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우시네요.”강여름이 진심으로 감탄해서 말했다.“최 회장 사모님에게 그런 칭찬을 듣다니 영광이네요.”여자가 빙긋 웃었다.“절 아세요?”여름은 잠시 멍했다.“아, 하긴. 지난번에 발표회에서 많이들 보셨겠구나. 저처럼 독특한 얼굴이면 기억에 남기도 쉽겠죠.”상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외적인 미보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푸훗,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죠.”여름이 웃었다.“차는 어쩌다가 빠졌어요?”“아까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피하다가 빠졌는데 몇 번을 빼보려고 했는데 제 힘으로는 뺄 수가 없네요.”그 사람이 쓴웃음을 지었다.여름은 직접 가서 상황을 살폈다.“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키 주실래요?”상대가 반신반의하며 키를 건넸다.여름이 바퀴 아래 큰 돌을 하나 괴더니 운전석에 앉아 확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순식간에 빠져나왔다.“이제 보니 베스트 드라이버셨군요. 고마워요.”상대가 감탄을 표했다.“천만에요.”여름이 돌아서 차에 올랐다.차윤이 곧 차를 출발시켰다.여름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윤은 언제나 여름을 보호해주는 사람이었는데 아까는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차윤 씨, 혹시… 아까 그분 알아요?”“네.”차윤은 조금 망설이다가 답했다.“보통내기 아닙니다. 이쪽 바닥에서 평가가 아주 안 좋습니다. 앞으로는 가까이하지 마세요.”“그래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여름은 사실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사람이 괜찮은지 아닌지는 보기만 해도 알지. 게다가 아까 그 사람은 내가 최하준의 와이프인 줄 알면서도 다른 재벌가 사람들처럼 명함을 주거나 하면서 굳이 나랑 연줄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잖아.좀 차갑기는 했지만 예의는 바르던걸.남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길 가는 사람이라서 평가가 안 좋을 수도 있지.”******펜션에 도착하니 6시가 다 되어 있었다.여름은 차에서 내려 호숫가 정자로 다가가는데 종업원들이 하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프랑스 요리 다 준
그 이름을 보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진 채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아직도 안 와?”“곧 도착해요.”“알겠어.”통화를 끝내고 여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아마도 그 사람들이 뭘 잘못 알았겠지. 나랑 하준 씨가 어떤 일을 겪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조금 더 하준 씨를 믿어 줘야 해.’3분 뒤 여름은 풀밭에 있는 하준 일행을 보게 되었다.남자 셋과 여자 하나, 모두 넷이었다.원래 그렇게 눈에 띄지 않던 지다빈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명품 SS신상을 걸친 다빈은 고상하고 시원스러워 보였다.지다빈은 불판 앞에서 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고 송영식이 두 사람 곁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이주혁은 나른한 자세로 맥주를 들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대단히 따뜻해 보이는 장면이었다.여름에게 갑자기 확 불안이 덮쳐왔다. 하준과 부부라고는 하지만 하준과 약간 친분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름은 하준의 친구와 그렇게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라면 당연히 남편의 사교 범주에 함께 들어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하지만 여름이 그렇게 스며들기도 전에 지다빈은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그들의 분위기에 녹아든 것으로 보였다.겨우 고용된 지 2주밖에 안 되는 간호조무사 주제에….여름은 그 장면이 너무 눈꼴 시고 역겨웠다.“어? 여름 씨….”이주혁이 제일 먼저 여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하준이 돌아보더니 여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여름은 웃음을 짜내며 다가가 하준의 손을 잡았다.“갑자기 바비큐가 무슨 일이야?”“바비큐 좋아해?”“뭐, 내가 별로라면 다른 거 먹게?”여름이 빙긋 웃으며 하준을 쳐다봤다. 농담처럼 툭 건넸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진심을 담은 물음이었다.하준은 원래 프랑스 요리를 먹기로 했다가 갑자기 바비큐로 메뉴가 바뀐 것을 떠올렸다.‘지금 다시 프랑스 요리로 바꾸자고 한다면….’하준은 머리가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
