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가 소리치며 눈물을 몇 방울 또르르 흘렸다. 눈물을 본 윤상원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날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왜 널 찾아갔을 때 돌아오지 않았어? 우리가 다시 사귀었더라면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윤상원은 찢어지는 심장을 부여안고 이를 악물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 윤상원이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신아영과 사귀기는 했지만, 신아영에게는 윤서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그저 신아영인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고맙고 윤서와는 재결합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사귀기로 했던 것뿐이었다.“아영이랑 오빠가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어. 나랑 지내는 시간보다 아영이랑 지내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윤서가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걔가 오빠 친동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니잖아. 난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 나중에 서울에 가서 나는 오빠를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려고 했어. 그런데… 백윤택에게 걸려들고 말았지.”윤상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4년 전 윤서가 백윤택에게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윤서가 병원으로 실려 간 사진이 있는데도 백윤택은 나와서 윤서가 자기를 꼬드겼다고 주장했었다.“그때 백윤택이 날 따라다니긴 했어. 하지만 그런 인간쓰레기를 내가 허락할 리가 없잖아? 계속해서 거절하자 그 인간은 성질이 나서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쳐들어온 거야. 날 마구 때리고 옷을 찢…”“윤서야…”윤상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윤서가 말을 이었다.“다행히도 날 구하러 와준 사람이 있어서 백윤택은 성공하지 못했어. 하지만 난 너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지. 경찰에 신고했지만 백윤택은 인맥과 돈을 동원해서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더라고. 그때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서 분명 피해자인데도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은 해외로 나가버렸지.”윤서가 한숨을 쉬었다.“막 나가서도 잘 지내진 못했어. 늘 오빠 생각을 했어. 혹시나 안부 톡이나 전화가
“미안해할 것 없어. 다 내 팔자지, 뭐.”윤서가 배를 어루만졌다.“나는 이제 차기 대통령의 딸이자 송영식의 부인이 되었지만…. 다들 알잖아? 송영식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윤상원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윤서야… 잘 지내고 있는 거야?”“내가 어떻게 송 의원의 양녀가 됐는지 알아?”윤서가 맞은 편의 윤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귀국하고 나서 오슬란에 들어가서 신제품 발표회를 하게 되었어. 그런데 백윤택이 내 잔에 약을 탔어. 그리고 송영식은 그날 거하게 마시고 취해 있었지. 그날 밤 이리저리 일이 꼬이면서 우리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어. 그쪽 집안은 송영식과 백지안의 결혼을 막으려고 일부러 그날 일을 크게 떠벌려서 송영식에게 날 책임지게 만들려고 했어. 심지어 사후 피임약을 바꿔치기까지 했지.”윤서가 몸을 부르르 떨고는 말을 이었다.“그런데 송영식이 죽어도 나랑 결혼을 못 하겠다는 거야. 그때까지도 난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나중에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그쪽 집안에서 내가 아이를 지우면 리마를 무너트리겠다면서 하지만 내가 아이만 낳아준다면 송태구 의원의 양녀로 삼아주겠다는 거야.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정말 비열한 사람들이구나.”윤상원은 윤서가 그런 일을 겪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비열하다고?”윤서가 쓴웃음을 지었다.“대통령이 딸이라고, 누구나 부러워할걸?”“하지만 그건… 넌 그런 걸 바라는 사람이 아니잖아.”윤상원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어쩌다가 송영식이랑 결혼을 하게 된 거야?”“백지안이 송영식을 차버렸거든. 그리고 오빠가 퍼트린 영상이 아주 결정적이었지.”윤서가 윤사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임신한 아내가 맞는 것을 보고 울컥해서 덤벼들었다고 하면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훨씬 수긍이 가잖아?”순간 윤상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윤서를 송영식과 결혼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거잖아?’“난 그날 정말로 아영이를 괴롭히지 않았어. 저가 달려와서 내 앞에
