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내가 알아서 잘 처리하지. 강신희가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어?”“알겠어.”위자영이 눈이 다시 표독스럽게 빛났다.“나를 손절하겠다니 어쩔 수 없지.”“그럼.”*******새벽.여름은 아침 식사 후 출근을 준비했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하준이 화이트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따라왔다. 그을린 피부가 성숙한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오늘은 펜트하우스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수리 중이라 공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여름이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의 금속 벽에 비친 하준의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이 사람은 정말 뭘 입어도 너무 근사하단 말이야.’“왜 따라와? 옷 갈아입고 출근해야 하지 않아요?”“배웅.”애교스러운 하준의 저음에 여름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말았다.출근 시간이라 오르락내리락 사람이 많았다. 아침은 특히 젊은 여자들 비중이 높았다.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들이 거의 모두 하준을 훔쳐보고 있었다. 새로 사람이 들어오자 하준에게 몸을 밀착하는 과감한 타입까지 나타났다.여름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하긴 저 정도 매력이면 예전의 나라도 훔쳐봤을 거야. 당연하지.그렇지만 남의 남자한테 그러지들 말라고.’“마누라, 나 손 시리다.”갑자기 하준이 뒤에서 여름의 팔 사이로 자기 팔을 끼워 넣어 껴안으며 여름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츤데레스러운 애교에 옆에서 보고 있던 여자들도 녹아내릴 지경이었다.물론 놀라기도 했다.‘너무 하네. 저렇게 이상한 얼굴을 하고도 저런 남자를 데리고 산다고?’엘리베이터가 주차장 층에 멈추자 다들 내렸다.저만치 걸어간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여자가 돈이 많은가 보다. 펜트하우스에 미스터리 금수저가 산다고 하던데 그게 저 여자인가 봐.”“세상에, 나도 그 여자처럼 돈 좀 있어 봤으면 좋겠다. 저런 명품남 키워보게.”“……”하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데 여름은 ‘풉’하고 웃었다.“명품남 님, 이제 올라가세요. 착하지?”여름이 그렇게 즐겁게 웃는 모습
“마음에 들어?”하준이 낮은 소리로 웃더니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여름을 바라보았다.“내 차도 있는데 뭐 한다고 차를 또 샀어요?”여름은 하준에게 너무 넘어가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렸다.“그 차 너무 낡아서 강여름에게 어울리지 않아. 당신한테는 최고로 좋은 것만 주고 싶어.”하준이 키를 눌렀다. 문이 날개처럼 올라가더니 호화로우면서도 절제된 인테리어를 드러냈다.“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여름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예전 같았으면 거절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최하준의 아내로서 마음이 편안했다.“그냥 ‘고마워’ 하고 끝인가?”하준이 음흉하게 눈썹을 올렸다. 불만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뭐 더 없어?”그런 하준을 보니 얼굴이 달아올랐다.“뭘 더 어쩌라고? 이제 부부면 당신 게 내 거죠.”“그러네. 나도 당신 거야.”하준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여름을 차에 밀어붙이며 키스했다. 그러고 나서야 아쉽다는 듯 여름을 놓아주었다.“자기는 점점 더 달콤해지네.”“아, 몰라. 그만 해요. 나 출근 해야 해.”여름은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쿨하던 하준이 이제는 너무 오글거려서 손이 없어질 지경이었다.그러나 얼굴이 어떻게 변해도 정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 안정됐다.여름은 새 차를 몰고 새벽 거리를 달렸다.그 낯선 수퍼카와 보란 듯 요란한 차 번호판은 당연히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신호에 걸려서 잠시 정차해 있는데 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야야야, 여름아. 아침에 애들이 뭔 슈퍼카 영상 공유하고 난리 났더라. 완전 부러워.”“뭐라고?”“어우, 세상에. 하얀 슈퍼카인데 국내에는 없는 모델이래. 그게 그렇게 비싼 데다 주문 제작하는 거라네? 근데 글쎄 차 번호판이 012 4865래. ‘영원히 사랑해요!’. 솔로 부러워 죽어!!!”“……”‘그게 그렇게 부러울 일인가?’“너도 최하준한테 하나 뽑아달라고 해. 그렇게 부자인데. 사람이 얼마나 로맨틱하니? 내가 영상 보내줄게. 너도 최하준에게