지다빈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여름이 기다리지 않고 말을 잘랐다.“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했으면 존중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송 대표는 집에 일하는 분에게 존중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죠?”송영식도 화가 났다.“강여름 씨, 이거 너무 하시네. 내가 당신한테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말에 가시가 있네? 이봐요, 우리 다빈이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송영식!”하준의 낮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내 와이프야. 말 조심하지 그래?”여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송영식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랬을까?다른 사람하고는 달라?뭐가 달라?’송영식이 짜증을 냈다.“그러면 네 마누라 관리 좀 하지 그래?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라 그래. 저러고 돌려 돌려 말하지 말고.”“난 충분히 있는 대로 말한 것 같은데.”여름이 담담하게 반격했다.“아니, 진짜….”“자기야, 이리와 내가 수제 소시지 구워줄게.”하준이 갑자기 여름을 잡아 끌었다.“우리는 저쪽으로 가자.”“…그래요.”송영식은 어쨌든 하준의 친구이니 이러고 난리를 쳐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름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준과 다른 쪽으로 가서 바비큐를 구웠다.그러나 기분은 여전히 별로였다.‘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대체 왜 송영식하고 싸움이 난 거지?’지다빈의 방금 그 세상 순진무구한 척하는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강여경이 떠올랐다.‘맞다, 강여경이 동성에서 이상하게 실종됐었는데…’“양파 다 타겠는데? 뒤집어야겠어.”하준이 말을 걸었다.“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아니에요.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고.”“뭐길래 나랑 있는데 딴 생각을 하실까?”하준이 쭉 뻗은 눈썹을 치켜 세웠다.“난 그냥… 요즘 간호조무사는 돈을 잘 버나 보네, 하고 있었어요. 지금 입고 있는 거 명품 신상이잖아. 한 세트에 몇백 만원은 할 텐데.”여름이 엉뚱한 데로 말을 돌렸다.하준의 눈썹이 모아졌다.“오후에 낚시를 좀 했거든. 근데 어쩌다가 쟤가 호수에 빠져 버렸어 그래서
이제는 이주혁도 짜증이 났다.“정말 너무 하시네….”“죄송합니다. 여기는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이때 다급한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돌아보니 어떤 여자가 이쪽으로 오려고 호텔 직원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여름은 그 사람이 아까 길가에서 구해준 차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이 봐요, 백소영 씨. 누가 이런데 막 들어오라고 했습니까?”송영식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당장 나가주시죠.”“난 최 회장 찾아온 거예요.”백소영은 속눈썹을 바르르 떨면서도 고집스럽게 최하준을 쳐다봤다.“우리 ‘영하’ 얘기 좀 하죠.”“최 회장이 영하를 도와줄 것 같습니까?”송영식이 비웃었다.“당신네 영하가 얼마나 비열한 짓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시죠. 저기, 경비 불러서 이분 모셔 나가도록 해요.”곧 펜션 경비들이 놔서 둘러싸더니 백소영 양 쪽에서 팔을 하나씩 잡았다.“잠깐만요!”여름이 벌떡 일어났다.“그분은 내 친구예요.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해도 되나요?”“함부로 끼어들지 마시죠.”송영식이 외쳤다.“오늘 정말 나랑 해보자는 겁니까?”“나한테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대놓고 말하세요.”여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내가 펜션 들어올 때부터 해서 계속 저한테 안 좋은 얼굴하고 계시던데.”송영식은 이제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아, 네 와이프 좀 어떻게 해줄래?”“이리 와요.”뜻밖에서 이번에는 하준까지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여름을 제압하려고 들었다.“우리 일에는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일…?지금 나랑 송영식이랑 싸우는 거 안 보여? 이게 왜 너희 일인데?방금 송영식이 나한테 함부로 하는 거 못 본 거야?’여름은 남편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크게 실망했다.“내 친구라면 내가 꼭 들어오라고 해야겠어요.”여름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자리에 있던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여름에게로 떨어졌다.전혀 우호적인 시선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남들 시선이야 전혀 신경 쓰이지 않
