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혁은 여름을 한 번 쳐다보더니 하준에게 물었다.“다빈이 장례식이 일요일인데, 갈 거야?”“……”“가자. 네가 안 가면 영식이가 또 난리 날 거야.”이주혁은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간다….”“기다려요.”여름이 일어섰다.“보여드릴 게 있어요”여름이 신아영의 통화기록을 둘에게 보여주었다.“윤서가 동성의 병원에서 지다빈과 강태환의 친자 감별 결과를 받던 날, 윤서가 신아영이라는 애랑 만났어요. 걔가 강여경이랑 아는 사이거든요. 윤서가 결과지를 받아왔을 때 누군가가 서울에서 신아영에게 전화를 걸었어요….”“무슨 뜻입니까?”이주혁은 안색이 변해서 말을 끊었다.“그러니까, 신아영이 전화를 건 상대는 강여경일 가능성이 있고, 강여경은 내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강태환과 친자 감별을 해서 자기가 지다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준 씨가 잡아들이려고 하니까 본인은 빠져나가고 진짜 지다빈을 잡히게 만든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가서 이 번호를 한 번 추적….”“이 일에 더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하준이 여름의 손을 놓았다. 서리처럼 찬 기운이 눈에 어렸다.여름은 이를 물었다.“하지만 이번 사건은 정말 수상하다고요. 가서 조금만 파보면….”“그만, 이 일은 이제 손 떼세요. 전에 하준이에게 이 일을 조사해 보라고 해서 하준이가 지다빈을 잡아 놓는 바람에 멀쩡하게 살아 있던 사람 생목숨만 잃었잖습니까?”이주혁이 짜증스럽게 말을 끊었다.그렇다. 이전까지 그래도 이주혁에게 여름의 이미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이번에 지다빈의 죽음으로 하준과 친구들은 친구를 잃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작은 의혹이라도 남겼다가 진정한 막후의 검은 손이 이대로 빠져나가게 될지 몰라요. 소영이도 사람인데 걔가 모함에 빠진 거라면 감옥에서 일생을 망치게 되는 거잖아요. 전에 사귄 적도 있는 사이면서….”“난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 그 독한 여자랑 사귄 겁니다.”이주혁이 냉정하게 말했다.“걔 악독한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요.”
장례식장.우울한 분위기에서 장례식이 거행 중이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하준과 이주혁이 차에서 내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검은 세단에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이번 사태에서 목숨을 구한 강여경이었다.“훗, 내가 미리 알아서 진짜 지다빈하고 바꿔치기했기 망정이지. 너희들은 내가 가짜 지다빈이었다는 건 꿈에도 모를 거다.”강여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최하준, 강여름, 너희들이 날 괴롭힌 만큼 모두 되갚아 주겠어.”“잘했어.”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이제 지다빈이 죽고 백소영이 감옥에 가면서 최하준, 강여름, 송영식 사이에 틈이 생겼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결과가 나왔군. 아주 만족스러워.”강여경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하지만 이 얼굴은 이제 못쓰게 되었네…”“일단 해외로 나가. 나중에 당신을 쓸 데가 또 있을 거야.”남자가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울리자 기사가 시동을 걸었다.“왜 그래?”이주혁이 물었다.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누가 몰래 우릴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총수인데 언제 어디서든 누가 훔쳐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냐?”“… 들어가자.”하준이 돌아섰다.장례식장에 들어서서 향을 피우던 송영식과 마주쳤다. 송영식이 싸늘하게 하준을 한번 노려보더니 시선을 피했다.이주혁은 다가가 인사말을 건네고 하준은 조용히 다가가 묵념했다.지다빈의 어머니가 대놓고 무례하게 말했다.“최 회장은 향 피웠으면 가요.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지영수도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는 참에 밖에서 들어오던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손에 들고 있던 초를 떨어트리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지…지안이? 백지안이 돌아왔어….”“무슨 헛소리니? 지안이 죽은 지가 언제인데?”지다빈의 어머니가 돌아보다가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송영식, 이주혁, 최하준 세 사람도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검은 원피스는 입구에서 걸어 들어오
