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까지 키스하던 여자가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입술과 얼굴을 문질러 닦는 게 아닌가.“임윤서 씨….”송영식은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티슈라도 드릴까요?”윤서가 휴지를 한 장 건넸다.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송영식이 홱하고 휴지를 채가서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더럽게!”“이하동문이네요.”윤서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라니 정말 참을 수 없군요.”“……”‘난 지금 네 얘기 하는 거야. 알아듣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송영식은 화가 나서 애꿎은 휴지에 화풀이를 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지경이었다.“울긴 뭘 웁니까? 그렇게 아쉬우면 뭐 한다고 그러고 못된 소리를 해요? 너무 작위적인 거 아니냐고?”“여자친구 없죠?”임윤서가 갑자기 물었다.“키스 되게 못 하시던데, 설마 첫 키스였어요?”“아니, 이 사람이 진짜….”팩트를 저격당한 송영식은 임윤서가 자기를 모욕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해서 말투가 사뭇 곱지 못했다.“맞나 보네.”폭주하는 송영식을 보니 갑자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가식 좀 떠는 것도 못 받아 주면 여자친구 못 만든다고요. 알아두세요.”송영식은 이를 꽉 물었다.“이봐요, 방금 내가 좋은 마음으로 도움까지 줬는데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습니까?”“내가 와 달라 그랬나요? 자기가 먼저 와서 남 오해하기 좋게 나더러 ‘자기야~’ 했으면서. 무슨 생각하고 그랬는지 내가 그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아요? 도와주기는 개뿔….”윤서가 콧방귀를 끼고 돌아서는데 막 마중 나온 여름을 만났다.여름은 뒤에 서 있는 송영식을 보더니 흠칫했다.“둘이….”송영식이 ‘허!’하더니 뭔가 잘못한 게 있는 사람처럼 돌아서서 가버렸다.“……”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내가 잘못 봤나? 어째 송영식에게서 츤데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둘이 또 싸웠어? 윤상원은?”“갔어. 이번에는 진~짜로 해어졌어. 이제 다시는 찾아
“항상 4인분을 하는데도 하준 씨가 다 먹어버리던데요.”여름이 냉장고에서 채소를 꺼냈다.이진숙은 희한하다는 표정이었다.“그게 사랑의 힘인가 봐요. 내가 어려서부터 회장님을 모셨는데 진짜 식욕이 없거든요. 좋아하는 게 없는지 하루에 한 그릇도 제대로 안 드시곤 했어요.”“……”사실 서울로 오지 않았다면 여름은 이진숙의 말씀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되돌아 보니 하준은 동성에 있을 때 여름이 해준 음식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말로는 그냥 그렇다고 말했었다.‘어휴, 츤데레.’어쨌거나 여름도 자기가 한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어서 좋았다.“이따가 원래 얼마나 잘 먹는 사람인지 보여드릴게요.”여름은 삼겹살을 실로 묶기 시작했다.삼겹살을 삶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기다리면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봤다.그러다가 오늘 저녁 검색 수 상위권에 있는 는 헤드라인을 보고 여름은 깜짝 놀랐다.좋지 않은 예감이 불쑥 올라왔다.여름의 심장이 심하게 떨렸다. 기사를 내려 사진을 보았다.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이 몇 장 있었는데 얼굴 생김새가 완전히 하준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중 한 장은 하준이 손에 칼을 들고 얼굴과 손이 온통 피에 물든 모습이었다. 어린아이인데도 눈을 미친 듯이 부릅뜬 모습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경찰에게 체포된 사진과 하얀 옷을 입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진도 있었다.-그런 병이 있대. 우리 동네에도 저 병 때문에 살인한 사람 있었어. 완전 무서워-개무섭. 자기 유모를 죽인 거임? 완전 도랏!-아니 왜 안 가둬 두고 정신병원에서 내보낸 거임? 또 사람 해치면 어떡해? 저런 병은 계속 약 먹어야 재발 안 한다던데…-지금 여하그룹 만들었다며? 저런 정신병자가 회사 경영해도 되는 거야?-와이프는 쟤 환자인 거 아나
