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 그만 해. 괜히 남의 부부 사이에 끼어들지 마.”마침내 이주혁이 입을 열었다. 바비큐 불판 앞에서 편안한 캐쥬얼을 입고 서 있는 이주혁은 자신감 넘치고 시원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깊은 두 눈만큼은 심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사람 짜증 나게 하는 그 매운 말솜씨 여전하구나.”백소영의 가슴에 날카로운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이주혁, 더 멋있어졌네. 그런데도 예전처럼 날 미워하는구나.’백소영이 얼음처럼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내가 그간 여러분을 최대한 피하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 왔으니 뭐 얽힐 것도 없었을 텐데 왜 갑자기 우리 영하에 이래요? 우린 최 회장의 제품이 없으면 안 되는 거 다 아시잖아요? 제발….”“영하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지.”하준은 찬바람이 쌩 불도록 돌아섰다.백소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백소영의 눈에서 무력함을 읽고 여름은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렸다.“내가 무릎을 꿇어도 안 될까요?”돌아선 하준을 절망적인 눈으로 보던 백소영이 물었다.송영식이 잔인하게 뱉었다.“밤새도록 꿇어 앉아 있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다 자업자득 아닌가? 돌아가서 반성하고 인간이나 되시죠. 그러면 먹고 살 길은 터줄 지 모르니까요.”“전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이러네요. 내가 대체 당신들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백소영은 자조적으로 웃더니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지다빈의 얼굴을 보더니 멈춰 섰다.“이게 누구야?”지다빈은 당황해서 얼른 하준의 등 뒤로 숨었다.최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당장 나가십시오.”백소영이 씩 웃더니 세 남자를 한 번 훑어 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뭇 동정 어린 시선으로 여름을 쳐다봤다.“셋이 이러고 순진한 사람 하나 속이고 희롱하니까 재미있나 보네?”여름은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저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지? 무슨 소리야?’여름은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너무 아파서 그 말을 들은 세 남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확 변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야, 당장 나가!”이주혁이 성큼성큼 걸
숯 타는 소리만 지글지글 들릴 뿐 주위는 조용했다.얼마나 지났을까…. 하준이 겉옷을 잡더니 여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다 먹었다. 이제 그만 방으로 갈까?”“난 집으로 갈게요.”여름이 냉랭하게 답했다.송영식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내일 아침에 바다 낚시하러 가기로 했잖아? 여름 씨는 차 실장더러 데려다 주라고 하자. 우리도 서로 시간 안 맞아서 오랜만에 만나서 노는데.”“편한 대로 하세요.”여름은 하준의 손을 떨치고 그대로 가버렸다.“낚시는 그만 두지.”하준은 성큼성큼 여름을 따라갔다.지다빈도 급히 물건을 챙겨서 쫓아갔다.짜증이 난 송영식은 애꿎은 정자 기둥을 걷어찼다.******돌아가는 길.여름과 하준은 뒷좌석에 앉고 상혁이 운전했다. 지다빈은 조수석에 앉았다.한참을 가다가 지다빈이 조심스럽게 앞에서 떡을 건넸다.“저기, 두 분 저녁도 안 드셨잖아요? 제가 떡을 좀 가져왔거든요. 허기라도 달래세요.”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다빈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지다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떡을 받아 여름에게 들이밀었다.“아직 1시간은 더 가야 돼. 좀 먹어요.”“생각없어요.”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를 들여다 볼 뿐이었다.해변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분위기는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지다빈은 눈시울을 붉힌 채였다.여름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 지다빈을 쳐다봤다.“왜 또 이러실까? 오는 동안 나는 지다빈 씨에게 아무 짓도 안 한 것 같은데.”“그게….”지다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았다.“죄송합니다.”“뭐가 또 죄송하죠?”여름이 담담하게 물었다.“제발 툭하면 내 앞에서 가련한 척 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보면 내가 지다빈 씨 괴롭히는 줄 알겠어.”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자기야….”