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짝 놀라서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는 신호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출장 가지 않았나? 지금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텐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여보, 점심에 뭐 먹어?”“아직 생각 안 해봤어!”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어젯밤에 너무 늦게 출장 가게 되어서 급하게 떠났잖아. 당신이 걱정할까 봐 오늘 아침에 서둘러 돌아왔어. 그래서 아침을 먹을 시간도 없었어! 조금 있다가 점심 먹으러 갈 거니까 생각해 봐, 뭐 먹고 싶은지. 남편이 살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쇼하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전혀 화나지 않았고 전례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나도 아침을 먹지 못했어!”“당신 술 마셨어?” 그는 나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술 냄새를 맡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손님을 만났다던 그는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응!”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 갑자기 말했다.“그럼 골든 이글스 빌딩 건너편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자!”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여보가 말한 대로 해!”인생에는 항상 희극적인 장면이 있다. 우리가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도혜선을 만났다. 이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된 나는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세련된 니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일종의 우아함과 능숙함을 겸비한 걸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신연아의 천박함을 생각하자 나는 몰래 기뻐했다. 이 게임은 이미 승자와 패자를 보아낼 수 있었다.오늘 이 여자를 다시 보자 왠지 호감이 생겼다. 그녀가 나를 대신해 ‘싸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신호연은 오늘 소개를 마다하지 않았고 나는 겸손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각자 자리에 앉은 후 나는 신호연에게 물었다.“도혜선 씨는 매우 유능한 사람처럼 보이네! 훌륭해!”신호연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한 것은 장점이 아니야, 나는 마
나는 떨떠름해서 그에게 콩이도 데려왔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이미 시어머니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오고 있다고 말했다.예전에 나를 사교 모임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가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가는 길에 오늘 저녁 식사 자리가 천우 그룹을 위한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의 중에 조 대표님이 지난번에 발표를 맡은 매니저가 왜 이번에는 회의에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호연은 나를 저녁 식사 자리에 데려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몇 번이고 상기시켜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다.나머지 세 그룹도 서울시에서 손꼽히는 그룹들인데, 각자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신흥 건재는 너무 규모가 작아 나머지 세 그룹과 같은 레벨에 있지 않았다.갑자기 신흥 건재가 땡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이번에 오는 천우 그룹의 대표들 중에 배현우가 있었다.몇 시간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 들었고 약간 긴장했다.그는 잘 생기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와 웃지 않고 조 대표님의 뒤를 따랐다. 그는 들어왔을 때만 먼저 나에게 인사를 했다. 특별한 행동이 없었기에 드디어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사람이 많아서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식사 자리에서 배현우는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강철 창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나는 그가 신호연이 아니라 왜 나에게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조 대표는 항상 큰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내가 매우 이상하게 느낀 것은 배현우는 그의 비서이지만 조 대표가 배현우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는 것을 보고 이 비서를 정말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신흥 건재의 알루미늄 강철 창문 프로젝트는 당시 내가 적극적으로 도입을 밀었던 것이었다. 신호연은 계속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높은 비용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았었다. 그의 이유는 새로운 플라스틱 강철 창문이 가성비가 더 높고 수익성이 더 높다는 것이었다.나는
다음날.나는 콩이를 데리고 고향행 비행기에 올랐고,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야 이미연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알렸다. 나는 그녀에게 몇 가지 일을 반드시 서둘러 완성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내 계획의 어느 단계에서도 틀려서는 안 된다.나는 이미연에게 이미 신호연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녀가 언제든지 나 대신 주의를 기울이도록 부탁했다.이미연과 통화를 마치고 나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충동을 억누르고 결국 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껐다.나는 그 남자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가는 길에 콩이는 매우 흥분했지만, 나는 계획서를 자세히 훑어봤다.왠지 그날 배현우가 나한테 정신 차리라고 하면서 날 도와준다는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이게 날 도와주는 건가?나는 그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고향의 늦가을은 좀 쌀쌀해서 나는 출발할 때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우리 걱정을 할까 봐 그랬다.