차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윤상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그때 내가 윤서를 잡으러 외국으로 나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아영이의 말만 아니었었다면….아영이?’윤상원은 처음으로 지난 일을 진지하게 되돌아보았다.그날 경찰서에서 신아영이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면 윤상원은 그렇게 미친 듯이 송태구의 정적과 손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윤서의 말대로 둘 사이에 신아영만 없었다면 정말 둘은 지금 이 지경이 되는 대신, 진작에 결혼해서 지금쯤 아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윤상원은 이제서야 윤서와 사귈 때 아영이와 거리를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회사로 돌아와서 윤상원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다가 입구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는 바로 신아영을 찾아갔다.그런데 신아영은 자리에 없었다.윤상원은 윤서의 말이 생각나서 신아영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 실크리본으로 묶어둔 고급스러운 선물상자가 보였다. 선물인 듯했다.열어서 확인해 보니 매우 고급 브랜드인 것 같았다.“오빠….”이때 갑자기 신아영이 들어왔다. 윤상원에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는 멈칫했다.“서류를 찾으러 왔는데 이게 보이더라고.”윤상원이 얼른 대답했다.“누구한테 선물하게?”“응. 지난번에 오빠 꺼내느라고 친구가 힘 좀 써줬잖아. 그래서 선물 하나 샀어.”그렇게 말하면서 신아영이 윤상원의 팔에 감겨왔다.“당연히 은혜는 갚아야지. 언제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하자.”윤상원이 문득 말했다.“그럴 필요는 없어. 굉장히 바쁘거든. 그리고 우리랑 사는 세계가 달라서 오빠를 꺼내준 것만 해도 엄청 시간 내준 거야.”신아영이 웃었다.“아, 오늘 오후에 좀 일찍 나가서 이거 전해주려고 하는데.”“그래, 가 봐.”윤상원이 끄덕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오후에 신아영은 강여경과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차를 몰고 회사에서 빠져나갔다.그러나 뒤에 택시가 따라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택시에는 윤상원이 타고 있었다.혹시나 눈에 띌까 싶어서 자기 차가 아닌 택
50분 뒤.신아영의 차는 어느 마천루의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윤상원은 신아영이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은 덩치가 좋은 경비 둘이 지키고 있었다.신아영이 경비에게 뭔가를 보여 주자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했다.윤상원이 의혹에 차서 쳐다보고 있는데 기사가 떠들었다.“저 건물 옥상에 고급 클럽이 있거든요. 저 엘리베이터는 그 클럽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예요. 연봉 30억 이상 되는 사람들만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다던데요. 그래서 저기 출입하는 사람들은 재벌 2세이거나 연예인이에요. 여친이 대단한 분인가 봐요.”윤상원은 경악했다.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신아영의 친구가 대단한 신분이라면 신아영을 그런 곳에 들여보내 줄 수 있는 것도 별 이상할 것은 없다.윤상원은 그 클럽에 들어갈 조건이 안 될 것이 뻔했다. 막 자리를 뜨려는데 고급 외제 승용차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곧 강렬한 레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윤상원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정말 강여경이었다.전에 여름의 집안 결혼식에서 본 적이 있었다. 4년이 지나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지만, 한눈에 강여경이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 신아영이 들어가자 몇 년 동안 실종되었던 강여경이 같은 장소에 나타나는 우연이 벌어질 확률이 몇 %나 되겠는가?신아영은 진짜로 강여경과 아는 사이라는 점이 확실해졌다.윤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전에는 윤서가 회사까지 쫓아와서 신아영에게 폭력적으로 대했던 것이 질투심 때문인 줄 알았다.당시 신아영은 강여경을 모른다고 했었다.이제 보니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과연 신아영이 한 거짓말이 그것뿐일까?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지는 않았을까?’윤상원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이때 기사가 소리쳤다.“저 여자는 연예인이네!”윤상원이 다시 돌아보니 또 고급 스포츠카가 멈춰 섰다. 그리고 살구색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에 야구모자를 쓴 여자가 내렸다.일부러