백지안은 마음이 괴로운 듯 입술을 꽉 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만하자, 영식아. 지안이도 무슨 고충이 있겠지.”이주혁이 송영식의 말을 끊었다.송영식은 물끄러미 백지안을 바라보더니 결국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돌아왔어?”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익숙한 얼굴을 보니 백지안은 얼굴이 울컥했다. 백지안은 서서히 시선을 그 뒤의 영정사진으로 옮겼다.“다빈이가 죽을 줄은 몰랐거든. 내가 가장 아끼던 사촌 동생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다들 할 말이 없었다.지영수가 갑자기 다가와 백지안을 안더니 대성통곡했다.“지안아! 왜 이제서야 왔니? 다빈이가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삼촌, 지안이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어요?”백지안이 울먹이며 물었다.그 말을 듣더니 지영수가 하준을 노려보았다.“다 저 인간의 와이프와 백소영이 우리 애를 모함해서 생긴 일이다.”백지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을 깜빡이며 하준을 돌아보았다.“하준아….”하준은 백지안의 눈을 피했다.“백소영이….”“네 와이프라고 강여름 감싸는 것도 이제 작작 해!”송영식이 화를 냈다.“강여름은 너무 못된 인간이라 너에게는 안 어울린다고 내가 한두 번 얘기했냐? 이제 지안이도 돌아왔고, 이제 걔랑은 헤어져.”하준의 미간에 세로줄이 생겼다. 막 한 소리 하려는데 백지안이 급히 끼어들었다.“영식아, 그런 소리 그만해. 어떻게 결혼을 한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이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이제 나하고 하준이는 이미 끝난 사이야.”“끝나긴 뭐가 끝나? 하준이 마음속에는 여전히 너밖에 없는데. 설마 너 이제 하준이를 사랑하지 않…”“됐어.”하준이 굳은 얼굴로 송영식의 말을 잘랐다.“지안이가 살아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난 이제 아내가 있는 사람이야.”“싸우지들 말고, 지안이가 돌아왔으니 기쁜 일이잖아. 밤에 우리 환영식하러 가야지.”이주혁이 말했다. “고마워,
백지안이 와인잔을 꽉 잡았다.“그렇지만 그런 생각해 본 적 있니? 젊은 여자가 납치되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술잔을 쥔 하준이 손이 떨렸다.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백지안을 쳐다봤다.“세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을게. 너무 힘드니까.”백지안은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당하고 또 당하고… 얼마나 당했는지 모르겠어. 한참 만에야 겨우 기회를 잡아서 탈출했지만 난… 난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비자도 취소되고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방법이 없었어. 식구들에게 간신히 연락을 했었는데 식구들은 날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서 그냥 그대로 외국에서 사라졌으면 하더라고.”“너무 하잖아.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에게!”송영식이 벌떡 일어섰다.“하준이에게 연락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난 이미 하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백지안이 눈을 깜빡이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하준이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인데 나는… 그런 몸이 되어버려서 하준이가 날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했어.”하준은 두 눈을 감았다. 심장이 기름에 덴 것 같았다.자신이 백지안을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지안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제는 여름이 아이를 가졌고 하준의 마음도 달라졌다.“됐어. 거기까지만 얘기하자.”이주혁이 손수건을 건넸다.송영식은 심장을 에는 것 같았다.“지안아, 걱정하지 마. 네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널 버리지 않아. 넌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순수한 소녀야.”“고맙다.”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백지안이 웃었다.“사실은 이번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돌아왔어.”그러더니 백지안은 명함을 석 장 내밀었다.하준은 백지안의 명함을 받아 들고 흠칫했다.“네가 그 글로벌한 명성을 떨친다는 정신의학 박사 나드쟈야?”“명성까지는 좀 과장이지만 이쪽 방면에서 나쁘진 않은 편이야.”백지안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최 회장.
