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정말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부끄러웠다.“됐어요. 내가 할게.”얼른 가서 하준을 밀어내려고 했다.“안 돼.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직접 느껴봐야 해.”하준이 새빨개진 여름의 얼굴을 보고 일부러 놀렸다.“제대로 빨 줄도 모르면서.”여름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그렇게 문지르면 안 돼요. 다 망가지겠네.”“그럼 가르쳐 주던가.”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린애처럼 얌전히 가르쳐 달라는 표정을 했다.여름은 마침내 자기가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을 깨달았다.“얼른.”하준이 재촉했다.여름은 할 수 없이 울상을 하고 쪼그리고 앉아 하준을 가르쳤다.“이렇게 뒤집어서 반대쪽으로…”가르치는 대로 조심스럽게 자기 속옷을 빠는 하준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빨래를 널더니 하준이 돌아봤다. 복잡하면서도 감개무량한 여름의 눈을 보더니 우습기도 하고 슬쩍 짜증도 났다.“그런 눈으로 볼 일인가?”“당연하죠. 남이 내 속옷 빨아준 거 처음이거든요.”여름이 입을 비죽거렸다. 전에 한선우와 몇 년을 사귀었지만 두 사람은 이 정도까지 친밀하지는 않았다.남친이 속옷을 빨아준다는 것은 남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함께 살고 나서 그 거만한 최하준이 자기 빨래를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당신 속옷 빨래해 줄 남자가 더 필요한 건 아니겠지?”하준이 여름을 안아 침대에 올려놓으며 경고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한선우와 양유진이 당신 속옷을 안 빨았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그 손모가지를 그냥….”“그럴 일 없네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최하준 밖에 없으니까.”여름이 하준의 목에 손을 걸더니 먼저 입을 쪽 맞췄다.“쭌, 사랑해요.”여름의 가벼운 키스에 하준은 심장이 떨렸다.손을 뻗어 여름의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진짜?”“내가 거짓말한 적 있던가?”여름은 마음이 답답했다.‘완전 진심으로 고백하는 거라고, 이 바보.’“예전에!”하준의 눈에 원망스러운 빛이 돌았다.“전에 나한테
하준이 웃었다.“알겠어. 아주 노래 가사를 외우는구먼. 처음 날 만났을 때 느낌부터 시작해서 읊어 보시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보자. 다 꺼내 봐.”“……”여름은 이제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결국 어쩔 수 없이 하준의 목을 안고 애교를 떨었다.“내가 잘못했어요, 여보. 대체 언제 사랑에 빠졌는지 말하라니, 그걸 어떻게 알아? 같이 살면서 순간순간, 그리고 내가 위험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날 구해줄 때마다 빠져들었겠지.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을 사랑하고 있던 걸.”하준은 완전히 여름에게 녹아버렸다.“진짜야?”“그럼.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내가 평생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매력적인 사람이었어요. 평소에 성격이 좀 안 좋아서 그러지. 어쨌든 매일 나에게 미운 말만 골라서 해서 날 울리고 그랬잖아. 안 그랬으면 훨씬 더 빨리 사랑하게 됐을 텐데.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거든.”여름이 두 손으로 하준의 얼굴을 받쳤다. 검은 눈동자에 하준의 모습이 가득했다.하준이 여름의 입술에 쪽하고 뽀뽀했다.“요, 요, 요 입으로 사람 낚는 기술 보라고. 전에는 대체 남자를 얼마나 낚은 거야?”“당신밖에 없는데. 앞으로도 당신밖에 없을 거고.”여름이 하준을 꼭 안았다.하준의 목젖이 꿀꺽했다.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자꾸 이러면 아기 만들고 싶어진다니까.”여름이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끄덕하려는 찰라, 하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하준이 슬쩍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머리끝까지 화가 난 최대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놈의 자식! 넌 네 마누라 간수도 못 해? 감히 FTT에서 반도체 소유권을 가져가겠다니? 어디서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까불어?”여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하준이 웃으며 여름을 쓱 쳐다봤다. 목소리는 사뭇 냉정했다.“제 와이프의 생각이 제 생각입니다.”“네가 정말 나 숨 넘어가는 꼴을 보겠다는 거냐?”최대범의 목소리가 떨렸다.“할아버지, 저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FTT쪽에
