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를 눕히고 서신일 일행이 병실 밖으로 나가다가 서둘러 들어오던 최하준과 마주쳤다.“안녕하십니까? 이주혁 선생에게 아버님 상황 얘기해 놓았습니다. 꼭 최고의 의사가 담당할 수 있도록 해 놓겠습니다.”하준의 말투는 사뭇 공손했다. 지난번 서유인과 함께 생신에 왔을 때와는 너무 다른 태도였다.“잘 부탁한다.”서신일은 여름을 가만히 보더니 하준이 그 손녀를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았다.‘이제부터는 여름이 녀석에게 잘해줘야겠구나.이제 경주에게 사고가 났으니 벨레스는 의지할 데가 없어. 앞으로는 저 손녀사위가 희망이구나.’그렇게 생각하면서 여름을 돌아보았다.“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직 젊으니 할 일은 해야지. 앞으로는 종종 집으로 와서 나랑 네 할머니도 만나고, 혹시 벨레스에 가보고 싶으면 언제든 우리한테 말만 하렴.”여름에게는 너무 뜻밖이었다. 그러나 곧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벨레스 사람들은 권력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구나.’“할아버지, 저런 애를 우리 집안에 들이시는 거예요?”서유인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소리 질렀다.“됐다, 어쨌든 네 언니 아니냐. 앞으로는 너도 도와줄 테고.”그렇게 말하고 서신일은 박재연과 나가버렸다.서유인은 달갑지 않다는 듯 발을 구르고 고개를 돌려 여름을 노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하준과 눈이 마주치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회장님….”하준은 서유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바로 여름에게 걸어가 허리에 손을 얹더니 부드럽게 위로했다.“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이제 내가 곁에 있잖아.”그 모습을 보니 서유인은 질투가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한 번도 자기에게는 주지 않았던 다정한 시선이었다.추성호가 잘해주기는 하지만 최하준처럼 지적이지도 않고 품위가 있지도 않았다.서유인은 증오심에 이를 갈았다.“강여름, 잘난 척 그만해. 우리 할아버지가 최 회장 체면 봐서 그러시는 거야.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거 우리 집안에 발끝도 못 들여놔.”여름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정말 대단하네.
“걱정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생각 안 하니까. 지금은 우리 아버지 말고는 다른 생각할 틈도 없어요.”여름이 담담히 말을 끊었다.하준은 여름이 백지안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여름은 하준의 마음속에 얼마나 백지안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잘 알았다.‘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이제는 미워해 봐야 소용도 없어.산 사람은 영원히 죽은 사람과는 다툴 수도 없잖아.’“…뭐, 그러면 다행이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준의 마음은 무거웠다.여름이 오해할까 봐 걱정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또 불편했다.‘쓸데없는 생각을 안 한다니, 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가?’하준은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속에서 초조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나가서 담배를 피웠다.30분쯤 지나서 돌아와 보니 여름이 서경주에게 물을 먹이다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다가 눈을 마주치니 시선을 돌렸다.하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30분씩이나 나가 있어도 뭘 하고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왜 이렇게 쌀쌀맞지?’그러나 서경주의 상태를 보니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 듯했다.그래서 헛기침하고는 먼저 말을 걸었다.“방금 주혁이한테 말 넣어 놨어. 간병인 붙여서 아버님 좀 봐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해외 권위 있는 해당 분야 전문가랑 상의도 해볼 거야….”******“고마워요.”여름이 진심으로 인사했다.“고맙기는, 내 아내인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여름이 너무 격식을 차리니 섭섭한 듯 하준이 부루퉁했다.“그나저나 위자영이 의심스러워서 그렇게 아버님 간병 직접하겠다고 고집부린 겁니까?”“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식 양도하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위자영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뒤에 위지웅 같은 사람까지 끼고 있으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거든요.”“확실히 그렇지.”하준이 동의했다.“이미 사고 원인은 사람 풀어서 조사해 보고 있어요.”여름은 생각에 잠겼다
