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딸린 신은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박태준의 말을 들은 그녀는 넋이 나가 물었다.“뭐라고?”박태준은 말을 잇지 않고 두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행동으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보여주었다.신은지는 그로 인해 깜짝 놀랐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환자가 원숭이처럼 여기저기 오르고 있는데, 그녀는 그의 다리에 무리가 갈까, 갈비뼈의 금이 더 벌어질지 걱정되었다.앞 두 번의 경험으로 인해, 박태준이 침대를 오르는 기술은 더욱 매끄러워졌다. 신은지가 질책의 말을 내뱉을 겨를도 없이 박태준은 이미 침대에 안정적으로 앉았다.1미터 너비의 침대가 두 성인을 수용해야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긴 남자라 벅차 보였다. 또한 무게가 너무 나가는 탓인지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은지는 이 소리가 밖으로 퍼지며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되었다.그녀는 정말 그 정도의 부끄러움까지는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침대의 다른 편으로 내려가려 하자, 박태준이 그녀를 잡았다.“은지야, 그냥 너 안고 있고 싶어.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때, 다시 너를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웠어.”그 한마디로 인해서 신은지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침대 모서리에 기대며 한 사람이 겨우 누울법한 자리를 마련했다.“오 분 만이야.”그녀가 마련해줄 수 있는 제일 넓은 공간이었다.몸에 부상이 많은 박태준이다 보니, 옆으로 너무 오래 누워있으면 안 좋았다.“응...”한 글자뿐이었지만, 먼저 안겨 오는 신은지로 인해 그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말캉한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박태준은 처음에 놀라고, 그다음에는 넘치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허공에서 손을 얼마간 멈칫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움직임도 없이 두 사람은 좁은 침대에서 빈틈없이 조용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너무도 조용했다.귓가에는 설로의 호흡소리와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
신은지는 박태준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목젖과 가슴을 따라가다가 어딘가에 멈춰 섰다.그가 몸을 약간 기댄 채 서 있었기 때문에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쉰 목소리에서 지금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리가 부러졌는데도 그렇게 버티니까 이렇게 되지. 쌤통이야. 참고 있어 그냥.”말을 마친 그녀는 불을 끄고 옆 침대로 가서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 누웠다.박태준이 방금 누워있었던 침대여서 그의 숨결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신은지의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그의 냄새가 풍겨와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환했던 병실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복도의 희미한 불빛이 유리창으로 들어와 바닥을 밝혀주었다.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박태준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이제 겨우 6시라서 한창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병원에 사람이 제일 많을 시간이기도 했다. 병실의 문은 방음이 잘되지 않아서 밖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다를 떠는 소리, 도시락 파는 소리, 간호사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좀 쌀쌀했지만 조용한 세월이 느껴졌다.침대에 눕자 박태준이 안절부절못하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제야 그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두통부터 다리통, 근육통까지, 갑자기 피곤해지더니 손을 들 힘조차 없었다."똑똑.”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강혜정이 고용한 간병인이 시간에 맞춰 그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러 온 것이었다. 진서원은 그에게 도시락을 장롱 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먼저 나가 보세요. 그리고 좀 이따가 빈 도시락 받으러 오세요.”환자 본인이 나가보라고 하니 그들은 한가해졌다는 생각에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은 도시락을 내려놓고 나갔다.그는 잠든 신은지를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그녀가 배고플까 봐 몇 번 불러서 깨우려고 했다."은지야, 먼저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자, 어때?”박태준은 온
박태준은 신은지에게 오시은은 머리에 문제가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그 둘은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진선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계속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방금 은지 씨를 뭐라고 불렀어요?”오시은이 말이 잘못 나와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로 그녀를 불러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 명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어색했다. 하지만 감추면 그녀는 오히려 오해를 받을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버지의 귀한 인연을 놓치면 앞으로 경중에는 오씨 가문이 없을 것이었다.오시은은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박태준을 가리켰다."박 대표님은 박씨 가문 미래의 동업자입니다. 돈만 투자해 주신다면 전 누구든 금주 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그리고 또 신은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그러니 박 대표님의 부인님도 당연히 금주 님이십니다.”"...”이는 정말 만점짜리 대답이었다. 그는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저 탄복할 뿐이었다.그와 오시은이 아래층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진선호도 그녀와 박태준의 관계가 언제 병문안을 올 정도로 친하지 않는데 왜 병문안에 왔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박 대표님, 빨리 쾌차하시길 빕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오시은은 그저 형식적인 인사를 하러 왔다. 