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는 박태준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 걸 보고 일부러 그를 놀렸다."내가 잘못 말했나? 아직 약혼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연인인가?""잘못 말하지 않았어."박태준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이미 내 청혼을 승낙했으면 약혼한 사이인 거지."박태준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의 반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후회하지 마."놀리려고 했던 그녀는 그의 진지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장난기를 거둬들였고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응'이라고 대답했다.때때로 누군가가 그에게 술을 권하러 왔다. 신은지는 박태준의 전 부인인데 오늘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타나 재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출근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투명 인간이 되어 조용히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술을 권하러 온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한 번씩 깎아내렸다.그녀는 접대를 싫어하고 이러한 허위 칭찬에 대처하는 것을 더 싫어해서 식사를 여러 번 방해받은 후 짜증을 참을 수 없어 박태준을 식당 구역에서 쫓아냈다.음식을 다 먹은 그녀는 서둘러 박태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진유라에게 답장을 보냈다.나유성이 그녀를 부르며 옆 의자에 앉았다."어떤 기자 분이 너에게 역사 관광 지구 디자이너의 명분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어.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먼저 네 의견을 묻고 싶어.""나는 그냥 아르바이트일 뿐이라 인터뷰는 필요 없어. 회사에 다른 분들 모셔서 가."그녀는 건축설계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고 모르는 부분이 많았으며 다만 관련 왕조의 건축양식을 그렸을 뿐이었고 세부적인 부분은 모두 나유성이 사람을 찾아 수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기에는 부끄러운 실력이었다."인터뷰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건설업계에서 유명해질 거고 만약 누군가가 관련 설계를 요청한다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거야.""나는 건축 설계를 계속할 생각이 없어. 유명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이건 좋은 기회야 당신은 당신이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싶은 사람
박태준은 그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마 위의 개미처럼 안절부절했다. 그래서 빨리 보내버리려고 했다."귀찮지 않아.""이 돈은 내가 빌린 돈인데 갚아야지.""빌린 게 아니라 예물이고 나에게 시집왔으니 이 돈은 네 거야.""지금 당장 돈이 급하지 않으니 너에게 맡길게."하지만 박태준이 허락할 리 없었다. 만약 어느 날 신은지가 이 3억을 가지고 협박하면 이혼 하지 않는다고 했던 약속은 무효로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었다."그럼 회사의 주식으로 바꿔. 어차피 은행에 맡겨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건데. 게다가 잘못하면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은행에 빚을 지게 될 수도 있어.""좋아, 내일 비서에게 계약서를 보내라고 할게."나유성은 자리를 비운 뒤 술 한 잔을 들고 고연우에게 다가갔다."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일이 좀 지체됐어요."그가 왔을 때 마침 박태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유성과 이야기하고 있었다."뭐 하셨어요?""꽁냥꽁냥하는 거 보고만 있었어요?”“아니요, 은지를 찾아서 업무를 좀 상의하고 왔어요. 역사 관광 지구 1단계는 그녀가 만든 디자인으로 업계의 칭찬을 받고 있어서 2단계 공사에도 참여하도록 초청할 계획이에요."고연우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정말 공적인 일 때문입니까? 설마 아직도 체념하지 않고 공적인 핑계를 대고 사심을 채우려는 건 아니겠죠?"나유성이 코웃음을 쳤다."2단계와 1단계 인원은 변하지 않았어요. 은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았어요. 음식을 주문하는 보조원들도 모두 같은 사람인데 제가 사심을 채운다고요?”나유성의 생일이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섣달그믐날, 경인 시의 겨울은 매우 추웠고 대지는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실내는 따뜻하고 바깥 날씨는 매서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서 찾아왔다. 몸이 좋지 않았던 강혜정이 병에 걸렸다. 그래서 박용선은 그녀를 데리고 열대 도시로 휴가를 떠났다.겨우 며칠 휴가를 냈는데, 신은지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집에서