“궁금해서 그래요.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 안 하고… 참을 수 있어요?”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애매하게 여름을 쳐다봤다.“참을 수야 있지. 당신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혼자 해결했는데.”“…전 여친도 있었으면서?”여름은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다 알아도 말 안 하고 있는데 사람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하준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한참 만에 복잡한 표정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나는….”여름은 더는 듣기도 싫어서 화제를 바꾸었다.“남자가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한다는 건 밤일이 안 되거나 아니면 마음에 둔 누군가가 있는 거겠죠. 아무래도 서경재가 위자영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설마.”“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여자의 직감은 정확하다고요. 어려서부터 장애가 있는 경우 어떤 사람은 밝고 낙관적으로 자라고 어떤 사람은 장기적으로 어두운 성격이 된대요.”“어쨌든 당신 추측일 뿐이잖아. 증거가 있어야지. 하지만 아버님을 해친 사람은 의식 회복하실까 봐 걱정이거나 어쩌면 직접 손을 댈지도…”“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잡으려고 누가 손을 뻗을지 기다리는 중이에요.”여름은 의미심장하게 하준과 눈을 맞추었다.‘역시 내 와이프야. 이 복잡다단한 권력관계를 다루어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성장이 빠르군.”******다음 날, 새벽.상혁이 조사 결과를 가지고 왔다.“서 회장님을 들이박은 화물차 기사는 깨끗합니다. 그 도로에 커브가 있었는데 서 회장님께서 탄 차가 갑자기 방향을 잃고 들이받았습니다. 검시 결과 회장님 운전기사 위에서 상당한 양의 마약이 발견됐습니다.”“기사가 마약을 하고 환각을 일으켰나요?”여름이 깜짝 놀라 물었다.“사고의 주요 원인이 그겁니다. 하지만 검사를 진행했던 의사 말로는 장기 복용은 아니라고 합니다. 잘못 복용했을 수 있는데 사망해서 생전에 누구와 접촉했는지, 누가 먹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위지웅 쪽도 조사를 했습니다만, 이번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갑자기?동성에 있었을 때 같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여름이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사랑해요, 사랑해. 얼른 출근이나 해요.”여름이 하준의 등을 떠밀었다.여름의 뒷모습을 보는 하준이 눈빛이 무거워졌다.하준도 바보가 아닌데 뭔가를 숨기는 듯한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회사에 도착했다.하준은 짜증스럽게 검색했다.Q: 왜 여자가 질투하지 않나요?A1: 성격이 독립적이라 연애도 지적으로 분석하며 자제력이 강한 경우A2: 자아가 단단해 상대를 믿고 매우 신뢰하며 이해하는 경우A3: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A3는 뭐야?’하준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둔탁한 소리가 들리자 상혁이 걱정스러운 듯 들어와 하준을 한 번 쳐다봤다. 요즘 최하준의 성질이 늘어서 걱정하던 참이었다.‘이해가 안 되네. 요즘 신혼이라 한창 깨를 볶을 때인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지?’하준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상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한편, 큰 사무실에서 여름은 벨레스 주식 동향을 보고 있었다.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서경주에게 사고가 났으니 오늘 벨레스 주식은 큰 폭으로 떨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주식 상황이 꽤 안정적이었다.그렇게 보니 서경재가 점점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나 어디 있~게?”“지친다, 그냥 말해라.”“그래. 나 지금 너희 회사 주차장 들어가는 중. 아빠 사고 났다며? 속상할 것 같아서 내가 유명한 달달이 가게에서 디저트 사 왔지.”윤서가 웃었다.“최하준이 그 정도로 널 다정하게 챙겼을 것 같지 않아서.”여름은 움찔했지만 바로 답했다.“올라오지 말고, 당장 차 돌려서 나가!”“야, 강여름. 섭섭하게 왜 이래? 너 위로해 주려고 일부러 멀리까지 가서 달달이까지 사 왔는데. 차까
