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자는 눈물범벅이 되어 있을 하준을 상대할 각오를 하면서 왔는데 이렇게 평온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오다가 장춘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하준의 얼굴에서 온기가 싹 가시더니 방어적이고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장춘자는 철렁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여름이 시원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불쾌한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사뭇 평온한 말투였다.장춘자는 여름을 흘겨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준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내 와이프가 눈치 보게 만드실 거면 돌아가세요.”“얘가….”장춘자는 혈압이 확 올랐다.“난 네 할미다.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니?”“우리 식구들은 항상 내 상처에 칼을 꽂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번에 여름이 아니었으면 날 또 무자비하게 정신병원에 처넣었을 겁니다.”하준이 비꼬아 말했다.“정말 내게 조금이라도 가족의 정이라는 게 있다면 강여름 씨를 존중해 주시죠.”장춘자는 마음이 답답했다.여름이 상황을 보고 있다가 끼어들었다.“사실 얼굴까지 이 지경이 됐는데 화는 제가 내야죠. 설마 제가 FTT 정도 되는 집안 출신이 아니라고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장춘자는 입이 벌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하준이 먼저 말했다.“처음부터 내가 먼저 강여름에게 매달렸어요. 쓸데없는 생각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날 처음 만났을 때 강여름은 내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서유인이랑 사귀는 척했던 것도 다 내가 강여름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키려고 벌인 일입니다.”“어떻게 네가 유인이한테 그런 짓을 하니?”장춘자는 좀 화가 났다.“그렇게 서유인이 좋으시면 손녀로 입양하세요.”하준의 눈동차가 차가웠다.“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니? 유인이가 얼마나 괜찮은 애인에….”“강여름은 괜찮은 사람이 아니란 말씀입니까?”하준이 갑자기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둘 다 서경주의 딸입니다. 내 와이프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누구에게서 태어날지를 여름이가 정했나
“그건 위자영이 몇 억을 집어넣었으니까 그런 겁니다.”하준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모가 여름 씨 얼굴을 망치는 대가로 위자영이 지불한 거니까 다 허위 실적입니다.”장춘자는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이 정도로 끝나는 걸 고맙게 생각하세요. 할머니, 할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납니다.”하준이 일어섰다.“자식들 간수 잘하십시오. 하나는 남편에게 퍼줄 줄밖에 모르고, 하나는 허위 실적이나 만들어 내고,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건 무능하기 짝이 없고. 제가 없어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년에 발 뻗고 지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장춘자는 충격으로 몇 년은 팍삭 늙어버린 기분이었다.******12시 30분.여름이 다 된 음식을 들고 나와서 보니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일단 할머니께 밥을 담아 내드렸다.장춘자가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보더니 조금 놀랐다. 자기 집에서 셰프가 한 음식보다 가정식 느낌인데도 매우 진수성찬이었다.게다가 그렇게도 징글징글하게 밥을 안 먹던 최하준이 너무나 맛있게 식사하는 게 아닌가? ‘정말 맛있게 먹네….’장춘자도 보쌈 고기를 한 점 집어 보았다. 입에서 살살 녹는 게 아주 일품이었다.그런데 한 점 더 먹으려고 봤더니 하준이 얼마나 빨리 먹어 치웠던지 벌써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아유, 그만 먹어. 할머니 아직 잡숫지도 못했는데….”여름이 접시를 장춘자 앞으로 밀었다.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아, 좀 더 하지, 왜 요거밖에 안 했어?”“어제 저녁에도 먹었잖아? 이렇게 똑같은 것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여름이 나물을 집어 주었다.“영양을 균형 있게 섭취해야지. 편식하면 안 돼. 자꾸 이렇게 편식하면 다시는 밥 안 해줄 거야~.”“쳇, 그러면 할 수 없지.”뭘 먹어도 한두 젓가락 먹고 나면 상을 물리던 하준이 이렇게 얌전히 나물을 받아 밥 두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고 장춘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덩달아
