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지 씨."박태준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별일 없으면, 저와 제 아내는 밥을 먹을 생각입니다."이렇게 분명한 암시를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고 목소리를 떨었다."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더는 한 글자도 말할 수 없다.너무 급하게 가다가 옆자리에 있는 공예함도 잊은 채 예함이의 작은 몸에 무릎을 부딪혔다."언니..."예함이는 케이크를 먹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쭈뼛쭈뼛 바라보며 부딪혀 아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공예지는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예함이는 테이블 위에 놓인 딸기 케이크를 한 세 번 바라보았고 아쉬워하며 입술을 핥았지만 순순히 공예지를 따라갔다.박태준과 신은지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서 그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그들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 실험해 보려고 했다."언니, 예함이 잘못했어?"어린 소녀가 눈치를 잘 살폈다."언니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오빠는 의심하지 않았어."공예지는 그녀의 입을 꽉 막았다."예함이 착하지? 방금 일은 우리 둘 사이 작은 비밀이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돼."식당에서 신은지는 천천히 메뉴를 뒤적거렸고 테이블 위의 물건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박태준은 처음에 그녀가 공예지가 반만 말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했지만 그녀는 물어보지 않았다.그녀가 묻지 않자 박태준은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졌다."나한테 물어볼 것 없어?""있지, 뭐가 맛있어?""..."30초나 기다렸지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박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식당은 당신이 추천하지 않았어? 뭐가 맛있는지 몰라?""다 맛없어."박태준은 가뜩이나 머리가 아팠는데 이번에는 더 아팠다. 관자놀이를 누르니 손가락 아래서 힘줄이 뛰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머리가 아파서 말을 하기
진유라는 역시 손쉬운 달인답게 신은지가 메세지를 보는 틈에 또 십여 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은지야, 슬퍼하지 마. 내가 가서 그 망할 놈의 남자, 내가 죽도록 욕해버릴게.][감히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다니.]이어서 폭행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서 화면이 피범벅으로 됐다.[미친.][잘못됐네.][내가 마음에 든 게 아니라 너에게서 멀리하라고 그러네.][그 개자식이 내가 너한테 음탕한 사진을 보냈다고 모함했어.]신은지는 고개를 돌려 박태준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약간 숙인 그는 이마에서 턱까지의 선이 도톰하고 매끄러웠다. 진유라에게 보내는 것인지 눈썹을 찡그리며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평소에 엄숙하고 담백한 남자가 아무렇게나 검색해도 나오는 사진 때문에 진유라에게 돈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입꼬리가 통제 불능으로 씰룩거리자 신은지가 이렇게 답장하려고 했다.[태준이 헛소리 듣지 마. 네가 나를 망치지 않았으니까.]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진유라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박태준 씨 타자 속도가 너무 느리네. 내가 십여 개를 보내서야 그가 하나 답장할 수 있어. 이런 사람인데 네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신은지는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아까 타자했던 ‘네가 나를 망치지 않았으니까'라는 말을 지우고는 대답했다."왜 이렇게 메시지를 빨리 보내?"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고 있었고 박태준의 휴대전화도 진동하고 있었다.윙윙 진동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진유리의 말을 들어보면 대화 상대는 모두 그녀였다.그녀 혼자서 그들 두 명과 문자를 하면서도 속도가 아주 빨랐다.두 사람의 개인 카톡을 바꾸는 것만으로 손가락이 바쁠 것 같았다.[휴대전화로 하나 답장하고 컴퓨터로 하나 하지.][무슨 사진이길래? 나한테도 보내줘야지. 꼭 사진으로 박태준의 그 고리타분한 얼굴을 박살 낼 거야. 그게 무슨 음란한 사진이라고. 분명 생물학적인 그림 설명일 거야.][자기가 음탕하니까 모든 사람을 음탕하게 보는 늙고 음탕한 사람이야.
