 모르지. 하지만 백지안도 형님에게 100% 아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최양하가 어깨를 으쓱했다.“예전 같았으면 나도 이런 소리 안 해요. 네, 나도 쓰레기였으니까.하지만 난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면 다른 여자들하고는 무조건 거리를 둘
하준은 짜증스러운 듯 입술을 핥았다.“네가 좀 잘 돌봐 줘.”통화가 끝나자 여름이 하준을 쳐다보았다.“왜요? 백지안 사고 났대요?”“들렸어?”하준의 눈이 당황한 듯 커졌다.‘아주 작은 소리로 통화했는데 들렸단 말이야.’‘들리기는 개뿔, 그냥 다 때려 맞춘 거지.역시나 백지안 만만치 않군.’여름이 답했다.“하, 백지안이 사고 났다고 송영식이 전화한 거 아녜요? 안 봐도 뻔하지. 송영식은 당신이 백지안을 데려다주지 않았어 사고 났다면서 백지안은 또 왜 다 젖었냐고 당신한테 한 소리 했겠지. 하지만 백지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송영식에게 한마디도 안 했을 테고.”“……”하준은 깜짝 놀랐다. 여름이 자기 전화기에 도청기라도 달아놓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어떻게 알았어?”여름의 양쪽 입꼬리가 축 내려갔다.‘뭐야, 다 맞췄어?’“다 예전에 강여경이 하던 짓이잖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하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여름은 어깨를 으쓱했다.“첫째, 사고로 최하준에게 깊은 자책감을 심어준다. 둘째, 송영식에게 왜 내가 술을 부었는지 말하지 않음으로서 최하준에게 자신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한다. 이게 다 그런 애들이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에요.”하준의 미간이 더 찌푸져졌다.“지안이를 안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자기가 지안이를 잘 몰라서 그래….”“됐어요. 그 사람이 착하다고 쳐요. 당신은 십수 년을 알았고 나는 어젯밤 처음 만났으니까. 그렇게 마음에 품도 못 잊던 첫사랑인데 그런 소리 들으면 당연히 기분 별로겠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하지만 내 눈에 백지안은 내 남편 빼앗아 가서 내 아이의 가정을 망치려는 사람으로 밖에는 안 보여요.”“왜 이렇게까지 날 안 믿어 주는 거야?”하준은 조금 화가 난 듯했다.“당신에게는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이나?”“믿음은 상대가 주는 거죠. 당신이 나에게 뭘 보여줬는데요? 지다빈 가니까 지안 온 거밖에 안 보이는데?”여름은 참지 못하고 계속했다
“내 몸에 무슨 흔적이라도 남아있는지 보라고. 난 정말 결백해.”하준이 팔을 활짝 벌리고 여름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여름은 도저히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하준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뭐야, 망나니같이. 빨리 들어가요.”“여보, 울지마. 내가 죽일 놈이야. 잘못했어.”하준은 그 틈에 여름을 품에 감아 안더니 얼굴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난 당신한테만 망나니이고 싶은데.”“아, 진짜. 당신 이러는 거 싫어!”여름이 손을 들여 하준의 어깨를 때렸다. 불안감을 해소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속상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허구한 날 날 비난하고 욕을 쏟아내다가 갑자기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대해주고! 앞으로는 백지안도 만나지 마!”“자기야, 그건 안 되지.”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지금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백지안밖에 없어. 내가 이 젊은 나이에 당신이랑 우리 아가들을 못 알아봐도 괜찮겠어?”여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당신이랑 그 사람이 둘만의 세계에 있는 거, 난 싫단 말이야. 정 그러면… 집으로 와서 치료하라고 해요. 내가 밖에서 지켜볼 거야.”하준이 여름이 얼굴을 쓰다듬었다.“이제 보니 우리 와이프가 이렇게 엄한 분이셨어. 전에는 내가 왜 몰랐을까?”여름이 하준을 노려봤다.“잘 들어요. 아기만 아니었으면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할 이유도 없어.”“무슨 뜻이야?”하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기 때문에 나랑 산다는 말이야?”“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 보라고. 지다빈을 곁에 두더니 이제는 백지안이라니. 나도 이제 지쳤어. 얼마나 더 당신에 대한 애정을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여름이 진짜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준은 은근히 씁쓸했다.하준도 지안이 자신을 치료할 정신과 의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러나 정말이지 백지안과 다시 합칠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우리 자기, 난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여름은 이미 침대에 누워있