“그냥 매 생각을 말한 거예요.”여름은 하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지다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를 들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설마 전 여친을 괴롭혔다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죠?”참지 못하고 결국 여름이 비아냥거렸다.하준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여름을 노려봤다.“쓸데없는 생각 그만둬.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나랑 이렇게 입씨름하니까 좋아?”“언제 당신하고 입씨름을 했어요?”여름은 온몸이 점점 더 식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미소를 유지했다.“난 아주 이성적으로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중인데. 그런데 내가 물어보는 문제에 하나도 대답을 안 해주네요."“당신하고 이러고 싶지 않아. 배고프니까 난 뭣 좀 먹고 올게.”하준이 입구로 걸어갔다.“그러면 마지막 질문이에요. 당신들 셋은 뭘로 날 속이면서 가지고 놀았는데요?”여름의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물었다.하준이 다시 돌아봤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눈 속에서 분노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 백소영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니까? 다시는 이런 영양가 없는 질문 하지 마. 날 정말 눈곱만큼도 안 믿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하준의 지적에 여름은 힘이 쭉 빠졌다.여름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소영이 지다빈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볼 때 눈에 동정심이 가득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좋아요. 백소영 그만두죠. 그러면 지다빈 내보내세요. 간호조무사 바꿔요. 난 걔 마음에 안 들어요.”하준이 입을 한 번 꾹 다물더니 말했다.“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돌려 돌려 떠든 게 결국은 지다빈이 마음에 안 들고 나는 믿을 수 없다 이겁니까? 왜 그렇게 돌려서 말합니까? 사람 피곤하게.”“……”여름은 몸이 떨렸다.요즘 하준은 내내 여름을 아껴주기만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매정한 말투는 정말 너무 오랜만이었다.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당신이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네요. 어쨌든 지다빈인지 나인지 선택하세요.”여름은 사뭇 필사적으로 나왔다.“병원에 간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하준은 친구와 지다빈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조롱거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1~2’년 더 지내면 어떻게 될까?’여름의 손이 저도 모르게 얼굴로 올라갔다.‘이제 난 더 이상 예전처럼 예쁘던 강여름이 아니야.그런데도 최하준이 나를 계속 사랑해 줄까?’여름은 불쑥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여름은 혼자서 서재로 들어갔다.곧 밖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지다빈이 나갔나 보군.’여름은 나가보지 않았다.밤 11시가 되자 문이 벌컥 열렸다. 하준이 들어왔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눈썹에서 느껴졌다.“강여름 씨, 아직 다 안 했습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방으로 와서 잘 생각을 안 합니까? 지다빈 때문이라면 이미 나갔습니다.”“먼저 가서 주무세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여름은 하준을 쓱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하준이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얼굴을 해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적당히 해야지,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하준이 의자에 앉은 여름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말투가 사뭇 사나웠다.“나한테 이런 얼굴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다른 여자를 잡았던 손으로 날 만지지 말아요.”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냈다.그 순간 하준의 분노가 폭발했다.“뭘 잡아요? 사람이 다쳤쟎습니까? 이모님 불러서 상처 소독하고 드레싱 하라고 한 것까지 가지고 질투합니까? 나는 뭐, 길에서 교통사고가 난 걸 봐도 여자면 구해주지 못합니까?”여름은 씁쓸함을 꾹 누르며 비아냥거렸다.“최 회장님은 정말 사람 구해주는 걸 좋아하시네요. 평소 차윤 씨나 상혁 씨에게는 그렇게 다정하지도 않으시면서.”“말이 안 통하는군요. 요즘 내가 너무 잘해줬나 봅니다?”하준은 손을 놓았다.“서재에 있고 싶다면 실컷 서재에 남아서 반성하십시오. 질투도 정도껏 해야지.”하준은 말을 마치더니 싸늘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여름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