박태준이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공예지였다.공예지는 금방 밖에서 들어 왔는지 롱패딩에 털장갑과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박태준을 손사랫짓하며 거절했다.“아니요, 괜찮습니다.”공예지는 박태준의 손에 채 타지 않은 담배를 보면서 말했다.“선생님께서 너 지금 상황으로는 금연하는 게 좋다고 하셨어.”“어.”공예지의 말에 박태준은 차갑게 대답했다. 공예지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박태준의 표정이 부드러워진 것을 보았다.박태준은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박태준은 신은지의 앞에 가서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면서 말했다.“왜 나왔어?”“너 찾느라고 나왔지. 오랫동안오니까 화장실에 빠진 줄 알았잖아.”신은지가 장난을 치고는 고개를 돌려 공예지가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러나 공예지는 이미 다른 쪽에 갔고 그저 익숙한 옆모습만 봤다.“아는 사람이야?”“아니, 몰라.”그 약 검사 결과는 이미 나왔다. 사람에게 영향이 가는 약이었다. 어떤 영향이 가는지 구체적인 증상은 아직 모른다.박태준은 신은지에게 이 일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안다고 해도 걱정만 하게 될 것이다.신은지가 모른다 해도 박태준은 열심히 치료할 것이니 말을 안 해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신은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왜 저 사람이 익숙해 보이지?”박태준은 신은지의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익숙하다고 그러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네.”신은지가 뾰로통해서 말했다.“내가 눈이 멀기라도 했다는 걸로 비꼬는 거 같은데.”“아니, 그 뜻이 아니야.”얼마 지나지 않은 신은지는 이 일을 잊었다. 박태준과 강태민이 술에 취해 신은지가 운전했다.“아빠, 아니면 신당동에서 주무세요. 전에 사시던 곳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서 먼지가 가득해요.”강태민은 요즈음 군천시에 머물렀다.“괜찮아, 이미 호텔을 예약했단다.”강태민은 부 좌석에 앉은 박태준을 보고 말했다.“네가 출
음식점 안.신은지는 가게 안을 들어가기도 전에 진유라를 봤다. 기다리는 게 지루했는지 물을 찍어서 테이블에 돼지를 그리고 있었다.“너 이거 그린 게 곽 변호사님이야?”진유라는 깜짝 놀라 물컵을 엎을 뻔했다. “놀랬잖아, 이 좋은 날에 그 사람 이름은 왜 말하는 건데.”진유라는 말하면서 주위를 돌아봤다. 곽동건이 확실히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기대여 말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앞으로 내 앞에서 그 이름 꺼내지도 마. 나올까 봐 아찔해 나니까.”신은지는 진유라가 곽동건의 이름만 들어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혹시 너 괴롭혔어?”진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번에 강아지 주운 날에 밥 한 끼 먹은 후에 만난 적 없어.”신은지가 물었다.“그럼 너 그 사람이 싫어?”만일 진유라가 곽동건을 싫어한다면 곽동건이 진유라를 찾을때 막으려고 했다.진유라가 생각하고 말했다. “아니, 싫어하는 건 아니고…”진유라는 갑자기 눈이 커지더니 욕을 했다. “X발”“왜 그래?”신은지가 진유라의 반응에 의아해하며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을 봤다. 신은지도 욕 할 뻔했다. 박태준과 곽동건이었다.두 사람 모두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명품 옷은 아니었지만 그 두 사람은 딱 봐도 주변의 환경에 어울리지 않았다.가게 안의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이 됐다.점원이 물었다.“지금 남는 자리가 없는데 먼저 번호 뽑아서 기다리시겠습니까? 한 20분 정도면 될 것 같아요. 1번 테이블이요.”곽동건이 물었다.“합석해도 될까요?”점원은 좀 당황했다. 고깃집에 외서 합석한다는 것을 처음 들어봤다. 빨리 막고 갈 수 있는 패스트푸드도 아니고 . 그리고 설 연휴 기간이라 친구들끼리 아니면 가족들끼리 와서 외식하는 사람이 많아서 합석은 불편한 일이었다.마음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됩니다, 손님분들만 괜찮다고 하시면요.”옆에 테이블에 한 사람이