"할부요? 하루에 한 번 해도 3개월인데요? 속도가 빠르면 아이까지 생겼겠어요."진유라는 짜증을 내며 머리를 쓸어올리며 눈을 부릅뜨고 마치 시험 감독 선생님 같이옆에 서 있는 곽동건을 노려보았다."지금 베낄 테니까 나가세요."진유라는 맥이 빠져서 컴퓨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펜을 들고 쓸 준비를 했다.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백 번 베끼면 손이 망가질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베끼지 않으면 곽동건은 어머니 앞에서 헛소리할 것이었다. 바로 그의 집으로 보내지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나았다.복수는 언제 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빚은 언젠가 곽동건에게서 돌려받을 것이었다. 그때는 백 번 베끼게 할 뿐만 아니라 두리안 껍질 위에 무릎을 꿇고 베끼게 할 것이었다.옆에 있는 남자가 걸음을 옮기지 않은 것을 본 진유라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들었다."설마 여기 서서 계속 내가 베끼는 걸 지키고 있을 건 아니죠?"곽동건은 입술을 오므린 채 그녀를 응시했고 안색이 안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진유라는 그의 눈빛에 깜짝 놀라 심장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이 사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닌가?'그녀가 가슴을 두드리며 시선을 거두려 하자 곽동건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뽀뽀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달라붙었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입술에 닿아 뽀뽀는 점점 진득한 입맞춤으로 변했다."..."그의 손이 진유라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그녀를 속박하는 자세로 그들은 키스를 이어 나갔다.곽동건의 손바닥의 온도를 느끼며 진유라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자신이 이틀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유라야, 전화해서 동건 씨한테 어디까지 왔는지 물어봐."진유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리더니 이내 멈췄다.진유라는 곽동건을 밀어내고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고 놀란 어머니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마주쳤다.진유라 어머니는 침착하게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사방을 쓸어보더니 혼잣말했다."왜
박태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제는 공예지만 보면 조건반사처럼 두통이 발작한다. 몇 번이나 두통이 가장 심할 때 그녀와 마주쳐서 그런가?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데 공예지가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비행기’라고 말했다.그는 즉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진영웅에게 말했다.“이사님들이랑 먼저 가 있어.”진영웅은 공예지를 힐끗 보더니 한마디 귀띔했다.“대표님, 시간이 없어요.”박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예지를 데리고 그녀가 머물렀던 라운지로 갔다. 프런트 직원이 과일과 디저트를 내왔고 그녀의 취향을 물은 후 새콤달콤한 과일주스도 올렸다. 조금 전까지는 이런 대우가 없었다.그녀는 약속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앉아서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프런트 직원은 몇 번 우렸는지 모르는 국화차 한 잔을 내왔을 뿐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은지였다면 프런트 직원이 이렇게 홀대했을까 생각했다.“공예지 씨.”박태준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여인을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제 정신으로 돌아온 공예지는 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프런트 직원을 보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여기서 얘기해요? 누가 듣지 않을까요? 조용한 곳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프런트 직원이 계속 이쪽을 봐요.”“그럴 필요 없어요.”박태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가 웃었다.공예지는 내심 기뻐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지만 박태준이 이내 그런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었다.“은지 팬이에요.”박태준은 그 직원이 몰래 비상 통로에 숨어 은지의 대회 동영상을 보고, 친구에게 빨리 보라고 미친 듯이 추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공예지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웃음이 사라졌다.박태준은 이 화제를 건너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몇 시 비행기예요?”“3시 10분이요.”그가 손목시계를 보니 지금 12시 반이다.“항공편은요?”“...”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
박태준은 차에 오르자마자 진영웅에게 지시했다.“오늘 오후 3시 10분 경인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알아보고, 국내외 모든 항공편 탑승객 자료를 나에게 보내줘. 공항 가자.”마지막 한 마디는 기사에게 한 것이다.진영웅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각 항공사에 연락해 명단을 받았다.박태준은 휴대폰 옆면의 버튼을 띄엄띄엄 누르면서 화면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30분 넘게 기다린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 혹시 말총머리를 한 프런트 직원 연락처 있어?”“...”진영웅은 동작을 멈추더니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저한테는 없지만 회사 단톡방에 물어보면 알아요. 대표님, 반한 건 아니시죠? 사모님을 배신하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이 실종되셨을 때, 사모님은 시부모를 위로하랴, 회사 관리를 배우랴, 짬짬이 바다에 나가 대표님을 찾으랴, 바빠서 하루 한 끼로 때우셨어요. 대표님이 주신 꽃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 흘리는 것도 자주 봤고요. 밤새도록 울어서 이튿날 회사에 나올 때 눈이 부은 것도...”박태준은 경을 읽는 듯한 그의 잔소리에 머리가 아파 참다못해 소리질렀다.“입 닥쳐.”“...”“은지가 문자 답장했는지 물어봐.”곧바로 전화해서 해명하지 않은 원인은 은지가 먼저 전화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어떤 인플루언서의 동영상을 봤는데, 사랑을 하는 여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첫째, 언제나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 한다. 둘째, 투정을 부린다. 당신이 무조건 포용할 것을 알고 가끔 억지를 부린다. 셋째, 질투한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모든 생명체, 특히 여인을 질투한다.문제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와 은지는 삶과 죽음의 고비를 같이 넘긴 사이라 분명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 하지만 답을 들어보니, 세 가지 중 한 가지도 맞지 않았다.은지는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성격이고 휴가 때도 항상 일을 찾아서 한다. 투정 부리지 않고 억지 부리는 일은 더더욱 없다. 질투할라고, 공예지를 ‘예지 씨’라고 다정