“쭌, 나도 할머니가 계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야 왜 진작 할머니랑 더 시간을 보내지 못했나 후회가 되더라고요. 가족은 피로 연결된 존재잖아요. 떼내고 싶다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포용하고, 더 용서할 수 있어요.”여름이 하준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하준은 감동했다.가슴 밑바닥에서 흐르던 감정이 갑자기 마그마처럼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여름의 얼굴을 꼭 붙들고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자기, 미안해.”‘정말 너무 미안해. 내 가족이 당신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도 날 위해서 모두를 포용하겠다니….하지만 그러지 마.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내가 하나하나 다 갚아줄 거야.이모라도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어.’“언젠가는 내가 당신 얼굴 꼭 되돌려 줄게. 사랑해. 죽을 때까지, 죽으면 다음 생에서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해.”여름은 두 눈을 감았다. 이 순간, 너무나 든든하고 평온한 느낌이었다.‘얼굴이 어떠면 어때? 괜찮아. 최하준만 괜찮다면 난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다음 날.여름은 출근했다.상혁이 간호조무사 몇 명을 데리고 아주 이상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회장님, 병원에서 추천한 간호조무사들입니다.”책을 읽던 하준이 얼굴을 들었다.하준의 병은 하루 이틀에 좋아지는 병이 아니었다. 여름도 자기 일이 있는데 24시간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관리를 위해 집에 전문 간호 요원이 필요했다.그런데 하준의 시선이 한 간호조무사의 얼굴에서 멈추더니 몇 초간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이름이 뭔가?”하준이 너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상대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지다빈이라고 합니다.”“지다빈이라고?”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지안이란 사람이랑 압니까?”“사촌 언니인데요.”지다빈이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우리 언니를 아세요?”“……”‘안다 뿐이겠어?’하준은 속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그렇다며 이서그
그 말을 듣고 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여기는 우연히 오게 됐나?”“그런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이번 시즌에 가장 근무 성적이 좋은 사람들만 뽑아서 후보로 보냈거든요.”하준은 끄덕였다. 마침내 마음에 의심을 걷어냈다.“영하는 지금 누가 최고 책임자지?”“백소영 씨입니다.”“남의 자리를 뺏어 놓고 아직 욕심을 놓지 못했군. 영하에는 반도체 공급하지 마.”“…알겠습니다.”상혁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오후 5시.여름은 조금 일찍 퇴근했다. 막 차에서 내리려는데 농구장에서 공 소리가 들렸다.여름의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하준이 두 손을 살짝 들고 점프했다. 깔끔하게 3점 슛이 들어갔다. 한참 그러고 놀았는지 등이 살짝 젖어 있었는데 활기차 보였다.여름은 넋을 잃고 하준을 바라보았다.학생 때는 한선우가 세상에서 농구를 제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의 하준과 비교해 보니 진짜 농구를 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짝짝짝!”농구장에 갑자기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름은 그제야 코트 가장자리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평범한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검은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어 올리고 있었다.“회장님 너무 멋지세요.”여자애가 물과 수건을 들고 다가갔다.“벌써 40분 지났어요. 이제 좀 쉬셔야죠.”“응.”하준이 물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저녁노을을 받은 두 사람의 모습이 눈부셨다.“쭌….”여름이 부르면서 얼른 다가갔다.하준이 돌아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자기, 오늘은 일찍 왔네?”“좀 일찍 퇴근했지. 혼자 심심할까 봐.”여름이 그 여자애를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말쑥하게 생기긴 했지만 예전의 자신의 미모만 못했다. 심지어 서유인보다도 못한 듯했다.여름은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혹시나 잃게 될까 싶어 속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여름도 예외가 아닌 듯했다.“안