“백소영, 그만 해. 괜히 남의 부부 사이에 끼어들지 마.”마침내 이주혁이 입을 열었다. 바비큐 불판 앞에서 편안한 캐쥬얼을 입고 서 있는 이주혁은 자신감 넘치고 시원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깊은 두 눈만큼은 심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사람 짜증 나게 하는 그 매운 말솜씨 여전하구나.”백소영의 가슴에 날카로운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이주혁, 더 멋있어졌네. 그런데도 예전처럼 날 미워하는구나.’백소영이 얼음처럼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내가 그간 여러분을 최대한 피하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 왔으니 뭐 얽힐 것도 없었을 텐데 왜 갑자기 우리 영하에 이래요? 우린 최 회장의 제품이 없으면 안 되는 거 다 아시잖아요? 제발….”“영하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지.”하준은 찬바람이 쌩 불도록 돌아섰다.백소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백소영의 눈에서 무력함을 읽고 여름은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렸다.“내가 무릎을 꿇어도 안 될까요?”돌아선 하준을 절망적인 눈으로 보던 백소영이 물었다.송영식이 잔인하게 뱉었다.“밤새도록 꿇어 앉아 있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다 자업자득 아닌가? 돌아가서 반성하고 인간이나 되시죠. 그러면 먹고 살 길은 터줄 지 모르니까요.”“전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이러네요. 내가 대체 당신들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백소영은 자조적으로 웃더니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지다빈의 얼굴을 보더니 멈춰 섰다.“이게 누구야?”지다빈은 당황해서 얼른 하준의 등 뒤로 숨었다.최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당장 나가십시오.”백소영이 씩 웃더니 세 남자를 한 번 훑어 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뭇 동정 어린 시선으로 여름을 쳐다봤다.“셋이 이러고 순진한 사람 하나 속이고 희롱하니까 재미있나 보네?”여름은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저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지? 무슨 소리야?’여름은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너무 아파서 그 말을 들은 세 남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확 변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야, 당장 나가!”이주혁이 성큼성큼 걸
숯 타는 소리만 지글지글 들릴 뿐 주위는 조용했다.얼마나 지났을까…. 하준이 겉옷을 잡더니 여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다 먹었다. 이제 그만 방으로 갈까?”“난 집으로 갈게요.”여름이 냉랭하게 답했다.송영식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내일 아침에 바다 낚시하러 가기로 했잖아? 여름 씨는 차 실장더러 데려다 주라고 하자. 우리도 서로 시간 안 맞아서 오랜만에 만나서 노는데.”“편한 대로 하세요.”여름은 하준의 손을 떨치고 그대로 가버렸다.“낚시는 그만 두지.”하준은 성큼성큼 여름을 따라갔다.지다빈도 급히 물건을 챙겨서 쫓아갔다.짜증이 난 송영식은 애꿎은 정자 기둥을 걷어찼다.******돌아가는 길.여름과 하준은 뒷좌석에 앉고 상혁이 운전했다. 지다빈은 조수석에 앉았다.한참을 가다가 지다빈이 조심스럽게 앞에서 떡을 건넸다.“저기, 두 분 저녁도 안 드셨잖아요? 제가 떡을 좀 가져왔거든요. 허기라도 달래세요.”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다빈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지다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떡을 받아 여름에게 들이밀었다.“아직 1시간은 더 가야 돼. 좀 먹어요.”“생각없어요.”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를 들여다 볼 뿐이었다.해변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분위기는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지다빈은 눈시울을 붉힌 채였다.여름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 지다빈을 쳐다봤다.“왜 또 이러실까? 오는 동안 나는 지다빈 씨에게 아무 짓도 안 한 것 같은데.”“그게….”지다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았다.“죄송합니다.”“뭐가 또 죄송하죠?”여름이 담담하게 물었다.“제발 툭하면 내 앞에서 가련한 척 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보면 내가 지다빈 씨 괴롭히는 줄 알겠어.”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자기야….”“그냥 매 생각을 말한 거예요.”여름은 하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지다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를 들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설마 전 여친을 괴롭혔다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죠?”