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나가고 나서 하준은 피곤한 듯 병상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마지막으로 여름을 이렇게 가만히 들여다본 게 언제였더라….’요즘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각을 세웠었다.가만히 여름을 보던 하준은 그제야 여름이 매우 마르고 초췌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임신하면 몸무게가 느는 게 정상 아닌가?’내내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던 차윤이 한참을 망설이가 결국 말했다.“솔직히 제 생각에는 요즘 사모님하고 말다툼하실 때 회장님이 좀 심하시긴 했습….”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하준이 차윤을 싸늘하게 노려봤다.“그게… 사모님이 괜히 친구를 만났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못 만나게 하고 싶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계속 별장 안에만 갇혀 계셨으니 사모님이 얼마나 무료하고 외로우셨겠습니까? 회장님은 집에도 안 오시지, 전화도 한 통 없으시지…. 사모님은 매일 그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보기 어찌나 불쌍하던지….”‘불쌍해?’하준은 속이 쓰렸다.‘천하의 최하준 와이프가 불쌍하다는 말을 듣다니….’“말만 꺼내면 백소영 일로 싸우려고 드니 전화를 할 수가 있어야지.”“하지만 사모님은 회장님이 그런 마음을 정확하게 모르시잖습니까? 사모님은 회장님이 자신을 싫어해서 전화도 안 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차윤이 작은 소리로 전했다.하준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20여 분이 지나서 여름이 서서히 눈을 떴다.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의식적으로 배로 손을 가져갔다.‘우리 아기가….’“걱정하지 마. 아기는 무사해.”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최하준이 왜 또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여름은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꿈이 아닌가 싶었다.“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하준이 가볍게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여름의 손을 잡아 입가에 가져갔다.“자기야, 내가 다 잘못했어. 당신은 임신했는데 당신 곁에 있어 주지도 않고, 내가 조금 물러서면 될 걸 사사건건 당신이랑 싸우고…. 하지만 나도 일부
“요즘 출근 안 합니다.”하준이 대답했다.최대범이 듣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아직까지 추동현을 감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정말 걔 때문에 화가 나서 죽겠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최란은 바보가 아니다. 그저 너무 추동현을 믿고 사랑했을 뿐.“와, 식사하시네요, 할아버지, 할머니? 어제 제가 호텔에서 누굴 봤는지 아세요?”최윤형과 최양하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내가 백….”그러나 테이블에 앉은 여름과 하준을 보더니 최윤형이 귀신이라도 본 듯 얼어붙었다.‘요즘 집에 안 오더니, 어쩐 일로 집에 있어?’최양하는 그저 평온하게 최하준을 흘깃 보더니 최대범 옆에 앉았다.“누굴 만났는데?”장춘자가 최윤형에게 물었다.최윤형은 깊이 한숨을 쉬더니 답했다.“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배고프다. 이모님, 저도 밥 주세요.”최대범이 최윤형을 노려보더니 흥 했다.“온종일 술집이나 돌아다니고, 넌 나날이 자회사 실적 떨어지는 게 안 보이니? 너희 둘은 대체 언제나 하준이를 본받을래? 하준이가 FTT 전자 키우는 거 봐라.”최양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아버지 눈에는 최하준밖에 안 보인다니까.’그러나 최윤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했다.“할아버지, 누구나가 다 그런 별종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부자가 몇이나 나오겠어요?”“하긴, 그도 그렇네.”장춘자가 한숨을 쉬더니 여름의 배를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었다.“그래도 여름이 배 속에 아가는 제 아빠의 좋은 유전자를 받았겠지.”하준은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물려받던 말던 상관 없습니다. 그저 아이가 편히 살면 좋겠습니다.”“그건 그렇네.”이쪽을 흘깃 보는 최양하의 마음이 뭐가 복잡해 보였다.“아 참, 얘, 양하야. 하준이는 벌써 애까지 생겼는데 넌 대체 언제 여자친구라도 하나 생기니? 이제 슬슬 결혼을 해야지”장춘자가 갑자기 화살의 방향을 다른 손자에게로 향했다.“요즘 보니까 노 회장 네 딸이….”