여름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사에 도착해서는 또 한 차례 부러움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엄상인이 웃었다.“요즘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얼굴 너무 좋아 보이세요. 이제 최 회장님이 얼마나 대표님을 아끼는지 다 알겠네요. 아 참, 하영그룹에서 비즈니스 나이트에 초청장 보냈습니다. 천인그룹 따님이 보낸 파티 초청장도 있고요.”여름은 수북이 쌓인 초청장을 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엄상인이 말을 이었다.“이제 FTT 신제품 발표가 코앞이라 각계에서 최 회장님과 줄을 대려고 합니다. 회장님 아내로서 줄을 대야 할 주요 인물로 인식되는 거죠.”“그러네 전에는 이런 초대장 하나 받기도 그렇게 어렵더니….”여름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역시나 서울에 오니까 인맥이 중요하구나.”“아무래도 최 회장님은 업계에서 주요 인물이시니까요. 대표님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좋으세요.” 엄상인이 열심히 여름의 비위를 맞췄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초대장은 이사들에게 적당히 나눠주세요. 같이 가게.”“알겠습니다.”엄상인이 나가고 낯선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오랜만이다. 나 지금 서울인데 커피 한잔할 시간 되나?”윤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름은 실소가 터졌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까 윤서랑 얘기했다고 나타난 건가?’******회사 1층 커피숍.여름은 다시 윤상원을 만나게 되었다.역시 윤상원은 잘 지내지 못하는지 매우 야위어 이전과 비교하면 초췌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의기소침해 보였다.그러나 여름은 별로 감정적으로 동요되지는 않았다. 이런 결과도 결국 자업자득이었다.“오랜만… 이네.”윤상원은 여름을 보더니 표정이 이상해졌다.“내 얼굴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여름이 담담히 말했다.“알겠어. 이제는 화신 대표가 최하준의 아내라는 거 전 국민이 다 알지. 내가 널 너무 얕봤구나.”윤상원이 약간 괴로운 듯 말했다.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뭔데요? 그냥 말해 봐요.”“윤서가 어디 있는지
“정말 너무 하네. 이건 나랑 윤서 사이의 일이야.”윤상원이 화냈다.“이제 최하준 와이프가 되었다고 잘난 척하지 마!”“이제 보니 윤서의 친구를 내내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군요. 그건 윤서에 대한 존중도 없다는 뜻이지. 윤서가 너무 아깝네요.”여름은 말을 마치더니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난 한동안 이쪽에서 지낼 거야. 윤서 못 만나면 나도 못 가.”윤상원이 고함쳤지만 여름은 상대하지 않았다.******사무실.갑자기 하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름은 커피를 마시며 전화를 받았다.“나 몰래 남자랑 카페에서 데이트 했다는 소문이….”“푸흡!”여름은 그만 모니터에 커피를 뿜고 말았다. “차 실장이 또 보고했나 보네?”“아닌데. 당신 내 와이프라고. 이제는 어지간한 아이돌보다 끌고 다니는 카메라가 많아. 내가 폭로를 막아야 할 사진이 수시로 들어온다는 말이지.”하준이 테이블을 톡톡 치는 것 같았다.“그런 사람은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사람 추레하던데.”이제 누굴 만날 자유도 없다는 사실에 여름은 화가 났다.“윤서 전 남친이에요. 윤서 소식 알아 보러 왔었고, 안 알려줬어요.”“응, 앞으로는 모르는 남자 따라나가지 마시죠.”“곧 발표회인데 안 바쁜가 봐요? 한가하네?”포스 강한 하준의 말투를 들으니 여름은 머리가 아팠다.“회사가 아무리 바빠도 와이프가 먼저지.”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요즘 여자 덕 보려는 남자도 많습니다.”“쓸 데 없는 소릴. 누가 이렇게 생긴 사람한테 관심이나 있겠어요?”“그건 모르지.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예쁘거든.”“……”전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말이 너무 달콤해서 듣고만 있어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이 분이 요즘 꿀만 먹고 다니나….”“강여름이 보쌈을 만들어 주면 더 달콤한 말도 할 수 있는데.”낮게 웃는 목소리가 첼로 소리처럼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여름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가지가지 하네. 보쌈 먹자고 저러고 낯 부끄러운 소리까지
