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설마 전 여친을 괴롭혔다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죠?”참지 못하고 결국 여름이 비아냥거렸다.하준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여름을 노려봤다.“쓸데없는 생각 그만둬.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나랑 이렇게 입씨름하니까 좋아?”“언제 당신하고 입씨름을 했어요?”여름은 온몸이 점점 더 식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미소를 유지했다.“난 아주 이성적으로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중인데. 그런데 내가 물어보는 문제에 하나도 대답을 안 해주네요."“당신하고 이러고 싶지 않아. 배고프니까 난 뭣 좀 먹고 올게.”하준이 입구로 걸어갔다.“그러면 마지막 질문이에요. 당신들 셋은 뭘로 날 속이면서 가지고 놀았는데요?”여름의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물었다.하준이 다시 돌아봤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눈 속에서 분노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 백소영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니까? 다시는 이런 영양가 없는 질문 하지 마. 날 정말 눈곱만큼도 안 믿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하준의 지적에 여름은 힘이 쭉 빠졌다.여름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소영이 지다빈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볼 때 눈에 동정심이 가득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좋아요. 백소영 그만두죠. 그러면 지다빈 내보내세요. 간호조무사 바꿔요. 난 걔 마음에 안 들어요.”하준이 입을 한 번 꾹 다물더니 말했다.“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돌려 돌려 떠든 게 결국은 지다빈이 마음에 안 들고 나는 믿을 수 없다 이겁니까? 왜 그렇게 돌려서 말합니까? 사람 피곤하게.”“……”여름은 몸이 떨렸다.요즘 하준은 내내 여름을 아껴주기만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매정한 말투는 정말 너무 오랜만이었다.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당신이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네요. 어쨌든 지다빈인지 나인지 선택하세요.”여름은 사뭇 필사적으로 나왔다.“병원에 간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하준은 친구와 지다빈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조롱거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1~2’년 더 지내면 어떻게 될까?’여름의 손이 저도 모르게 얼굴로 올라갔다.‘이제 난 더 이상 예전처럼 예쁘던 강여름이 아니야.그런데도 최하준이 나를 계속 사랑해 줄까?’여름은 불쑥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여름은 혼자서 서재로 들어갔다.곧 밖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지다빈이 나갔나 보군.’여름은 나가보지 않았다.밤 11시가 되자 문이 벌컥 열렸다. 하준이 들어왔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눈썹에서 느껴졌다.“강여름 씨, 아직 다 안 했습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방으로 와서 잘 생각을 안 합니까? 지다빈 때문이라면 이미 나갔습니다.”“먼저 가서 주무세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여름은 하준을 쓱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하준이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얼굴을 해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적당히 해야지,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하준이 의자에 앉은 여름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말투가 사뭇 사나웠다.“나한테 이런 얼굴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다른 여자를 잡았던 손으로 날 만지지 말아요.”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냈다.그 순간 하준의 분노가 폭발했다.“뭘 잡아요? 사람이 다쳤쟎습니까? 이모님 불러서 상처 소독하고 드레싱 하라고 한 것까지 가지고 질투합니까? 나는 뭐, 길에서 교통사고가 난 걸 봐도 여자면 구해주지 못합니까?”여름은 씁쓸함을 꾹 누르며 비아냥거렸다.“최 회장님은 정말 사람 구해주는 걸 좋아하시네요. 평소 차윤 씨나 상혁 씨에게는 그렇게 다정하지도 않으시면서.”“말이 안 통하는군요. 요즘 내가 너무 잘해줬나 봅니다?”하준은 손을 놓았다.“서재에 있고 싶다면 실컷 서재에 남아서 반성하십시오. 질투도 정도껏 해야지.”하준은 말을 마치더니 싸늘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여름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
