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지.”최란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사실은 그때 네 아빠와 이혼하고 나도 그렇게 빨리 재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 그날 네 아빠랑 대판 싸우고 술을 마시고 나서 추동현이랑 보내게 된 거야.”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아들로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그날 밤에 그 사람이 아버지였을 수도 있겠네요.”하준의 말에 최란은 완전히 놀라서 우는 것도 잊었다.“그… 그럴 리가.”“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좀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여울이랑 하늘이 좀 부탁드릴게요.”하준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멍하니 있는 최란을 남겨주고 나갔다.하준은 차를 몰고 한병후가 구매한 지 얼마 안 되는 별장으로 갔다. FTT 산장이 지금은 자신의 소유가 되긴 했지만 너무 눈에 띄는 곳이라서 일단 한동안은 그곳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냐?”한병후는 수면 가운을 입고 잘 준비를 하다가 하준이 왔다는 소리에 다시 내려왔다.“오늘 뉴스를 보니까 가디언이 추신과 협력한다는 기사가 났길래요.”하준이 무거운 말투로 물었다.“그래.”한병수가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나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추동현과 협상 자리에는 사장이 나갔지. 추신이 지금은 국내 최고의 그룹이라고 하지만 주력 브랜드가 그렇게 힘이 있진 않지. 반도체 분야도 랜들이 지원을 해주어서 사실상 추신에서 버는 건 중개료 정도다. 추신은 아직 그쪽 기술이 부족해. 물류는 벨레스를 먹어서 해결했겠다, 이제는 가디언의 기술을 도입하길 원하고 있어. 그러면 자체적인 상품을 개발해 낼 수 있을 테니까. 현재는 아직 기초적인 협상 단계다. 추신에서 출자해 기술단지를 세우고 그 프로젝트에 투자하겠다더구나.”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눈을 빛냈다.“그렇지만 기술은 저와 협력하기로 하셨죠. FTT에서 먼저 시작했으니 나중에 추신보다 앞서서 제품을 출시해 버리면 추신은 투자금을 그대로 날리게 되는 거군요.”“그래.
“알겠습니다.”하준은 조용히 탄식했다. 언제가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역시나 아버지에 비하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역시나 내 아들이구나. 네가 재기할 때가 우리 부자의 복수가 시작되는 때다.”한병후의 눈에 뼈에 사무치는 한이 솟구쳤다.하준의 얇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시고 나서 혹시… 관계를 가지신 적 있나요?”한병후는 뜨악했다. 잠시 후 눈에 고뇌가 스쳤다. “그런 일은 물어서 뭐 하려고 그러니? 언제 적 일인데, 기억도 안 난다. 게다가 최란을 생각하니 속이 거북하구나.”“어머니와 추동현 일 때문에요?”하준이 결국 그렇게 물었다.“당연하지. 그런 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니? 혼전에야 란이와 추동현이 어떤 사이였건 상관없다. 그러나 결혼을 했으면 애를 생각해서라도 추동현하고는 거리를 두었어야지. 네 엄마는 너도 신경 쓰지 않고 매일 추동현하고 어울리고는 했다.”이미 오래된 일이라고는 해도 그 일을 언급하자 한병후는 여전히 화가 나서 이마에 푸른 심줄이 올라왔다.“나주에 내가 추동현을 손 봐준 일로 이혼을 하자고 하더구나. 몇 번을 싸우다가 나도 마음이 식어서 이혼을 해버렸던 거지.”“어머니와의 과거를 알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는 두 분이 이혼하고 나서 관계를 가진 일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하준이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요. 예를 들어서 뭐 어머니가 취한 다음에라도….”한병후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뭐, 그런 일이 한 번 있기는 했다. 란이랑 크게 싸우고 안 좋은 소리를 몇 마디 했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네 엄마에게 상처가 됐을 것 같아서 가보니 취했더구나. 그래서 …크흠,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그 애기는 그만하자.”한병후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하준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는지 알지 못했다.최란은 그때 술에 취해서 기억이 너무 모호해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그러니까, 양하