“…아유, 정말.”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뭐, 저녁에 가서 보쌈이라도 삶아줄까?’******퇴근 후 여름은 일부러 마트에 가서 돼지고기를 샀다.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틀었다.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30분 전 벨레스 그룹의 서경주 회장이 탄 차가 대형 트럭과 충돌해 기사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현재 서경주 회장은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며 아직 생사불명이다. 현장 소식에 따르면 현장은 매우 처참하며 내일 주식 시장에 크게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그 뒤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서경주와 오래 지낸 건 아니지만 여름에게는 유일한 혈육이었다.‘아버지에게 교통사고가 났어?’여름은 급히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했다.응급실 복도에는 벨레스 식구들로 가득했다.울고불고하던 위자영이 악에 받쳐서 달려왔다.“이 재수 없는 것. 네가 집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사고뿐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여름은 붉어진 눈시울로 맞받아쳤다.“우리 아버지는 안에서 사경을 헤매는데 아내라는 분이 남편 걱정은 안 하고 그 틈에 화풀이할 생각뿐인가요?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녜요?”“너한테 피해 본 것이 있으니 화풀이도 하겠지!”위자영은 여름의 날카로운 시선에 살짝 당황한 듯했다.“당연히 내 남편은 걱정되지. 누구보다 걱정된다고!”“그렇다면 그 화부터 거두세요. 다들 힘들다고요. 이제는 난리 좀 작작 치세요. 나도 어렵사리 아버지를 되찾았는데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여름이 슬픔에 잠겨 애원했다. 생트집 잡는 사람 보듯 쳐다보니 위자영은 화가 치밀었다.“난리라니 내가 무슨….”“됐다, 입 다물어.”안 그래도 아들 때문에 심란하던 박재연은 여름의 쓴소리를 들으니 위자영이 하는 짓이 도를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름이 하는 말이 맞지. 경주는 안에서 생사를 넘나들면서 치료받고 있는데 너는 이러고 입씨름할 정신이 있니? 작작 해야지.”위자영은 망신스러운 나
“그건 안 되지.”위자영이 얼른 막아섰다.“내 남편인데 왜 네가 돌봐? 명의라면 나도 아는 분 많다.”“그러니까 말이야.”서유인이 끄덕이며 짜증스럽게 덧붙였다.“그리고 아빠를 간호하더라도 내가 해야지 네가 뭔데? 잘 알아둬. 넌 우리 가족관계 증명서에도 못 올라오는 애라고.”“과연 두 분이 아는 명의가 많을까요, 주민그룹에서 아는 명의가 많을까요?여름이 되물었다.위자영은 말문이 막혔지만, 억지를 썼다.“어쨌든 난 죽어도 서경주 간호 권리를 너에게 못 넘긴다. 내가 멀쩡할 때도 네 엄마를 못 이겼는데 남편 식물인간 돼서는 강신희 딸에게도 못 당해서야 되겠어?”그러더니 위자영은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다시 울었다.여름은 위자영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신일만 바라보았다.“요즘 아버지가 이혼하려고 얼마나 확고하게 결심하셨었는지는 누구보다 할아버지께서 잘 아실 거예요. 하지만 이제 사고가 났으니 두 분은 아직 부부니까 아버지 재산 분배는 법에 따라서 배우자, 자녀, 부모 순이 되는 거죠?”서신일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위자영이 다가오더니 강여름을 밀쳤다.“뭐야? 지금 내가 남편을 해쳤다는 거냐? 저가 악랄하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런 줄 아나 봐? 내가 서경주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 세상에서 내가 서경주를 제일 사랑한다고!”“그쪽 분께 하는 말 아니에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 알려드리는 거지. 우리 아버지 깨어나시면 아주머니께는 하나도 좋을 게 없다고요.” 여름의 말투가 사뭇 날카로웠다.“물론, 나는 아주머니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저 역시 여러 가지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쨌든 우리 같은 집안은 다른 집이랑은 사정이 좀 다르니까요.”박재연은 완전히 여름의 말에 넘어갔다.“그렇지, 난 네가 경주를 간호하는 데 동의한다.”“어머님, 쟤 말만 듣고 제가 경주 씨를 해칠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위자영은 격한 감정에 울먹였다.“못 해요. 남들이 알면 얼마나 저를 욕하겠어요?”“아주머니를