그것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이었다. 육정현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편에 서 있는 그녀도 와서 보지 않으면 너무 야속해 보였다. 그런데 또 와서 병문안하려니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분도 없었으니 결정할 때 정말 머리가 아팠다.떠날 때 그녀는 진선호도 함께 끌고 갔다.진선호는 일 년 내내 단련했기 때문에 피부가 비록 캄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얗지도 않았고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백세리는 20년 이상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아가씨였기 때문에 피부는 희고 섬세했다. 두 사람이 꽉 잡고 있는 손은 아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그
신은지는 스웨터를 아래로 당기더니 자신의 쇄골 아래에 있는 키스마크를 가리켰다. 어젯밤에 박태준이 남긴 자국이었다."맞잖아, 머릿속에 온통 야한 생각만 하는 거."박태준은 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아내에게 키스를 한 것뿐인데 왜 머릿속에 온통 야한 생각만 하는 사람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난 남자야. 게다가 정상인 남자. 좋아하는 여자를 보면 당연히 절제가 잘 안되고 욕구가 생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그를 향해 눈을 희번덕거리던 신은지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여졌다."그래도 참아.""이건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야. 오죽했으면 남자는 다 하반신 동물이라는 말이 나왔을까.""누가 그래? 못 참는다고."그녀가 치켜올린 눈매와 야릇한 눈빛을 보며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직감했다. 절대 자기가 좋아하지 않을 화제라고 생각해 다른 말을 꺼내려고 하던 중 그녀가 입을 열었다."10대 때부터 나를 짝사랑했고 중간에 3년 동안 결혼생활도 했지만 너 그때는 잘 참지 않았어?"신은지뿐만 아니라 진유라도 자기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고 결혼은 압박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여겼었다.“……"과거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떳떳하지 못해서 목소리까지 낮아졌다."내가 짝사랑할 때 넌 너무 어려서 좋아해도 티를 낼 수 없었어. 결혼하고 당신한테 손을 대지 않은 건... 내가 바보였어.""푸하하."신은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바보라고 이렇게 당당하게 인정하는 건 처음이었다.그의 애틋한 눈빛에 그녀는 마음이 약해져서 손을 뻗어 그를 안았다."의사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어. 잘 치료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어. 그러니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돼, 있더라도 참아. 만약 이제 다리가 고쳐지지 않아서 절뚝거리면 그때 가서는 아무런 방법도 없어."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만졌다."지금은 안 되고 다 나은 다음에는 돼?""근육이랑 뼈를 다 다쳐서 100일 동안 조심해야
그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래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꽃을 보관하는 것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신은지는 똑똑히 들었으나 못 들은 체하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뭐라고?”"아니야,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는 아직 땅에 내려 걸을 수 없었고 어디를 가든지 휠체어를 타야 했다. 그의 신원이 공식적으로 공개되기 전에는 외부인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 없었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둘이서만 지내기로 했다. 그녀는 어제 가정부에게 1층 객실을 정리하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진선호가 전에 묵었던 그 방이었다. 침대 시트까지 같은 세트였다."...”잔뜩이나 답답했는데 더 짜증 났다.박태준은 신분을 회복하자마자 그 눈치 없는 진영웅부터 해고하기로 했다.'은지가 꽃을 드라이 플라워로 만들어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해도 진영웅 그놈도 모른다는 말이야? 아무튼 감성 지수가 너무 낮다니까!'그는 휠체어를 움직여 침대 곁으로 갔다. 입술을 깨물더니 눈에 익은 침대 시트에 시선을 고정했다.몇 분 후, 주방에서 채소를 썰던 신은지는 박태준이 방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왜?”그가 화장실이 아닌 침대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자려고?”'자는데 왜 불렀지? 병원 침대도 팔 힘으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데 이 정도 높이의 침대는 당연히 올라갈 수 있을 텐데.'"시트가 더러워졌어."그는 휠체어를 밀고 옆으로 한 걸음 나아가 큰 시트를 보여주었다. 짙은 색의 시트가 물에 젖어 색이 매우 눈부셨다. 신은지는 입구에 서서 모든 장면을 목격했다."침대에 오줌 쌌어?”그녀가 이렇게 물었다고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박태준이 화장실에 갔다 온 후 멀쩡한 침대 시트에 물 얼룩이 생겼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남자는 어이가 없어 이를 갈며 또박또박 말했다."물을 쏟은 거야."신은지는 그제야 그의 다리에 놓인 생수를
박태준과 육명선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년 남자가 황급히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소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정현아, 무슨 일로 날 찾았어?"박씨 집안에서 실종된 그 사람과 너무 닮아서 매번 볼 때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멍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박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앉으라고 지시했다"이사님은 불법 자금 모집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육영 그룹의 대표로 되기 전에 박태준은 육정현의 신분으로 육 씨네 사람들은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다. 육명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진짜 육정현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를 대표로 앉히기로 한 결정에 대해 육 씨네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시골에서 데려온 허약한 사람인 주제에... 