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듣자, 전예은의 긴장감이 풀렸고, 의식적으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려던 순간 또 그녀에게 제압당했다.태준은 아직 그녀를 감싸고 있다.그가 차갑게 자기를 대하는 것은 예전에 그를 버리고 외국으로 간 것 때문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서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신은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턱을 들면서 눈을 내리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전투력이 폭발하는 싸움닭처럼: “꿈 깨, 난 절대로 전예은에게 사과하지 않아.”박태준의 얼굴에는 분노로 가득 찼고, 소용돌이치는 폭우처럼 은지를 당장에라도 휩쓸어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 “예은에게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야. 아이에게 사과하란 얘기야.”자신의 온화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수습하려고 나서려던 전예은: “……”신은지는 이를 악물고 경시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도 좋은 아버지인 척을 하겠다는 거네.”박태준은 그녀의 비아냥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섰고, 그의 키와 카리스마가 주는 압박감이 순간 신은지의 기세를 압도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약간 힘을 주어 잡아당겨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과해.”그는 얼굴에 묻은 커피를 아직 닦지 않았다. 그리고 태준에게 끌려간 신은지의 머리 위에는 그의 아래턱을 따라 흐르는 커피 몇 방울이 떨어졌다.신은지: “……”이놈이 자기만 힘들면 됐지,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네.“내 말이 맞을까 꺼리면 아이를 낳지 않으면 되지. 쓰레기 같은 당신과 천한 전예은 둘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아?”전예은: “신은지, 나와 너 사이 갈등은 기껏해야 여자들 사이의 허영심과 질투심일 뿐이고, 대학 시절 가끔 비아냥거린 것 외에 별다른 도를 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최근에는 더더욱 없었고. 너 나한테 입을 열면 천한 여자라고 욕하는데 너무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전예은 말이 사실이지만, 전부 다 사실인 것은 아니다.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학과 퀸카 옹호자들이 서로 알게 모르게 기선제압을 하면서
두 사람은 안 좋게 헤어졌다. 재경그룹에서 나온 신은지는 바로 장 변호사한테 전화 했다. ”저 이혼소송 진행해 주세요 “전에 이혼소송 건에 대해 분석해 줬었기에, 장 변호사는 딴 말 없이 그녀에게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알려주었다.전화 통화가 끝난 후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신은지는 얼굴 붉히는 일 없이, 결혼할 때처럼 조용히 이혼을 마무리하려 했었다. 재경그룹과 같은 재벌그룹은 언론이 항상 주시하고 있기에, 약간의 움직임만 보여도 세상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만신창이인 혼인 생활이 외부로 노출되어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동정받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결국에는 소송까지 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근처 커피숍에서 간단히 식사할 음식을 주문하고, 1시간 후에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했다.오후 6시 40분경, 검은색 긴 기장의 패딩에 검은색 마스크를 한 남자가 커피숍에 들어왔고,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곧장 신은지를 향해 걸어왔다. ”신은지 씨.”차연우는 마스크를 벗고 웨이터에게 얘기했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한 사람을 조사해 주셨으면 해요.“ 신은지는 휴대폰을 꺼내 조사할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차연우는 전에 기자로 활동했었고, 당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기자들이 알아내기 힘든 내막을 폭로했고, 폭로하기 전에 예고하여 나쁜 습성을 가진 연예인과 재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나중에 무차별하게 너무 많이 폭로한 탓에 사람에게 얻어맞고, 너무 심하게 매 맞아서 죽은 개처럼 땅에 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당시 신은지가 우연히 그를 구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신은지에게 생명의 빚을 지게 되었다. 차연우는 신은지가 보여준 사진을 보면서 물었다. ”어떤 정도로 조사하면 될까요?”그에게 의뢰한다는 건 필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신은지는 사진 속의 오만한 표정의 신지연을 보며, 붉은 입술을 가볍게 열었다. ” 무너져서 다신
박태준은 말없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고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다.그의 변호사인 곽동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은 사모님, 법원에서는 사모님과 대표님께서 사적으로 조정하시는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는데 이혼소송까지 이어지면 사모님께도, 대표님께도 영향이 좋지 않습니다.”장 변호사도 이혼 소송 전에 조정 단계가 있다고 그녀에게 귀띔한 바 있다. 일종의 법률절차이다. 일반적으로 재판 며칠 전에 이루어지는데 박태준이 너무 바쁜 나머지 재판 전으로 미뤄진 것이다.신은지: “그럼 저 사람에게 이혼에 동의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제가 즉시 소송을 철회하고, 일 분도 지체하지 않겠습니다.”곽동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현저한 감정 변화가 없었다. 조금 전에 한 얘기는 그저 관례적인 질문인 듯 전혀 성의가 없어 보였다.잠시 후, 재판장은 관련 인원과 함께 조정하러 왔다. 과연 직업이 직업인지라 각종 감언이설로그들을 설득했고, 이를 듣는 신은지 자신조차 사리 분멸을 못하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했다.“반드시 이혼할 겁니다!”모두가 그녀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재판장님을 포함한 관련 직원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은지는 신지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발신자 번호는 국내 번호였고, 전화를 받고 목소리를 듣자, 누군지 바로 알았다. “당장 그 소송철회 해!” 신진하는 노발대발했고, 마라톤을 열 번 넘게 완주한 사람처럼 거친 숨소리로 전화에서 얘기했다. 이 얘기를 듣자, 신은지는 바로 박태준을 바라보았다……박태준은 이 순간을 기다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녀가 보는 그 시점에 그 역시 그녀를 보았고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신은지는 말없이 입 모양으로 그에게 내뱉었다. “비열해.”그가 신진하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자기 말을 들을 거로