윤상원이 반짝이는 윤서의 모습을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무래도 윤서를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뭐, 보아하니 만난 것 같네.”휴대폰 저쪽에서 여름의 한숨이 들려왔다.“어제 너 찾는다고 왔었거든. 얘기 잘해 봐.”“그, 그래.”윤서도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랜만이야’하는 눈빛으로 전 남친을 올려다봤다.“왜 서울로 이직했다고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해줬어?”윤상원이 쓴웃음을 지었다.“전화도 톡도 다 차단했더라. 그렇게까지 난리를 치고 아직도 화가 다 안 풀렸어?”“난리를 쳐?”윤서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내가 짜증 난 줄 알고 말 몇 마디면 달래질 줄 알았나 보네?’“그래,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반성했다니까. 몇 달이 흘렀는데 아직까지 이렇게 화를 내면 어떡해? 돌아가자. 내가 네 부모님 찾아뵙고 사과 드리고 나서 바로 결혼하자.”윤상원이 윤서의 손을 잡았다.윤상원에게는 윤서가 없는 삶이 너무 낯설었다.예전에는 연애가 소중해서 일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윤서를 만나곤 해다.그러나 윤서가 떠나고 나서 가끔 시간이 남으면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공허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느껴졌다.그러나 전에는 윤서를 제대로 아껴주지는 못했다.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이제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난 돌아가지 않아.”윤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지금 오슬란에서 일하는데 전망도 좋고.”윤상원은 깜짝 놀랐다.“동성에서도 잘살고 있었잖아?”“……”윤서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대체 얼마나 나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야?’“전에는 내가 오빠 때문에 동성에 있었던 거지.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어. 아직 젊은데 넓은 세상을 더 봐야지. 결혼도 하기 싫어. 내가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이제 그만 해라. 그렇게 나하고 결혼하고 싶다더니….”“이제는 결혼 같은 거 하기 싫다니까.”윤서가 말
윤서는 화가 나서 팔짝 뛸 지경인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돌아보니 그 잘난 송영식이 건방진 미소를 장착하고 다가왔다.“어젯밤까지만 해도 나만 사랑한다더니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밀당입니까? 난 가지고 논 거예요, 자기?”송영식이 야릇한 소리에 윤서는 소름이 돋았다.“누구야? 무슨 사이야?”윤상원이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를 보더니 안색이 확 바뀌었다.경계심에 확 불이 들어왔다. 상대가 자기보다 못하다면 관심을 껐겠지만, 송영식은 키도 크고 기품 있고 카리스마까지 풍기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한눈에도 보였다.윤서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리더니 갑자기 송영식에게 팔짱을 꼈다.“내가 깜빡하고 말을 못 했네. 여기 내 새 남친이야. 인사해.”송영식은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어? 이게 아닌데? 남친이 아니었나? 더 싸우다 헤어지라고 끼어들었더니 이거 도와준 꼴인가?’“말도 안 돼.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윤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런 식으로 날 자극하려는 거지? 그래, 충분히 마음 아팠다. 우리 이제 그만 하고 집으로 가자.”“우린 이미 헤어졌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윤서는 송영식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봐봐, 얼마나 사람이 우아한가? 품위 있지, 매력 있지 누구나가 꿈꾸는 애인이라고. 예전에는 이 세상에 오로지 윤상원밖에 없는 줄 알고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근사한 남자들이 너무 많은 거야. 이제 더는 윤상원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송영식은 멍한 기분이 되었다.‘아니, 얼마 전에는 나한테 그렇게 욕을 욕을 해대더니?거지 같다며?구리다며?말이 머리를 안 거치고 막 나오는 거야?’“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윤상원이 아무리 해도 못 믿겠다는 듯 서글프게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랑 아영이 때문에 화가 나서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거짓말 아니야. 난 진짜 이 사람 사랑해. 못 믿겠다면 보여주지.”윤서는 그대로 넥타이를 홱 잡아채더니 발끝을 바짝