외국 유학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대학도 못 다녔으면서 무슨 근거로 육영 그룹의 후계자가 되려고?'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육명선의 아들이었다. 억지로 심은 기억과 맞지 않는이상함을 느끼지 않도록 기민욱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할 수 있었다.육명선은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 육영 그룹은 지금 당신이 관리하고 있고 저는 기껏해야 배당금을 받는 주주인데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육 이사님도 이 일의 주모자가 기민욱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그에게 권력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가 어디서 육영 그룹의 도장을 손에 넣었는지, 어떻게 육씨 가문의 직원들이 그의 뒤를 봐주도록 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정현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아닐까? 나는 기민욱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와 친분도 없어. 회사 사람들은 그가 네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동생이면 네가 그냥 가버리면 안 되지. 육영 그룹이 어렵게 조금 올랐던 주식이 지금 하한가로 떨어졌는데
강혜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좀 나른할 뿐이야.”그녀는 입구를 슬쩍 보았다."태준이는? 같이 돌아오지 않았어?”"바쁜 것 같아서 제가 먼저...”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혜정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 표시를 보고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전화 좀 받을게."그녀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위층으로 올라가서 통화를 이어 나갔다.강혜정은 위층으로 가서 박태준이 돌아올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텅 빈 거실을 둘러본 그는 휠체어를 끌고 신은지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비록 두 사람은 지금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스킨십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왜 너 혼자야? 우리 엄마는?"예전 같으면 매번 돌아왔을 때마다 모여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마치 친 모녀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위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어머니는 전화를 받으시러 위층에 가셨는데 아직 안 내려오셨어.”박태준이 2층 쪽을 바라보자 마침 도우미 아주머니가 과일을 잘라 왔다."내가 올라가서 부를게.”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아프면 오르내리기가 불편할 것 같아 인테리어 할 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었다.강혜정은 방에 있었는데 전화는 끊긴 지 오래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서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박태준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태준아.”"아주머니가 과일을 잘라주셨어요. 같이 먹으러 가요.”"기민욱은 정말 죽었어?"경찰이 공지를 냈지만 강혜정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네.""그럼 해결된 거야?”"해결됐지만 불법 자금 모집이 재경 그룹의 주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아직은 당분간 박태준의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어요.”강혜정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기민욱은 몇 년 동안 외국에 있었고 귀국해도 가끔일 뿐이라서 인맥은 발전시키지 못했어.”경인 시에는 최근 인사이동이 많았다. 재경 그룹 외에 일부 관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민욱의 나이로는 절대
식사를 마친 박태준과 신은지는 신당동으로 돌아갔다.차를 세운 후 그녀는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냈고 그가 자리에 앉은 후에야 뒷문을 열고 쇼핑백을 꺼냈다.그는 그녀가 오후에 쇼핑하러 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께 선물도 사 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지금 손에 든 쇼핑백을 보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신은지가 돈을 쓰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되려 그녀가 돈을 충분하게 쓰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다른 남자들이 돈을 내주지 못할 정도로 쓰면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 할 텐데.'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블랙카드를 주려고 했다.집에 들어서자 그녀는 쇼핑백에서 선물 세트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전에 주기로 했던 지갑이야. 마음에 드는지 봐봐."항상 반응이 빨랐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건네진 선물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지나서야 대답했다."네가 준 거라면 다 좋아.”“..."깁스한 다리를 쳐다본 신은지가 입을 열었다."오늘 샤워할 때는 바디워시 말고 세제를 써 봐. 느끼한 것 좀 빼자."그는 그녀가 방금 자신을 힐끗 본 것이 과연 때릴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것이라고 의심했다."하지만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하면 보통 웃으면서 결혼하고 싶다고 그러지 않아?"이 말은 그가 전에 로맨스 드라마 댓글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앞으로 로맨스 말고 전쟁 드라마나 봐."'대사가 좀 별로지만 느끼하진 않으니까.'"…"'아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그녀의 철벽에 그는 그 애정 어린 말들을 참고 묵묵히 선물 상자를 뜯어야 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진짜로 목욕하는 바디워시를 세제로 바꿀까 봐 두려웠다.지갑의 디자인은 매우 심플했고 박태준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이전 지갑에서 카드와 현금을 모두 꺼내 새 지갑에 넣은 후에야 고개를 들어 신은지를 보았다."고마워."충격을 받은 나머지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쇼핑백에서 또 다른 선물 세트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퇴원 축하하고 집에 온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