“그리고 이제 치료받을 때가 아니면 백지안하고 따로 만나지 말아요. 당신 친구들이 백지안이랑 사이가 워낙 좋아서 종종 만난다는 건 알겠는데 다음에 넷이 만날 일이 생기면 날 데리고 가요.”여름은 작은 새처럼 하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하준은 한동안 여름이 이렇게 먼저 사랑스럽고 따스하게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마음이 확 약해졌다.“하지만 걔들이….”“날 안 좋아하는 건 알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내 남편을 다른 여가자 빼앗아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다 참을 수 있어.”여름이 고개를 들더니 그 커다랗고 사랑스러운 눈을 깜빡였다.“누가 우리 남편 이렇게 잘 생기래? 사랑스럽게!”“우리 자기, 난 자기 말만 들을게.”하준이 시선이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고개를 숙여 여름의 입술을 키스로 눌렀다.‘난 아무래도 이 자그마한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것 같아. 이렇게 빠졌는데 내가 백지안이랑 뭘 어쩐다고? 뭐, 상관없어 여름이가 기분만 좋다면 다 좋아. 출근하고 싶으면 해야지, 암.’----오전 8시 40분.하준은 여름이 허리에 팔을 감고 식당으로 들어왔다.여름의 작은 입술과 볼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장춘자는 경험이 풍부한 노인이었다. 한눈에 아침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안심이 되면서도 노파심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보기 좋구나. 그래야 부부 같지.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의사가 3개월 되기 전에는….”“할머니, 괜찮습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저희도 다 압니다. 애도 아니고.”할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름은 어쩔 줄 모르고 바닥만 뚫어져라 내려다봤다.한쪽에서 식사를 하던 최양하가 혀를 찼다.‘어젯밤에는 그 난리를 치더니 오늘은 또 뭔 깨를 볶고 이래?최하준이 여자를 구슬리는 기술이 좋은 건지, 강여름이 남자 다루는 솜씨가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아주 천생연분이다, 천생연분이야.’“아 참, 어제 셋이 같이 돌아왔다면서?”최대범이 갑자기 물었
최대점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전에 백지안을 본 적이 있었지만 여름처럼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다.“세상에 정신과 의사가 없어서 걔를 불러다가 치료를 하냐? 당장 의사 교체해!”장춘자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래! 전 여친에게 치료를 받다니 네 와이프 기분은 생각해 봤니?”여름이 한숨을 쉬었다.‘할아버지랑 할머니는 백지안을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나 보네.’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주혁이가 그러는데 지금 최고의 정신과 의사래요. 세계 최고라는 정신과 의사를 초빙해 올 때만 해도 그게 백지안인지 몰랐어요.”최대범은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하지만 행실 조심하고! 난 네가 네 에미가 했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구나.”“저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출근길에 하준은 다음 치료 일정을 물으려고 백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럴 줄 알았지. 너희 집에 가면 가는 건데,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날 워낙 안 좋아하시잖아, 그래서….”“이미 말씀드렸어. 다들 상황은 대충 이해해 주셨어.”“그럼 됐어.”백지안이 신음했다.“그런데 너한테는 내가 솔직히 말할게. 장소가 바뀌니까 원래 하려고 했던 치료 프로세스를 다시 수정해야겠어. 아마 예전처럼 회복 속도가 빠르진 못할 거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하준은 살짝 찡그렸다. 물론 빨리 상태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백지안과 단둘이만 있는 상황을 여름이 워낙 신경 쓰여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래. 아, 어젯밤에는 괜찮았어? 왜 차가 없다고 말 안 했냐? 기사 보내서 태워 주면 되는데.”“됐어. 어젯밤 같은 상황에서는 네가 나를 잘 챙겨줄수록 네 와이프는 오해하게 되어 있어.”백지안이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난 네가 어렵게 찾은 행복을 깰 생각은 없어.”“……”하준은 미간을 꾹 눌렀다.“지안아, 너도 네 행복을 찾아야지. 너와 나는 인연이 못 되었지만 사실 네 곁을 내내 지켜주는 사람 있잖아?”“혹시… 영수 말하는 거야?”백지안