”앞에 세 가지는 말도 안 된다.”최대범이 깜짝 놀랐다.“추신그룹 올해 재무재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추신그룹만 내내 성적이 저조했는데 평소 가만히 실력을 숨기고 있다가 최양하가 무대에 올라오더니 5가지를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추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였을까요?최대범은 흠칫했다.“일단 FTT가 무너지면 추신이 절대적으로 윗자리로 치고 올라갈 겁니다. 하지만 제가 FTT를 장악하고 나면 우리 집안의 지위는 변함없을 겁니다. 저야 뭐 별 상관 없습니다. FTT를 제게 넘겨주지 않는다고 해도 제 지위는 흔들림 없을 겁니다. 다만 FTT의 생사는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이 되겠죠.”“하지만 넌 병이….”“못 믿으시겠다면 그만 두겠습니다. 할 일이 있어서 이만….”그렇게 말하고 끊으려고 하자 최대범이 급히 말했다.“그래, 난 이제 늙었으니 너희 젊은 애들과는 싸울 수가 없지. FTT를 넘기마. 하지만 회사는 잘 경영해주고, 네 이모는… 걔들이 너에게 잘못했지. 나도 용서해달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구나. 하지만 다들 한 가족 아니냐, 너무 뚝 끊지는 말자꾸나.”“저는 언제나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원수로 갚는 사람이었어요.”“얘야….”“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전화를 끊은 하준의 눈은 한없이 싸늘했다.여름은 하준이 그런 싸늘한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준의 품에 덥석 뛰어들어 꼭 안으며 말을 돌렸다.“추신의 자산 규모가 정말 그 정도예요?”“어떨 것 같은데?”하준의 눈에서 싸늘함이 서서히 가시고 대신 따스함이 돌아왔다.“조금 믿을 수가 없네. 추신은 내내 그렇게 별볼일 없어서 주민그룹이랑 쿠베라가 더 대단한 줄 알았거든요.”“응, 추신이 워낙 발톱을 잘 숨기고 있었지. 이번에 약혼식에서 추성호가 너무 거만하게 굴지만 않았으면 내가 가서 뒤져볼 일이 없어서 몰랐을 거야.”하준은 생각에 잠겼다.“추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내 의부도 겉보기처럼 간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여름은 완전히 깜짝 놀랐다.“추동현
”하준이 말이 지금 추신 자본 규모가 우리 나라에서 손에 꼽는 수준일 거라는데.”최대범이 갑자기 말했다.장춘자가 놀랐다.“그럴 리가?”“아직도 20년 전 추신만 생각하는 거요? 그 때만 해도 내가 동현이를 우습게 생각했지. 음악에서는 프린스니 뭐니 했지만 가업은 별볼일 없었잖아. 그래서 란이가 추신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지. 나도 다 알면서도 못 본 체해줬어. 하지만 하준이 말이 사실이라면 추신이 뭔가 꿍꿍이가 있어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구먼.”“그러네요. 지난 번에 약혼식 만해도 사부인은 몇 년째 추신 상황이 굉장히 어렵다면서 많이 도와달라고 하던데.”장춘자가 울컥했다.“전에 내내 하준이가 일을 열심히 안 해서 내 체면만 깎아 먹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하에게 FTT 경영을 맡긴 건데 양하가 이렇게 계속 친가라고 추신만 도와주다가는 FTT가 길가로 나앉을 판이야.”최대범이 그 길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이리로 한 번 건너오게.”한나절 만에 최대범이 FTT주식과 회장자리를 모두 최하준에게 양도한다는 이야기가 온 서울에 다 퍼졌다.온 가족이 본가로 모여들었다.최민이 제일 먼저 반대했다.“왜 이러세요? 왜 갑자기 FTT를 하준이에게 물려준다고 그러셔? 내가 그동안 아빠한테 어떻게 했는데?”“뭐라고?”그 말을 듣고 최대범은 등짝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아니, 걱정돼서 그러죠. 하준이가 날 미워하니까 걔가 회장자리 올라가면 분명 나랑 대립하게 될 텐데.”최민이 놀라서 얼른 최대범이 손을 꾹 잡아 누르며 말했다.“오빠랑 언니는 할 말 없어?”최진은 입을 비죽거렸다.“난 하준이랑 뭐 딱히 얽힌 건 없는데. 하준이에게 FTT를 안 맡기면 뭐, FTT 절단 나는 꼴을 보자는 거야? 지금 다들 비웃으면서 우리 회사 망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말은 잘도 하셔.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저렇게 쓸모가 없으니….”최민이 대놓고 최진을 욕했다.“입 다물어.”최대범이 짜증스럽게 최양하를 쳐다봤다.“양하는 어떻게 생각하니?최양하는 주먹