윤상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아영이 어쩌다가 그렇게 못된 인간들과 어울리게 되었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죄송한데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주세요.”클럽에 들어갈 자격이 안 되니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윤상원은 도중에 택시에서 내려 휴대 전화를 들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윤상원은 하마터면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그러나 자신은 이제 영원히 기회를 잃었다는 점을 냉정하게 상기했다.“방금 아영이가 무슨 클럽에 들어가는 걸 봤는데 곧이어서 강여경처럼 생긴 사람도 그리로 들어가더라고. 그리고 나중에는 시아도 오더라….”“시아?”윤서는 깜짝 놀랐다.“나도 확실하지는 않아.”윤상원이 살짝 머뭇거렸다.“그런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모자랑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거든.”“정말 시아일지도 몰라. 전에도 강여경이랑 친했거든.”윤서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윤상원이 준 정보는 너무나 의외였다.아까 가서 이야기를 잠깐 했다고 저녁에 바로 이렇게 정보가 날아올 줄도 몰랐다.윤상원이 자기 말을 믿고 진짜 신아영을 조사해 볼 것이라는 데 100%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아영이는… 알아?”문득 윤서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그게… 몰래 미행을 했거든. 아마도 네 추측이 맞는 것 같아.”윤상원이 괴로운 듯 말을 이었다.“예전에 너에게 손찌검했던 일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다 지나간 일인데, 뭘. 이번에는 날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것만 해도 고마워.”막 그런 말을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송영식의 고함이 들려왔다.“누구랑 통화를 하는 거야!”“일단 끊어. 어쨌든 정말 너무 고마워.”윤서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윤상원은 송영식의 목소리가 거친 데다 당황한 윤서의 목소리까지 듣고 나자 윤서가 그 집에서 눈치를 보느라고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나 싶었다.생각할수록 후회되었다.‘그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윤서가 이렇게 자기를 아껴주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을
“뭐? 질투?”송영식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질투하면 어쩔 건데? 내 와이프한테 다른 남자가 얼씬거리는데 내가 질투도 못해?”“……”윤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생각과 조금 달랐다. 송영식이 절대로 부인할 줄 알았는데 이건….되려 자기가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게 되었다.송영식은 처음에는 ‘아, 쪽 팔려서, 원’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할 말을 잃은 윤서를 보고는 부끄러움이 확 날아가 버렸다.“어쨌든 한 번만 더 만나면 내가 윤상원을 찾아가서 당신이 그 녀석을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다 불어버릴 거야.”윤서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아 몰라. 비켜! 여름이한테 전화해야 해.”“못 비켜. 나 없는 틈에 또 그 녀석에게 연락하면 어쩔 거야?”송영식은 그대로 의자에 앉아 버렸다.아까 윤서가 윤상원과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꿀이 뚝뚝 떨어지는 거 같았던 것이 언짢았다.‘나한테는 허구한 날 버럭버럭 소리만 지르면서.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냐고?’“그러시던지”윤서는 송영식에게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결국 본체만체하면서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방금 윤상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신아영이 밤에 뉴아쥬(Nuage)클럽에 갔대.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거기 강여경이랑 시아도 나타났다는 거야.”“정말 강여경이었구나.”자기 예상이 틀렸으면 하고 바랐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여름은 골치가 아팠다.“시아까지 합세했구나.”“이상할 것도 없지. 전에 동성에서도 시아랑 가깝게 지냈었잖아.”윤서가 콧방귀를 뀌었다.“강여경은 시아가 이주혁이랑 결혼한다는 사실을 아는 거야. 그렇게 좋은 인맥을 안 잡아당기고 배기겠어? 그나저나 시아는 진짜 낄끼빠빠를 모르고 아무 데나 끼고 난리네.”“그 셋은 나에게 원한이 있는데, 이제 거기에 백지안까지 합세하면….”여름은 머리가 아팠다.“이제 어떡할 거야? 지금 바로 클럽으로 가서 강여경을 족쳐볼까?”윤서가 아무렇게 나 뱉었다.“그래.”“어?”윤서는 당황했다.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