방금 전까지 키스하던 여자가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입술과 얼굴을 문질러 닦는 게 아닌가.“임윤서 씨….”송영식은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티슈라도 드릴까요?”윤서가 휴지를 한 장 건넸다.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송영식이 홱하고 휴지를 채가서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더럽게!”“이하동문이네요.”윤서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라니 정말 참을 수 없군요.”“……”‘난 지금 네 얘기 하는 거야. 알아듣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송영식은 화가 나서 애꿎은 휴지에 화풀이를 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지경이었다.“울긴 뭘 웁니까? 그렇게 아쉬우면 뭐 한다고 그러고 못된 소리를 해요? 너무 작위적인 거 아니냐고?”“여자친구 없죠?”임윤서가 갑자기 물었다.“키스 되게 못 하시던데, 설마 첫 키스였어요?”“아니, 이 사람이 진짜….”팩트를 저격당한 송영식은 임윤서가 자기를 모욕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해서 말투가 사뭇 곱지 못했다.“맞나 보네.”폭주하는 송영식을 보니 갑자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가식 좀 떠는 것도 못 받아 주면 여자친구 못 만든다고요. 알아두세요.”송영식은 이를 꽉 물었다.“이봐요, 방금 내가 좋은 마음으로 도움까지 줬는데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습니까?”“내가 와 달라 그랬나요? 자기가 먼저 와서 남 오해하기 좋게 나더러 ‘자기야~’ 했으면서. 무슨 생각하고 그랬는지 내가 그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아요? 도와주기는 개뿔….”윤서가 콧방귀를 끼고 돌아서는데 막 마중 나온 여름을 만났다.여름은 뒤에 서 있는 송영식을 보더니 흠칫했다.“둘이….”송영식이 ‘허!’하더니 뭔가 잘못한 게 있는 사람처럼 돌아서서 가버렸다.“……”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내가 잘못 봤나? 어째 송영식에게서 츤데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둘이 또 싸웠어? 윤상원은?”“갔어. 이번에는 진~짜로 해어졌어. 이제 다시는 찾아
“항상 4인분을 하는데도 하준 씨가 다 먹어버리던데요.”여름이 냉장고에서 채소를 꺼냈다.이진숙은 희한하다는 표정이었다.“그게 사랑의 힘인가 봐요. 내가 어려서부터 회장님을 모셨는데 진짜 식욕이 없거든요. 좋아하는 게 없는지 하루에 한 그릇도 제대로 안 드시곤 했어요.”“……”사실 서울로 오지 않았다면 여름은 이진숙의 말씀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되돌아 보니 하준은 동성에 있을 때 여름이 해준 음식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말로는 그냥 그렇다고 말했었다.‘어휴, 츤데레.’어쨌거나 여름도 자기가 한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어서 좋았다.“이따가 원래 얼마나 잘 먹는 사람인지 보여드릴게요.”여름은 삼겹살을 실로 묶기 시작했다.삼겹살을 삶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기다리면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봤다.그러다가 오늘 저녁 검색 수 상위권에 있는 는 헤드라인을 보고 여름은 깜짝 놀랐다.좋지 않은 예감이 불쑥 올라왔다.여름의 심장이 심하게 떨렸다. 기사를 내려 사진을 보았다.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이 몇 장 있었는데 얼굴 생김새가 완전히 하준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중 한 장은 하준이 손에 칼을 들고 얼굴과 손이 온통 피에 물든 모습이었다. 어린아이인데도 눈을 미친 듯이 부릅뜬 모습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경찰에게 체포된 사진과 하얀 옷을 입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진도 있었다.-그런 병이 있대. 우리 동네에도 저 병 때문에 살인한 사람 있었어. 완전 무서워-개무섭. 자기 유모를 죽인 거임? 완전 도랏!-아니 왜 안 가둬 두고 정신병원에서 내보낸 거임? 또 사람 해치면 어떡해? 저런 병은 계속 약 먹어야 재발 안 한다던데…-지금 여하그룹 만들었다며? 저런 정신병자가 회사 경영해도 되는 거야?-와이프는 쟤 환자인 거 아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