나가서 누가 왔는지 자세히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백지안? 안 죽었어?”“그래. 안 죽었지. 돌아왔어.”백지안이 즐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 백소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런데 네가 이런 꼴일 줄은 몰랐다. 쯧쯧. 불쌍하게도.”“뭐 하려고 돌아왔어?”백소영은 혐오스럽다는 듯 백지안을 노려봤다.‘늘 이런 식이었어. 저 인간만 나타나면 내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고 다쳤다고.’백소영은 마침내 백지안에게 하늘의 심판이 내렸다고 생각했으나 그 인간이 다시 돌아왔을 줄이야….“난 그냥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되찾으러 왔어.”즐겁다는 듯 백지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네 엄마가 내 가족을 망가트렸잖아. 있지, 이번에는 네가 당할 차례야.”“뭘 어쩌려고 그래?”백소영이 분노에 찬 시선을 보냈다.“백지안, 우리 엄마는 한 번도 널 홀대한 적 없어. 언제나 나보다 너에게 잘해주셨다고.”“그저 다 우리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것뿐이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영하를 손에 넣었겠어? 너희 모녀가 아주 온갖 궁리를 다 한 거잖아? 하하, 이제 우리 아빠는 심장병이 도져서 혼수상태로 입원하셨으니, 연화정은 의지가지없게 되어 버렸지. 우리 엄마가 당했던 고생을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하나하나 맛보게 해줄 거야.”“네 엄마가 아빠한테 버림받은 건 네 엄마가 바람 나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녀…”“닥쳐!”백지안이 갑자기 소리 질러 말을 끊었다.“넌 그 꼬라지를 하고도 잘도 조잘거리네.”“백지안, 잘 들어. 우리 엄마를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가 죽어서라도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다.”백소영이 철장을 잡고 흔들며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백지안을 노려봤다.“아하하, 걱정하지 마. 죽어도 난 널 상대할 방법이 다 있거든.”백지안은 하찮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너랑 하준이 와이프랑 사이좋다며?”백소영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내가 돌아왔으니까 걘 꺼져야지.”백지안의 빨간 입꼬리가 의기양양하게 올라갔다.“꿈 깨시지. 최하준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내가 이것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절대!”----하준의 본가여름은 매일 새장에 갇힌 새처럼 지냈다.담장 안에서만 지내고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됐다.이미 일주일은 하준을 만나지도 못했다.‘나라 배 속의 쌍둥이는 이미 싹 잊었나 봐.’나날이 우울한 기분이 들어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장춘자와 최대범은 점점 초조해졌다.“하준이에게 전화 좀 걸어 봐.”저녁을 먹다가 장춘자가 집사에게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와이프랑 애를 이렇게 방치해서야 쓰나. 방을 따로 쓰라고 했지 와이프를 내팽개치라고 한 게 아닌데.”집사가 전화를 걸고 오더니 괴로운 얼굴을 했다.“야근이라고 합니다.”“아무리 야근을 해도 사람이 쉬는 시간도 있겠지. 이거 정말 너무 하는구먼.”최대범이 테이블을 탕하고 내리쳤다.“정말 바쁜가 보죠.”장춘자가 최대범에게 슬금슬금 눈짓을 해 보이더니 턱으로 여름을 가리켰다.최대범은 골치가 아팠다.‘아니, 제가 강여름 아니면 죽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와이프는 여기다 던져놓고 들여다 보지도 않다니, 마음이 바뀌었나.’최대범도 처음에는 여름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훌쩍 말라서 초췌해진 여름을 보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전화하실 것 없어요. 저희 싸웠거든요. 그래서 별로 제가 안 보고 싶은가 봐요.”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들었다.“그냥 여기 갇혀만 있으려니까 답답하긴 하네요. 내일 혹시 나가서 좀 친구랑 놀다 와도 될까요?”“…어, 그러렴. 하지만 진숙 이모랑 같이 나가거라.”장춘자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러나 다음 날 여름이 나가려고 했더니 차윤이 길을 막았다.“죄송합니다, 사모님. 회장님께서 나가지 못하시게 하라고 했습니다.”“날 연금하겠다는 건가요?”차윤을 보는 여름의 눈은 사뭇 실망에 차 있었다.‘아, 회장님은 정말 왜 이렇게 사모님께 잔인하게 이러실까….’차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오늘 백소