여름은 정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진숙이 담요를 가지고 나와 어깨에 덮어주었다.여름이 앉아 있는 자리는 서명산의 경치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밤에 부는 바람 속에서 은은하게 초여름의 냄새가 났다.“임신 축하합니다.”최양하가 천천히 걸어왔다.여름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아이고, 아직도 화내시는 겁니까? 이제 FTT의 사모님이 되셨는데.”최양하가 여름 곁에 와서 앉았다.“그래도 저한테 고맙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아직 빛도 못 보는 신세일 수도 있었다고요.”여름은 아무 말 없이 최양하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인간이 다 있나, 그래?’그러나 예전에 최양하가 저질렀던 짓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는 여름이 신경 써야 할 인간이 정말이지 너무 많았다.그래도 여름의 얼굴에 흉터를 보니 최양하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다.“아, 뭐…. 그래도 제가 뭐 하나 말씀은 드리려고요. 조심하세요.”“뭘요?”“최하준말입니다. 와이프가 임신했을 때 밖에서 딴짓하는 남편이 많다잖습니까? 그러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세요. 아하핫!”최양하가 농담하듯 웃었다.“……”“저기…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긴 바람길이라 바람이 세니 너무 오래 앉아 계시지 마세요.”여름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그따위 소리를 하려고 여기까지 나왔어?’생각해 보니 오늘 조심하라고 경고한 사람이 두 번째였다.‘소영이도 조심하라고 그러고, 대체 누굴 조심하라는 거야?’여름은 알 수가 없었다.“쟤가 당신한테는 무슨 일이지?”최하준은 카디건을 하나 들고나오다가 멀어져 가는 최양하의 뒷모습을 보고 미간에 깊게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별말 안 했어요.”여름은 얼굴을 피했다.“걔가 뭐라고 했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쟤는 당신이 내 약점인 걸 알고 있어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그러는 거야.”하준이 말을 마치더니 공주님 안기로 여름을 안아 올렸다.“한참 앉아 있었네 이제 들어 갑시다.
30분쯤 영화를 보고 나자 하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하준이 전화를 들다 여름은 흘끗 보았다.‘나드쟈’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나가서 좀 받고 올게.”하준은 휴대 전화를 들고 나가서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이제는 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하는 사이가 됐어?”백지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그런 게 아니라….”백지안이 ‘푸흣’하고 웃었다.“농담이야, 농담. 낮에 의료 기록을 좀 더 살펴보고 널 위한 치료 솔루션을 만들어 봤어. 오늘 밤에 바로 시작하자.”“오늘?”하준이 흠칫했다.“응. 일단 30단계로 준비했거든. 타임테이블에 따라서 진행되는데 밤에 좀 스트레스도 덜하고 하니까. 내가 보니까 넌 이 시간이 제일 이완되는 시간대더라고. 그래서 제일 순수한 감정이 나오기 좋은 시간이거든. 그리고 네 증상은 미루면 미룰수록 치료하기 힘들어져. 오늘 바로 시작하자.”하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미안, 오늘은 내가 일이 좀 있어서….”“아, 그렇구나. 와이프랑 있어 줘야 하나 보지? 미안해….”백지안이 갑자기 당황했다.“내가 깜빡했다. 너 이제 유부남이지.”하준이 답했다.“… 미안. 내일 저녁에 하자.”“그래.”백지안이 쓴웃음을 지었다.“네 와이프가 정말 부럽다.”하준은 흠칫하더니 복잡한 얼굴이 됐다. 백지안은 전에 자신의 아내가 될 뻔한 사람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둘은 헤어지게 된 것이다.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백지안이 먼저 ‘안녕!’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준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영상실로 들어갔다.여름이 고개를 들더니 하준을 쳐다봤다.“드디어 그 나드쟈라는 의사를 찾았군요?”“응, 치료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하준이 여름을 안았다.“여자예요?”여름이 망설이다가 물었다.“또 질투하는 거야?”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짝 놀리듯 물었다.“자기야, 날 믿어야 해. 내 마음속에는 이제 당신이랑 아기밖에 없어.”그렇게 말하더니 하준