참지 못하고 결국 여름이 비아냥거렸다.하준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여름을 노려봤다.“쓸데없는 생각 그만둬.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나랑 이렇게 입씨름하니까 좋아?”“언제 당신하고 입씨름을 했어요?”여름은 온몸이 점점 더 식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미소를 유지했다.“난 아주 이성적으로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중인데. 그런데 내가 물어보는 문제에 하나도 대답을 안 해주네요."“당신하고 이러고 싶지 않아. 배고프니까 난 뭣 좀 먹고 올게.”하준이 입구로 걸어갔다.“그러면 마지막 질문이에요. 당신들 셋은 뭘로 날 속이면서 가지고 놀았는데요?”여름의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물었다.하준이 다시 돌아봤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눈 속에서 분노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 백소영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니까? 다시는 이런 영양가 없는 질문 하지 마. 날 정말 눈곱만큼도 안 믿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하준의 지적에 여름은 힘이 쭉 빠졌다.여름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소영이 지다빈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볼 때 눈에 동정심이 가득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좋아요. 백소영 그만두죠. 그러면 지다빈 내보내세요. 간호조무사 바꿔요. 난 걔 마음에 안 들어요.”하준이 입을 한 번 꾹 다물더니 말했다.“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돌려 돌려 떠든 게 결국은 지다빈이 마음에 안 들고 나는 믿을 수 없다 이겁니까? 왜 그렇게 돌려서 말합니까? 사람 피곤하게.”“……”여름은 몸이 떨렸다.요즘 하준은 내내 여름을 아껴주기만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매정한 말투는 정말 너무 오랜만이었다.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당신이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네요. 어쨌든 지다빈인지 나인지 선택하세요.”여름은 사뭇 필사적으로 나왔다.“병원에 간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하준은 친구와 지다빈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조롱거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1~2’년 더 지내면 어떻게 될까?’여름의 손이 저도 모르게 얼굴로 올라갔다.‘이제 난 더 이상 예전처럼 예쁘던 강여름이 아니야.그런데도 최하준이 나를 계속 사랑해 줄까?’여름은 불쑥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여름은 혼자서 서재로 들어갔다.곧 밖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지다빈이 나갔나 보군.’여름은 나가보지 않았다.밤 11시가 되자 문이 벌컥 열렸다. 하준이 들어왔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눈썹에서 느껴졌다.“강여름 씨, 아직 다 안 했습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방으로 와서 잘 생각을 안 합니까? 지다빈 때문이라면 이미 나갔습니다.”“먼저 가서 주무세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여름은 하준을 쓱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하준이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얼굴을 해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적당히 해야지,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하준이 의자에 앉은 여름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말투가 사뭇 사나웠다.“나한테 이런 얼굴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다른 여자를 잡았던 손으로 날 만지지 말아요.”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냈다.그 순간 하준의 분노가 폭발했다.“뭘 잡아요? 사람이 다쳤쟎습니까? 이모님 불러서 상처 소독하고 드레싱 하라고 한 것까지 가지고 질투합니까? 나는 뭐, 길에서 교통사고가 난 걸 봐도 여자면 구해주지 못합니까?”여름은 씁쓸함을 꾹 누르며 비아냥거렸다.“최 회장님은 정말 사람 구해주는 걸 좋아하시네요. 평소 차윤 씨나 상혁 씨에게는 그렇게 다정하지도 않으시면서.”“말이 안 통하는군요. 요즘 내가 너무 잘해줬나 봅니다?”하준은 손을 놓았다.“서재에 있고 싶다면 실컷 서재에 남아서 반성하십시오. 질투도 정도껏 해야지.”하준은 말을 마치더니 싸늘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여름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