진유라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곽동건이 녹음 펜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았기 때문이다.“말해요.”“뭐 하는 거예요?”“처리할 수 없으니 다음에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만나면 물어봐야죠.”“...”진유라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비열한 놈!그녀의 어머니는 덜렁대고 믿음이 안 가는 부분이 있지만 가정교육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 진씨 가문의 아가씨가 입만 열면 부모님 안부를 묻는 욕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진씨 가문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러니까 이 일이 그녀의 어머니 귀에 들어가면 분명 회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곽동건에게 급소를 찔린 그녀는 반항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항상 엄숙한 박태준과 곽동건이 있으니 삼시 세끼, 의식주, 이런 쓸데없는 얘기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같이 화장실에 가는 틈을 타서 진유라는 의문스럽다는 듯 신은지에게 물었다.“네 남편이 나한테 불만이 있어? 왜 도둑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 내가 너한테 말을 좀 많이 하면 은근히 나를 노려봐.”“...”“설마...”진유라는 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여자한테까지 질투하는 거야? 혹시 결혼한 후 네가 모든 친구와 절교하기를 바라니? 네가 그 사람 외에 아무도 없는 외톨이가 되면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가스라이팅하는 건 아니지? 감히 너한테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머리를 싹 뽑아버릴 거야.”“아니야.”그녀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신은지가 급히 제지했다.“네가 나한테 식스팩이 있는 연하남을 소개해 줄까 봐 경계하는 거야.”진유라는 자기 이마에 ‘억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것 같았다.“내가 언제 너한테...”맞다. 그녀는 확실히 소개한 적이 있고 심지어 한둘이 아니다. 실적 목표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신은지가 그들에게 작업해도 상관없었다. 신은지가 정말 맘에 들어 하면 그녀는 막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깔끔하게 다듬어 그녀에게 바쳤을 것이다.그녀는 속이 켕기는 듯 혀를 내밀었다.“그때는 너희 둘이 이혼한다고 했잖아. 누가
강아지는 진유라가 문에 들어서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를 정면으로 덮쳤고, 흥분해서 그녀의 몸을 헤집으면서 깽깽 짖었다. 곽동건이 말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 곧 죽을 것 가은 모습은 전혀 없었다.곽동건이 잘 먹였는지 강아지는 살이 많이 쪄서 처음 볼 때처럼 그렇게 마르지 않았다. 강아지가 덮치는 바람에 진유라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다가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혔다.진유라는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품에 있는 강아지 머리에 올렸고, 두어 번 쓰다듬자 강아지가 그녀의 손을 핥아 침을 발라놓았다.“이름 지었어요?”그녀는 뒤로 돌아서서 곽동건의 옷을 잡아당긴 후 그가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침을 그의 비싼 옷에 문질렀다.남자는 그녀가 손을 문지르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진유라는 동작을 멈추고 민망한 듯 소리 내 웃고는 무안해하며 손을 내렸다.“보기와 다르게 강아지를 잘 키우네요. 살이 엄청 쪘어요.”“허!”곽동건은 그녀의 속임수를 까발리지 않고 그녀를 건너서 안으로 들어갔다.“라라, 와서 밥 먹어.”“?”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지만 정말이지 관계가 그렇게 친근하지 않았다.라라...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곽동건의 친밀한 호칭 때문에 소름 돋은 팔뚝을 비벼댔다. 이렇게 익숙한 것을 보니 뒤에서 수없이 불렀던 것 같다.진유라는 남자의 훤칠한 뒷모습을 보면서 기막히다는 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이 남자가 츤데레일 줄은 몰랐다.이 두 글자를 중저음인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무척 듣기 좋았다.그리고 방금 밥을 먹지 않았는가? 이 남자는 정말 그녀를 식충이로 아는가?그녀의 몸에 비비적거리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대던 강아지는 곽동건의 부름 소리에 이내 그녀를 놓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장갑을 끼고 구석에 있는 작은 그릇에 개 사료를 담는 곽동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진유라는 한참 지나서야 또박또박 말했다.“강아지를 뭐라고 불렀어요?”곽동건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라, 왜요?”그의 입