다 듣고 나니 여름은 심장이 떨렸다.“백현수의 전처는 자식이 없었어?”“전처 자식 얘기하니까 짜증 난다.”윤서가 답답한 듯 말했다.“며칠 전에 접대를 하러 갔다가 백윤택이란 사람이랑 마주쳤는데 아주 질척거려 대서 죽을 뻔했잖아.”“백윤택이라고?”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아, 생각났다. 전에 동성에 있을 때 윤정후라고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양 대표가 날 구해줬잖아? 나중에 경찰에 들어보니까 윤정후 누나 윤정란이 백윤택의 눈에 들었는데 백윤택이 부당한 방법으로 윤정란을 몰아붙여서 결국 자살했다더라고. 나중에 윤정란 집에서 백윤택을 고소했는데 원래는 형을 받아야 맞는 건데 최하준이 백윤택 편에 서서 승소했다지?”“와, 이제 봤더니 그 나쁜 놈이었어?”임윤서가 깜짝 놀랐다.“난 어쩜 이렇게 재수도 없게 그런 물건한테 걸렸대냐?”“백윤택이 네 주소는 모르지?”여름도 걱정이 됐다.“알지. 어디서 알아냈는지 요 며칠 퇴근만 하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니까.”임윤서는 생각할수록 무서웠다.“그런 전과가 있는 인간이면 나한테도 막 그러는 거 아니겠지? 최하준은 정신이 나갔다니? 어쩌자고 그런 사람 변호를 해?”“……”그야말로 여름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여름은 자신이 진실과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며칠은 집에 가지 말고 호텔 같은 데 묵어.”여름은 안심이 안 되는 듯 덧붙였다.“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알았지?”“그래. 며칠 지나면 날 잊었으면 좋겠다. 아오, 짜증 나.”----오후가 되자 엄기숙이 조사 자료를 가지고 왔다.“대표님, 영하는 주로 컴퓨터, 프린터 등 제품을 생산합니다. 영하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내내 FTT 아니면 지안그룹 등에서 제공받고 있었는데 최근 어쩐 일인지 영하에서 지안에 뭘 잘못했는지 지안과 FTT가 영하와의 거래를 끊었습니다. 다른 기업들도 최 회장님께 밉보일까 싶어서 영하와 거래를 하지 못
‘그래, 그렇겠지, 내가 최하준을 막아줄 수는 없으니까.’여름은 갑자기 우스워졌다.“좋아요. 그러면 어제 내가 도와줬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치고 하나만 말해줄래요? 지다빈 씨 알아요?”“……”“아나 보군요.”휴대전화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셋이 날 속이고 가지고 논다고 했었죠? 그때 보니까 날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던데…?”“자기 마음만 단단하면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죠.”백소영이 낮은 솔로 답했다.여름이 처량하게 웃었다.“그래요. 억지로 말하라고는 안 할게요. 아 참, 백윤택 씨가 오빠죠? 요즘 내 친구 윤서를 따라다닌다던데 내 친구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말이나 좀 전해주세요.”“그놈의 백윤택….”백소영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그럴게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최하준 씨 곁에서 지다빈을 제거하세요.”여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젯밤에 이미 내보냈어요.”“그렇군요. 하지만 그 인간이 그렇게 얌전히 물러날 리….”백소영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때 사무실 밖에서 고함이 들리더니 송영식이 차윤을 밀치며 뛰어 들어왔다.“저기, 이쪽에 일이 좀 생겨서 끊어야겠네요.”서둘러 전화를 끊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송영식을 보고 나니 방금 백소영이 말하려다 만 ‘얌전히 물러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왜 저러는 걸까?’“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작은 회사까지 발걸음을 하셨나요?”여름은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물었다.“모르는 척하지 마시지! 당신이 하준이한테 다빈이 내쫓으라고 했지?”송영식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두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그래도 얼마 전부터는 사람 취급을 좀 해 줄까 했었는데.”여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나랑 같이 사는 사람은 송영식 씨가 아니에요.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나는 하준이 친구니까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잘 안다고