여름은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가 서재 책상 서랍을 열어 약병을 꺼내 보았다.얼른 검색해보니 그중 2병은 신경안정제와 향정신성 약물이었다.‘그 뉴스가… 진짜야?자기를 돌봐주던 유모를 죽이고 날 그렇게 해쳤으니 앞으로도….’온몸이 떨렸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사모님, 회장님이 안 오시는데 전화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이진숙이 올라왔다가 여름의 손에 들린 약병을 보더니 표정이 바뀌었다.“그 약은….”“하준 씨 어려서부터 자라는 거 다 봤다고 하셨죠? 그러면… 정신질환 있는 것도 다 아셨어요?”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이진숙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게….”“지금 인터넷에 다 떠돌아요.”여름이 휴대폰을 열어 보여주었다.“이게 다 사실이에요?”이진숙은 사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누가 이런 걸… 너무 하네. 사모님, 회장님을 믿으셔야 해요. 회장님은 좋은 분이세요.”“하지만 평소에도 성격이 폭력적이고 화도 잘 내고 극단적이잖아요. 그리고 이 약이 그 증거 아닌가요?"여름은 약병을 꼭 쥐고 중얼거렸다.“사실 나는 평소에도 너무 무서워요. 그때 하준 씨에게 다치고 나서는 너무 두렵다고요. 그냥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그래요. 말씀드릴게요. 다른 사람들처럼 회장님을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이진숙이 한숨을 쉬었다.“그게 회장님이 8살 때 발병했어요. 그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을 때예요. 어머님은 도련님(우리 회장님 말이에요.)을 본체만체했고 할아버지는 사업에만 몰두하는 차가운 분이셨죠. 할머니는 도련님을 아껴주셨지만 돌봐야 할 자식도 많고 손자도 많았죠. 게다가 접대에 교제에 바쁘셨으니 도련님 신경 쓸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 유모가 도련님을 학대하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거예요.”“학대요?”여름은 깜짝 놀랐다.그래요. 도련님은 어렸을 때 불안이 좀 높아서 툭하면 울고불고했거든요. 사실 그냥 어린애잖아요. 그런데 유모는 그게 짜증 났던 거예
“회장님은 지금….”상혁은 초조한 듯했지만 차마 입을 못 열었다.“이모님 말씀 들었어요. 하준 씨 병은 상관없어요.”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여름이 말했다.“회장님이 뉴스를 보셨는데 혼자서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여기저기 찾아보고는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정서가 불안해서 병이 재발했을 것 같아요. 어머니께 가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어머님께요?”“네. 아까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시고 ‘이건 어머니가 벌인 짓이야’뭐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어머님과 부딪힐 때마다 회장님이 제어를 잘 못 하시는데…”상혁이 초조한 듯 말을 이었다.“지금 회장님 어머니께 가는 길입니다”“주소 보내주세요. 저도 바로 갈게요.”여름은 차 열쇠를 가지고 차에 뛰어올랐다.******개인 별장.최하준의 정신병력 관련 기사를 보자마자 최란은 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사진 네가 유출한 거 아니니?”“언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그 사진은 우리 집에만 있는 거야. 너 말고 또 우리 집에서 누가…?”최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는 보디가드가 쓰러져 있고 최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얘….”“따라오세요.”하준은 거칠게 최란을 끌고 옥상으로 갔다.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서 최민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옥상, 산발이 된 최란이 물었다.“얘, 대체 뭘 어쩌려고… 앗!”하준이 갑자기 최란을 옥상 가장자리로 떠밀었다.“내 이전 병력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어쩌다가 이런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을까?”하준이 최란을 꽉 움켜쥐고 소리쳤다.최란은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동공이 확장됐다.“내가 그런 게 아니야….”“지난번에도 이걸로 날 협박했잖아요?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합니까?”하준의 두 눈에 검붉은 빛이 돌았다.“그저 눈에 양하밖에 없죠. 최양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시잖