곽동건은 고개를 숙이고 진유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무 가까워 키스하려는 줄로 착각할 뻔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멈췄다.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라라, 당신은 증거가 없어요.”이같이 부드럽고 질척대는 소리가 진유라의 귓가에 울렸지만 그녀는 조금도 설레는 느낌이 없었다. 그가 강아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 말에 담긴 뜻 때문이다.“...”도리로는 안 되니까 막무가내로 나오겠다는 건가? 게다가 파렴치한 짓을 하면서 아주 당당하다.곽동건은 그녀의 혀에 난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괜찮네요. 심각하지 않아요. 약은 바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진유라는 눈을 흘기며 그를 확 밀어냈다.“그저 실수로 깨물었을 뿐이에요. 혀를 깨물고 자결한 것도 아닌데, 다치면 얼마나 다쳤겠어요? 누가 실수로 혀를 좀 깨물었다고 약 바르는 걸 봤어요?”“많이 늦었어요. 먼저 갈게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강아지도 그녀가 가려는 걸 아는지 조금 전까지 그녀의 발 옆에 엎드려 있더니 어느새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깽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곽동건이 눈을 내리깔았다.“라라야...”진유라는 잔뜩 화가 나서 그의 말을 잘랐다.“닥쳐요.”그녀는 바짓가랑이를 물고 있는 강아지를 뿌리치려 했다.“곽동건, 뭐 하는 거야? 내 바지를 물지 마. 안 그러면...”겁을 주려던 그녀는 곽동건의 말이 생각나서 말을 바꿨다.“안 그러면 아빠한테 배상하라고 할 거야.”곽동건이 빙그레 웃었다.“제 이름을 부르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불러도 돼요. 강아지를 매개로 삼지 말고.”“...”낯가죽이 두껍기로 철면피다. 그녀가 맞받아쳤다.“그러니까 당신은 제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당당하게 부를 수 없어서 강아지를 ‘라라’라고 부르는 거예요?”진짜 변태같이 잘도 논다.“아니, 처음 왔을 때 자꾸 ‘라라라’ 하면서 울어서.”“?”강아지가 낯선 환경에 가면 운다는 걸 진유라도 안다. 하지만 어떤 개가
잘 모르는 사람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싫어하는 박태준은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공예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생활을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검사 과정일 뿐입니다. 긴장해서 검사 결과가 부정확하게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벼운 대화나 환자의 관심사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장을 풀어드리는 것입니다.”“네.”남자는 나지막이 대답했지만 여전히 말을 이어갈 의향이 없었다.그가 거부하자 공예지는 화제를 돌렸다.“지난번에 저를 구해주셨는데,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박태준이 눈을 뜨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요. 우연히 마주쳐서 도와준 것뿐이에요. 누구라도 마찬가지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알아요.”공예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박태준 씨에게는 쉬운 일이었겠지만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박태준 씨가 따지지 않는다고 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박태준은 은혜를 갚겠다고 고집부리는 여인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신은지가 이렇게 고집스럽게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면 귀엽다고 생각하며 어지간히 괴롭혔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러는 건 짜증 나고, 말귀를 못 알아듣냐고 묻고 싶을 뿐이다.“이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은혜를 갚는 거예요.”박태준은 이 말을 내뱉은 후 다시 눈을 감았다.“그리고 저는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 과정은 생략해도 되니까, 그쪽은 자기 본업에 충실하세요.”“...”이 말은 직접 닥치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공예지는 졸업도 안 한 인턴인지라 이런 무안을 당하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죄송합니다.”“네.”아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검사실에는 최면 음악만 남았다. 박태준은 사실 매우 졸렸다. 그는 요즘 두통이 점점 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