“뭐라고?”추성호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지금 엄청난 자금 들여서 생산라인 다 만들어 놨더니 인제와서 죽으란 소립니까?”“아니 뭘 또 죽기까지 해. 지금까지 번 것도 꽤 되잖아?”최양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최하준 어렸을 때 사진은 추신 쪽에서 흘러나온 거 아닌가?”“강여름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믿는 겁니까? 게다가 우리가 가족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사진을 구해요?”최양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추동현의 평소 행실로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하여간 우리 식구들이 죄다 날 의심하고 있어서 최하준이 회장으로 올라가고 나면 제일 먼저 나부터 해 넘기려고 들 텐데.”“됐어요. 어쨌든 어머님도 계신데. 어머님의 주식은 결국 당신이 물려받을 거 아닙니까?”이쪽 전화를 끝내자마자 추성호는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계획이 실패했습니다.”“그래. 내가 최하준과 최대범의 투지와 강여름을 모두 너무 얕잡아 봤어.”추성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강여름에 대해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화신 대표라고는 하지만 대표 자리에 앉은 지도 얼마 안 된다. 하지만 어제 라이브를 보니 전 세계로 송출되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도 침착했다. 심지어 청중과 국내 최고라는 FTT에 맞서면서도 내내 냉철하고 날카로웠다.하준의 병이 재발하고 나서 여름이 여하를 일부 떠받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왠지 약혼녀인 서유인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다르다지만 한 아버지 자식인데 서유인은 왜 저렇게 하찮아 보일까?’“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합니까?”“다행히 내가 애진작에 플랜B를 준비해 뒀었지. 이제 걔가 등장할 때가 됐군.”“기대하겠습니다.”추성호가 한껏 공손하게 답했다.‘이분의 작전 능력은 정말 감탄스러워. 얼마 안 가서 추신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 될 거야.FTT만 끝장난다면…’******다음날장춘자는 해변 별장으로 주식을 직접 들고 왔다.들어가서 보니 청소하는 이진숙을 제외하고는 아
장춘자는 눈물범벅이 되어 있을 하준을 상대할 각오를 하면서 왔는데 이렇게 평온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오다가 장춘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하준의 얼굴에서 온기가 싹 가시더니 방어적이고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장춘자는 철렁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여름이 시원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불쾌한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사뭇 평온한 말투였다.장춘자는 여름을 흘겨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준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내 와이프가 눈치 보게 만드실 거면 돌아가세요.”“얘가….”장춘자는 혈압이 확 올랐다.“난 네 할미다.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니?”“우리 식구들은 항상 내 상처에 칼을 꽂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번에 여름이 아니었으면 날 또 무자비하게 정신병원에 처넣었을 겁니다.”하준이 비꼬아 말했다.“정말 내게 조금이라도 가족의 정이라는 게 있다면 강여름 씨를 존중해 주시죠.”장춘자는 마음이 답답했다.여름이 상황을 보고 있다가 끼어들었다.“사실 얼굴까지 이 지경이 됐는데 화는 제가 내야죠. 설마 제가 FTT 정도 되는 집안 출신이 아니라고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장춘자는 입이 벌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하준이 먼저 말했다.“처음부터 내가 먼저 강여름에게 매달렸어요. 쓸데없는 생각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날 처음 만났을 때 강여름은 내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서유인이랑 사귀는 척했던 것도 다 내가 강여름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키려고 벌인 일입니다.”“어떻게 네가 유인이한테 그런 짓을 하니?”장춘자는 좀 화가 났다.“그렇게 서유인이 좋으시면 손녀로 입양하세요.”하준의 눈동차가 차가웠다.“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니? 유인이가 얼마나 괜찮은 애인에….”“강여름은 괜찮은 사람이 아니란 말씀입니까?”하준이 갑자기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둘 다 서경주의 딸입니다. 내 와이프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누구에게서 태어날지를 여름이가 정했나
