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앉읍시다.”최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여름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테이블에는 각종 과일과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여름은 앞에 놓인 잣을 몇 알 까다가 너무 귀찮아서 곧 포기해버렸다. 최하준이 그 모습을 보고는 대신 까서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그 세심한 배려에 여름은 마음속까지 달콤해지는 기분이었다.“여름 씨….”갑자기 양유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이 고개를 들어보니 흰색 바지에 남색 상의를 걸친 댄디한 모습의 양유진이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한 발짝 다가선 양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여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하준이 바로 그 손을 잡아 저지하더니 여름을 안으며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뭡니까?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남의 와이프에게 집적거리다니?” “최하준, 이제 옛날의 당신이 아닐 텐데. 내가 곧 여름 씨를 되찾아 올 거니까 두고 보시지. 여름 씨에게 당신은 어울리지 않아.”양유진은 이렇게 경고하고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름에게 말했다.“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여름 씨.”“여긴 어떻게 왔어요?”이 두 남자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여름은 화제를 돌리려 했다.“최근에 추신과 합작 건이 있어서요.”때마침, 추성호의 비서가 반갑게 걸어왔다.“양 회장님, 앞쪽에 자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여긴 VIP석이 아닙니다.”“그래요? 하지만 여기 최하준 회장이….” 양유진은 최하준에게 이를 갈아온 지 오래였다. 드디어 보복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회장은요, 무슨… 어디 우리 추 대표님 뒤꿈치나 따라오겠어요?”비서는 비웃으며 양유진을 데리고 앞으로 갔다.“여름 씨, 나랑 같이 안 갈래요?”양유진이 여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사람들 모두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얼굴도 다 망가진 여자를 두고 이렇게 잘생긴 남자 둘이 싸우고 있다니,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여름은 난감할 뿐이었다.“몇 번을 말합니까? 내 아내입니다.”하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
“난….”“들었습니까? 내 와이프가 가라잖습니까? 뭐 이렇게 얼굴이 두꺼워?”하준이 여름의 허리를 감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앉아요, 여보. 잣 까줄 테니 먹어요.”양유진이 하준의 품에 안긴 여름을 빤히 쳐다봤다. 눈 속에 어두운 기색이 스쳐가더니 보기 싫을 정도로 찡그린 얼굴로 돌아섰다.여름은 고개 들어 양유진의 뒷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정말이지 양유진이 하루빨리 자신을 놓아줬으면 했다.하준의 곁에 남기로 결심한 이상 여름은 더 이상 양유진과 함께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이제 여름과 하준은 이혼도 하지 않았으니 더욱 안 될 일이었다.“다른 남자 생각하지 말고 이거나 좀 먹어봐요.’하준이 여름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양유진은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닙니다.”“……”“오늘 이 약혼식에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은 다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서울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뒷배경도 없는 사람이 이런 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데다, VIP석이라니, 그렇게 간단할 것 같습니까?”여름은 말문이 막혔다.‘확실히 오늘 본 양유진의 모습은 사뭇 낯설었다.******약혼식이 끝난 뒤.벨레스에서 초대한 하객은 잔디밭으로 이동해 오후에는 댄스파티가 벌어질 예정이었다.이제 돌아가는 하객들이 이동하던 중 여름은 막 일어나다가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다.그리고 뚱뚱한 남자가 갑자기 돌아보더니 여름에게 욕을 퍼부었다.“이거 왜 남의 엉덩이에 손을 대고 지랄이야?”지난번에 FTT 자선의 밤에 여름에게 손댔던 구 이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뭐야? 어디서 남의 남편을 건드려? 감히 남의 남편을 꼬시려고 들어? 어디 너 죽고 나 죽자.”구 이사 곁에 있던 부인이 바로 나서며 여름을 밀쳤다.“거 손을 못쓰게 되고 싶어서 이러시나?”하준이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그 부인의 손목을 확 잡았다.막 자리를 뜨던 하객들이 고성에 구경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아니, 구 이사님, 무슨 일입니까?”추성호가 중재하고 나섰다.구