”하준아, 진정해라. 난 네 에미야.”최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금 넌 천륜을 어기는 짓을 하고 있어.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할 거다.”“흥, 손가락질은 이미 받고 실컷 받고 있습니다. 대체 날 왜 낳았나요? 당신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에요.”최하준은 미친 듯 소리쳤다. 최란은 상반신이 뒤로 한참 밀린 채 허우적거렸다.“정말 날 죽일 셈이니? 미쳤구나.”“네, 미쳤어요. 어머니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습니까?”하준은 다시 흥분했는지 자신을 컨트롤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닫던 중에 갑자기 강여름이 비명이 들려왔다.“그만 해요!”하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자신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여름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지쳤어. 이젠 너무 지쳤다고.’하준은 병이 재발하고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젠 가슴속에 악만 남았다.전에는 그래도 최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정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이제 다시는 그 하얀 정신병원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그곳은 영원히 하얀 벽만 있는 곳이었다.아무도 하준에게 관심도 애정도 주지 않았다.“이리 와요.”여름이 한 걸음 한 걸음 숨도 못 쉬고 하준에게로 다가갔다.“그만, 더 다가오지 말아요.”하준이 여름에게 고함쳤다.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난 병이 있어. 당신을 다치게 할 거야. 이제 다 알잖아?”여름은 하준의 그런 낯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난 무섭지 않아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사람은 없어요. 당신 잘못도 아니에요. 당신에게 상처 준 사람이 잘못한 거지.”“안 믿어. 그만 둬.”하준이 고개를 저었다.“예전에 어머니도 그런 소리로 날 속였었어. 그러더니 날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버렸다고.”최란은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그때 네 상태는 병원에 보내서 치료하지 않으면…”“시끄러!”하준은 갑자기 더 울컥한 듯했다.“당신이 날
최란을 잡고 있던 하준이 손에 힘이 풀렸다. 바닥으로 스르륵 쓰러졌다.여름이 바로 하준을 안았다.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약속할게.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깨어나면 당신이 좋아하는 거 만들어 줄게요.”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펴지더니 기절했다. 가만히 잠든 아이처럼. 그 난리를 치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최란은 마침내 구조된 사람처럼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한참 동안 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최양하가 달려와 최란을 붙잡았다.“제가 이미 정신병원에 연락해 놨어요. 바로 와서 데려갈 거예요.”최란은 깜짝 놀랐다.여름이 화난 눈으로 최양하를 노려봤다.“누가 전화하래요?”불쾌하다는 듯 최양하가 답했다.“그 난리를 치는데 치료 받으러 보내야죠. 그러다 또 사람 죽으면 어떡합니까?”“그래. 정말 너무 무섭더구나.”추동현이 최란의 손을 잡고 덜덜 떨었다.“정말 너무 놀랐다니까요.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요. 이번엔 당신이었지만, 다음에 발병하면 또 누가 될지도 모르….”추동현은 말끝을 흐렸다. 듣다 보니 최란은 마음이 흔들렸다.“역시 병원에 보내서 치료하는 게 좋겠어. 안 해봤던 것도 아니고….”여름은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준 씨 말 못 들으셨나요? 전에 하준 씨를 속이고 입원시킨 바람에 상처받았잖아요. 어머니로서 아픈 사람을 그 싸늘한 병원에 보내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으세요?”최란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분노가 떠올랐다.최양하가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이 뭘 압니까? 형을 가둬두지 않으면 또 사람을 해칠 거라고요. 당신을 해칠지도 몰라요.”“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건 내 문제예요.”여름은 울컥했다.“말을 참 쉽게 하시는군요. 본인이 갇혀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거겠지. 어려서부터 부모님 사랑만 받으며 자랐겠죠. 어머님은 좋다는 건 뭐든 다 해줬을 테니까요. 하지만 하준 씨는 어땠을까요? 정신병은 왜 걸렸겠어요? 당신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준 씨는 혼자서 옷장에 갇혀 있었어요.