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바로 만덕동 병원으로 갔다, 역시 부모님은 갑자기 우리 모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상태는 괜찮았다, 다만 입이 살짝 비뚤어졌고 말을 하는 것이 좀 불편했다.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된 것을 보고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꼬박 2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하얗게 변했고, 어머니도 그랬다, 나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콩이는 조잘조잘 말을 이쁘게 하면서 외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었고, 의사에게 꼭 집에 돌아가겠다고 계속 소리쳤다.나는 의사에게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자세히 묻고 의견을 구했는데, 의사는 퇴원하는 데 동의했지만 약을 처방받았으니 반드시 제때 약을 복용할 것을 당부했다.그날 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콩이는 지난번에 왔을 때의 기억이 없어서 모든 것이 낯설었고, 큰 눈을 깜박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익숙해져서 낯을 가리지도 않고 이것저것 계속 물
공장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경비원이 나를 막아섰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진사원을 만나러 왔다고 밝혔다.경비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진 대표님께선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출장 가셨어요!”“혹시 어디로 출장 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나는 다소 조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울산에 더는 오래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저 같은 경비원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경비원의 태도는 아주 나빴다.“그럼 혹시 연락처라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전 다른 지역에서 특별히 진 대표님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거든요. 그래서 연락이라도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4년 전의 일로 난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했다.“전 모릅니다!”경비원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짜증 난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진 대표님을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거죠?”“전 협력 제안을 하러 온 거예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협력은 마케팅 부서가 아닌 대표님을 찾아온 거죠? 당신 같은 사람 저도 많이 봤습니다. 얼른 가세요! 여기서 알짱거리지 말고!”경비원의 태도는 점점 더 거만해졌다. 이렇게 큰 공장에 이런 자질을 지닌 경비원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비는 점점 억세게 내리고, 날도 점점 추워졌다. 나는 느껴지는 추위에 몸을 살짝 떨었다.“그러지 마시고, 저도 멀리서 대표님을 만나 뵈러 온 거예요. 따듯한 물 한잔 얻어 마셔도 될까요? 물 한 잔만 주시면 바로 마시고 갈게요.”이미 경비실 책상 위에 있는 각 부서 연락처를 발견한 나는 하는 수 없이 굽신거리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마세요. 여긴 당신에게 줄 따듯한 물 따윈 없습니다! 얼른 가세요.”경비원은 바로 나를 끌고 공장 대문 밖까지 나왔다. 나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지만, 경비원은 여전히 차갑고 무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 휙 돌아섰다. 그는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을 닫았다.비는 억세게 내리고 내가 가져온 우산은 작았다. 몸은 이미 절반이나 빗물에 젖어 있었
방을 하나 잡고 얼른 방으로 올라온 나는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온풍기를 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몸을 적셨다. 조금 전까지 얼어버릴 것 같던 내 몸은 샤워기를 한참 틀고 나서야 조금씩 몸이 녹는 느낌이었다.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오지 않아 후회가 되었다.몸에 이불을 두른 채 미리 켜두었던 전기 포트를 들고 컵이 깨끗한지 아닌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얼른 뜨거운 물을 따랐다. 뜨거운 물만 몇 잔 연거푸 마시고 나니 살짝 뭔가가 아쉬웠다.‘아, 생강 한 조각만 있었으면 좋겠네.'어느새 난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진사원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손을 뻗어 아까 그 견본책을 들었다. 연락처를 찾자마자 휴대폰을 들고 연락을 시도했지만 아무리 연락을 해봐도 받지를 않았다. 정말이지 대기업은 역시 대기업이었다. 대표님 만나기도 이렇게나 어렵다니.모든 희망을 아까 그 남자에게 거는 수밖에 없었다. 밤새 동안 그 남자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는 연락에 점차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빠지게 되었다. 한참 졸고 있던 와중에 열이 나더니 서서히 추위를 느끼고 있었고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윗니와 아랫니는 어느새 서로 부딪치며 달달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몽사몽 한 채로 뜨거운 물을 따라 부어 마시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고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심지어 악몽까지 꾸게 되었다.다음 날 오전, 나는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혹여라도 신호연이 나에게 연락을 할까 두려웠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숙박업소 근처에 있던 편의점으로 갔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영상통화를 걸어 내가 본가로 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편의점은 가장 무난한 장소였고 들킬 위험성도 낮은 곳이었다. 대충 몇 마디를 하고 난 뒤 나는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머리에 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으니까.약국에 들러 감기약을 사