신은지는 처음 이렇게 자기애가 넘치는 남자를 보았다!힘껏 그를 밀었다. "더러운 것을 몸에 묻을까 봐”박태준이 일어서 그녀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 신은지는 경계심을 점점 풀게 되었으며, 방금 남자가 한 말에 반격했다: "또이라니? 내가 언제 찾았었어?”"언제 그랬냐고?"남자가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스폰서 아니었어? 수십억이나 갖다 바쳤지만 지금 이혼하자고 난리 치고 있잖아, 세상에 나보다 더 한 호구가 더 있어?”신은지: "……”박태준 그 입은 정말 지독하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_x000B_"호구 찾아다닐 생각 포기하는게 좋을 거야. 밖에서 누굴 꼬시든,걔가 얼마나 호구든 상관없어 근데 그놈 반드시 억울해서 죽을 거야.”그는 차문을 닫고 "강기사님, 사모님 집으로 보내주세요.”신은지는 뭐라도 변명하려고 했지만 참았다. 됐다. 쇠귀에 경 읽는 짓을 왜 하냐!법원을 떠난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강기사에게 진유라의 중고품 가게로 데려다주라고 했다.…진유라는 그녀가 쳐져 있는 얼굴을 봐서 재판 잘 안 된 것을 예측했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잘 왔다, 가자, 술 마시러 가자.”신은지가 가게에 들어오기도 전에 진유라가 어깨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이 오래 만났으니, 진유라의 마음을 바로 캐치했다 “나 괜찮아.”"나 술 댕겨, 우리 아빠가 요즘 뭔 찔라를 하는지, 갑자기 술, 담배를 끊재. 아니, 자기만 하면 되는데, 나까지 못 마시게 매일 날 감시해. 오늘 출장 갔어, 좋은 기회 놓치면 안 되지.”강기사님은 신은지를 데려다주고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와 진유라가 나오는 것을 보았고, 혹시라도 차가 필요할까 봐 잠시 세웠다. 두 사람이 멀지 않은 노래방에 들어갔다는 것을 봤다.그는 고민하다가 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사모님이 진유라씨와 같이 노래방에 들어갔어요.”박태준은 자세한 주소를 물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세요.”낮에 노래방은 사람이 별로 없고, 취한 사람도 더욱 없어서
신은지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박태준을 알아본 그녀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당신만 보면 짜증 나니까.”옆에서 듣고 있던 강 기사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돋았다. 평소에 신은지가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살기등등하게 박태준을 대하지는 않았다.그는 혹시라도 박태준이 열받아서 그녀를 이곳에 버려두고 갈까 봐 걱정했다.박태준은 짜증을 참으며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신당동으로 가지.”“신당동 싫어!”술 취한 신은지가 발악하듯 말했다. “오네스타로 보내줘. 거기가 내 집이야.”오네스타는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었다.박태준은 그 말을 듣자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지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못 들은 척했다.만약 지금 신은지가 술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 취한 그녀가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대답 안 해?”신은지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꼬장을 부렸다. 박태준은 그대로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팔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닥쳐.”신은지의 두 눈에 물기가 스며들었다.“무섭게 왜 그래.”박태준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술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게 이토록 지치는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하게 된 그였다.“무섭게 왜 그러냐고.”그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짝!그가 정신이 팔린 사이, 여자의 손이 날아와서 그의 목덜미를 쳤다. 긴 손톱이 그의 목덜미에 뻘건 생채기를 냈다.“아까 무섭게 소리쳤잖아. 얘기하기 싫으면 얌전히 닥치고 있을 일이지!”불과 1초 전까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이 글썽해 있던 그녀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했다.박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넥타이를 풀어 그녀의 손을 묶고 억지로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움직이지 마.”물론 얌전히 있을 신은지가 아니었다. 그가 그럴수록 그녀의 발버둥은 심해졌다.“이거 당장 풀어!”여자의
박태준은 그녀가 다가와서 핸드폰을 가로챌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핸드폰을 확인한 신은지는 화면잠금이 풀리지도 않은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화면에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몇 통 떠 있었다.일부러 보려고 핸드폰을 잡은 게 아니라는 걸까?그런데 왜 화면을 보고 있었지?신은지는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고 불쾌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내가 내 방에 있는데 무슨 문제 있어? 당신이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잤으니까 여기 있지. 아니면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자지 못해서 실망했어?”박태준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퀭하고 옷도 구겨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야성미 넘치는 모습이었다.신은지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생긴 건 정말 멀쩡한데 왜 입만 열면 그 모양이야? 당신 참 뻔뻔한 거 알아?”