최란은 아주 먼 옛날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제 보니 하준이 마음에 상처가 많았구나.’최란은 확실히 하준의 존재 자체가 짜증 났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것이 싫을 수밖에 없었다.“사진은 네가 유포했니?”최란이 인상 쓰며 물었다.“내일 여하에서 신제품 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보니 식구들은 너 아니면 네 이모를 의심하고 있다.”“전 아니에요.”최양하는 좀 화가 났다.“아무리 그래도 형인데요. 안 그래도 병도 있는 사람한테 제가 그렇게까지 하겠어요?”최란은 머리가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아들 성격이야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그렇다면… 정말 최민이 한 짓인가?’“형이 저 모양인데 내일 발표회는 할 수 있을까요?”최양하가 갑자기 주저하며 물었다.최란이 최양하를 노려보았다. 최민을 만나야 했다.******이주혁은 하준을 데리고 자기 병원으로 가 검사하고 진정제를 놓아주었다.전에는 이주혁이 그렇게 오만하고 싸늘하며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더니 오늘은 어째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하준이가 당신이랑 사귄다는 말을 듣고 솔직히 난… 하준이가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주혁이 갑자기 웃었다.“그런데 오늘 보니 그런 생각한 게 좀 부끄럽네요. 하준이가 여름 씨를 그렇게 아낄 만하군요.”여름은 친구니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럼 이제는 팔에 저 상처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주혁이 쓴 웃음을 지었다.“이제 대충 아시겠지만 하준이는 자제가 안 될 때마다 자해를 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인데 매번 여름 씨랑 관계가 있었죠.”여름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한 번은 아침에 하준이가 여름 씨랑 싸웠을 때죠. 걔는 밖으로 나와 차에서 자해를 했어요. 다른 한 번은 여름 씨를 별장에서 구한 뒤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죠.”여름은 생각났다. 처음은 여름이 하준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화가 나서 나갔을 때였다. 두 번째는 같이 차에 타고 있다가 갑자기 내렸었다. 여름은 그때
여름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렇죠. 아주 미워 죽는 게 맞죠. 동성에서는 날 안 믿어주고, 허구한 날 괴롭히고, 상처 주고… 하지만 최하준에게 일이 났다는 얘기를 들으니 너무 걱정이 되더라고요. 불행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도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최하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여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을 속일 수는 없더라고요.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내다 보니 점점 더 최하준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요.”의식이 없이 잠든 하준을 애틋하게 쳐다봤다.‘즐겁지 못한 과거는 그냥 흘러가게 둬요. 이제부터는 내가 잘해줄게요.’이제 서경주도 혼수상태고 하준을 돌볼 유일한 가족도 여름이 되었다.이주혁은 흐뭇해했지만, 상혁은 걱정이 많았다.“회장님이 일을 못하신다면 내일 발표회는 어떡하죠? 게다가 지금 병에 관련해서 찌라시가 퍼져나가면 진정시킬 사람도 없고요.”여름이 흠칫했다.“여하 그룹은 다른 책임자가 없나요?”“계시기야 계시지만 발표회는 회장님이 직접 하신다고 이미 공지가 나간 상태인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생겨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논란이 될 텐데 여하의 장래에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겁니다.”여름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생각하더니 벌떡 일어났다.“내일은 제가 대신하죠. 아내니까 도울 의무가 있어요."“하지만내일 발표회에서는 기자들이 회장님 병력에 관해서도 물어볼 텐데요.”“내가 답하면 되죠.”여름이 예리한 시선으로 상혁을 돌아봤다.“자료 좀 수집해 주세요. 사람들에게 최하준이 정말 정신병으로 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겠어요.”상혁은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감동을 받았다.‘드디어 우리 회장님을 아껴주는 사람이 나타났구나.’******다음날.바다를 마주 보는 별장, 봄꽃이 한창이다.침대에서 밤새 푹 잔 하준이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옷도 안 입고 입구로 후다닥 걸어갔다.이때 마침 문이 열리더니 상혁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회장님 깨셨군요.”하준은 상혁을 밀치더니 1, 2층을 돌아보고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