이진숙은 여름이 한결 좋아진 것을 보더니 웃으며 놀렸다.“역시나 회장님이 같이 계셔줘야 되겠네요.”여름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줏대 없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하준이 어리석게 눈이 멀어서 백소영과 임윤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은 미우면서도, 임신한 상황에서 하준이 자신의 곁을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저녁이 되자 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은 야근이야. 저녁 먹으러 못 갈 것 같네. 이따가 접대도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그냥 시내에서 하루 자고 들어갈게.”“그래요.”전화를 끊고 나자 여름은 갑자기 최양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여름은 자신이 최양하 따위가 했던 말조차 신경이 쓰이는 것이 짜증 나서 이마를 문질렀다.‘지다빈도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또 백지안을 닮은 사람을 만났을 리도 없잖아.’저녁 8시, 여름이 샤워를 하러 가려는데 휴대 전화가 ‘띠링’하고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서 사진이 와 있었다.눌러보니 사진 속에는 최하준과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함께 호텔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자는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윤기 나는 긴 머리가 어깨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완벽한 모습이었다.그러나 더욱 여름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여자와 양유진이 전에 보여준 적이 있었던 사진 속 인물이 너무나 똑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지다빈이 그 사진의 인물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목구비가 사진 속 여자처럼 또렷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었다.‘하지만 이 사람은 완전히 백지안과 똑같이 생겼어. 아니, 완전히 백지안 본인인데?게다가 여자를 보는 최하준의 눈빛이 너무나 다정하잖아!’여름은 사진이 찍힌 날짜를 보았다. 어제 아침 9시였다.여름이 차를 타고 법원에 나가던 시간이었다.그 시간에 최하준과 그 여자는 호텔에 있었다는 말이었다.‘대체 누구야?’발밑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지난번에 지다빈이 백지안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백지안, 최하준이 꿈결에서도 부르던 그 이름.백지안은 보통이 아니라고, 살아 있었으면 여름은 상대가 안 될 거라고 했던 소영의 말이 기억났다.‘아, 어제 소영이가 ‘패시연 조심해.’라고 했었지?패, 시, 연…백, 지, 안?’머리가 띵했다.여름은 놀라서 온몸이 굳어졌다.‘그래, ‘백지안 조심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그러니까 소영이는 백지안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소영이는 알고 있었어.그리고 최양하도 어제 갑자기 조심하라고 했었지?다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최하준은 다시 백지안의 곁으로 돌아갈까?’갑자기 심장이 확 조여드는 듯했다. 손으로 가만히 배를 만졌다.‘안 되겠어. 최하준이 전에는 어떤 인간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내 배 속에 있는 아가들의 아빠라고! 애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다 있는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여름이 휴대 전화를 들어 바로 최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되지 않습니다…”‘뭘 하는 거지? 뭘 하고 있길래 전화를 꺼 놔?설마 백지안과 함께 있는 건 아니겠지?’여름의 망상은 이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이번에는 상혁에게로 걸어보았다.“하준 씨 전화가 꺼져 있어서요.”회사에서 야근을 하던 상혁은 깜짝 놀랐다.“회, 회장님은 지금 심리 치료 중이시라 전화를 못 받으십니다. 의사가 치료에 방해된다고 꺼놓으라고 했거든요.”“치료라고요? 그 나드쟈라는 의사 말이에요?”“네. 선생님께서 치료를 너무 미루면 점점 더 치료하기 어려워진다고 빨리빨리 치료를 진행하고 싶어 하시더라고요.”상혁은 조심해서 말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하준의 병이 빨리 치료되기도 바랐지만 그 과정에서 나드쟈가 죽었다던 백지안이라는 사실을 사모님이 눈치라도 챘다가는 큰일이었다.여름은 잠시 아무 말 없더니 다시 물었다.“오늘 밤에 새 아파트에서 잔다고 했죠?”“네, 그렇습니다.”전화를 내려놓고 여름은 당장 새 아파트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십중팔구 누군가가 여