“그건 위자영이 몇 억을 집어넣었으니까 그런 겁니다.”하준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모가 여름 씨 얼굴을 망치는 대가로 위자영이 지불한 거니까 다 허위 실적입니다.”장춘자는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이 정도로 끝나는 걸 고맙게 생각하세요. 할머니, 할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납니다.”하준이 일어섰다.“자식들 간수 잘하십시오. 하나는 남편에게 퍼줄 줄밖에 모르고, 하나는 허위 실적이나 만들어 내고,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건 무능하기 짝이 없고. 제가 없어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년에 발 뻗고 지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장춘자는 충격으로 몇 년은 팍삭 늙어버린 기분이었다.******12시 30분.여름이 다 된 음식을 들고 나와서 보니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일단 할머니께 밥을 담아 내드렸다.장춘자가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보더니 조금 놀랐다. 자기 집에서 셰프가 한 음식보다 가정식 느낌인데도 매우 진수성찬이었다.게다가 그렇게도 징글징글하게 밥을 안 먹던 최하준이 너무나 맛있게 식사하는 게 아닌가? ‘정말 맛있게 먹네….’장춘자도 보쌈 고기를 한 점 집어 보았다. 입에서 살살 녹는 게 아주 일품이었다.그런데 한 점 더 먹으려고 봤더니 하준이 얼마나 빨리 먹어 치웠던지 벌써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아유, 그만 먹어. 할머니 아직 잡숫지도 못했는데….”여름이 접시를 장춘자 앞으로 밀었다.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아, 좀 더 하지, 왜 요거밖에 안 했어?”“어제 저녁에도 먹었잖아? 이렇게 똑같은 것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여름이 나물을 집어 주었다.“영양을 균형 있게 섭취해야지. 편식하면 안 돼. 자꾸 이렇게 편식하면 다시는 밥 안 해줄 거야~.”“쳇, 그러면 할 수 없지.”뭘 먹어도 한두 젓가락 먹고 나면 상을 물리던 하준이 이렇게 얌전히 나물을 받아 밥 두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고 장춘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덩달아
“쭌, 나도 할머니가 계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야 왜 진작 할머니랑 더 시간을 보내지 못했나 후회가 되더라고요. 가족은 피로 연결된 존재잖아요. 떼내고 싶다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포용하고, 더 용서할 수 있어요.”여름이 하준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하준은 감동했다.가슴 밑바닥에서 흐르던 감정이 갑자기 마그마처럼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여름의 얼굴을 꼭 붙들고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자기, 미안해.”‘정말 너무 미안해. 내 가족이 당신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도 날 위해서 모두를 포용하겠다니….하지만 그러지 마.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내가 하나하나 다 갚아줄 거야.이모라도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어.’“언젠가는 내가 당신 얼굴 꼭 되돌려 줄게. 사랑해. 죽을 때까지, 죽으면 다음 생에서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해.”여름은 두 눈을 감았다. 이 순간, 너무나 든든하고 평온한 느낌이었다.‘얼굴이 어떠면 어때? 괜찮아. 최하준만 괜찮다면 난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다음 날.여름은 출근했다.상혁이 간호조무사 몇 명을 데리고 아주 이상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회장님, 병원에서 추천한 간호조무사들입니다.”책을 읽던 하준이 얼굴을 들었다.하준의 병은 하루 이틀에 좋아지는 병이 아니었다. 여름도 자기 일이 있는데 24시간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관리를 위해 집에 전문 간호 요원이 필요했다.그런데 하준의 시선이 한 간호조무사의 얼굴에서 멈추더니 몇 초간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이름이 뭔가?”하준이 너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상대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지다빈이라고 합니다.”“지다빈이라고?”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지안이란 사람이랑 압니까?”“사촌 언니인데요.”지다빈이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우리 언니를 아세요?”“……”‘안다 뿐이겠어?’하준은 속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그렇다며 이서그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