여름은 마음이 좀 답답했다.‘남의 이름에 백지안처럼 ‘지’자가 들어갔다고 신경 쓰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그렇다고 엄청 대범한 사람인 척하기도 싫어서 대놓고 비죽거렸다.“어린애 말을 잘도 듣네.”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허리를 숙여 여름의 몸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뭐 타는 냄새 안 나? 질투심에 강여름 불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어쭈, 아주 이런 걸로 농담을 하시겠다?”여름이 하준을 찰싹 때렸다.말이 때린 것이지 실상은 간지러울 수준이었다.여름의 손을 와락 움켜쥐더니 그 손을 하준이 입술로 가져가 쪽하고 키스했다.“예전 같으면 내가 말 안 듣지. 오히려 주위에 정신병원에서 파견 나온 의료인이라면 반감을 가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강여름을 위해서 빨리 건강해지고 싶어졌거든. 다시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알겠지?”여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자기가 너무 쩨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알았어요. 하지만 좀 나이가 많은 사람을 두거나 남자로 해도 되잖아요? 출근하고 나면 하루 종일 당신이랑 저 사람이랑 둘이서만….”하준이 웃더니 여름의 턱을 치켜올렸다.“이거, 이거, 진짜 질투하는데?”“최하준!”여름은 새빨개진 얼굴로 하준을 노려보았다.“적당히 하시지?”“나 참, 난 입맛이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아직도 몰라? 그러니까 내 옆자리는 강여름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야.”하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에 내가 서유인이랑 있을 때는 꿈쩍도 안 하는 것 같더니, 엄청 질투하면서 말만 안 한 거군?”“……”팩폭을 당하자 매우 민망했다.“흥, 당신이랑 안 놀아. 밥이나 해야지.”여름은 하준에게 수건을 집어 던지고는 밥을 하러 내려갔다.주방에 들어가니 지다빈이 리스트를 들고 왔다.“사모님, 이게 평소 회장님이 드시는 식단표인데요. 조금 더 영양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위주로 준비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폭식은 피해야 하고요.”“알았어요. 고마워요.”여름이 목록을 받아 들더니 갑자기
지다빈은 여름의 조심스럽게 여름의 눈치를 살피며 살그머니 문을 닫고 나갔다.하준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당신 때문에 애 놀랐잖아.”“……”여름은 입을 꾹 다물었다.“내가 뭘 어쨌다고 놀라요? 엄청 다정하게 말했는데.”“그래. 하지만 엄청 질투가 섞여 있었지.”하준이 끄덕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냥 우유잖아. 그런 걸로 질투하지 마.”“……”‘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쩨쩨한 사람 같잖아.’여름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억울했다.‘내가 너무한 거야? 아니잖아?’“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이리 와. 머리 말려줄게.”하준이 드라이어를 꺼냈다.머리를 다 말리고 여름은 이불을 파고 들어갔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틀 연속 사랑을 나누고 나니 하준이 어쩐지 더 다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름은 여전히 조금 부끄러웠다.그런데 오늘은 하준이 불을 끄더니 얌전히 누워있었다. 평소의 하준 같지 않았다.여름은 살짝 어색해하면서도 하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우리 애기 착하지, 자자.”다정하게 말하며 하준이 여름의 등을 토닥였다.여름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하준의 목을 껴안았다.“쭈운….”불을 껐기 망정이지 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줄 뻔했다.움찔하더니 하준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나 곧 진정했다.“아까 다빈 씨가 그러는데 아직 약 복용 중이고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으니까 부부관계 조심하라고 하더라고.”“……”여름은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내내… 괜찮았잖아. 굳이 조심할 필요가 있을까?”“나 참, 내가 그렇게 좋아?”하준이 갑자기 플러팅하듯 눈썹을 치켜세웠다.“아니거든요!”여름은 돌아누웠다.‘사람 부끄럽게, 진짜!’“에헤이, 거짓말쟁이!”등 뒤에서 하준이 꼭 안았다.“우리 애기 착하지. 난 지금 너무 자극을 받으면 안 돼. 내가 날 컨트롤하지 못해서 당신을 다치게 할까 봐 겁난다고. 지난번에도 그랬잖아.”여름은 입술을 깨물고는 한참 만에야 억지로 답했