“아니다!”한병후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추동현 그 자식이 나쁜 놈이지.”“네, 정말 악랄합니다.”하준이 갑자기 핏발 선 눈을 들었다.“아버지, 양하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만한 자가 있습니다. 잡아서 심문해 보면 알게 될 겁니다.”원래는 한동안 민정화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는 양하를 위해서 조금 서둘러 손을 쓰고 싶었다.******어느 허름한 아파트 단지.전성이 ‘밥 먹어~’라고 외친다.민정화가 살짝 나온 배를 붙잡고 안에서 나온다.화려하게 화장을 한 민정화를 보고 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임신했는데 그렇게 색조 화장을 진하게 해도 괜찮아? 색조 화장품을 쓰면 피부도 많이 상할 텐데, 그리고 아기 생각도 해야지.”“아기 생각은 충분히 하고 있거든요. 아이라인도 안 그렸는데.”민정화가 언짢은 듯 말을 이었다.“게다가 임신해서 얼굴에 기미랑 뭐가 자꾸 올라온단 말이에요. 기미는 가리고 싶다고”“정화야….”“또 삼계탕이야? 이젠 질렸다고요.”정화가 부루퉁해서 소리쳤다.전성은 불둑거리는 태양혈을 누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전에는 민정화와 종일 붙어 있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저 발랄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지룡을 떠나 함께 살고 나서야 전성은 민정화와 성격이 정말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여왕님처럼 모셔도 민정화는 온갖 까탈을 부리고는 했다.그러나 이미 자기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 남자로서 책임을 안 질 수도 없었다.전성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오후에 가서 사 올게.”“응.”그제야 민정화는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이때 휴대 전화가 띠링 하고 울렸다. 추성의가 보낸 톡이었다.추성의는 추성호의 사촌 동생이다. 지금은 추신에서 사장 자리를 맡고 있어 위풍당당하다. 맞은 편에 앉은 마흔이 넘은 전성을 흘끗 쳐다보았다.마땅찮은 기분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전에는 전성의 위세가 온 사방에 떨쳤었다. 잘생기고 위풍당당한 남자였다. 그러나 지룡을 떠
차윤은 민정화에게 다가와 찰싹 따귀를 때렸다.“차윤, 이게!”민정화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감히 내게 손을 대? 가만두지 않겠어. 잘 들어. 최하준은 이제 한물갔다고.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면 하루빨리 그 수하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걸. 그대로 있다가는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널 없애 버릴 줄 알라고.”“거 말 많네.”차윤이 다시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민정화는 머리가 윙윙 울렸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전성이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만해!”분노한 전성이 말렸다.“회장님, 정화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이미 지룡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지룡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평생 지룡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 해왔는데 지금 제 아내를 이렇게 괴롭히시다니요? 인간적으로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인간적으로 어떻게 이러냐고?”하준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전성, 자네가 지룡을 위해서 적잖이 일해준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지룡에서 자네에 대한 대접도 섭섭지 않았을 거야. 그동안 최소한 수십억은 손에 만졌을 텐데? FTT에서는 그간 권력과 지위와 금전을 모두 충분히 제공했어. 그런데 그런 대접을 받고도 우리를 배신해?”순간 전성의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누명 씌우지…”“누명?”하준이 다시 웃었다. 시선이 다시 차윤에게로 향했다. 차윤이 다시 민정화를 쳤다.“차윤… 최하준….주...죽여 버리겠어.”너무 아파서 민정화는 더듬거리면서도 저주를 그치지 않았다.“그만둬!”전성이 흥분해서 소리쳤다.“회장님, 임신한 아이입니다. 해치지 마십시오.”“자네 아이를 가져서 그렇게 방자하게 날 기만 하도록 내버려 둔 건가?”하준이 갑자기 민정화의 턱을 움켜쥐었다.“아이는 걱정이 되나 보지?”전성의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질려버렸다.“그러지 마십시오. 제발….”“그렇다면 양하가 실종되던 날의 진상을 알아야겠다. 말하지 않겠다면, 뭐 그래도 상
