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란은 아주 먼 옛날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제 보니 하준이 마음에 상처가 많았구나.’최란은 확실히 하준의 존재 자체가 짜증 났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것이 싫을 수밖에 없었다.“사진은 네가 유포했니?”최란이 인상 쓰며 물었다.“내일 여하에서 신제품 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보니 식구들은 너 아니면 네 이모를 의심하고 있다.”“전 아니에요.”최양하는 좀 화가 났다.“아무리 그래도 형인데요. 안 그래도 병도 있는 사람한테 제가 그렇게까지 하겠어요?”최란은 머리가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아들 성격이야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그렇다면… 정말 최민이 한 짓인가?’“형이 저 모양인데 내일 발표회는 할 수 있을까요?”최양하가 갑자기 주저하며 물었다.최란이 최양하를 노려보았다. 최민을 만나야 했다.******이주혁은 하준을 데리고 자기 병원으로 가 검사하고 진정제를 놓아주었다.전에는 이주혁이 그렇게 오만하고 싸늘하며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더니 오늘은 어째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하준이가 당신이랑 사귄다는 말을 듣고 솔직히 난… 하준이가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주혁이 갑자기 웃었다.“그런데 오늘 보니 그런 생각한 게 좀 부끄럽네요. 하준이가 여름 씨를 그렇게 아낄 만하군요.”여름은 친구니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럼 이제는 팔에 저 상처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주혁이 쓴 웃음을 지었다.“이제 대충 아시겠지만 하준이는 자제가 안 될 때마다 자해를 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인데 매번 여름 씨랑 관계가 있었죠.”여름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한 번은 아침에 하준이가 여름 씨랑 싸웠을 때죠. 걔는 밖으로 나와 차에서 자해를 했어요. 다른 한 번은 여름 씨를 별장에서 구한 뒤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죠.”여름은 생각났다. 처음은 여름이 하준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화가 나서 나갔을 때였다. 두 번째는 같이 차에 타고 있다가 갑자기 내렸었다. 여름은 그때
여름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렇죠. 아주 미워 죽는 게 맞죠. 동성에서는 날 안 믿어주고, 허구한 날 괴롭히고, 상처 주고… 하지만 최하준에게 일이 났다는 얘기를 들으니 너무 걱정이 되더라고요. 불행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도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최하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여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을 속일 수는 없더라고요.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내다 보니 점점 더 최하준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요.”의식이 없이 잠든 하준을 애틋하게 쳐다봤다.‘즐겁지 못한 과거는 그냥 흘러가게 둬요. 이제부터는 내가 잘해줄게요.’이제 서경주도 혼수상태고 하준을 돌볼 유일한 가족도 여름이 되었다.이주혁은 흐뭇해했지만, 상혁은 걱정이 많았다.“회장님이 일을 못하신다면 내일 발표회는 어떡하죠? 게다가 지금 병에 관련해서 찌라시가 퍼져나가면 진정시킬 사람도 없고요.”여름이 흠칫했다.“여하 그룹은 다른 책임자가 없나요?”“계시기야 계시지만 발표회는 회장님이 직접 하신다고 이미 공지가 나간 상태인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생겨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논란이 될 텐데 여하의 장래에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겁니다.”여름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생각하더니 벌떡 일어났다.“내일은 제가 대신하죠. 아내니까 도울 의무가 있어요."“하지만내일 발표회에서는 기자들이 회장님 병력에 관해서도 물어볼 텐데요.”“내가 답하면 되죠.”여름이 예리한 시선으로 상혁을 돌아봤다.“자료 좀 수집해 주세요. 사람들에게 최하준이 정말 정신병으로 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겠어요.”상혁은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감동을 받았다.‘드디어 우리 회장님을 아껴주는 사람이 나타났구나.’******다음날.바다를 마주 보는 별장, 봄꽃이 한창이다.침대에서 밤새 푹 잔 하준이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옷도 안 입고 입구로 후다닥 걸어갔다.이때 마침 문이 열리더니 상혁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회장님 깨셨군요.”하준은 상혁을 밀치더니 1, 2층을 돌아보고
