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자 조은서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그러나 유선우는 손을 내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그녀는 몇 번 더 애원했지만 유선우는 끝내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타고 떠났다.그 후 그는 H시에 약 일주일간 머물렀고, 바로 그 일주일 동안 백아현은 첫 번째 다리 수술을 마쳤고, 백아현과 그의 관계를 언론에서 파헤쳐 처음으로 그에 대한 불륜설이 터져 떠돌기 시작했다.출장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친정 얘기를 더는 꺼내지 않았고, 여느 때와 같이 그의 짐을 정리하고 목욕물을 준비하였다...유선우는 씻고 나서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향해 그녀와 두 번이나 관계를 가졌지만 그건 그들이 결혼한 후로 가장 침묵이 흘렀던 잠자리였다. 잠자리하는 내내 그는 아무 소리 내지 않았고, 그녀도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쾌락과 전율을 신음으로 터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는 죄책감을 줄이고 싶었다.한바탕 뒹굴고 나서 그는 침대 머리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조은서가 작은 소리로 그한테 돈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잠시 그녀를 보다가 이천만짜리 수표를 건넸다.일 년이 지났는데도 유선우는 그 일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았다.수표를 받으면서 심하게 떨고 있던 그녀의 손... 아마 그 시각부터였을까,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그녀는 유선우의 어린 아내가 아닌 유 대표 사모님으로 변신하였다.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와 그의 회상을 멈췄다.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인님, 식사가 다 준비되었는데 내려가서 식사하시겠어요?”“좀 이따 내려갈게요!”유선우는 일기장의 맨 마지막에 쓴 글귀를 지그시 쳐다보며 하인한테 대답했다.그건 조은서가 제일 마지막으로 남긴 여자애의 속마음이었다.몇 글자 안 되는 구절이었지만, 유선우의 뇌리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크게 울려
거실에서 온 오후 앉아있은 유선우는 해 질 녘이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진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장 변호사한테 별장에 들르라고 해. 이혼 합의서 한 장 작성해 오라 하고.”전화기 너머에서 진 비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정신 차려 물었다.“대표님, 이혼 말씀이세요?”유선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고, 저쪽의 진 비서는 눈을 살짝 깜빡이며 상사의 뜻을 마침내 알아차렸다.순간, 그녀는 기쁜 마음이 들면서 생각했다.대표님이 이혼하면 자신한테도 기회가 돌아오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자신이 백아현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며.......30분 후, 진 비서가 장 변호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왔다.서재 안의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저조했다.하인도 대충 낌새를 차려 커피를 가져다준 후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도 장 변호사를 알아보고, 속으로 주인님이 부인과 이혼하려는 것이라 추측했다.향긋한 커피 향이 서재에 퍼졌지만, 그 누구도 마시지 않았다.유선우는 통창 앞에 서 있었다. 석양이 그의 그림자를 쓸쓸할 정도로 길게 호선으로 끌어당겼다.그는 가볍게 그의 뜻을 밝히고 장 변호사에게 합의서를 작성하게 했다.그의 합의서 내용은 결코 조은서한테 후한 편은 아니었다.3년 동안 부부 생활을 하였지만, 그녀에게 주는 위자료가 30 몇 평의 아파트 한 채와 현금 4억이 겨우였다. B 씨에서 손꼽는 부잣집으로 이혼하는 위자료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소문나면 사람들이 실컷 비웃고도 남을 일이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에게 이만큼밖에 주고 싶지 않았다!조은서가 원하는 대로 자유를 얻었으니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가혹한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들이 결혼할 때 합의했던 부분도 있고, 이 정도면 그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되었다.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스스로 자신이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그 이유가 조은서가 베개에 엎드려 우는 모습을 본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눈시울
자그맣고 앙증맞은 8인치 케이크였다.노란 별들이 있는 짙은 푸른 하늘 아래, 미니 사이즈의 텐트와 예닐곱 살쯤 되는 소녀가 그 텐트 안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고 있는 모양의 케이크......병실에서 조은서는 소파에 앉아 그 작은 케이크를 보고 있었다.매우 소녀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그녀의 눈은 마치 무수한 작은 별들을 숨긴 것처럼 반짝였다.온몸이 부드럽고 나른한 게, 마치 그녀가 신혼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유선우를 보는 그녀의 눈빛도 반짝반짝 빛났었는데... 지금 그녀는 다른 남자 때문에 그 부드러운 눈빛을 하고 있다.케이크 하나로 이렇게 기뻐하다니.유선우는 문득 다시 그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이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말.그럼 그녀는 허민우를 좋아하게 된 건가?유선우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며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그는 조은서를 이대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그 이혼 서류를 꺼내 두 쪽으로 찢어 쓸모없는 휴지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조은서가 막 케이크를 자르려던 참에 유선우는 문을 밀고 병실로 들어왔다.그녀는 유선우를 보더니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무의식적으로 케이크를 숨기려고 했다. 이 작은 케이크는 유선우한테 갇히고 나서 유일하게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이고 그녀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있는 물건이다.이 케이크를 누가 보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카톡으로 감사 인사도 하지 않았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했을 뿐이다.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유선우를 바라보았다.