다 듣고 나니 여름은 심장이 떨렸다.“백현수의 전처는 자식이 없었어?”“전처 자식 얘기하니까 짜증 난다.”윤서가 답답한 듯 말했다.“며칠 전에 접대를 하러 갔다가 백윤택이란 사람이랑 마주쳤는데 아주 질척거려 대서 죽을 뻔했잖아.”“백윤택이라고?”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아, 생각났다. 전에 동성에 있을 때 윤정후라고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양 대표가 날 구해줬잖아? 나중에 경찰에 들어보니까 윤정후 누나 윤정란이 백윤택의 눈에 들었는데 백윤택이 부당한 방법으로 윤정란을 몰아붙여서 결국 자살했다더라고. 나중에 윤정란 집에서 백윤택을 고소했는데 원래는 형을 받아야 맞는 건데 최하준이 백윤택 편에 서서 승소했다지?”“와, 이제 봤더니 그 나쁜 놈이었어?”임윤서가 깜짝 놀랐다.“난 어쩜 이렇게 재수도 없게 그런 물건한테 걸렸대냐?”“백윤택이 네 주소는 모르지?”여름도 걱정이 됐다.“알지. 어디서 알아냈는지 요 며칠 퇴근만 하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니까.”임윤서는 생각할수록 무서웠다.“그런 전과가 있는 인간이면 나한테도 막 그러는 거 아니겠지? 최하준은 정신이 나갔다니? 어쩌자고 그런 사람 변호를 해?”“……”그야말로 여름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여름은 자신이 진실과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며칠은 집에 가지 말고 호텔 같은 데 묵어.”여름은 안심이 안 되는 듯 덧붙였다.“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알았지?”“그래. 며칠 지나면 날 잊었으면 좋겠다. 아오, 짜증 나.”----오후가 되자 엄기숙이 조사 자료를 가지고 왔다.“대표님, 영하는 주로 컴퓨터, 프린터 등 제품을 생산합니다. 영하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내내 FTT 아니면 지안그룹 등에서 제공받고 있었는데 최근 어쩐 일인지 영하에서 지안에 뭘 잘못했는지 지안과 FTT가 영하와의 거래를 끊었습니다. 다른 기업들도 최 회장님께 밉보일까 싶어서 영하와 거래를 하지 못
‘그래, 그렇겠지, 내가 최하준을 막아줄 수는 없으니까.’여름은 갑자기 우스워졌다.“좋아요. 그러면 어제 내가 도와줬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치고 하나만 말해줄래요? 지다빈 씨 알아요?”“……”“아나 보군요.”휴대전화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셋이 날 속이고 가지고 논다고 했었죠? 그때 보니까 날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던데…?”“자기 마음만 단단하면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죠.”백소영이 낮은 솔로 답했다.여름이 처량하게 웃었다.“그래요. 억지로 말하라고는 안 할게요. 아 참, 백윤택 씨가 오빠죠? 요즘 내 친구 윤서를 따라다닌다던데 내 친구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말이나 좀 전해주세요.”“그놈의 백윤택….”백소영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그럴게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최하준 씨 곁에서 지다빈을 제거하세요.”여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젯밤에 이미 내보냈어요.”“그렇군요. 하지만 그 인간이 그렇게 얌전히 물러날 리….”백소영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때 사무실 밖에서 고함이 들리더니 송영식이 차윤을 밀치며 뛰어 들어왔다.“저기, 이쪽에 일이 좀 생겨서 끊어야겠네요.”서둘러 전화를 끊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송영식을 보고 나니 방금 백소영이 말하려다 만 ‘얌전히 물러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왜 저러는 걸까?’“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작은 회사까지 발걸음을 하셨나요?”여름은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물었다.“모르는 척하지 마시지! 당신이 하준이한테 다빈이 내쫓으라고 했지?”송영식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두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그래도 얼마 전부터는 사람 취급을 좀 해 줄까 했었는데.”여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나랑 같이 사는 사람은 송영식 씨가 아니에요.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나는 하준이 친구니까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잘 안다고