“아, 대표님. 전에 영하 쪽하고도 꽤 가깝게 지내셨잖습니까? 이번에 새 회장이 부임했던데 축하 전화라도 한 번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오 사장이 말했다.여름은 흠칫했다.“누군데요?”“백윤택이죠. 백현수와 전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입니다. 그다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FTT에서 바로 반도체 공급에 동의도 했다고 합니다."여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백윤택 같은 인간쓰레기가 소영이를 대신하다니.십중팔구 뒤에서 백지안하고 최하준의 입김이 적잖이 작용한 거겠지.’ 전 나랑 소영이가 그렇게 애원해도 영하에 반도체를 공급해주지 않더니 백지안이 돌아오고 백윤택이 회장이 되고 나니 반도체를 넣어주다니.최하준, 백지안하고 재결합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백지안의 자리가 있는 거야.애만 아니었으면 백지안의 자리가 나보다 훨씬 더 크겠지.’여름은 한숨을 쉬었다.‘릴랙스~ 릴랙스~ 아기를 위해서 감정 조절해야 해.’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여하간 LOVE’로부터 톡이 들어왔다.-자기야, 출근 첫날인데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배 안 고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내가 상혁이 편에 보낼게.‘젠장, 챙겨주는 척하지 마! 이 나쁜…..’여름은 휴대전화를 던져 버렸다.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10분쯤 지나자 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우리 자기, 왜 톡을 보고도 답이 없어?”“답장하기 싫어서요.”여름도 계속 얌전한 역할로 남고 싶었지만 너무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왜 그래?”하준은 어리둥절했다.“누가 우리 자기를 짜증 나게 했어?”“최하준이요.”여름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왜 백윤택을 영하 회장 자리에 앉혔어요? 전에 술집에서 날 그렇게 모욕한 것도 알고, 그 인간이 한 짓거리 때문에 난 죽을 뻔하기도 했는데. 또 백지안 한 마디에 넘어가서 그 인간쓰레기가 무슨 짓을 해도 무조건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 전에 다시는 백윤택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나하고 약속했잖아요?”하준은 머리가 아팠다.“내
이렇게 간절하게 서경주를 마주하고 싶을 때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서경주가 깨어난다면 최소한 기댈 피붙이가 하나는 생기는 셈이었다.“아빠, 얼른 일어나세요. 저 요즘 너무 힘들어요. 보고 싶어요.”눈물 한 방울이 서경주의 손등에 떨어졌다. 여름은 이때 서경주의 손이 가늘게 흔들린 것을 보지 못했다.그다음 여름은 백현수의 병실로 갔다.막 들어서는데 백현수가 힘겹게 허리를 숙여 소변통을 집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제가 도와드릴 게요.”여름이 급히 다가갔다.“저 소영이 친구예요.”“고맙구려.”백현수가 미안한 듯 답했다.잠시 후 여름이 화장실에 가서 소변 통을 따르며 물었다.“왜 혼자 계세요? 어머님이나 간병인은요?”“간병인이 오늘 안 왔어. 아내는 아침에 뭐 챙길 게 있다고 집에 가더니 안 오네. 이제 나더러 동성으로 가서 치료를 하자면서 짐 챙겨야 한다더니 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네.”백현수는 약간 초조해 보였다.“내가 꼴이 이래가지고 가보지도 못하고, 안 그랬으면 벌써 내가 가봤을 텐데. 아까 윤서가 왔길래 집에 좀 가 봐달라고 했지.”여름은 불현듯 그날 소영이가 최대한 빨리 부모님을 서울에서 다른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 떠오르면서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떠올랐다.“아들도 있잖아요? 그리고 백지안도 있고? 그 사람은 돌아왔는데 왜 아버님을 보러 오지도 않나요?”“지안이?”백현수가 깜짝 놀랐다.“걔는 죽었어….”“아직 모르셨군요. 안 죽었어요. 전 만나기도 했는걸요.”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가 입원한 지가 며칠인데 지다빈의 장례식에 갈 시간은 있으면서 가지 아버지 문병은 오지도 않다니, 아무리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고 해도 이런 법은 없었다.“난 몰랐네.”백현수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뭐, 그 두 녀석은 잘못 키웠지. 그래도 내가 애진작에 우리 소영이랑 화정이만이 내가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봤기 망정이지. 그런데 우리 소영이가….”백현수가 말하면서 눈물을 보였다.“그날 막 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