그러나 양유진은 그윽한 눈으로 여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오랜만이네요.”“네, 막 퇴근하다가 여름 씨가 보여서 저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습니다.”양유진이 조금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요즘 잘 지냅니까? 아까 보니까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아뇨. 그냥 생각을 좀 하느라고요.”여름은 부인했다.“하긴, 이제는 사랑하는 남자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기뻐야겠지요.”양유진이 자조적으로 웃었다.“양 대표님, 죄송해요….”여름은 너무나 죄책감이 느껴졌다.“이번에는 천만에요, 라고 말하지 못하겠네요.”양유진이 씁쓸하게 웃고는 크루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더니 하나를 여름에게 건넸다.“저…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여름은 당황해서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이제는 저랑 잠시도 같이 있기 싫은가요? 정말 잔인하군요.”양유진이 애원하는 얼굴로 말했다.결국 여름은 모질게 굴지 못했다.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는 얘기와 회사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그러느라고 맞은 편에 앉은 누군가가 몰래 사진을 찍는 줄도 몰랐다.30분쯤 앉아 있다가 여름이 다시 핑계를 대며 일어섰다.“잠시만요….”양유진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았다.여름은 무의식적으로 확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이제는… 손만 잡아도 이렇게 놀라는군요.”양유진의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심하게 충격받은 듯했다.“하긴, 예전에도 나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었죠.”“제가 빚을 많이 진 것은 알아요. 네 평생을 두고 갚겠다고 했었죠. 하지만 이제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저는… 제 신장을 대표님께 이식해 드릴게요.”여름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양유진은 깜짝 놀랐다. 한참 후에야 약간 화난 얼굴을 했다.“여름 씨, 날 뭐로 보는 겁니까? 네, 저 화났습니다. 씁쓸하네요. 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보상받고 싶지는 않습니다.”양유진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여름이 깜짝 놀라 양유진을 쳐다봤다.‘화이트 스노우 월드라고?’화이트 스노우는 유명한 테마파크였다. 안에는 세계 각지의 재미있다는 온갖 놀이 시설이 다 들어있고 가운데에는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높다란 성도 있었다.양유진이 여름에게 가엾다는 시선을 보냈다.“심지어 백지안을 기념하기 위해서 FTT에서는 테마파크에 ‘백’에서 따온 ‘화이트’를 이름에 넣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름 씨를 부러워할지 몰라도 재벌가에서는 당신을 조롱하고 있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까?”“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군요.”여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한 가지 더 있습니다.”양유진이 갑자기 거칠게 여름의 팔을 잡았다.“예전에 왜 윤정후가 여름 씨를 해치려고 했는지 압니까?”“……”여름의 입술이 떨렸다.양유진은 여름에게 피할 기회를 주었다.“윤정후는 최하준이 백윤택의 소송을 도와주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백윤택이 바로 백지안의 오빠예요. 그래서 최하준은 무작정 백윤택을 도와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안하무인이고 양심 없는지는 접어두고, 최하준은 백지안을 위해 자신의 원칙도 버릴 수 있었던 거예요.”여름은 멍해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그러나 다른 사람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 들으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질식할 것 같았다.여름은 하준이 돈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었다.하준이 엄청난 금수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저 이기는 것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그게 아니었어. 모든 것이 다 백지안을 위해서였어.대체 백지안이 최하준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길래.양유진은 마음 아픈 듯 고개를 숙였다.“여름 씨는 최하준이 전 여친을 위해 벌였던 일 때문에 죽을 뻔했습니다. 잘못은 최하준이 저질렀는데 왜 강여름 씨가 저에게 빚을 갚습니까?”“그만 하세요.”여름은 더 듣기 싫었다. 곧 이성이 모두 날아갈 지경이었다.“여름 씨, 당신이 이성을 찾았으면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최하준