그러나 양유진은 그윽한 눈으로 여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오랜만이네요.”“네, 막 퇴근하다가 여름 씨가 보여서 저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습니다.”양유진이 조금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요즘 잘 지냅니까? 아까 보니까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아뇨. 그냥 생각을 좀 하느라고요.”여름은 부인했다.“하긴, 이제는 사랑하는 남자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기뻐야겠지요.”양유진이 자조적으로 웃었다.“양 대표님, 죄송해요….”여름은 너무나 죄책감이 느껴졌다.“이번에는 천만에요, 라고 말하지 못하겠네요.”양유진이 씁쓸하게 웃고는 크루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더니 하나를 여름에게 건넸다.“저…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여름은 당황해서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이제는 저랑 잠시도 같이 있기 싫은가요? 정말 잔인하군요.”양유진이 애원하는 얼굴로 말했다.결국 여름은 모질게 굴지 못했다.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는 얘기와 회사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그러느라고 맞은 편에 앉은 누군가가 몰래 사진을 찍는 줄도 몰랐다.30분쯤 앉아 있다가 여름이 다시 핑계를 대며 일어섰다.“잠시만요….”양유진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았다.여름은 무의식적으로 확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이제는… 손만 잡아도 이렇게 놀라는군요.”양유진의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심하게 충격받은 듯했다.“하긴, 예전에도 나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었죠.”“제가 빚을 많이 진 것은 알아요. 네 평생을 두고 갚겠다고 했었죠. 하지만 이제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저는… 제 신장을 대표님께 이식해 드릴게요.”여름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양유진은 깜짝 놀랐다. 한참 후에야 약간 화난 얼굴을 했다.“여름 씨, 날 뭐로 보는 겁니까? 네, 저 화났습니다. 씁쓸하네요. 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보상받고 싶지는 않습니다.”양유진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여름이 깜짝 놀라 양유진을 쳐다봤다.‘화이트 스노우 월드라고?’화이트 스노우는 유명한 테마파크였다. 안에는 세계 각지의 재미있다는 온갖 놀이 시설이 다 들어있고 가운데에는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높다란 성도 있었다.양유진이 여름에게 가엾다는 시선을 보냈다.“심지어 백지안을 기념하기 위해서 FTT에서는 테마파크에 ‘백’에서 따온 ‘화이트’를 이름에 넣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름 씨를 부러워할지 몰라도 재벌가에서는 당신을 조롱하고 있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까?”“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군요.”여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한 가지 더 있습니다.”양유진이 갑자기 거칠게 여름의 팔을 잡았다.“예전에 왜 윤정후가 여름 씨를 해치려고 했는지 압니까?”“……”여름의 입술이 떨렸다.양유진은 여름에게 피할 기회를 주었다.“윤정후는 최하준이 백윤택의 소송을 도와주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백윤택이 바로 백지안의 오빠예요. 그래서 최하준은 무작정 백윤택을 도와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안하무인이고 양심 없는지는 접어두고, 최하준은 백지안을 위해 자신의 원칙도 버릴 수 있었던 거예요.”여름은 멍해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그러나 다른 사람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 들으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질식할 것 같았다.여름은 하준이 돈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었다.하준이 엄청난 금수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저 이기는 것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그게 아니었어. 모든 것이 다 백지안을 위해서였어.대체 백지안이 최하준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길래.양유진은 마음 아픈 듯 고개를 숙였다.“여름 씨는 최하준이 전 여친을 위해 벌였던 일 때문에 죽을 뻔했습니다. 잘못은 최하준이 저질렀는데 왜 강여름 씨가 저에게 빚을 갚습니까?”“그만 하세요.”여름은 더 듣기 싫었다. 곧 이성이 모두 날아갈 지경이었다.“여름 씨, 당신이 이성을 찾았으면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최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