구 이사는 하준의 가족들이 정색하는 모습을 보니 전혀 하준을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뭐 별 건 없고, 내 손을 이 지경 만들어 놨으니 나도 당신 손 한 번 꺾으면 되지 않겠어? 그리고, 당신 마누라가 날 꼬드기려고 교양 없이 굴어서 우리 마누라가 화가 났으니까 뺨이나 한 대 맞으시던지.”여름이 그 말을 듣더니 웃었다.“내가 그쪽을 꼬드기려고 들었다고? 입으로 무슨 말을 못 해? 내가 그쪽에 손을 댔는지 안 댔는지는 여기 사방에 CCTV가 잔뜩 있으니까 확인해 보면 되겠죠.”구 이사가 버럭 화를 냈다.“무슨 소리야? 내가 너 같은 거에게 누명을 씌웠다 이건가?”“구 이사 같은 사람이 굳이 당신 같은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이유가 있나?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인정을 안 하다니 그냥 한 대 맞아도 싸지 싶은데.”도 대표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서유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얼른 사과 드려. 다음부터는 그런 짓 좀 그만하고.”여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알겠네. 오늘 다들 우리 부부를 손보려고 작정했군. 진상이 어떤지는 다들 관심 없었어.”“강여름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뭐 어쩔 수가 없군요.”추성호가 느긋하게 말을 받았다.“하지만 잘못했으면 응당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모든 시선이 최하준에게로 향했다.한 때 모두가 우러러보던 신과 같은 남자였다.그런 신 같은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지니 다들 몰려와서 한 번 밟아보며 남의 불행을 즐기려고 들었다.그런 시선을 모두 받으며 하준의 깊은 눈이 가족에게로 향했다.“다들 저 사람들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시나요?”가족들에게는 하준이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보였다.장춘자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내 생각에는….”“잘못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최대범이 장춘자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받았다.“우리가 잘못 가르쳐서 저 녀석을 너무 기고만장으로 만들었어.”최민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하준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겠지
다들 깜짝 놀랐다.FTT 가족들은 더욱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여하그룹이 네 거였더냐?”최대범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무슨 짓이니?”최란도 믿을 수가 없었다.“FTT 회장 자리에 앉아서 뒷구멍으로 새 회사를 만들어 FTT와 경쟁하고 있었어?”“저런 배은망덕한 놈을 보았나? 애초에 저 녀석에게 FTT를 맡기는 게 아니었어.”최대범은 당장 뭐라도 들어서 하준을 후려쳐 버리고 싶었다.“화내지 마세요. 겨우 그까짓 여하그룹, FTT의 상대가 못 된다고요.”최민이 깔보듯 말했다.“그래요. FTT 전자가 세계 일류 브랜드인데 그깟 여하,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최정도 비웃었다.그제야 최대범의 얼굴이 좀 풀렸다.“너는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 아니다. 각오 단단히 해. 양하야, 3개월 안에 여하를 흔적도 없이 밟아버리거라.”“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최양하가 눈 속의 두려움을 억지로 감추며 답했다.하준이 그들의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며 웃었다.“양하는 아직 어른들께 FTT 전자 랩의 심희철 팀이 단체로 회사 그만둔 거 말씀 안 드렸나? 아, 심희철 팀은 우리 여하로 들어왔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여하에서 신규 제품 발표회가 있을 겁니다. 오전 11시에 글로벌 생중계니까 놓치지 마십시오.”현장은 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건 FTT에서 발표하려고 했던 거잖아? 그걸 왜 여하가 발표해?’최양하가 냉랭하게 웃었다.“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FTT에서 3년 동안 심희철 팀에서 만들어낸 제품인데, 그 데이터를 가지고 여하에 갔다 이거지? 우리 쪽에서는 100% 지적 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어. 게다가 심희철하고 여하를 다 고소할 수도 있지.”“재미있군.”하준이 웃었다.“심희철 팀장 계약서 안 읽어 봤구나. 애초에 심희철은 FTT와 계약한 적이 없어. 최하준 개인과 했지. 연구 자금도 FTT에서는 한 푼도 대지 않았어. 내가 혼자 출자했으니까.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고소를 하겠다는 거지?”“되려…”하준이 느