박태준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목젖만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고 말은 내뱉지 못했다.신은지가 휴대폰을 꺼놓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그 사진들 때문에 화나서인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은 다사다난한 시기라 조금도 요행 심리를 가질 수 없다.그리고 공예자 말로는 그 사람이 오늘 귀국한다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그쪽에서 그의 부하들 눈에 띄지 않도록 미리 대처했을 가능성은 없을까?그 사람이 귀국하자마자 은지가 사라졌다...이 두 가지 일이 겹치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박태준은 말하는 속도가 극히 빨랐다.“몰라요. 은지 휴대폰이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돼요. 은지가 평소에 어디 자주 가는지, 혹은 다른 연락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 봐요.”진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은지가 연락이 끊겼는데, 이 자식은 자기 때문에 화난 건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자는 뭘 하려고 남자를 만나는 거야? 짜증만 나는데.“마누라를 잃어버린 사람은 박 대표님이 아마 사상 최초일 거예요.”비아냥댄 후 그녀는 더 욕하고 싶었지만 지금 은지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박태준과 시비를 따질 시간에 전화를 몇 통 더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막아 스스로 음 소거를 한 후 목구멍에서 ‘네’라는 한 글자를 짜내고 전화를 끊었다.진유라는 1초라도 늦으면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박태준은 진영웅에게 전화해 왕준서와 함께 박물관 주변 CCTV를 뒤져서 신은지의 행방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그는 나유성에게도 전화했다. 친구 중에 신은지가 연락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니까.신은지가 단지 사진 때문에 그에게 삐진 거라면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간 경우다.이런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박태준은 계속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고 머릿속에서 전기 드릴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머리와 몸이 다 아팠다. 전
결국 신은지가 너무 미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끄고, 오늘 저녁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하겠다고 말해서야 경을 읽는 듯한 하소연이 끝났다.그녀는 박태준에게 전화해 알리려 했지만 강태민이 이미 알렸다고 했다. 그녀가 오늘 밤 신당동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묵기로 했다고.“남자는 좀 애간장을 태워야 해. 가끔 며칠씩 본체만체 내버려두기도 하고. 그러지 않으면 너를 쉽게 봐. 네가 철저히 자기 것이 됐다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지.”강태민은 딸이 나쁜 남자에게 속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늙은 아버지처럼 미친 듯이 그녀를 세뇌시켰다.“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 헤어졌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등등 많잖아. 남자는 다 나쁜 놈이야. 너무 오냐오냐하면 안 돼.”점점 삐딱하게 나가는 것을 보고 신은지가 빙그레 웃더니 한마디 귀띔했다.“아버지도 남자예요.”“어...”말문이 막힌 강태민은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이렇게 못나서 어쩌냐는 듯 말했다.“박태준을 말하는 거잖아. 계속 그렇게 감싸라.”이 말이 끝나자마자 육지한이 들어왔다.“둘째 어르신, 박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강태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빨리도 왔네. 진작 알았으면 흔적을 지울걸. 좀 더 오래 걱정하게 말이야. 어디 다른 여자랑 또 스캔들을 내나 보자.’그는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신은지를 힐끗 보고는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들어오라고 해.”신은지는 잔뜩 인상 쓰고 있는 그를 보고 말했다.“아버지, 그건 진짜 오해예요. 뚱한 표정을 짓지 마세요. 그 사람이 자기를 맘에 안 들어 하시는 줄 알아요.”“맘에 안 드는 게 맞는데 뭐. 네가 기어이 그 녀석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리 500도 근시라도 눈에 차지 않았을 거야.”“...”박태준은 이내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신은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는 길 내내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강태민이 신은지를 데려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사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직
옆에서 이를 똑똑히 본 강태민은 코웃음을 쳤다.‘그 주제에, 나를 따돌리고 일을 벌이겠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박태준은 침대 시트도 갈지 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정돈한 후 30분 동안 회사 일을 처리했다. 이쯤 되면 강태민이 잠들었을 것 같아 그는 일어나서 살금살금 방문을 열었다.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비상등만 따뜻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그의 방에서 신은지의 방에 가려면 중간에 강태민의 방을 지나야 한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 걸으면 사락사락 소리 나긴 하지만 이렇게 미약한 소리는 무시해도 된다.그래도 강태민의 방문 앞을 지날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벌컥! 꼭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강태민이 문 뒤에 서서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다보았다.“박 대표, 한밤중에 살금살금 어디 가세요?”“...”“들어와요. 마침 물어볼 일이 있어요.”이튿날, 하룻밤 푹 자고 난 신은지가 상쾌한 얼굴로 방을 나서다가 마침 피곤한 얼굴로 강태민 방에서 나오는 박태준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가 다시 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렇게 일찍... 왜 아버지 방에서 나와? 게다가...”게다가 딱 봐도 밤을 새운 모습이다.박태준은 눈을 겨우 뜨며 힘없이 대답했다.“아버님이 나를 붙잡아 밤새 장기를 두게 했다면 믿겠어?”“...”차라리 두 사람이 밤새 싸웠다고 하면 믿었을 것이다. 강태민이 박태준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먼저 찾았을 리 없잖아.박태준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내가 밤에 널 찾아갈까 봐 방도를 대신 거야.”“하룻밤 장기를 둔 게 이 정도로 피곤해?”이전에도 박태준은 회사 일이 바쁠 때면 밤을 꼬박 새울 때가 많았지만 이튿날 똑같이 활기차고 평소랑 별 차이가 없었다. 혹시 나이 들어서 정력이 달리는 건가?박태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채고,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은 후 벽에 붙이고 서서 깊고 긴 키스를 나누었다. 남자는 아침에 몸이 민감하기 때문에 키스만 했는데도 반응이 왔다. 그는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