한참 후, 유선우는 그녀 옆에 다가와 앉아, 눈길을 케이크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의 작은 얼굴로 옮겨 유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생일이라고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어? 점심에 아주머니가 당신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였는데 내가 그걸 다 먹어 치웠어. 이젠, 이 케이크 같이 먹으면서 생일을 축하해볼까?”“선우 씨!”조은서는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조은서가 이러한 생각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유선우는 욕실로 가버렸다.잠시 후, 욕실에서는 콸콸 흐르는 물소리와 남자의 낮고 쉰 목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조은서도 이제는 성숙한 여자다.유선우가 욕실에서 생리적인 요구를 해결하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다.약 20분 후, 유선우는 욕실에서 걸어 나왔고 그의 몸에는 늘 입는 하얀색 목욕 가운이 걸쳐져 있었다. 앞가슴은 살짝 열려 있었고, 하얗고 단단한 가슴에서 물방울이 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유선우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걸어와 침대 옆에 서서, 멍하니 있는 조은서를 바라보았다.한참 후 조은서도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그녀는 눈꼬리가 빨갛고 눈가가 그렁그렁하였다. 누구든지 남편이 이렇게 괴롭힌다면 참을 수 없을 텐데 그녀는 이런 결혼 생활을 3년이나 견뎌냈다.이미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애처로운 얼굴을 보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케이크 한 개 때문에 말끔히 사그라들었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허민우라니.......유선우는 깊고 어두운 눈빛,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목소리로 큰 결심을 한 듯 조은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난 이혼 안 할 거야!”조은서의 입술이 잔잔하게 떨렸다.유선우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조은서, 내가 못 가지는 건 허민우한테도 있어선 안 돼.”그리고 그는 서류봉투를 침대 머리맡에 던졌다.조은서는 갑자기 뭔가 깨닫고 빠른 속도로 그 서류봉투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휴지 조각들만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것의 원래 모습을 알 것 같았다.이혼 합의서였다. 그것도 유선우가 직접 사인 한.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갈기갈기 찢겨 있다.조은서는 그것들을 허망하게 쳐다보며 눈만 깜빡였다.그녀는 방금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자유와 한 끗 차이로 스쳐 갔구나!단지 케이크 하나 때문에, 유선우는 그녀에 대한 마지막 연민을 거둬들였고, 더 이상 그녀를 놓아주지 않기로 했다.조은
“너는 당연히 거절할 수 있어.”“내가 장담하는 건데 내가 돕지 않는다면 조은혁은 무조건 감방을 갈 거야. 그것도 10년. 은서야, 한번 생각해 봐. 그때 얼마나 많은 부잣집 아가씨들이 네 오빠를 맘에 두고 있었는지. 그렇게 훌륭했던 사람이야. 만약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약에 조 씨 가문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미래에는 귀여운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겠지!” ...만약 예전에 유선우가 조은서의 몸에 상처를 냈다면 지금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두 사람은 더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유선우가 조은서를 아내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진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익과 명예 때문이었다.조은혁을 도와주는 대신 조은서는 그의 아내가 되여야 했다. 조은서는 머뭇거리며 거절을 하지 않았지만 냉큼 동의하지도 않았다. 조은서는 이불을 꽉 잡고 복잡해진 마음을 추스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생각해 볼게요!”유선우는 놀라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많은 일을 겪고 더 단단해지듯이 조은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던 어린 조은서가 아니다. 지금의 조은서는 사모님이다.유선우는 기분이 좋아서 조은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유선우는 애매모호하면서 로맨틱하게 말했다.“정확한 선택을 해낼 거라고 믿어! 은서 사모님!”...그날 밤, 유선우는 떠나가지 않았다. 다만 쏘파에서 잤다. 불을 끈 병실에는 너무 조용한 나머지 서로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서로 신경을 안 쓰려고 했으나 그 누구도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조은서는 얼굴을 베개에 붙이고 유선우가 했던 말들을 몇 번 되새겼다. 만약에 유선우의 아내가 되기를 결심하면 그는 조은혁을 구해줄 거고 그러면 조은혁은 감방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다.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나 사실 조은서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다만 이런 운명이 너무
조은서는 유선우의 눈을 피하면서 침대 끝쪽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제저녁에 말한 조건에는 제가 백아현과 미래의 애인들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말라는 게 포함된 거 아닌가요?”유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은서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선우 씨, 백아현과 관계를 맺는 순간 제가 어떤 마음일지는 생각하지 말아야죠! 그리고 우리가 진짜 부부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선우 씨 말대로 우리는... 그저 파트너일 뿐이 잖아요!”유선우가 이미 명백하게 말했기에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말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유선우는 피씩 웃었다.유선우는 천천히 걸어와 조은서의 턱을 들고 가는 식지로 그녀의 빨간 입술을 터치하면서 매력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정말 또박또박 잘하네!”조은서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유선우는 조은서를 눕히면서 오뚝한 코와 입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맞닿은 순간 기분이 묘했다.유선우는 조은서르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 겼다.“언젠간 꼭 내 거로 만들 거야.”조은서는 이젠 어린애가 아니다. 유선우와 부부생활을 삼 년 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결혼 후, 유선우가 취해서 집으로 돌아와 같이 잠자리를 하자고 술주정을 부리면 조은서는 늘 거절했다. 만약 유선우가 강압적으로 다가오면 조은서는 베개를 맞대고 울기만 했다. 그래서 삼 년 동안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예전에는 순결 때문이라면 지금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조은서는 입술을 살짝 떨었다...유선우는 조은서를 놓아주고 화장실로 들어가 어제 입었던 옷으로 환복 했다.그리고 나와서 덤덤하게 말했다.“기다릴게! 은서 사모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유선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억울함과 굴욕이 가득했다.유선우는 코웃음을 치더니 떠났다.일층으로 걸어 내려갔을 때 기사는 프리미엄 벤을 정차하고 기다