그는 분명히 다른 방으로 가서 잘 수 있었다. 굳이 소파에 앉아 유령처럼 잠자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현실적이었다. 대체 잠든 내 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신은지는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오싹해졌다.박태준은 비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물었다.“핸드폰 배경화면 어떻게 된 거야?”그녀의 배경 화면은 그와 아주 흡사한 캐릭터를 그린 것이었는데 옆에 죽어 버리라는 저주의 말이 쓰여 있었다.박태준이 물었다.“날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당연한 거 아니야? 당신은 자기가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지?”말하는 와중에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차연우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 부족하면 제가 더 찾아볼게요.]핸드폰을 내려놓은 그녀는 뒤돌아서 옷 방 문을 열었다.이곳에서 나간 지 몇 달이 지났고 박태준은 고용인을 시켜서 그녀의 짐을 다 버렸다고 말했기에 갈아입을 옷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구겨지고 술 냄새가 진동했기에 아무거나 찾아 입으려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옷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 색상 분류까
문을 부술 것 같이 요란한 소리가 건물을 진동했다.신은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밖에 얼굴을 꽁꽁 감싼 신지연이 서 있었다.“무슨 일이야?”어떻게 들어왔을까 처음에는 궁금했는데 뒤에 청소부 이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은지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언니, 형부한테 말해서 나 좀 도와달라고 해. 요즘 사람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어디서 이상한 짜집기 영상을 가져다가 인터넷에 올렸어.”신지연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신은지가 입구를 꽉 막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신은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내가 널 왜 도와줘야 하지? 신지연, 우리 사이가 서로 도와줄 정도로 좋은 건 아니었잖아? 서로 머리채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내가 대체 널 왜 도와줄 거라 생각한 거야? 넌 과거에 나한테 한 짓을 다 잊었어?”잠시 말이 없던 신지연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그 영상 네가 폭로한 거야?”신은지는 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말해, 네가 한 거냐고? 아니, 분명히 너야. 너를 제외하고 이런 짓 할 사람은 없어.”“하!”신은지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넌 평소 네 행실이 어떤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다른 건 몰라도 영상 속에서 신지연이 협박했던 사람들만 해도 신지연을 미워할 사람은 수두룩했다.“나쁜 년.”신지연이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신은지는 재빨리 문을 닫아 버렸다.신지연은 그대로 주먹을 현관문에 꽂아 버렸다. 손톱이 현관문에 쓸리며 부러졌다.신은지가 말했다.“또 시끄럽게 하면 이웃들 다 불러서 네가 오늘 인플루언서 폭행 사건의 가해자라는 걸 까발릴 거야.”그 말에 신지연이 황급히 마스크를 똑바로 쓰고 주변을 살피더니 말했다.“비겁한 년 같으니라고!”그 말을 끝으로 신지연은 가버렸다.재경그룹 내부에서는 요 며칠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직원들은 감히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일에만 몰두했다.대표인 박태준이 심기가 불편한 티를 팍팍 내고 다녔기 때문이다.최근 그의 사무
박태준은 시선을 서류로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야.”전예은의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르더니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그래도 2년이나 사귀었는데 진심을 들을 자격 정도는 있는 거 아니야? 나랑 사귀는 동안에는 날 좋아했어?”그녀가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질문이었다.그들이 사귀게 된 건 정말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어느 날 상업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말이 통해서 조금 오래 대화를 나누었고 그렇게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사귀기도 전에 스캔들이 났다.기자들이 둘이 진짜 만나는 거냐고 박태준을 다그쳤지만 그는 정면으로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해명을 귀찮아하는 그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추측성 기사들을 써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전예은은 그의 여자친구가 되어 있었다.고개를 든 박태준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예은아.”“아니, 말할 필요 없어.”전예은이 그의 말을 자르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질문을 했을까? 2년 만나면서 손 한번 잡아준 적 없는 사람인데 날 좋아할 리 없잖아? 태준 씨를 탓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잘못 없어.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고.”박태준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답을 듣기 싫어서일까, 전예은은 그 말을 끝으로 서류도 챙기지 않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갔다. 박태준은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잠시 감았다가 비서실에 연락했다.“진 비서, 예은이가 나가면서 계약서 안 챙겨갔으니까 진 비서가 좀 챙겨줘.”진영웅이 계약서를 가지고 나간 뒤, 그는 맨 위층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남성용 시계 하나가 들어 있었다.L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지만 한번도 세간에 공개된 적 없는 시계였다.그 시계는 주문제작한 제품이었다.전에 나유성이 돌아왔을 때 그가 선물했던 시계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시계였다.그 시각, 신은지는 집게로 자기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