백지안은 하준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아무리 어두운 곳에서 봐도 저 콧날과 턱선은 여전히 또렷하구나. 이 남자는 아무래도 내가 다시 찾아와야겠어.’“준,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 영하를 이제 좀 풀어줘.”“왜? 네가 이제 회사 가져 가게?”“그런 건 아니지. 난 이제 내 일하기도 바쁜데 회사 관리할 시간이 어디 있어?”백지안이 쓴웃음을 지었다.“우리 아빠 심장병도 재발했는데 소영이는 감옥까지 갔잖니? 그래도 우리 아빠가 회사를 엄청 아끼셨는데 회사까지 없어지면 정말 무너지실 것 같아서 그래.”하준의 눈에 따스함이 스며들었다.“너 외국에서 그 고생을 하는 동안 네 아버지가 널 그렇게 모질게 대했는데도 넌 참 여전하구나.”“아버지가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야 아버지의 일이고, 난 그냥 딸로서 내가 할 도리를 해서 내 양심에 걸리지만 않으면 돼.”백지안이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어른이 되었는데도 오빠가 아직 저러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좀 그래서, 내가 예전처럼 그러고 사고 치지 않게 딱 잡아서 사람 좀 만들어 보게.”백윤택 이야기가 나오니 하준은 혐오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그래, 인간 만들긴 해야지.”백지안이 갑자기 하준을 보며 웃었다.“난 한참은 설득해야 할 줄 알았는데 이거 너무 쉽게 넘어 오는걸?”“난 너에게 빚진 게 있잖아.”하준이 말했다.“없어. 넌 나한테 빚 같은 거 진 적 없어.”백지안이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30분 뒤, 하준과 백지안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컴컴한 펍 구석에서 양유진이 걸어 나오더니 손에 든 사진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오후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양유진에게 저녁에 이 펍으로 오라는 수신자 불명의 문자가 왔었다.“강여름, 보아하니 이제 네 처지가 점점 더 위태롭게 되는 것 같구나.”양유진은 톡으로 여름에게 사진을 보냈다.-저녁에 친구랑 ‘Ever After’라는 펍에서 술 한잔하다가 이 둘 사람이 펍 2층의 룸으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여름 씨
최양하는 이마를 문질렀다.‘하아, 가끔 여자들 육감은 정말 무서울 때가 있다니까.’“실은 저도 형님이랑 송영식 일행이 요즘 매일 백지안을 만난다고 누구한테 들었어요. 다른 건 저도 잘 모릅니다.”“옛날 애인을 만나서 피하지 않고 계속 만나려고 든다면 바람 나는 건 시간 문제 아닌가요?”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쓰렸다.“난 우리 쌍둥이가 아빠 없이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알겠습니다.”최양하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40분 뒤, 차는 펍 주차장에 멈췄다.여름이 차문을 열고 나왔다.“잠깐만 기다리세요.”최양하는 아무래도 배 속의 아기가 걱정이 되서 급히 따라왔다.여름은 2층으로 올라가서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네 번째 방문을 열자 소파 위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훤칠한 키에 그 이목구비는 최하준이었다. 하준은 얼굴을 온통 백지안의 가슴에 묻고 백지안은 하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문이 벌컥 열리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가만히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여름은 완전히 속이 울렁거렸다.‘더러워. 토하고 싶어!’여름이 사랑하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의 몸에 안겨 있었다.여름은 하준이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백지안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하준이 난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아이들이 있잖아?’가슴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여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백지안이 급히 하준을 밀쳤다.“준 와이프예요? 이건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여름은 테이블에 있던 술잔을 들어서 백지안의 얼굴에 부었다.“꺄악!”백지안이 비명을 질렀다.소파에 기대어 있던 하준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하준은 가장 괴로웠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돌리고 있다가 갑자기 비명소리에 깬 것이었다.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지안의 머리에서부터 옷과 몸이 온통 젖어 있었다.그리고 그 앞에는 완전히 분노에 찬 여름이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하준이 벌떡 일어서서 여름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