이주혁이 말을 이었다.“카메라 앞에서 발작이 오면 그야말로 회사의 미래는 없어지는 거야. 이제 평생 사업은 못 하게 돼.”“그만해.”하준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여름 씨를 믿어. 여름 씨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이주혁이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라이브 앱을 열었다.“잘하고 있는지 같이 보자고.”이미 동시접속자 수가 어마어마했다.여름은 검은 수트를 입고 연단에 올랐다.처음으로 최하준이 아내로서 공개장소에 나서는 것이었다.여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국내 최고의 신랑감이 사랑하는 아내는 엄청난 미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강여름의 실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실시간 채팅창에 난리가 났다.-뭐야? 얼굴 왜 저래?-진짜 괴물처럼 생겼어.-최하준 미쳤다더니 시력에도 이상 생김?이주혁은 깜짝 놀라서 실시간 채팅창을 닫아버렸다.그러나 하준은 이미 다 봐버렸다. 또 화가 폭발했다.“이것들이! 미녀를 보러 왔어 발표회를 보러 왔어, 어? 누군지 다 적어 놔. 가만 안 둬.”상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화제를 바꿔보려고 했다.“어… 아, 사모님 말씀 시작하시네요. 진짜 멋있는데요.”하준이 상혁에게 눈을 부라렸다.‘나도 눈이 있는데 그걸 네가 굳이 말해야 내가 아는 줄 알아?’어쨌거나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여름을 보는 건 하준도 처음이었다.오늘 여하의 발표회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여름은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잡더니 톡톡 쳐서 확인을 해보고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최하준 회장의 와이프 강여름입니다. 오늘 여하에서 개최하는 발표회에 와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저희는 신규 반도체를 개발해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원래 최하준 회장께서 직접 소개를 드릴 예정이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늘 자리를 함께하지 못해….”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제일보 기자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정신병 재발 때문입니까? 정말 어렸을 때 보모를 살해했나요? 제대로 처벌 받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심신 미약 때문이었나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그러면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최하준 씨의 병에 대해서라면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하준 씨가 이유 없이 보모를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최하준 씨가 8살이었을 당시 치료과정입니다. 장기적인 학대로 인한 우울증과 PTSD입니다. 네, 보모에게 장기적으로 심각한 학대에 시달렸습니다.여름이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오래된 영상이 푸른 스크린에 올라왔다.경찰이 머리를 산발하고 주름진 얼굴을 한 중년 부인에게 질문하는 영상이었다.“평소 울면 어떻게 대했습니까?”“잡아서 옷장에 집어넣고 잠갔어요.”“얼마나 감금했습니까?”“보통 하루 이틀이오. 그 집 식구들은 아무도 신경 안 쓰더라고요. 아무도 몰랐어요. 이틀 굶어도 애가 죽지는 않더라고요.”경찰이 울컥했다.“겨울에도 그랬습니까?”“네. 얼어서 기절할 때도 있더라고요. 그러면 끌고 와서 식구들한테 애가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가 놀았다고 말하면 다들 믿던데요. 애가 워낙 지랄 맞아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5분짜리 영상이 끝나고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일부 울분을 터트리는 기자도 있었다.여름은 눈시울을 붉힌 채 심호흡을 했다.“중요한 것은 보모를 살해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3일 밤낮을 갇혀 있다가 잠시 제정신이 아닌 채로 반항하다가 다치게 한 겁니다. 그 뒤로 병원에서 3년을 입원해 치료받았습니다. 이후 치료 효과를 인정받고 퇴원했습니다.”“하지만 어제 최하준 회장의 병력과 자극적인 사진이 퍼졌는데요. 그렇습니다. 신제품 발표를 앞두고 너무 긴장해서 집에서 나오던 길에 회장님이 쓰러졌습니다. 발표회가 취소될 뻔했어요.”여름의 시선이 갑자기 사나워졌다.“악의적으로 이런 사진을 유포하다니 상처 입은 사람에게 소금 뿌리는 격이죠. 사업에 있어 경쟁은 할 수 있지만 도의적 선은 넘으면 안 되죠. 