“그래서 민정화는 진작에 추신과 결탁한 상태였고, 데이터를 빼돌리고 양하에게 뒤집어씌운 것도 민정화였다?”하준이 압박하듯 물었다.“그건 모릅니다.”전성이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 자네는 알고 있어.”하준이 민정화의 입에서 재갈을 빼냈다.민정화는 너무 아파서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심지어 차윤이 손에 든 침을 보고는 두려운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아니야, 아니라고! 다 거짓말이야! 저 사람이 추신과 결탁한 거라고요. 난 아무 죄도 없어요. 다 전성이 혼자서 한 짓이에요. 전성이 추신에서 받은 것이 많았거든요.”전성은 온몸이 굳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여자를 쳐다보았다.하준은 전성을 흘긋 쳐다보더니 민정화의 휴대 전화를 꺼내 톡 어플을 열어 전성에게 들이밀었다.“아직 상황을 잘 파악 못한 것 같은데, 자네들이 밥을 먹기 전에 민정화는 추성의에게 꼬리를 치고 있었어.”전성은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대화의 내용을 가만히 보았다. 두 눈이 분노에 흔들렸다.“정화야, 어떻게 이런….”“거짓말이야! 난 그런 적 없어!”민정화가 놀라서 변명을 하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어, 그 위쪽을 보면 늙은이는 이제 꼴 보기 싫다, 늙은이의 애 따위 지워버리고 싶다… 뭐 그런 내용도 있군.”하준이 톡을 읽어 내려갔다.전성의 근육이 온통 부들부들 떨렸다.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한참 만에야 비통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런 여자를 위해서 회장님을 배신하다니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그 전에 나는 진상을 알았으면 하는데.”하준이 싸늘하게 말했다.전성이 헛웃음을 웃었다.“처음에는 정화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부회장님이 실종되고 나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정화를 데리고 일단 지룡을 떠나서 물어보았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더군요. 제가 내내 FTT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길 원치 않는다며 다 저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화가 났지만 정
역시나 지룡의 리더를 맡았던 전성인지라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추신에 스파이로 잠입하라는 말씀이죠?”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FTT 밑에서 수십 년 일한 사람답군.’“자네 집안은 대대손손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해주었다. 우리도 자네들에게 적지 않은 비용과 마음을 썼어. 우리 가문이 무너지면 떠날 수는 있겠지만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 배신자는 처단한다는 지룡의 규율을 알고 있을 거야. 자네가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FTT가 그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다.”그 말을 들은 전성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그래. 이게 다 내가 정화에게 정신이 나가서 벌어지 일이지.정화가 그런 짓을 하도록 내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으면 FTT 랩실에서 데이터를 도둑맞을 일도 없고 정화가 부회장님을 해치는 일도 없었겠지.’“죄송합니다. 죗값을 받겠습니다.”전성이 증오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전에는 정화에게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제가 눈이 멀었었나 봅니다.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저 전성은 앞으로 회장님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하준이 무표정하게 답했다.“오버하지 말라고. 날 배신한 자를 내가 곁에 둘 리 없잖아? 게다가 나는 자네도 믿지 않아. 이번 일만 깨끗하게 처리해 주면 자네 아이를 데리고 꺼질 수 있게 해주겠다. 실패하면, 자네들을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어.”그 말을 들은 전성은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민정화가 다급히 말했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지금 자기 목숨이 전성에게 달렸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민정화는 지금 죽음이 가장 두려웠다.죽음 앞에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민정화의 말을 들은 전성은 증오스러운 눈으로 민정화를 노려보았다.‘이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란 말인가, 저 여자를 위해서 나는 내 모든 양심까지도 다 져버렸는데.’하준이 민정화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전성이 스파이로 침투하는 동안 너도 간다