유선우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펜 뚜껑을 닫았다.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백아현이 식사할 때 내는 소리를 떠올렸다. 물론 유선우는 그 소리에 별로 신경을 안 쓸 수 있지만... 김재원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다. 진 비서는 오랜 직장생활을 한 사람답게 유선우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챈 듯 낮은 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따가 차에서 아현 씨에게 식사할 때 주의하라고 얘기하겠습니다. 김재원 선생님은 학자 집안 출신이라 분명 이런 작은 예의범절에 신경을 쓸 것입니다.” 유선우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진 비서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 확신했다. 사실 진 비서는 마음속으로는 백아현을 개돼지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아주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유 대표와 결혼하려고 한다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백아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웨딩드레스와 같이 하얀 치마를 차려 입었고 겹겹이 있는 레이스는 로맨틱하고 아름다워 그녀의 작은 얼굴을 꽃처럼 보이게 했다.백아현의 휠체어를 밀며 내려오는 진 비서는 그녀를 향해 경멸의 눈총을 쏘았다. ‘시골 촌뜨기! 가뜩이나 키도 작은데 이렇게까지 입으니 정말 더 촌스러워!’ 하지만 차에 앉은 백아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진 비서와 달리 자신은 유선우와 함께 뒷자리에 탔기 때문이다.백아현은 고개를 들어 유선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용기 내 물었다.“선우 씨, 제 치마 어때요? 김재원 선생님이 좋아하실까요?”조수석에 앉아 있는 진 비서는 어이가 없어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유선우는 기본 예의라도 차리기 위해 백아현에게 눈길을 한 번 돌리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네.”백아현은 그 말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그녀의 어머니가 말하길 남자는 여자가 하얀색 옷을 입으면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백아
김 선생님의 비서는 눈에 띄게 멈칫했다. 그리고 금방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말을 보탰다.“그건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선생님께 알려드린 거예요.”유선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비서도 한시름 놓으면서 백아현에게 시선을 놀렸다.‘다들 백아현 씨가 예쁘다고만 했지, 장애인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리고 옷차림도... 참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군.’비서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백아현은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당신이 김재원 선생님이신가요?”“저는 선생님의 비서 임도영이라고 합니다.”백아현의 미소는 빠르게 굳어갔다. 상대가 한낱 비서 나부랭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는 식으로 눈을 부릅떴다.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유라는 피식 비웃었다. 임도영은 수많은 음악가가 잘 보이려고 안달 났을 정도로 인맥이 넓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백아현은 임도영을 무시할 자격이 없었다. 오늘의 행동으로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아현이 우스워지는 것보다도 반가운 것도 없었다....역시나 임도영은 김재원과 만나자마자 그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했다. 그러자 그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상대가 유선우의 사람인지라 일단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나눴다.유선우의 곁에 앉은 백아현은 두근거리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김재원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세계 최고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명예는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유선우와도 천상의 조합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백아현과 달리 유선우와 김재원은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한 명은 음악계의 거물이고, 다른 한 명은 상업계의 거물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식사가 시작된 다음 김재원은 먼저 힘든 신세를 한탄했다.“대표님, 요즘은 클래식 음악을 하기도 참 쉽지 않아요. 제가 아무리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도, 국내에서는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거든요. 요즘 사람들은 정신