최하준 회장은 그동안 꾸준한 기부활동을 해왔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수많은 직원이 가정을 부양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최하준 회장이 대체 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경제일보 기자가 다급히 외쳤다.“FTT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괜찮아요.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언론사라고 무단으로 개인의 사적인 사진을 인터넷에 함부로 유포해서 정신적 피해를 입히면 안 되죠. 이미 경찰에 신고했습니다.”여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분 밖으로 모셔주세요. 경찰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경제일보 기자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경비는 뭐라고 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끌고 나가버렸다.전광석화 같은 일 처리에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이제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블랙 정장을 입고 단상에 선 여름은 서늘한 표정에 온몸에서 풍기는 독보적으로 싸늘한 카리스마에 다들 두려움을 느꼈다.여름은 모두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개인적인 일이 해결됐으니 이제 다시 발표회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 제품이 원래 FTT에서 개발하던 것이 아닌가 하는는 점을 궁금해 하는 분도 계실 텐데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심희철 팀이 개발한 제품의 소유권은 최하준 회장 1인에게 속한 것입니다. 현재 최하준 회장은 FTT를 떠났으므로 심희철이 연구 개발한 제품의 소유권을 찾아오기로 한 것입니다.”폭탄 같은 발언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어느 회사에서도 분쟁에 휩싸일 수 있는 FTT와는 협력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기자들이 놀라서 물었다.“그러면 최하준 회장이 FTT와 정면으로 붙는 건가요?"“전쟁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하그룹에서 자기 소유권을 되찾아오는 것뿐입니다.”여름이 웃었다.“이제부터 관련 자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해변 별장, 최하준은 라이브 방송 속의 당당하고 화끈한 여름을 보며 자랑스러움에 입꼬리가 올라갔다.‘역시 내 와이프라니까.’그 작고 가냘프던 여름이 이렇게나 성장하다니, 이제는 용기와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전에는 늘 구해주고 지켜줘야 하는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옆에 설 수 있겠는
하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랑 그렇게 오래 같이 일을 했으면서 그딴 일도 못 해내면 안 되지. 못 하면 나랑 같이 못 다녀.”“……”상혁과 주혁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지금 하준의 와이프인 여름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능력자인 점은 사실이었다.******발표회는 3시간 동안 계속됐다.끝나고 나서 여름은 차에 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기사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고 보니 하준이 수영장 옆 풀밭에 서 있었다.흰 셔츠에 편안한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셔츠를 바지에 넣지 않아서 더욱 편안해 보였다.바닷바람이 불어와 옷자락과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산들산들 흔들었다.언뜻 보면 열 살은 어려진 것 같았다. 대학생 같은 하준을 보니 순수해 보였다. 다만 안색이 너무 창백했다.여름은 마음이 약해졌다.한 걸음 한 걸음 하준에게 다가가 기다란 속눈썹을 올렸다.“미안해요. 사람들 앞에서 당신 병력을 밝혀 버렸어요. 내가 미워요?”하준이 여름의 머리를 쓸더니 와락 품에 안았다.“내 와이프 점점 더 근사해지네.”“화… 안 나요?”여름은 조금 놀랐다. “병력이 알려지는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당신이 날 떠나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 없어.”하준이 여름의 얼굴을 받쳐 들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정말로 내 곁에서 함께 치료하는 걸 봐줄 거야?”“응.”여름이 단호하게 끄덕였다.“하지만 언제 다 나을지도 모르는데. 평생 못 고칠 지도 몰라. 게다가 당신을 다치게 한 적도 있잖아. 어떤 때는 나도 통제가 안 되는 내 자신이 두려워.”하준의 눈에 확 초조함과 고통이 스쳐 갔다.“쭌, 치료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여름이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우리 아이를 가져요.”하준이 깜짝 놀랐다.“전에는 싫다고 했잖아?”“이주혁 씨와 상의해 봤어요. 가정을 이루고 싶잖아. 아이가 생기면 우리 두 사람의 가정이 더 완벽해질 거예요.”여름은 고개를 들어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아이가 생기면