“절벽도 높고 파도도 거칠군요. 당시 양하는 다리가 골절된 상태였으니 생존 가능성은 없어 보이네요.”하준은 말하면서 점점 더 괴롭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병후 앞에 털썩 꿇어앉아 잔뜩 잠긴 목소리로 눈물을 떨구었다.“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양하를 잃고 말았습니다.”“아니다. 모두 네 탓을 할 수는 없지. 나에게 책임이 적지 않다. 예전에 내가 그렇게 란이만 두고 떠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네 엄마가 오해하지도 않았을 거고 추동현이 네 엄마를 이용할 기회도 없었을 텐데.”한병후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추동성은 정말 악랄한 작자로구나. 내가 자기 계획을 망쳤다고 양하를 자기 아들인 척하고는 수십 년을 속여가며 살았다니. 그 오해 때문에 너와 양하는 내내 다투는 사이게 되었고 결국은 형제 사이에 이런 비극마저 빚어지고 말았다. 그게 놈의 목적이었을 게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추신을 뿌리 뽑아 추동현이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겁니다.”그 순간 하준은 무한한 복수심에 이글이글 타올랐다.‘추동현, 양유진, 백지안….모두 다 나의 적이다.’******진영 그룹.양유진은 최근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내내 얼굴이 어두웠다.전수현이 커피를 내려 가져왔다. 양유진 등 뒤에 서서 어깨를 주무르더니 곧 점잖지 못한 움직임을 보였다.“장소는 좀 가려.”양유진이 전수현이 손을 잡고 경고했다.“지난번에 한선우 사태를 겪고도 정신 못 차렸어?”“안심하세요. 문은 이미 잠갔으니까.”전수현이 질투가 담긴 말투로 귓가에 속삭였다.“자기 요즘 계속 백지안만 찾아가더라. 걔가 기술이 더 좋아요? 그래서 이제 나는 질렸어?”“질투하는 거냐?”양유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당연하지. 최소한 나에게는 첫 남자인데.”전수현이 뾰로통해서 중얼거렸다.말인즉슨 백지안에게 양유진은 첫 남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양유진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전수현은 짐짓 점잔을 빼는 양유진의 모습을 잘 알았다. 바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이때 갑자기 입
‘비서가 향수를 너무 진하게 뿌리지 않나? 유진 씨는 이래도 별 상관이 없나?’사실 향수는 너무 인공적인 향이라서 아무리 명품 향수라고 해도 여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어쩐 일인지 여름의 눈에 양유진이 점점 더… 천박해 보이기 시작하니 이상한 일이었다.“여름 씨도 알다시피 저는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양유진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그래도 일부러 이렇게 사 왔는데요?”여름은 일부러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유진 씨 입으로도 모처럼만에 왔다고 했으면서.”“알았어요, 알았어. 와이프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마셔야죠.”양유진이 바로 여름의 기분을 맞추며 밀크티를 받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맛있네요. 와이프가 가져와서 그런가 유난히 더 달콤한데요.”말끝마다 와이프, 와이프거리는데도 여름이 딱히 싫어하지 않자 양유진은 꽤 흡족했다.“여름 씨, 정말 의외네요. 나는 아직 화가 나 있을 줄 알았거든요.”“말했잖아요. 나도 미안했다고.”여름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지나간 얘기는 우리 그만 해요. 아 참, 여기 걸레 있어요? 밖에서 흙을 좀 밟고 들어와서 그러는데 화장실에 가서 좀 닦을게요.”“있어요.”양유진은 전수현이 휴게실 안에 숨어 있는 게 걸려서 바로 따라 들어왔다.양유진이 그렇게 바짝 따라 들어올 줄 몰랐던 여름은 할 수 없이 정말 신발을 닦았다.“저 실은 배가 아파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가서 일 보고 계세요.”여름은 화장실 문을 잠그고 문에 바짝 기대서 1분쯤 기다렸다. 양유진이 떠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희미하게 옷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이어서 신발 소리가 잔뜩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정도였다.여름은 방금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문이 잠겨있었던 것과 사무실에서 전수현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설마 유진 씨와 전수현 사이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 전수현을 옷장에 숨겼었나?그런데 내가 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