서경주를 눕히고 서신일 일행이 병실 밖으로 나가다가 서둘러 들어오던 최하준과 마주쳤다.“안녕하십니까? 이주혁 선생에게 아버님 상황 얘기해 놓았습니다. 꼭 최고의 의사가 담당할 수 있도록 해 놓겠습니다.”하준의 말투는 사뭇 공손했다. 지난번 서유인과 함께 생신에 왔을 때와는 너무 다른 태도였다.“잘 부탁한다.”서신일은 여름을 가만히 보더니 하준이 그 손녀를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았다.‘이제부터는 여름이 녀석에게 잘해줘야겠구나.이제 경주에게 사고가 났으니 벨레스는 의지할 데가 없어. 앞으로는 저 손녀사위가 희망이구나.’그렇게 생각하면서 여름을 돌아보았다.“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직 젊으니 할 일은 해야지. 앞으로는 종종 집으로 와서 나랑 네 할머니도 만나고, 혹시 벨레스에 가보고 싶으면 언제든 우리한테 말만 하렴.”여름에게는 너무 뜻밖이었다. 그러나 곧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벨레스 사람들은 권력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구나.’“할아버지, 저런 애를 우리 집안에 들이시는 거예요?”서유인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소리 질렀다.“됐다, 어쨌든 네 언니 아니냐. 앞으로는 너도 도와줄 테고.”그렇게 말하고 서신일은 박재연과 나가버렸다.서유인은 달갑지 않다는 듯 발을 구르고 고개를 돌려 여름을 노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하준과 눈이 마주치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회장님….”하준은 서유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바로 여름에게 걸어가 허리에 손을 얹더니 부드럽게 위로했다.“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이제 내가 곁에 있잖아.”그 모습을 보니 서유인은 질투가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한 번도 자기에게는 주지 않았던 다정한 시선이었다.추성호가 잘해주기는 하지만 최하준처럼 지적이지도 않고 품위가 있지도 않았다.서유인은 증오심에 이를 갈았다.“강여름, 잘난 척 그만해. 우리 할아버지가 최 회장 체면 봐서 그러시는 거야.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거 우리 집안에 발끝도 못 들여놔.”여름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정말 대단하네.
“걱정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생각 안 하니까. 지금은 우리 아버지 말고는 다른 생각할 틈도 없어요.”여름이 담담히 말을 끊었다.하준은 여름이 백지안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여름은 하준의 마음속에 얼마나 백지안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잘 알았다.‘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이제는 미워해 봐야 소용도 없어.산 사람은 영원히 죽은 사람과는 다툴 수도 없잖아.’“…뭐, 그러면 다행이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준의 마음은 무거웠다.여름이 오해할까 봐 걱정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또 불편했다.‘쓸데없는 생각을 안 한다니, 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가?’하준은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속에서 초조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나가서 담배를 피웠다.30분쯤 지나서 돌아와 보니 여름이 서경주에게 물을 먹이다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다가 눈을 마주치니 시선을 돌렸다.하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30분씩이나 나가 있어도 뭘 하고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왜 이렇게 쌀쌀맞지?’그러나 서경주의 상태를 보니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 듯했다.그래서 헛기침하고는 먼저 말을 걸었다.“방금 주혁이한테 말 넣어 놨어. 간병인 붙여서 아버님 좀 봐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해외 권위 있는 해당 분야 전문가랑 상의도 해볼 거야….”******“고마워요.”여름이 진심으로 인사했다.“고맙기는, 내 아내인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여름이 너무 격식을 차리니 섭섭한 듯 하준이 부루퉁했다.“그나저나 위자영이 의심스러워서 그렇게 아버님 간병 직접하겠다고 고집부린 겁니까?”“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식 양도하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위자영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뒤에 위지웅 같은 사람까지 끼고 있으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거든요.”“확실히 그렇지.”하준이 동의했다.“이미 사고 원인은 사람 풀어서 조사해 보고 있어요.”여름은 생각에 잠겼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