하준은 주방으로 가서 밥을 담았다. 여름이 웃으면서 이진숙에게 속삭였다.“환자인 건 알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정상으로 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조심스러워할수록 하준 씨도 더 민감하고, 감정적이고 예민해질 것 같거든요.”이진숙이 깜짝 놀랐다.“사모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그렇네요. 회장님도 아직 안 드셨는데 식사 좀 하게 해주세요.”곧 하준이 밥 한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자긴 안 먹어요?”“방금 먹어서 별로 배가 안 고파.”하준이 여름 앞에 밥그릇을 놓아주었다.“거짓말! 이모님이 자기 밥 먹어야 한다고 하던데.”여름이 억지로 하준을 끌어다 앉혔다.“꼭 먹어야 해.”“밥이 안 넘어가.”“내가 먹여줄게요.”여름이 새우를 집어 하준의 입에 넣었다.“……”‘뭐지? 그 맛없던 새우가 갑자기 맛있네?’“하나 더.”새우 하나를 꿀꺽 삼키더니 졸랐다.“혼자서 먹어 봐요.”여름이 젓가락을 쥐어 주었다.“싫어. 입맛이 없단 말이야.”하준이 얼굴을 홱 돌리며 극혐 얼굴을 했다.여름은 진땀이 났다.‘하아아… 새우 먹는 거 보니까 입맛 없는 거 아닌데?내가 먹여주면 뭐 맛이 다르냐?어쨌거나 뭘 먹여야 하니까….’여름은 할 수 없이 직접 먹이기로 했다.어느새 여름이 한 그릇을 먹는 동안 하준은 두 그릇을 먹었다.이진숙이 보더니 너무 기뻐했다.“회장님이 이렇게 드시는 거 너무 오랜만에 보네요. 역시 사모님이 먹여 드려야겠어요.”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전에는 왜 이렇게 유치한 최하준의 모습을 몰랐을까?’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꾹 쥐는 느낌이 들었다돌아보다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하준의 눈과 마주쳤다.“아까 밥 먹고 나면 안마해달라면서요.”“어?.... 아, 응.”여름은 흐뭇했다.‘밥 먹인 보람이 있군.’잠시 후 여름은 깩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살살~ 아파요.”“살살 하는 건데.”“아니, 그만, 그만! 아파 죽겠네.”여름이 후다닥 하준의 손에서 벗어났다.“다른 거 하죠. 이따가 나 샤워할 건데 그 힘으로 내
여름이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정말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부끄러웠다.“됐어요. 내가 할게.”얼른 가서 하준을 밀어내려고 했다.“안 돼.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직접 느껴봐야 해.”하준이 새빨개진 여름의 얼굴을 보고 일부러 놀렸다.“제대로 빨 줄도 모르면서.”여름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그렇게 문지르면 안 돼요. 다 망가지겠네.”“그럼 가르쳐 주던가.”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린애처럼 얌전히 가르쳐 달라는 표정을 했다.여름은 마침내 자기가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을 깨달았다.“얼른.”하준이 재촉했다.여름은 할 수 없이 울상을 하고 쪼그리고 앉아 하준을 가르쳤다.“이렇게 뒤집어서 반대쪽으로…”가르치는 대로 조심스럽게 자기 속옷을 빠는 하준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빨래를 널더니 하준이 돌아봤다. 복잡하면서도 감개무량한 여름의 눈을 보더니 우습기도 하고 슬쩍 짜증도 났다.“그런 눈으로 볼 일인가?”“당연하죠. 남이 내 속옷 빨아준 거 처음이거든요.”여름이 입을 비죽거렸다. 전에 한선우와 몇 년을 사귀었지만 두 사람은 이 정도까지 친밀하지는 않았다.남친이 속옷을 빨아준다는 것은 남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함께 살고 나서 그 거만한 최하준이 자기 빨래를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당신 속옷 빨래해 줄 남자가 더 필요한 건 아니겠지?”하준이 여름을 안아 침대에 올려놓으며 경고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한선우와 양유진이 당신 속옷을 안 빨았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그 손모가지를 그냥….”“그럴 일 없네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최하준 밖에 없으니까.”여름이 하준의 목에 손을 걸더니 먼저 입을 쪽 맞췄다.“쭌, 사랑해요.”여름의 가벼운 키스에 하준은 심장이 떨렸다.손을 뻗어 여름의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진짜?”“내가 거짓말한 적 있던가?”여름은 마음이 답답했다.‘완전 진심으로 고백하는 거라고, 이 바보.’“예전에!”하준의 눈에 원망스러운 빛이 돌았다.“전에 나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