구 이사와 도 회장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금 한창 최하준을 닦아 세운 것을 생각하니 후회막심이었다.“최, 최 회장. 미안하네. 내가 눈이 멀었지. 날 한 대 쳐.”구 이사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최하준은 그 기름진 얼굴에 손도 대기 싫었다.“아니, 그렇게 기세등등하시더니, 내 와이프가 손댔다고 큰소리 치지 않았습니까??”“아, 아니야. 내가 잘못했네.”구 이사가 손을 모았다.“빌려면 최양하에게 비시죠. 누가 압니까? 일주일 안에 칩을 개발해 낼 수 있을지?”하준은 한껏 입꼬리를 올리더니 여름을 데리고 나가버렸다.이제 아무도 둘을 막지 않았다. 심지어 추성호와 서유인도 불안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입구에 도착하자 하준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모두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시선은 마지막에 추성호에게로 향했다.“추 회장, 오늘 이 파티는 내가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추성호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추성호가 상상했던 것과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아 참, 내 와이프 강여름 씨는 누구도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특히 내 와이프의 외모를 비하하는 사람은 나와 직접 싸울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말을 마치더니 하준은 여름을 데리고 성큼성큼 나가버렸다.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서유인은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다시는 최하준이 일어서지 못할 줄 알고 추성호를 택했는데 최하준이 다시 살아난 데다, FTT라는 배경이 없이도 최하준의 앞날은 밝았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이때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약혼식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최대범은 충격으로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와 버렸다.식구들이 최대범을 휴게실로 옮겼다.“양하야, 이리 와 보거라.”최대범이 최양하에게 손짓했다.“할아버지….”불안해하며 최양하가 다가갔다.최대범이 지팡이를 들더니 내리쳤다.“심희철 팀이 회사를 나가는 일이 벌어졌는데 나한테는 말도 안 했어?”“아버지, 진정하세요. 하준이가 너무 비열했어요.”최란이 얼른 아들을 감싸
다들 나가고 나서 최대범은 한숨을 쉬었다.장춘자가 물을 따라 건넸다.“당신도 늙었어요. 차라리 이제 권력을 내려놓아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쟤들 중에 하준이보다 나은 애가 어디 있어요? 이러다가 우리나라 최고라는 FTT명성도 못 지키겠어요.”“하지만 그놈의 자식이 말을 안 들어 먹으니 화가 난단 말이야.”최대범이 답답한 가슴을 툭툭 쳤다.“확실히 그놈이 독하긴 했지. 우리 집안 애들 중에 그만한 녀석이 없어. 란이가 잘 하긴 해도 하준이랑 비교하면 아직 멀었지.”“우리 가문 명맥을 지키자면 그 정도는 돼야지요.”******호텔 주차장.여름은 차에 타서 저도 모르게 몰래 옆에서 안전벨트를 매는 하준을 쳐다보았다.오늘은 스포츠카를 가지고 나왔는데 온갖 첨단 기술이 빛나는 운전석에 앉은 하준을 보니 너무나 근사했다. ‘방금 약혼식 장에서 보여준 아우라는… 너무 멋있었어!’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아, 진짜. 어쩜 이렇게 자극 포인트 만날 똑같아?’“보고 싶으면 대놓고 보십시오. 아무리 감탄하면서 봐도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여름의 갈망하는 듯한 시선을 포착하더니 하준이 여름을 바라보며 입가에 매혹적인 웃음을 띠었다.“안 봤거든요. 그냥 고개 돌리다가 한 번 본 거지.”여름은 어설프게 창밖을 보는 척했다.하준이 여름의 손을 조물락거리며 즐거운 듯 웃었다.“방금 남편 멋있지 않았습니까? 응? 반했지?”“뭐, 너무 자주 봐서….”여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의 뺨을 잡더니 입술을 막았다.‘어머 어머, 또 이래….’여름이 눈을 깜빡거리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하준의 매력에 저항하기란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저도 모르게 취하게 만드는 매력이었다.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꾸자꾸 하준에게 빠저들고 마는 것이었다.이럴 때 하준의 매력은 여름의 방어력을 0으로 만들어 버린다.******검은 세단이 천천히 스포츠카 근처에 와서 섰다.