지금 들어온 건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사원이었다. 그 옆에는 며칠 전 나를 태워줬던 진씨 성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진사원과 나는 오랫동안 서로 눈을 마주쳤다. 4년이라는 시간, 진사원은 많이 늙어버렸다. 새까맣던 머리도 이제는 흰머리로 덮여있었고 얼굴도 매우 핼쑥해져 있었다. 진사원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정말로 당신이네요, 한지아씨.”“네, 저예요. 진 사장님, 저 한지아 맞아요. 정말 오랜만이에요!”반가움도 잠시 지금 몰골에 나는 약간의 부끄럼을 느꼈다.“얼른 다시 누우세요!” 진사원은 성큼 내 침대 쪽으로 다가왔고 배천우는 빨리 옆으로 비켜드렸다. 진사원은 얼른 내 침대 옆 의자에 착석하며 말했다.“지아씨,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배현우는 같이 들어온 진씨 성을 한 남자한테 눈짓하더니 둘이서 같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안에는 나와 진사원 둘만 남겨졌다.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진사원에게 얘기했다.“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요! 저야말로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사장님 연락처를 몰라서 어떻게 연락 드려야 하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거든요!”“이거 참... 무엇을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사실은 회사가...! 아니, 이 말은 넣어두기로 하고, 여기까진 무슨 일로...?”진사원이 말을 망설이는 걸 보니 뭔가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더는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그를 찾아온 이유에 관해서 얘기를 꺼냈다. 물론 이걸 성사시키기 위해 천우그룹 얘기도 함께 꺼냈다.진사원은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말을 끊지 않았을뿐더러 예전에 계약한 서령과의 얘기와 이제 와서 제품을 바꾸려는 이유 등을 세세히 물어봤다. 나는 쓸데없는 겉치레는 던지고 그에게 솔직하게 내가 지금 처한 상황과 아직 날 의탁할 만한 회사를 못 찾은 일까지 다 얘기했다. 그리고 진사원한테 나에게 기회 한 번만 준다면
침대에 누워 기다리기만 하는 시간은 가히 가혹적이었다.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될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나 한지아는 전생에 신호연한테 크게 빚을 졌고, 이번 생에는 그 빚을 갚으려고 태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창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마침내 병실로 돌아왔다.물어보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애써 담담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배현우가 말했던 것처럼 괜찮은 척하는 것도 이제 한계인가 보다. 진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아씨,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요. 제가 지금 볼 일이 생겨서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몸 상태 괜찮아지시면 내일 다시 우리 회사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만 실례해야 할 것 같아요."내 안에 남아있던 한 줄기의 희망이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 꽉 쥐었던 손도 어느새 힘없이 풀려버렸다. 하지만 나는 진사원 앞에서 흐트러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내일 봬요!""그럼 내일 회사에서 기다릴게요!"그 말을 끝으로 진사원은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그런 그의 태도에 비즈니스맨의 냉정함을 본 듯해 마음이 쓰려왔다.진사원이 없는 병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마치 나락에라도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에 옆에 있는 배현우를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기나긴 정적을 깨고 배현우가 물었다."무슨 얘기 했는지 안 궁금해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이번에는 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배현우 씨,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은 너무 졸리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이 말을 건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순간, 뜨거운 눈물이 빠르게 내 두 눈가를 스쳐 양옆 머리카락으로 떨어졌다. 이어 배현우가 병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몇 분 뒤 간호사가 들어 와 수액 체크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잠에서 깨어나 보니 벌써 밤이었다. 오랜만에 깊은
내가 놀란 것은, 내가 사원 오피스 빌딩으로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 한지아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이었다.진사원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서프라이즈였다. 나와 독점 대리계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울산에서 2백만 원의 등록 자금으로 인테리어 유한회사를 등록했다. 또 구조설계와 시공에 탁월한 전문팀도 파견하였다.나는 떠나기 전까지도 그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그냥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지아 씨, 우리는 서로 돕고 도움받는 사이니 너무 큰 부담감은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돌려주어야 하나 고민할 필요 없어요. 당신도 나를 구해주셨으니, 제가 작은 것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 큰 영광이에요! 나중에 우리가 힘든 일을 모두 이겨내면 함께 차나 마시며 얘기합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알루미늄 창호에 관한 상세한 정보와 관련 절차까지 정리해 줬다.나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기에 그저 떠나기 전에 진심을 담아 한마디를 했다.“알겠어요. 이 은혜 마음속에 간직해 둘게요. 나중에 또 봅시다.”사원 오피스 빌딩을 나오는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흥분을 가라앉을 수가 없었다.‘한지아, 게임은 이제 시작이야.'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배현우와 떨어트릴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그들이 무슨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묻지 않았다.그날, 배현우가 나를 만덕동으로 향하는 KTX에 태워주었다. 왠지 승강장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애틋함이 피어올랐다.나는 본가에서 입찰용 알루미늄 창호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정리하여 배현우에게 바로 택배로 보내주었다. 내가 직접 가져가기엔 불편했다.이틀 후, 나는 홀로 서울에 돌아왔다.공항에 나를 데리러 온 건 신호연뿐이 아니었다. 신연아도 함께였다. 그 두명이 시선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주 만족스럽고,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