“잘 들어. 네 아빠는 나랑 이혼하려고 했다. 그래서 너에게는 벨레스 주식을 5%만 물려주려고 했어. 강여름에게는 35%를 물려주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게 다 널 위한 거야.”위자영이 서유인의 어깨를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서유인의 눈에는 혐오가 떠올랐다.“우리 아빠가… 왜? 나한테 왜 그러는데?”“그러니까.”위자영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벨레스 주식 5% 가지고는 재벌가에 우리 모녀는 명함도 못 내밀어. 추성호도 너랑 결혼하겠다고 안 할 거다.”서유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는 최하준에게 버림받았던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왜 다들 강여름만 좋아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아빠 딸이 아니면 난 누구 딸인데?”“울지마라. 네 아빠가 벨레스를 너에게 물려줄 거야.”위자영이 서유인을 끌어안았다.“곧 다 알게 될 거야.”******상혁이 벨레스 관련 정보를 여름에게 가져왔다.그동안 서경재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주주들을 만나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한편, 서경주의 측근들을 각종 이유로 직위 해제 시켜 버렸다.겨우 2주 만에 벨레스는 기본적으로 서경재의 손에 넘어갔다.“정말 사모님 예상이 적중했습니다. 업계에서도 서경재의 행보에 놀란 모양입니다. 다들 평소 서경재가 그동안 발톱을 숨기고 살았다고들 하더라고요.”상혁은 이제 여름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통찰력이었다.“서유인은요?”갑자기 여름이 물었다.“지금 부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전에는 그냥 직함만 받아 놓고 설렁설렁하더니 2주 전부터 갑자기 진지하게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주주 회의에도 참석하고 서경재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고 합니다.”여름이 생각에 잠겼다.“서경재는 서유인에게 어떤가요?”“굉장히 잘해줍니다. 며칠 전에는 꽤 큰 프로젝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벨레스와 추신이 손을 잡을 준비중입….”여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상혁 씨, 뭐 하나만 부탁하죠. 가서 뿌리가 살아있는 서경재와 서유인의 머리카락을 좀 구해다 주
12시 반, 세단 한 대가 펜션으로 들어왔다.송영식과 이주혁이 입구에서 기다린 지 한참 되었을 때에야 뒷문이 열리더니 지다빈이 안에서 나왔다. 둘은 몇 초간 얼어 있었다. 특히 송영식은 눈이 완전 휘둥그레졌다.“지안아… 아니지 지안이는 이거보다는 예뻤는데.”송영식은 흥분하는 듯하더니 곧 냉정을 찾았다.“아, 우리 사촌 언니를 아시나 봐요? 전 지안이 언니 사촌 동생이에요.”지다빈이 웃으니 보조개가 쏙 패였다.송영식이 살짝 눈시울을 붉히더니 시선을 피했다.“지안이 동생이면 이제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지.”“하준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이주혁이 하준에게 물었다“병원에서 보내준 간호조무사야.”하준이 담담하게 설명했다.“그랬구나.” 이주혁이 끄덕였다.“일은 잘해? 넌 좀 좋아졌고?”지다빈은 그 말을 듣더니 긴장한 얼굴로 하준을 쳐다봤다.“걱정하지 마.”송영식이 지다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일 못했으면 하준이가 벌써 사람 갈아치웠지.”지다빈이 고개를 들고 피식 웃었다.“제가 잘 못한다 싶으면 얼른 다른 분으로 교체하세요. 지금 병환 돌보시는 게 제일 중요하죠.”“뭐 괜찮아.”하준이 지다빈을 한 번 보더니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이주혁이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야, 저런 애를 왜 곁에 둬? 아직 백지안 못 잊은 거야?”“쓸데없는 소릴. 전에 나 어떻게 치료됐는지 잊었어?”하준은 살짝 짜증이 났다.“의사가 그러는데 내 병은 유아기의 영향이 크대. 지안이는 내 유년기에 유일한 빛이었잖아. 비슷한 얼굴이라도 보면 빨리 좋아질지도 모르잖아. 요즘 확실히 상태가 꽤 좋아졌다니까”“하지만 여름 씨가 알면….”“절대 모를 거야. 너희들만 입 다물면.”하준이 경고하듯 주혁을 노려봤다.“영식이도 입막음 잘해 놔.”이주혁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백지안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는 점을 떠올리고 나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아참, 요즘 ‘영하’랑 한 판 뜨고 있다며?”“한 판 뜬다기보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지. 왜? 아직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