소리에 놀란 이진숙이 달려왔다. 하준은 미친 듯했다. 테이블 위의 그릇을 하나씩 집어 던졌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이진숙은 얼른 여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거실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이진숙을 할 수 없이 지다빈을 떠올렸다.‘회장님 병이 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지다빈 씨가 회장님을 잘 돌봤었지.’******패스트푸드점에서 나온 다음.여름은 차도 타지 않고 내내 길을 따라 걸었다.얼마를 걸었는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화이트 스노우 월드 앞이었다.캐슬 위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깜짝 놀라서 보고 있는데 한 쌍의 연인이 옆을 지나갔다.“불꽃 너무 예쁘다.”“그렇지? 왜 이 시간에 하는지 알아?”“몇 시지? 10시 10분이네?”“응, 10시 10분에 235발로 만든 불꽃이래.”“그러면 1010235, ‘열렬히 사모’?”“오, 똑똑한데? 이 테마파크는 몇 년 전에 어느 금수저가 여자친구에게 바친 거래. 테마파크 오픈 전날 금수저는 여자친구에게 청혼하려고 했대. 그날 밤에는 이 일대 하늘이 온통 불꽃으로 가득했고, 가운데에는 LOVE라는 모양의 불꽃도 만들었다더라. 그날부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주말 10시 10분이면 235발 쏘는 불꽃놀이를 한대. 여기서 같이 불꽃 보는 연인은 평생 행복해진다던데?”“너무 로맨틱하다. 그 금수저 여친 부럽네. 둘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지?”“그렇겠지.”“……”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여름이 정신을 차려보니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1010235, 테마파크, 불꽃놀이....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 같잖아.그런데 그 금수저는 여친이 세상을 떠나고 이렇게 이상한 얼굴을 한 사람이랑 결혼을 해버렸네.’여름은 후회됐다.‘애초에 최하준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자정.여름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별장으로 들어갔다.마침 소파에서 졸던 이진숙이 여름을 보고 놀라서 펄쩍 뛰었다.“사, 사모님. 오셨어
여름의 눈에 큰 침대에서 편안히 잠든 하준이 보였다. 그런데 지다빈이 하준 곁에 반쯤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손까지 꼭 잡고 있었다.인기척을 느낀 지다빈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여름을 보고 불안해했다.“저, 오해하지 마세요….”여름은 아무 말 없이 와락 달려들더니 지다빈의 어깨를 뒤로 밀쳤다.“처음부터 수상했어. 간호하라고 했지, 누가 남의 남편 옆에 누우라고 했어?”“그런 게 아니에요.”지다빈이 억울하다는 듯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뭐가 아닌데?”여름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어제 내가 나가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하루도 안 돼서 다시 들어와서는 이제 여주인 행세를 해? 수치심이라는 걸 모르나?”“아, 시끄러워.”침대에서 자던 하준이 갑자기 깼다. 피곤한 듯 일어나 앉던 하준의 눈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지다빈과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여름이 들어 왔다.“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하준이 노기 어린 눈으로 여름을 쏘아 보았다.“집에 오자마자 사람부터 잡다니 내가 우스워 보여서 이럽니까?”여름은 눈이 커졌다.‘그러니까, 나는 집에 와서 다른 사람이 남편이랑 손을 잡고 침대에 누워 있는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내가 지금 이 모든 진상을 알고도 어떤 마음을 그러 모아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그래도 아픈 사람이라고,아무리 내 마음이 아파도 이 고비는 넘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 다짐하며 돌아왔는데.내가 둘의 연애를 방해했다 이거야?’“지다빈 씨 왜 여기 있어요?”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여름이 지다빈을 가리켰다.“어제 나가라고 하지 않았어요?”“내가 내보내고 싶으면 내보내고 들이고 싶으면 들일 겁니다. 내 마음이지.”하준의 눈이 분노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지다빈을 내보내라고? 저는 나 몰래 나가서 양유진이랑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공공장소에서 희희낙락하다 들어온 주제에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는 알고 저러는 거야?’“그래, 알겠어요.”상처 받은 여름의 심장은 이제 아주 너덜너덜해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