진석 그리고 조은희의 혼사는 순리대로 이루어졌고 아무도 발버둥 치지 않았다.가끔, 조은희는 이런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과정이 너무 순조로운 나머지 몇 년간의 헤어짐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마치 항상 붙어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회한 후에도 그는 그녀에게 해외 생활에 대해 더 묻지 않고 여전히 예전처럼 그녀를 대했다.그녀는 예전처럼 어리지 않았지만, 진석은 그녀를 20세 소녀로 여겼다. 조은희는 그가 18세 소녀를 더욱 좋아할 거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세월은 야속하게도 흘러만 갔지, 되돌아오진 않았다.진석은 그냥 미소를 지을 뿐.겨울, 낮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고 조은희는 퇴근 후 진석의 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석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도우미 두 아주머니를 집으로 불러 이미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조은희가 차에서 내릴 때 마침 진석의 전화를 받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언제 돌아와?”전화 한편의 진석은 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일곱 시쯤 집에 도착해요.”조은희는 소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석은 그녀에게 서재로 가서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조은희는 일부러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너의 직원도 아니고 월급도 받지 않는데 내가 왜.”진석이 답했다.“가족 수당을 받잖아요.”조은희는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준 후 차에서 내렸다.집안의 하인들은 모두 그녀를 보고 잇달아 멈추어 인사를 하였다.“아가씨가 돌아왔나요, 진 선생님은 몇 시에 돌아오죠?””일곱 시요, 바쁜 사람이잖아요.”하인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고 배가 고플가 먼저 과일 한 접시를 씻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조은희는 과일 접시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고 잠시 후 진석의 노트북에 무슨 영화가 있는지 찾아보려 하였다. 영화 한 편을 보며 진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진석의 서재는 단순하고 섬세하며 고급 원목 가구는 반짝반짝 광을 내고 있었다.조은희는 코트를 벗고 가죽 의자에 놓은 후 서랍을 열어 서류를 찾
조은희는 진석을 빤히 바라보았다.진석은 낮게 웃으며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블랙 카드를 한 장 꺼내 조은희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내 카드야. 한도가 없으니까 마음껏 써.”조은희는 놀란 듯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진석 씨, 정말 통 크시네요! 진 선생님, 감사합니다.”진석이 장난스럽게 그녀를 가볍게 툭 치자 조은희는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웃었다.“스폰서 오빠, 감사합니다.”진석은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강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예전에는 학문적이고 온화했던 그의 이미지가 지금은 사업가다운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입맞춤 후 그녀의 귀에 낮고 거친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조은희는 그 말을 듣고 묘하게 떨리는 감정을 느꼈다...진석은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살짝 물었다.“넌 은근히 독특한 취향이네.”조은희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운전하라고 했다. 진석은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둘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석의 어머니는 고향 요리로 한 상을 가득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진석이 조은희가 좋아한다고 말해준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진석의 아버지는 붉고 싱싱한 과일을 깨끗이 씻어 가지런히 접시에 놓고 있었다.진석의 차가 멈추자 그는 조은희를 데리고 내렸다. 진석의 부모는 반갑게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아버지는 조은희가 가져온 선물을 받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요.”어머니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감기 조심하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조은희의 피부는 밝고 투명하게 하얀 편이라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진석의 부모 눈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속으로 진석과 조은희가 아이를 낳는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정말 예쁘고 훌륭한 아이가 태어날 거로 생각했다.
진석은 조은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눈치챘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조은희의 얼굴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너와는 결혼 첫날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지! 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아마 어려울 거야. 너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해.”조은희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진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참 묘했다!예전에는 그저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였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로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조은희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도 처음이야! 결혼 첫날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배워둘게.”조은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진석의 품에 몸을 맡겼다.햇살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진석은 조용히 일어나 집을 떠났다. 조은희의 집이었기에 그 잠깐의 온기는 이미 지나쳐버린 상태였다...그들은 예전에는 갑자기 헤어졌지만, 지금 다시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조은희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실히 진석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있었다.그들은 연애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조은희는 조금 망설였다...조진범은 레드 와인을 손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아이도 일찍 낳고 그 후엔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진안영은 말했다.“아이를 낳으면 둘만의 시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조우현이 답했다.“다시 만난 연인들은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후회할 거예요.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테니까요. 사실 처음에 부소연과 결혼해야 했어요.”오빠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은희는 그 말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