“하준 씨는 자기 친구이기도 하잖아? 강여경은 최하준도 상대하려고 한다고. 이러고 눈 뻔히 뜨고 앉아서 친구가 당하는 꼴을 보고 있겠다는 거야?”윤서가 되물었다.송영식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윤서가 부엌으로 가서 밥을 먹고 나자 결국 송영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는 건 좋은데, 나도 따라가야겠어.”윤서는 송영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40분 후, 여름의 차가 송영식 집 앞에 멈췄다.차에 올라 송영식이 미간을 찌푸렸다.“왜 혼자 왔어요? 하준이는요?”“FTT에 또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서류를 내가고 있어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걱정할까 봐 준에게는 말도 안 꺼냈어요.”여름이 답했다.“말도 안 하고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더 걱정할 텐데.”송영식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영식 씨 내외 있잖아요?”여름이 빙긋 웃었다.“강여경이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설마하니 송영식 씨를 건드릴 정도는 아닐 거예요. 게다가 그렇게 오래 숨어 있다가 돌아왔으니 아마도 날 심연으로 밀어 넣어 서서히 말려 죽이고 싶을 거예요. 단숨에 적을 처치하고 나면 재미가 없잖아요.”송영식은 심란한 얼굴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아무래도 여름이 점점 하준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속을 알기 어렵고 남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악해 내고는 했다.뉴아쥬 클럽에 도착하자 송영식이 회원 카드를 내밀었다. 여러 차례의 보안 감사를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여긴 처음 와보는데 보안이 너무 지나지네.”윤서가 송영식에게 부루퉁하게 말했다.“당신이 운영하는 클럽도 있잖아? 그런데 여기처럼 삼엄하지는 않은 느낌인데.”송영식이 복잡한 심경으로 말했다.“여기는 사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야.”“누군데요?”여름이 궁금한 듯 물었다.“조의성이라고, VIP의 손자죠.”송영식이 답했다.“나보다 두 살 어린데 보통이 아니에요. 원래는 걔가 우리 삼촌하고 대선에서 맞붙을까도 했었는데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서
다들 뻔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친밀하게 안긴 것이 불편했지만 윤서는 송영식이 연기를 하는 것을 눈치채고 대충 맞춰주기로 했다.“어머나, 사모님을 무척 아껴주시나 봐요.”눈치 빠른 매니저가 생긋 웃었다.“정말 행복하시겠어요.”윤서는 빙긋 웃을 뿐,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들 송영식과 백지안의 일을 알고 이는데도 그렇게 입에 발린 말을 해주니 윤서는 그냥 둘 뿐이었다.“아, 오다가 보니까 조 대표 차가 있던데. 모처럼 왔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지금 조 대표 어디 있나요?”송영식은 은근슬쩍 거짓말을 했다. 사실 들어오면서 송영식은 조의성의 차 같은 것은 보지도 못했다. 그저 해본 말이었다.매니저가 웃었다.“마침 친구분이 오셔서 그쪽에 가 계세요.”“잘됐네. 조 대표가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죠.”송영식이 웃었다.여름이 갑자기 작은 소리로 끼어들었다.“그래도… 괜히 방해하는 거면….”“맞아.”윤서도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난 그냥 구경하러 온 건데.”“당신이 잘 몰라서 그래. 이렇게 하는 게 예의야.”송영식이 툭 뱉었다.“조 대표가 누군데, VIP의 손자라고.”윤서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그러면 인사해야겠네.”매니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끄덕였다.“위층에 계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그러더니 안내했다.뒤에서 송영식이 티 나지 않게 윤서의 귀여 속삭였다.“우리 둘이 짜지도 않았는데 연기에 죽이 착착 맞는데?”윤서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로 귀에 속삭이니 사뭇 야했다.윤서는 간지러워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송영식이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어허, 사이좋은 척하지 않으면 의심 산다고.”윤서가 남몰래 송영식을 흘겨보았다.왜 클럽 같은 데를 와서 뭔가 적진에 잠입하는 스파이마냥 사이좋은 척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곧 매이저가 송영식 일행을 데리고 어느 룸 앞에 멈추더니 가볍게 노크했다.곧 보디가드 같은 사람이 문을 열었다.“누구를 찾으십니까?”“조 대표를 좀 볼까 하고. 친구인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