“아, 주변에 신맛 나는 원두 좋아하는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하준은 백지안의 맞은편에 앉다가 갑자기 집에 있는 사람이 생각났다. 여름은 달달한 맛을 좋아한다. 커피를 마셔도 꼭 캬라멜마끼아또를 찾고는 했다.백지안은 생각에 잠긴 하준을 보자 자신을 앞에 앉혀 두고도 정신을 팔다니 필시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백지안은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의료 기록을 덮으며 웃었다.“네 증상은 재발 없이 80% 치료할 자신 있어.”하준의 눈이 빛났다. 막 뭐라고 하려고 하는데 차윤에게서 전화가 왔다.“회장님, 사모님께서 법원에 가셨습니다.”하준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못 나가게 잘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칼을 들고 살기 싫다고 하시는 바람에….”차윤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했다.“아주 잘하는 짓들이다.”하준은 화가 나서 전화기를 집어 던질 뻔했다.‘아기까지 있는데 그런 식으로 협박을 한다고? 정말 아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어떻게 우리 쌍둥이보다 백소영이 더 소중할 수가 있지?”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하준이 벌떡 일어섰다.“치료는 내일 하자.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그래. 하지만 너무 미루면 안 돼. 늦어질수록 치료효과가 떨어지거든.”백지안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두 사람은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다른 쪽 복도에서 나오던 서유인이 두 사람의 옆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는 구석으로 피하더니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자기, 거기 숨어서 뭐 해?”추성호가 다가와 서유인의 허리를 안으며 물었다.“봐요, 이게 누군가.”서유인이 사진을 열어 보여주었다.“백지안, 안 죽었더라고요.”추성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확실히 백지안이네. 지다빈처럼 그냥 닮은 사람이 아니라.”“흥, 남자랑 여자가 아침 9시에 호텔 방에서 나왔는데 밤새 룸에서 뭘 했겠어요?”서유인은 강여름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신이 났다.“강여름이 이 사진을 보면 어떨까?”
‘내가 친자 감별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소영이가 누명을 쓰지도 않았을 텐데.’“너희들이 와줄 줄 몰랐다.”백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셋은 서로 친구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판에 와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우린 네가 안 그랬다는 걸 믿어.”임윤서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우리가 꼭 항소해 줄게. 그리고 네 부모님도 돌봐드리고.”“고맙다. 혹시 해줄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을 벗어나 줄래?”백소영이 미처 말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데려가려고 사람이 왔다.백소영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백지영 조심해….”그러나 이미 저만치 끌려가 버린 데다 백소영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못했기 때문에 여름은 그저 백소영의 입 모양을 간신히 읽을 뿐이었다.“뭐라는 거지? 나한테 뭘 조심하라는 것 같은데.”“그러게.”임윤서가 백소영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패..시…연 조심해?”“……”그러나 옆에서 연화정이 너무 울다가 기절을 할 지경이라 여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둘은 급히 연화정을 부축했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소영이가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은 있어요. 저희가 반드시 소영이 꺼내올게요. 1년으로 안 되면, 2년이고 3년이고 노력할 거예요.”“고맙구나.”연화정은 둘이 너무 고마웠다.“그런데요 어머님, 아버님하고 서둘러 서울을 떠나시는 게 좋겠어요.”여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아까 소영이가 저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소영이는 뭔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위험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연화정은 좀 망연자실했다.“우리 부부가 평생 누구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어쨌든 아까 소영이랑 얘기할 때 보니까 뭔가 다급해 보이더라고요.”임윤서도 덧붙였다.“어머님하고 아버님 동성으로 가세요. 저희 집이 거기에 있거든요. 저랑 오빠가 잘 모실게요.”“얘들아 정말 고맙다.”연화정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일단 가서 짐을 챙기세요.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