한참을 입 맞추던 하준은 입술이 빨갛게 부어오르고서야 겨우 몸을 뗐다.자기 입술에서 하준의 맛이 나는 것을 느끼며 여름은 얼굴이 빨개졌다. 얼른 고개를 돌리다가 그제야 창문이 반쯤 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방금, 무슨 차가 지나간 것 같은데….”여름은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설마 누가 본 건 아니겠지?’“그럼.”하준의 눈이 반짝하더니 웃었다.“부부끼리 뽀뽀 좀 한 게 뭐 어때서.”여름은 입술을 깨물었다.‘부부고 뭐고를 떠나서 이런 건 누가 보면 부끄럽다고!’“아까 내 손은 왜 잡았는데?”하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여름은 흠칫했다가 확실히 손을 잡았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당황했다.“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하며 얼굴을 돌렸다.“아까 우리 식구들이 내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발 뺐을 때 말이지.”하준이 여름의 귓가에서 가볍게 웃었다.“그렇게 날 아껴주는지 몰랐어.”“아니거든요. 자아가 너무 비대하시네?”여름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구 이사와 협력할 건가요?”“아니.”“하지만 대기업인데….”“이제는 기술의 시대야. 일단 이런 제품은 한 번 뒤처지면 바로 도태야.”하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번에 많은 것들이 아주 확실해졌어. 주식 매입 방식으로 신생 기업들을 지원할 거야. 그런 구닥다리 기업의 시대는 이제 물러날 때가 됐어”여름은 바로 이해했다.“당신만의 비즈니스 제국을 세우려는 거군요. 그래서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으려고.”“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제 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거야.”여름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야심이야.얼마 안 가서 최하준이 비즈니스 판을 완전히 새로 짜겠어.이런 남자를 내가 잘 다루어 낼 수 있을까? 다시 신적인 자리에 올라가면 최하준을 노리는 여자는 더 많아질 텐데.그때 가서는 최하준의 아내라는 자리도 유명무실해지지 않을까?’******이틀 뒤.벨레스 별장. 한바탕 고함이 오간다.“서경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렇지만….”“내가 알아서 잘 처리하지. 강신희가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어?”“알겠어.”위자영이 눈이 다시 표독스럽게 빛났다.“나를 손절하겠다니 어쩔 수 없지.”“그럼.”*******새벽.여름은 아침 식사 후 출근을 준비했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하준이 화이트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따라왔다. 그을린 피부가 성숙한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오늘은 펜트하우스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수리 중이라 공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여름이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의 금속 벽에 비친 하준의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이 사람은 정말 뭘 입어도 너무 근사하단 말이야.’“왜 따라와? 옷 갈아입고 출근해야 하지 않아요?”“배웅.”애교스러운 하준의 저음에 여름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말았다.출근 시간이라 오르락내리락 사람이 많았다. 아침은 특히 젊은 여자들 비중이 높았다.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들이 거의 모두 하준을 훔쳐보고 있었다. 새로 사람이 들어오자 하준에게 몸을 밀착하는 과감한 타입까지 나타났다.여름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하긴 저 정도 매력이면 예전의 나라도 훔쳐봤을 거야. 당연하지.그렇지만 남의 남자한테 그러지들 말라고.’“마누라, 나 손 시리다.”갑자기 하준이 뒤에서 여름의 팔 사이로 자기 팔을 끼워 넣어 껴안으며 여름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츤데레스러운 애교에 옆에서 보고 있던 여자들도 녹아내릴 지경이었다.물론 놀라기도 했다.‘너무 하네. 저렇게 이상한 얼굴을 하고도 저런 남자를 데리고 산다고?’엘리베이터가 주차장 층에 멈추자 다들 내렸다.저만치 걸어간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여자가 돈이 많은가 보다. 펜트하우스에 미스터리 금수저가 산다고 하던데 그게 저 여자인가 봐.”“세상에, 나도 그 여자처럼 돈 좀 있어 봤으면 좋겠다. 저런 명품남 키워보게.”“……”하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데 여름은 ‘풉’하고 웃었다.“명품남 님, 이제 올라가세요. 착하지?”여름이 그렇게 즐겁게 웃는 모습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